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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신작시/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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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덕
離所 6
―아침에
오래 기억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다.
언제나 안개 가득한 아침이 두려웠고,
반쯤만 기운 어깨가 아팠고,
기운 어깨를 흔들며 걸어가야 할
안개 아침의 하얀 길들이 무서웠다.
도무지 잃어버린 길 가운데서
두려웠다. 아무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내 황량한 시간들, 시간의 억센 갈기들,
쇠사슬 채찍이 두려웠고,
맞고 맞아도 멍만 드는, 멍들어
죽지도 않는 시퍼런 욕망들이 무거웠다.
그것뿐이었다. 딱 그것이었다.
오래 기억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아직도 안개는 아침마다 자욱하고
조금 더 기운 어깨 흔들며 또 그 속을
가야하지만,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침묵으로 멈춘 자리에
이제 막 빨갛게 눈시울이 익는다.
離所 7
―하얀 오후
언덕을 미끄러지는 굉음의 오토바이가 없는,
미끄러져 자빠진 채 죽는 낯선 사람들도 없는,
심지어 대담한 고양이들조차 없는 이런 오후에는,
너를 안으며 흘리는 피보다 홀로 떠돌 때 샜던
그림자, 캄캄한 웃음이 더 낫다, 더 낮은 자세로
엎드려야겠다고 매미 흉내를 낸다 아아, 나는
매미의 목청을 가질 수 없다. 그 울음은 하얀 불,
오래 기다린 자의 떨림이기에. 더, 더 낮은 음성으로
울어야만 한다고 나는 맨드라미 몸짓으로 떤다.
그러나 나는 맨드라미 꽃잎 가질 수 없다. 그
떨림은 자주 죽어본 자의 표정, 그늘 아래 있기
때문이다. 깊이 울지도 쉬이 죽을 수도 없는 이런
오후에는, 너를 망가뜨리려는 단단한 결의보다 내
홀로 흔들어대는 서툰 생의 狂氣, 차고 무거운
생각의 銀비늘만 수없이 반짝인다.
이제부터,
나는 온전한 너를 믿지 않는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ꡔ끝을 찾아서ꡕ ꡔ한밤의 못질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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