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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신작시/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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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근
어느 날 봄이 내게로 와서
하루는 툇마루 끝에 팔 괴고 누워
하품 한 자락 길게 뽑으며 먼 산등성이
한켠 그늘과 눈맞추고 있었더니만,
눈물납디다 채 펼쳐보지도 못 하고 낡아버린 하루하루가
얼마나 많습디까 그 먼지 쌓인 하루하루가 다 그늘이 되면
어쩌나, 그나마 모조리 한숨으로 훅 끼쳐들면 흩어지면
어쩌나, 아까워서 그랬드랬습니다 겨드랑이나 갈비뼈 틈바구니
내 사타구니에 여태도 고여있는 나이, 볕 좋은 날 이불
털어 말리듯 훌훌 바람에 함부로 맡겨버리지 못 한 나이가
아까워서 아까워서 그랬드랬습니다 세월이 무슨,
연둣빛 앞산에 박힌 한 점 붉은 빛
꽃잎처럼만 그리 귀했으면도 생각했습죠
한데 세월은 참으로 모지락스럽기도 한 것입디다
자울자울 한나절 흐물거리며 한나절 눈 흐리며 나이 타령이나 속으로 하고 누웠는 놈 앞으로 허참, 봄네가 옵디다그려 연초록 풀잎들은 다 털어버리고 아지랑이 이런 것 개굴개굴 무논 이런 것 죄다 벗어던지고 새살거리는 바람도 없이 본래 봄만으로 몸으로만 봄이란 년이, 머리는 쑥대머리 까치집 얹고 때절은 저고리 반이나마 이미 풀어헤치고 어디서 주워다 둘렀는지 누런 무명치마 흔들흔들거려싸며 와서 내 앞에 술 취한 듯 서서 치마를 확 걷어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제 샅을 갖다대는데, 아나 먹어라, 아나 먹어라, 하며 한 이십 년쯤이나 때가 쩔어 허옇게 말라 꼬부라진 거웃 그나마도 듬성듬성 쥐파먹은 제 년의 보지를 내 얼굴에 코에, 아나 먹어라, 아나 먹어라, 펑퍼짐한 엉덩짝 앞으로 뒤로 궁싯거려싸며 비벼대는데 그것 참, 지린내 같기도 하고 달거리 피냄새 같기도 하고 두엄자리 거름 냄새 같기도 하여 한참을 어질어질 아지랑이 피어나듯 어질어질 이마 한쪽 짚으며 어느새 클클거리는 머릿속이나 가늠하다 잠깐 아뜩하여졌더니 봄이란 년이 글쎄 내 얼굴에 제 보지를 짓뭉게며, 아나 먹어라, 아나 먹어라, 이놈의 새깽이야, 내가 네 에미다, 이놈의 새깽이야, 내가 네 새끼란 말이냐, 그러고는 그 년 거짓말처럼, 모지락스런 그 봄이란 년 봄꿈처럼 나른하게시리 삐비꽃 퍼날리는 먼지길 따라 가버립디다그려
봄이 그 지랄 염병을 떨고 간 토방에 꽃 하나 졌습디다
새빨간 꽃잎이 다 뭉그러져 떨어진 자리가 빨그스름하니 물들었습디다
신기하게도 그 꽃 꼭 나를 닮아 누워만 있습디다 어매,
꽃 지고 나니 해도 지고 이제는 내 한 나절도 아주 다 기울어집디다그려
헤헤 헤헤헤헤,
그날 늙은 어미는 삼단 같은 머리칼을 질끈 동여 묶고 뒤란으로 갔다 작고 붉은 열매들이 드글드글 달려있는 늙은 어미의 뒤란에는 팔다리 없이 머리도 없이 항아리들이 살고 있었다 시커멓고 무서운 몸을 빛내는 항아리들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뒤란에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된 금기여서 항아리들 주변에 축축하고 번들거리는 우산이끼들만 도마뱀 비늘처럼 무성하게 자라났다 늙은 어미는 항아리들을 하나하나 온 팔에 쓸어안곤 했지만 좀처럼 항아리들의 꽉 다문 주둥이를 열어보지는 않았다 녹슨 철문이 열리듯이 그날 느닷없이 햇빛이 쏟아졌다 햇빛에서 날카로운 쇠냄새가 났다 열매들이 일제히 살을 터뜨렸다 뒤란에 낭자하게 흩어지는 작고 붉은 비명들 서둘러 늙은 어미는 항아리들의 뚜껑을 열었다 곰삭은 몇백 년 시간들이 걸죽하게 흘러넘쳤다 항아리 바깥으로 아기들이 쭉 말라붙은 목을 뽑아 올렸다 눈꺼풀은 굳고 구멍만 남은 코를 벌름거리며 입술도 없이 이만 달각거리고 귀도 짜부라져 눌러 붙고 머리칼만 수십 발 자란 아기들, 아기들의 몸 없는 머리를 늙은 어미는 하나씩 뽑아 들었다 헤헤 헤헤헤헤, 끝없이 아기들의 입술 없는 이가 늙은 어미를 향해 웃어댔다 아기들의 머리에 대고 어미가 말했다 언제 다 죽을래? 아기들의 머리가 어미에게 대답했다 헤헤 헤헤헤헤, 아기들은 다시 항아리 속에 갇혔다 팔다리 없이 머리도 없이 항아리들은 몸만으로 시커멓고 무서워졌다 늙은 어미는 다시 질끈 삼단 같은 머리칼을 동여 묶고 뒤란을 돌아 나왔다 햇빛들이 쇳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늙은 어미를 따라 나왔다 우산이끼들은 자라고 자라 마침내 커다란 도마뱀이 되었다 그날 울음도 없는 새들이 날아와 뒤란의 작고 붉은 비명들을 쪼아 먹었는데 헤헤 헤헤헤헤,
김 근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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