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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신작시/나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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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화병(花甁)
결국은 시들어 버리는 꽃을 꽂기 위해
내공은 속을 텅 비워버리는 연습인 것이다
주둥이가 깨지고 몸이 금가고
그렇게 살다가 깨끗이 버려지는 것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장작불 고열 속에서
기꺼이 그대의 가슴속에서 열반한 내 사랑
청자도 아니고 백자도 아니고
때깔도 곱지 못 한 이 삶은
오롯이 당신에게서 태어난 것이다
아직도 들끓는 피
아직도 너끈히 나무 한 그루 키워낼 수 있는
부푼 공기도
그대가 불어넣어준 들숨이다
아! 바다를 넘고 산을 넘어서
그대의 가슴에 다시 돌아가기 위하여
풀씨보다 더 가볍게 모래로 부서지려는
한 남자의 내공
라면의 뚜껑을 열다
희노애락의 조화가 저 속에 있다
단단하게 얽히고 얽힌
압축된 한 덩어리의 고뇌
절대로 썩지 않을 그리움에 담겨
걸을 때마다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낸다
뚜껑을 완전히 열지는 말아라
비상을 꿈꾸는 새처럼 일시에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완벽한 생살의 꿈틀거림
주르륵 눈물 대신 뜨거운 물세례
3분이면 해탈이다
3분의 고통 속에서
다시 살아야겠다는 식욕이 솟아오른다
뚜껑이 닫힌 채로 나는 당신 앞에 서있다
썩지 않을 그리움으로
기꺼이 뜨거운 욕조 속에 잠기고자 한다
그대여
뚜껑을 열어다오
그리고 뜨거운 물세례로 다시 태어나게 해다오
나호열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담쟁이넝쿨은 무엇을 향하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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