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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시인의 산문> 자욱하다, 봄날/배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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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하다, 봄날
배 영 옥
창밖으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며칠 사이 벚나무 가지의 둘레가 불그레하게 밝아오고 있습니다. 삼 년 전 봄날이 생각납니다. 네 그루 나무가 서 있는데 모두 같은 나무인 줄 알았습니다. 조금만 주의해 보아도 잎의 모양과 줄기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그 중 두 그루에 흐드러지게 벚꽃이 피는 것을 보고 그제야 벚나무인 줄 알았습니다.
벚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 두 그루 아래에는 벤치가 있습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는 지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합니다. 바로 옆 작은 초등학교 학생들이나 동네 노인들이 옛날에는 큰 길이었다는 벚나무 아래를 지나갑니다. 가끔씩 벤치에 앉아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느릿하게 흘러갑니다.
가끔 풍경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곳을 조금만 벗어나도 도시의 어지러운 일상들이 저마다 소음을 내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겠지요. 정지되어 있는 듯한 저 두 그루 벚나무 안에서는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겨우내 앙상하던 가지에 곧 터트려 버릴 울음덩이를 물고 이미 벚나무 주위는 어떤 기미를 풍기고 있습니다. 탱탱하게 부풀어오른 젖꼭지들. 가는 핏줄 끝까지 끌어올린 꽃잎이 될 것들이 조그만 몽우리 속에 제 몸을 구겨 넣고 있을 겁니다. 꽃바람이 불고 대지는 점차 데워지고 있는 중입니다.
벚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꽃봉오리들이 종양덩어리처럼 보입니다. 이 화창한 봄날에 종양이라니……, 내 속의 어떤 것들이 그런 생각을 불러내는 걸까요.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얼굴과 몸이 바싹 마르고 배만 둥그렇게 부풀어올랐었지요.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배를 안고 어머니는 어떤 꿈을 꾸셨을까요. 침침한 병원 한구석 침대 위의 어머니의 얼굴이 벚나무 검은 가지로 떠오릅니다. 가지 끝으로 햇살은 날카로운 침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피비린내를 사방으로 풍기며 밖으로 드러날 종양덩어리들이 내부에 가득합니다. 점점이 몸 속에 흩어져 피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팎이 뒤집힌 팝콘처럼.
어느 순간 폭죽처럼 터트려 만물을 들끓게 하는 꽃들. 어머니는 그 꽃 안에서 오래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속 침침한 어둠 안에 어머니가 웅크리고 있습니다. 근육 사이사이 가지 뻗은 실핏줄 끝에 매달려 곧 사라져 버릴, 이미 꽃이 뱉어놓은 소리 죽인 비명들이 벚나무 아래 자욱합니다. 꾹꾹 젖꽃판까지 눌러가며 나는 꽃잎의 기미를 샅샅이 염탐하고 있습니다. 둔탁한 통증이 이어지고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말들이, 간간이 연약한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실핏줄까지 오래 머문 것들이 피비린내를 풍기며 빠져나가고 어머니는 오랜 잠에 빠지고 있습니다.
정지한 풍경 속으로 아이 하나가 지나갑니다. 순간, 벚나무 그림자가 꿈틀합니다. 흑백필름처럼 희미한 영상 속으로 단발머리 어린 내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른쪽 무릎에 붕대를 감은 나는 핏물이 번지는 붕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쓰러질 듯 뛰어오는 어머니, 내가 벚나무 둥치에 기대어 울고 있습니다. 달콤한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듯이 나는 매년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봄볕이 말랑말랑하게 익어가고 화농한 꽃잎이 향기를 풍기기 시작할 때쯤 바깥의 봄도 익어가고 있겠지요.
내 안 어딘가에 숨어있어 잘 보이지 않는 한 그루 벚나무를 그려봅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꽃망울을 가득 부풀린 벚나무, 어느 시기에 자신도 모르게 툭툭 터트려져 제 몫의 꽃을 조금씩 피워내고 있습니다. 어둠 속을 파고들어가 심연과 같은 자신과 맞닥뜨렸을 때 나는 수많은 꽃등을 들어올린 벚나무를 보았습니다. 거친 벚나무 수피(樹皮)를 뚫고 환하게 피어난 벚꽃송이들, 나는 벚나무 아래서 오래 눈부십니다.
북지장사 아래 선산에 모신 어머니께 다녀왔습니다. 그늘이 짙은 어머니의 산소 근처에는 할미꽃, 제비꽃들이 흩어져 피어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습니다. 조용한 봄날, 벚나무의 흐드러진 꽃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떨어져 내립니다. 어머니의 기억과 봄의 기억은 하나로 뒤섞입니다. 벚꽃잎 한 장이 손바닥에 내려앉습니다.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꽃잎 한 장의 감촉, 가벼운 꽃잎 한 장의 무게를 안고 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후가 되자 하교하는 초등학교 아이들 고함소리로 골목이 소란합니다. 아이들은 검게 그을린 얼굴입니다. 도시의 아이들과는 달리 이곳 아이들은 등, 하교 때 걸어서 다닙니다. 아이들 집은 대체로 산아래 먼 곳에 있습니다. 둘 또는 셋이서 손을 잡고 먼 집을 찾아가는 아이들 머리 위로 벚나무 가지의 미세한 핏줄 하나하나가 봄볕 아래 꽃잎을 흩어놓습니다. 아이들의 머리와 어깨가 환하게 부풀어오릅니다. 봄날 허공이 한 뼘쯤 들어올려지고, 벚나무 아래로 드러난 그 경계가 자욱합니다. 벚나무 옆 느티나무가 조금씩 초록 잎새를 뱉어내고 있는 어느 봄날입니다.
배영옥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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