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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젊은시인조명/김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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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741회 작성일 05-01-19 12:57

본문

김규린 신작시


그들의 열애 외 9편



외로운 돌이
산비탈 굴러 굴러
어느 날
작은 호수에 던져졌다
심연의 깊은 밑둥이 자잘히 부서져
파문이 일었다

아무도 모른다
흔들리는 뿌리가 움켜 안은
수만 마디의 말과
수만 마디의 말이 뿌릴 벗어나
수면 위로 오를 때
은밀히 피가 번지는 것을






칼라꽃 부케를 든 신부



빳빳한 암술 노오랗게 쳐들고
칼라꽃 웨딩 부케 만들던 유년의 혼례를
나는 아직 기억하지
우왕좌왕 설레는 깃발 드리운 터널 밑으로
멈추고 걸었던 보드라운 맨발
허우적대며 지금껏 흘러나왔지
첩첩벽지로 나를 몰아넣는 제주 바람
내가 키운 바람이건만 그것들 언제나
낯설게 몰아치고―
나를 뚫어 오르는 꽃아
모든 길은 불공평한 그리움에 속해 있고
검은 가로수들은 길게 팔벌려 서서
행방을 채근하고 있다
어디에 닿으려 하나 나는……
보이지 않는 내가 물으면
잠잠히 하늘로 오르던 두터운 줄기
깃발이 보태어준 바람결 거세질 때
꽃아
네가 거둔 나의 수액과 함께
흰뿌리 다치지 않게 살살
살살 날아 이 세상
건너고 싶다





폭풍주의보



폭풍주의보가 내렸다
나는 전의를 가다듬는다
섀시 굳게 잠근 정적이
안온한 커튼에 둘러싸인 한때
비 소리가 자꾸 나를 부른다
땅 밑으로만 숨어드는
내 연노랑 뿌리는 알맞게 벗겨져
도로 위로 번지고 있다
이 폭풍에도 요행히 삶에 겨운 자동차 하나
와이퍼 세차게 껌벅이며
치고 간다

나른한 꽃병을 집어던지며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 아니면 죽음
부서진 꽃잎들이 이끌어온 삶, 차마
날 버리지 못 하는 영혼아

자동차들이 나를 치고 갔다

이제 난
상처를
느껴야 한다






풍경화가 마흔에 찾아낸 풍경



묵시의
분홍빛 다가와
그녀의 건조함을 탓하네
슬금슬금 날개 터는 백조의 무리
그 흰빛에도 분홍 뿌리 뻗어있었네
구름들은 어찌 저리
첼로 현 같은가
분홍에 겨운 날개들이
살캉살캉 밟으며 빙긋 내려앉네
다만 가을 때문이야―
눈 돌리는 그녀의 풍경화가
갑자기 아름다워지려 한다네
관대한 외투 걸친 꽃들과
손잡고 풍경 속으로 뛰어들었네
건조한 물관까지 흠뻑
분홍물,
전체를 조여오네






물결치는 섬



서른 셋에
세상의 들보가 되었던 사람
생각하면 오금 저려온다
눈 깜짝할 새 닥친 링 안의 서른셋은
코너로 나를 몰아붙이는데
어쩌자고 하늘은 멀어만 가는가
먼 꽃 뿌리 곁에서
친친 감겨있던 한 오라기 삶이
오늘 문득 일어서서 햇살에 찔리네
연민의 가시 방책을 넘으며
겨우 연명한 깔깔한 뼈대 한 줄
분별 없는 그것들에 찔려 쏟아지던 뇌수가
한결 나를 가볍게 했다
가시 방책 너머
푸드덕거리는 선홍빛 하늘

자정이 넘기 전에 붙들어야 하리
내 유리구두의 가련한 지느러미들을
돌려보내고 싶다
먼 뿌리 바다
곁으로





산에 오르는 간헐천 변의 꽃



무표정하게 기립한 세월들이 일제히
스쳐지나갈 때
죽음을 아는 너의 부드러움
한 여자는 연장으로 파도를 다듬었지
아주 매끄럽게
간헐천 변의 꽃들을 뽑아와
시들지 않게 항생제를 먹여 달래며
터무니없는 나이를 숨기곤 했지
눈가의 주름처럼 운명이 나를 빠져나가
어둠 위의 산 위에서 기다리는 몽상의 한때
다시 운명을 기다리기 위해
무딘 연장을 쥐는 날들은
강처럼 두 가닥 뿌리를 멀리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의 질량은 나만이 알 수 있다
수면에 얹혀질 때마다 동량의 파도를 밀어내던
꽃들의 숨찬 합창 들으며
걸어간다 나는

꽃들아 산책하자
간헐적인 향수와 폭풍 데리고
당분간 세월 더 모질 것이다
산책이 무료해지면
허한 방광 속 지린내 나는 옛 꿈이라도 맑게 걸러
샛별처럼 밝아 오는 산 위에서
한시름 쏟고 싶다






길 위에서



네가 가을이라면
가을을 무찌르는 裸松이고 싶다

모든 걸 다 벗고 싶다
가을아 고즈넉이 선 상념아

슬픔이 어쩌다 꽃이 된 뒤에
꽃이 천만 번의 윤회 끝에 슬픔을
다시 만나

말하라 生은―
우는 사람을 닮은 나무 같더라고
내게서 떨어져나간 죄악들이
어느 날 돌아왔을 때
팔 벌려 크게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너를 향해 치켜올릴
꽃 하나 없이
조금씩 울먹인다 나는

무찌를 것 다 놓아버린 줄기만 혈혈단신
나부끼며 턱을 괴는
길 위에서






애 련



가시 많은
꽃들이
가슴속에서
사르락 사르락
올 성긴 치마를 끌고 간다

어지럽게 쌓이는 길들

나는 햇살 쪽으로 쭈그려 앉아
볕 오래 쪼인
눈물로
말없이 지운다






음모, 길 위에 가스등 켜다



가스등 불빛 점점 작아지는 방에서
내 유년이 신경질적인 머리칼 속에 떨고 있을 때
멀리 골목을 돌아나간 음모는
여유 있게 서까래 뽑아 구식 패널을 못 탕탕 친다
나는 라일락처럼 멀쑥하니 안짱다리만 길어
넘겨다 보이잖는 글씨를 날마다 기다린다
부우연 달 아래 흩어지는 뜨거운 윤무
짐작할 수 없는 새들이 호들갑스레 피었다 지고
누군가
휘휘 풍경을 지우고 일어선다
지워진 그 풍경 속에서도 음모는 양은냄비처럼 끓고 있다
음모는 지워지지 않는다
신경질적인 머리칼 하나 둘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나는
묘령의 패널을 정강이에 사뿐 내걸고
창부처럼 골목길에 선다 이때
유년은 내게 들어와
라일락 뿌리를 낳고
나는 라일락 뿌리 위에서
기형의 미래들만 기르고 있다

나뭇잎 닮은 네 입술처럼 난 궁금하다
음모는 언제 끝나는가
가스등 들어
머리칼 흩어진 꼬불꼬불한 길들을 비춰본다






작별…… 그리고 상승하는 봄



곧, 눈물 떨어질 것 같은 어깨 점점점
지평선에서 잘려나간다
그 어깨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동안
누가 꽃잎을 얻었는가
보낸 이의 정은 길고 길어
가늠 못 할 똬리들이 명치를 감는다
기억들은 귓가에 내려
쫑긋거리는 꽃들을 비워놓고
빈 내장끼리라도 끌어안으며
붉게 침묵하는 그림자 무거워진다

자목련 열어보면
아지랑이 향해 헛손짓하는 포충망 속에
올 성긴 여자 맥없이 놓여있다
밟다 만 지평선 고스란히 덮고
베갯잇에 달려드는 미래와
곶감처럼 질긴 우울을 씹으며
그녀는 잠을 청한다

곧, 눈물 떨어질 것 같은 어깨 점점점
자목련처럼 잠 속의 봄을 밀어올린다


*시작 메모

보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가 있다면
그가 시집 한 권 내지 못 했을지라도
우러러 난 그에게
시비를 바칠 것이다.
시보다 앞서 아름다워야만 할
잿빛 열정들에게
날개 부러진 줄 모르고 우아한
흰 비둘기들에게
처량한 상련의 빛 한 줌 남긴다

김규린
1968년 제주 출생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로 등단
시집 <나는 식물성이다>


추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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