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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시 계간평> 길에 관한 네 가지 상상/고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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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079회 작성일 04-01-2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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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관한 네 가지 상상


고 봉 준
(문학평론가)



1.
삶을 길에 비유한 광고의 카피가 하나 있다. “인생은 기쁨도 슬픔도 모두 삼키고 가야할 기나긴 여정.” 비유나 상징은 문맥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의미화되지만, ‘여정’이나 ‘길’을 인생의 축도로 표현하는 예술적 관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낯선 풍경은 아니다. 우리는 예술 작품에서 길에 대한 아름다운 사유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ꡔ길ꡕ에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ꡔ안개 속의 풍경ꡕ에 이르기까지, 호메로스의 ꡔ오디세이아ꡕ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 이르기까지 길은 삶의 메타포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떠돌이 광대와 백치 여인의 삶을 통해 ‘구원’의 문제에 접근하는 ꡔ길ꡕ은 세 떠돌이의 삶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길’ 자체를 주제로 삼고 있다. 앙겔로폴로스의 ꡔ안개 속의 풍경ꡕ 역시 부재하는 아버지를 찾아나선 두 남매의 성장과정을 다룬 ‘길’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비극성은 길 저편의 공간, 즉 그들의 목적지가 구원의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길은 구원이 없는, 다시 말해 ‘길’ 없는 텅 빈 기표의 공간일 뿐이다. 또한 ‘길’은 ꡔ오디세이아ꡕ에서처럼 삶의 역경을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프로스트의 시에서처럼 선택이라는 가능성의 기표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술적 장치로서의 길은 목적을 향해 다가가는 ‘거리’의 개념이 아니라 언제나 그 위에서 일희일비의 사건이 전개되는 우연의 장이자 삶 그 자체이다. 예술이 ‘길’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2.
온 세상이 안개에 갇혀 있었지요.
겨울의 안방에 다정했던 친구처럼 봄이 마실을 와 있었습니다.
성미가 꽤 급한 친구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습니다.
겨울은 만신창이가 된 몰골을 애써 감추지는 않았지만
어서 돌아가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는개는 내리고 녹지 않은 눈들이 군데군데 남아서
주소불명 된 계절의 문패를 달고 있었습니다.
땀을 흘리듯 녹아내리며 안개를 만들기도 했지요.
개울가 톱니 같은 얼음의 이빨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은
물안개를 피워 올리며 어딘가로 한사코 가기만 하는
누군가의 뜨거운 마음처럼 흘러갔습니다.
안개에 아랫도리를 감추고 있는 산들은
하늘에 떠있는 섬처럼 아름다웠지요.
사람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이어도,
가 닿아야 할 섬이 저런 모습이리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저렇게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을 거란 생각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안개의 바다를 건너야 마침내
아름다운 섬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운무에 가려진 집들은 알 수 없는 만큼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나무들은 안개가 지어준 속살이 훤히 비치는 옷을 걸치고
세상을 유혹하고 있었지요.
나는 그 풍경의 한가운데를 긋고 한 마리 비오리처럼 날아갔습니다.
―이선식 「태백 가는 길에」 전문

이선식의 「태백 가는 길에」(≪내일을 여는 작가≫ 2003 봄호)에서 ‘길’은 여정의 일종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마주치는 풍경들과 그 풍경들이 촉발하는 삶에 대한 성찰, 화자는 지금 태백을 향해 여행 중이다. 작품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계절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러한 풍경의 변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길’과 ‘섬(이어도)’의 관계, 즉 삶의 추상적 표현으로 확장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선경’과 ‘후정’의 구도를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여행시들이 그렇듯이, 화자 역시 ‘태백’이라는 공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태백이 아니라 ‘가는 길’이다. 화자는 이 길 위의 풍경에서 계절의 변화와 삶의 의미를 읽는다.
‘주소불명’의 문패처럼 남루한 ‘만신창이’의 겨울과 ‘톱니’ 같은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의 봄은 ‘계절’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물안개는 눈의 차가움과 시냇물의 뜨거움이 마주침으로써 생기는 자연 현상의 하나이다. 그러나 안개에 둘러싸인 산의 모습은 ‘풍경’에서 ‘삶’의 상징으로 변화된다. 그것은 안개에 휩싸인 산의 모습이 마치 하늘에 떠있는 섬처럼 느껴지는 상상의 변주를 통해 시작된다. 하늘에 떠있는 섬(안개 속의 산)의 이미지는 마침내 ‘안개의 바다’에 떠 있는 섬으로 전화되는데, 이때 ‘안개’는 그 속성상 ‘깊이를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기표로 변형된다. 마찬가지로 ‘섬’ 역시 구체적 형상에서 ‘이어도’라는 유토피아의 추상적 표현으로 바뀐다. 화자는 세계를 섬들의 바다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섬’이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섬’은 또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섬은 그리움이나 사랑과 같은 이상적 세계에 대한 화자의 동경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화자가 말하듯이 이 유토피아적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운무의 바다를 건너야 하며, 설령 그 바다를 모두 건너간다고 해도 그 섬에 도달한다는 보장은 결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개의 ‘유혹’이기 때문이다. 유혹이란 텅 빈 기표의 마력처럼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화자는 그 유혹의 힘에 이끌려 지금 태백으로, 그리고 풍경의 한가운데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그 풍경의 한가운데를 긋고 한 마리 비오리처럼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의 중심은 언제나 비어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텅 빈 기표인 유혹이 결국 운무의 풍경 속에 가려진 섬들을 향해 날아가는 과정임을 적시하고 있다. 섬이 하나의 세계라면, 그리고 또한 그것이 인간에 대한 상징이라면 비오리처럼 섬을 향해 날아간다는 것은 결국 타인과 그의 삶에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길 자체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아름다운 섬이 ‘그리움’이나 ‘사랑’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3.
김기택의 「가로수」(≪문학과 사회≫ 2003 봄호)는 ‘길 위’에서 씌어진 작품이다. ‘길 위’나 ‘길 안’이라는 표현은 길을 공간적인 의미에서 접근할 때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이 아닐 때, 길 자체가 삶의 축도일 때 길은 삶의 공간과 등치된다. 길이 삶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할 경우, 삶은 길 위에서 시작되어 길 위에서 끝나는 한 편의 드라마로 정의되기도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도시적 일상의 공간인 ‘거리’와 그 거리의 폭력에 의해 말살되는 ‘생명’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고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와 생명(‘가로수’)의 병치는 낯설음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도시적 일상을 속박되어 있는 우리에게 그것은 ‘일상’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듯이 자연스러운 낯섦이다.

지나가는 차들과 행인들에게 거치적거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가지를 쳐낸 가로수들이 전봇대처럼 전선을 따라 도로변에 줄지어 서 있습니다. 가로수들이 껴입은 더러운 껍질은 긁혀 있거나 벗겨져 있거나 스티커가 붙어 있거나 현수막을 지탱하는 끈에 붙들려 있습니다. 남루하고 칙칙한 이파리들이 박쥐처럼 가지에 떼지어 달라붙어 있습니다.

무성한 잎으로 여러 상점들 간판을 가리던 나무 하나는 분노한 톱에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아 있습니다. 한때 생명을 담았던 그 그릇에는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가는 나이테가 있습니다. 그 나이테의 무늬 속에는 생명이 바삐 드나들던 맑은 소리와 함께 혹한의 시간과 두꺼운 매연과 소음이 레코드판처럼 녹음되어 있습니다. 목 없는 통닭의 다리처럼 움직이지 않는 뿌리는 여전히 힘차게 땅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녹슨 상수관과 부글부글 끓는 하수도, 전화선과 가스관이 어지럽게 매설된 땅 속에 가로수들은 시추공처럼 박혀 있습니다. 그래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매장량이 무한대인 초록빛을 뽑아 올립니다. 고엽제 같은 매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저돌적인 생명, 그 고집불통의 습관을 막을 힘은 이 가로수들에게는 없습니다. 모두가 지루하고 긴 삶을 각오한 지 오래입니다.
―김기택 「가로수」 전문

김기택의 「가로수」가 낯섦과 익숙함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작품이 우리의 일상을 낯설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숟가락을 움직이는 행동이나 문을 열고 닫는 일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일들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이때 무의식이란 우리의 몸에 각인되어 있는 습관의 일종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행동들을 의식하기 시작한다면, 그것들은 순식간에 낯선 무언가로 돌변하기 마련이다. 이는 의식이나 사물에 대한 자의식이 습관화된 지각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독자는 자신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활자화된 언어를 통해 재확인함으로써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세계의 폭력성을 목격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근대적 이성, 특히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버리지 못한 도구적 이성은 인간과 자연을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실체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이러한 강제적 분리는 결국 인간 중심주의라는 그릇된 인식 태도로 귀결되었다. 근대적 이성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에 알리바이를 제공했으며, 나아가 그것에 ‘진보’라는 면죄부까지 부여했다. 그 결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으며, 자연은 이제 도구의 일종으로 전락했다.
인간 중심적 사고는 자연을 오직 인간의 이익이나 생존만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데서 비롯된다. 인용시에서 나타나듯이 ‘가로수’는 자연이기를 그치는 한에서만 가로수가 된다. 가로수는 인간화된 자연의 표상이며, 그것의 일차적 목적은 유용성에 있다. 유용성의 도구로 전락한 자연은 ‘생명’이기를 그치고 ‘환경’의 일부분으로서 인간 세계에 포획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이나 차량의 질서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로수는 ‘스티커’나 ‘현수막’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시적 질서에 이용될 수 있어야만 가치를 부여받는다. 2연에서 화자는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생리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폭력을 ‘톱’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이처럼 유용성의 대상이 되어버린 가로수는 ‘시추공’이나 ‘전봇대’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여전히 가로수가 지닌 무한한 생명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고집불통의 습관’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생명의 본능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마찬가지로 현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이 멈출 기미가 없음을 보여준다. 시인의 희망적 시선과는 달리 도시는 도시의 본능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김기택의 「가로수」가 여전히 우울하게 읽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골목,이라는 발음을 반복하자 서서히 골목이 사라진다. 골목이, 골목이, 골목이, 골목이, 사라진다. 하지만 창밖에 골목이 있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팩을 꺼낸다. 내일은 선거일이다. 유통 기간이 지난 날짜가 적혀 있다.

하지만 음악은 발라드. 시인 오장환이 “백석은 모던 보이”라고 적어 놓은 글을 읽었다. 통장에 입금된 아르바이트 급여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국민은행으로. 내일은 선거일이다. 백석은 모던 보이,

나는 아직 과부하 상태인지도 모른다. 소실점을 향해 맹렬히 사라지는 롤러블레이드들. 골목이, 골목은, 골목과, 결국 골목을…… 나는 골목을 걸어간다. 인터넷 카페의 초기 화면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 “육(肉)에서 나온 것은 육(肉)이며, 영(靈)에서 나온 것은 영(靈)이다”(요한 3:6).

한때 혁명가였던, 아직 혁명가인지도 모르는, 컴퓨터 수리점 사장 김(金)을 먼발치로 발견하고, 나는 다른 골목을 택해 걷는다. 골목이, 골목을, 골목과, 결국 골목은…… 그는 나를 로맨틱한 동물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지만, 그날 밤 동해로 떠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이장욱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부분

한편 이장욱의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문학과 사회≫ 2003 봄호)는 도시적 공간으로서의 ‘도로’가 아니라 그 이면의 ‘골목’한 작품이다. 시적 공간으로서의 ‘골목’은 흔히 소외된 삶의 공간으로 표상되어 왔다. 도시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둡고 음습한 세계, 혹은 가난한 삶들이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낮은 지붕들 사이의 공간, 이것이 골목에 대한 관습적 상징이다. 그러나 이장욱의 시에서 골목은 가난한 세계라기보다는 모던한 산책자의 길이자 불온한 공간이다.
천재 시인 이상이 그랬듯이, 시인은 골목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위치시킨다. “골목,이라는 발음을 반복하자 서서히 골목이 사라진다”라는 진술에서 느껴지듯이 이러한 몽환적 분위기는 이장욱의 독특한 시적 문법이다. 그러나 「오감도」의 ‘아해’와는 달리 화자는 질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도시적 삶의 속도를 거스르기라도 하는 양 골목과 골목을 ‘걸어간다’. 화자는 자신이 걷는 무수한 골목들에 다양한 조사를 붙임으로써 골목들을 만들어낸다. 시인은 골목과 그 골목을 산책하는 화자, 그리고 그가 만난 일상적 인물들을 하나의 시적 공간에 병치시키고 있다. 그리고 골목에 대한 진술의 사이사이에 일상적 사건들, 가령 유통기간이 지난 ‘우유’와 아르바이트의 급여 입금, 선거 등의 사건들을 끼워 넣는다.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는 낯설게 병치된 언어들을 통해 도시적 삶의 우연성과 무의미함, 그리고 우울함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유통기간이 지난 우유와 입금되지 않은 아르바이트 급여와 같은 우울함과 한때 혁명가였던 컴퓨터 수리점의 김사장을 애써 외면해야 하는 화자의 절망적인 발걸음이 존재한다. 화자는 골목들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는 도시적 일상의 건조함을 낯선 언어와 풍경의 병치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4.
인터넷은 ‘길’에 대한 우리의 고전적 관념을 바꾸어놓았다. 전자 사막은 우리에게 ‘길’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현실적인 ‘길’임에는 분명하지만, 아스팔트나 황톳길과는 달리 ‘정보’가 흘러 다니는 매끄러운 공간이다. 도시적 감수성을 지닌 시인들에게 전자 사막의 길은 ‘도로’나 ‘골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길은 구속과 자유의 이중적 공간이다. 도시적 공간으로서의 ‘도로’는 자동차나 인간에게 이동의 공간이지만, 또한 그것은 매순간 그 흐름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분절하고 포획하는 구속 장치이다. 그러한 분절은 그 공간을 지나치는 주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홈 패인 굴곡조차 탈주의 여백을 지니기 마련이다. ‘사막’의 이미지가 보여주듯이 길은 언제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전자 사막의 길은 구속보다는 자유의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다. 전자 사막에서 모든 공간은 동시에 길이다. 아니, 그곳은 오로지 길들로만 구성된 공간이다. 이원의 「닫힌 것들」(≪문학과 사회≫ 2003 봄호)은 유목적 공간으로서의 전자 사막이 일상적 삶과 융합되는 과정을 시적 상상을 통해 보여준다.

열려 있는 문은 불안하다 나는 서둘러 문을 닫는다 이내 다시 연다
문이 닫힌 거울을 흰색 변기와 세면대와 욕조가 뚫고 있고 거울은 밖에다 늘어진 주머니처럼 내 몸을 매달고 있다
변기와 세면대와 욕조와 나는 하수구를 감추고 구멍이 없는 하늘을 빠져나온 새는 반짝이는 것들만 모여드는 창을 쪼아댄다 내 몸과 창 사이에 걸려 있는 모니터는 유리의 땅에서는 반짝이고
창은 시간의 파편이 박혀도 말이 없고 관 속의 죽은 자도 말이 없고 마우스도 말이 없다 내가 몸을 거울로 돌리자마자
엉겹결에 휴지걸이에 둘둘 말려 있던 길들이 바닥으로 풀려나온다 길은 중복되거나 반복된다 점점 굳어간다 쩍쩍 갈라진다 철근을 비집고 나온다
나는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구덩이 속에 죽은 자를 눕히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제 손을 만지작거린다 새는 창을 쪼다 말고 주둥이를 허공에다 썩썩 문지른다 곡소리가 석유처럼 흘러나온다
무덤도 하수구를 감추고 있다 하늘도 닫혀 있다 열려 있는 문은 불안하다
사람들은 막 솟은 무덤을 둥글게둥글게 돌아가며 꾹꾹 밟는다 지구는 둥그니까 새는 허공의 모서리를 쪼아댄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깜빡깜빡 출구가 없는 자신의 손을 잡았다 놓친다 30촉 백열등은 내 두 다리를 순간적으로 자르고는 제 빛으로 칭칭 감아 놓는다
내 몸으로 가는 길의 시간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곳은 뭉툭하고 오독오독하다 검은 옷의 사람들이 어깨까지 내려온 하늘을 뒤집어쓰고
빠르게 찬송가를 부른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거울과 하늘은 온몸이 구멍이다 나는 세면대 양쪽에 박힌 수도꼭지를 양손으로 붙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아직 어느 방향으로도 틀지 않았는데 세면대의 구멍 속으로 그림자만 빠져 나간다 나는 여전히 수도꼭지를 붙잡고 머리를 세면대 속으로 쑤셔 넣는다 거울에 몸이 들어가지는 않고
내 살 밖으로 등뼈가 튕겨져나온다 누가 내 등뼈를 거울 속에 집어넣었을까 악취가 나기 시작한 살이 빈 욕조로 흘러내린다 검은 옷의 사람들은 공기 속에 켜둔 시동을 끄지도 않고
계속해서 흙을 밟는다 그 발 아래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마우스도 말이 없다 새도 말이 없다 무덤과 하늘은 닫힌 거울이다 제 안을 보여주지 않는다
거울에 들어가면 하수구로만 뼈져나올 수 있다 하수구는 비좁다 죽은 자는 썩힐 수 있는 것은 다 썩힌다
하늘의 하수구로 제 그림자를 로프처럼 붙잡고 나온 새는 계속 같은 화면을 돌려본다 무덤이 나오면 하늘이 들어간다 산 자가 들어가면 변기가 나온다 문이 열리면 무덤이 들어간다
욕조가 나오면 곡소리가 들린다 곡소리가 들리면 하늘과 변기가 나온다 모니터가 나오면 무덤이 들어간다 무덤이 들어가면
내 몸과 거울이 나온다 열려 있는 벽은 불안하다 그러나 벽은 닫히지 않는다
―이원 「닫힌 것들」 전문(≪문학과 사회≫ 2003 봄호)

“열려 있는 문은 불안하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의 시적 공간은 욕실인 듯하다. ‘문이 닫힌 거울’은 ‘늘어진 주머니’ 같은 ‘내’ 몸과 ‘변기’, ‘세면대’와 ‘욕조’ 등 욕실의 실내를 비추고 있다. 열려진 문(이 문은 방문이 아니라 거울의 문이다)이 불안한 화자는 닫힌 거울의 문을 열었다 닫는다. 물론 욕실의 문 역시 굳게 닫혔으리라. 화자에 의하면, 닫혀진 문(공간)은 무언가를 감추기 마련이다. 욕실과 무덤은 모두 하구수(구멍)를 감추고 있다. 개폐의 관점에서 본다면 거울 역시 닫힌 공간이다. 닫힌 공간은 사물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의 몸은 거울의 ‘밖’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닫혀진 욕실과 닫혀진 하늘. 그 닫힌 하늘의 ‘하수구’로 새가 제 그림자를 ‘로프’처럼 붙잡고 내려온다.
닫힌 세계로서의 거울과 하늘은 ‘구멍’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러나 그곳은 들여다볼 수만 있을 뿐 통과할 수는 없다. 그래서 화자의 ‘그림자’는 문이 아닌, ‘세면대의 구멍’을 통해 빠져나온다. 새 역시 하늘의 ‘하수구’를 통해서만 내려올 수 있었다. 이 투과 불가능한 세계를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부패, 즉 죽음인 것처럼 보인다. 하수구를 감추고 있는 무덤, 하늘의 하수구를 통해 내려오는 새, 세면대의 구멍을 통해 빠져나오는 그림자, 모니터 속의 장례식, 이 모든 것들은 죽음의 연쇄를 형성하고 있다. 아직 죽지 않은 화자의 몸은 거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다만 ‘악취’가 나기 시작한 ‘살’만이 욕조의 구멍으로 흘러들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그렇다면 ‘무덤’과 ‘하늘’은 어떤 점에서 ‘닫힌 거울’과 같은가? ‘닫힌 거울’은 출구 없는 세계에 대한 공간적 상징이다. 무덤은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자, 다시 말해 부패한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세계이다. 투과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무덤과 하늘은 대칭을 이룬다. 무덤이 ‘지하’ 세계라면, ‘하늘’은 천상을 의미한다. 그 두 세계 모두 죽음의 공간이다. 살아 있는 자들은 이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러므로 그곳은 일종의 닫힌 거울인 셈이다. 이러한 개폐의 논리를 극한으로 밀고 간다면 닫힌 세계로서의 아파트 역시 거대한 무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화자의 육체와 창 사이에 걸려 있는 ‘모니터’의 전자사막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유리의 땅’에서 반짝이는 모니터는 화자가 ‘거울’을 향해 몸을 돌리자마자 ‘휴지걸이’에 말려 있던 ‘길’들을 풀어놓는다. 거울은 통과할 수는 없으나 들여다볼 수는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모니터를 통해 화자는 지금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장례식의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닫힌 거울인 무덤이나 하늘과는 달리 모니터는 열린 거울인 셈이다. 또한 그것은 열린 ‘벽’이다. 이 열려진 벽으로 인해 화자는 불안감을 느끼지만, 그러나 그 벽은 닫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열린 거울이기 때문이다. 열린 벽, 그리고 영원히 닫을 수 없는 벽, 그것은 ‘문’의 다른 이름이다.




고봉준
-2000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공저 <들뢰즈와 문학-기계>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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