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9호 <교육의 문화 인프라> 민족사관학교 : 빛과 그늘/황경식
페이지 정보

본문
민족사관고등학교:빛과 그늘
황 경 식(시 인)
1. 대안 없는 비판
어느 여자중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여학생들의 말이 날로 거칠게 변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국어교사가 아이들이 욕할 때마다 시를 한 수씩 강제로 암기하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 시를 외우기 싫어하는 학생들은 말하기에 보다 신중해질 것이고, 어쩌다 욕을 한 학생도 그때문에 시를 한 수씩 암기하다보면 그만큼 정서가 순화될 것이라는 일석이조의 방안이었다. 하지만 그 안은 즉시 부결되고 말았다. 너무 힘들고 귀찮다는 게 대다수 교사들, 특히 국어교사들의 견해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시를 싫어하는데”라고 국어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누구나 대안 없는 비판은 하기 쉽다. 특히 교육문제처럼 온 국민에게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저마다 한두 마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게 되지만 막상 뚜렷한 대안은 쉽사리 내놓지 못 하고 있다. 해마다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학입시와 고교 평준화 문제, 천문학적인 사교육비,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는 강남 8학군 집중 문제 등 오늘날 고교 교육과 관계되는 문제는 결코 한두 가지도 대충 넘어갈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어느 하나도 속시원한 해답은 없다. 비판만 날카롭고 논의만 무성할 따름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일선 고등학교에선 그 누구도 대안을 모색해보려는 기미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흐르는 대세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종의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치열한 입시 경쟁에서 너도나도 뒤질세라 눈에 불을 켜고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따라갈 뿐, 때로는 자성의 목소리가 이는 듯하다가도 곧 정부가 제도와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딴청을 부린다. 대학이 바로 서야 한다고 분개하는가 하면 학부모의 이기심을 통렬히 나무라고 교육당국의 무능력을 개탄하기도 한다. 이처럼 비판과 개탄만 난무하는 교육현장에서 언제부턴가 민족사관고등학교(이하 약칭 ‘민사고’)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 대안으로서의 민족사관고등학교
서울 공화국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만큼 모든 것이 서울 위주인 우리나라에서 우선 학교의 위치를 강원도 오지에 정한 것부터 일반의 상식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 같다. 하지만 이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독특한 학교 편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족반(자연계열, 인문계열)과 국제반(국제계열)의 개설인데 특히 국제반은 해외 대학의 진학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국내의 거의 모든 고등학교가 소위 SKY대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와 같은 명문대학 입시준비에 목이 매어있는데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히려 교육의 역점을 국제반에 두고 세계로 시야를 돌린 것은 놀랍고도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이 학교 설립자의 이상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졸업생들을 배출하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학교를 만들고자 하겠다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학교는 틀에 박힌 교실 수업에서의 탈피를 시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업하면 으레 학생들은 교실에 앉아있고 교사가 교실을 찾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민사고’에서는 학생들이 교사의 연구실을 찾아가는 연구실 중심수업으로 과감하게 형태를 바꿔버렸다. (이는 학급당 인원이 최대 15명 이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밖에도 이 학교만의 특징을 열거하자면 한둘이 아니다. 학교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면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독특한 제도들이 있는데 그 중 민족 6품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민족 지도자의 양성이라는 교육목표에 부합하는 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학생들에게 리더십의 바탕이 되는 영어품, 예술품, 독서품, 심신수련품, 봉사품, 정보품 등 6개 분야에서 졸업할 때까지 일정한 수준에 이르도록 교육하고 있다.
과감한 시책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물론 이에 걸맞은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학교 설립자의 결단에 의한 충분한 경제적인 뒷받침이다. 기숙사를 비롯한 각종 학교의 건물과 시설은 학교의 제반제도를 실현시키는데 거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모든 교사들에게 배당된 연구실과 부속 기자재들, 부러운 수준의 도서관시설과 장서들, 체육관시설 등 일일이 예를 들기 벅차다. 교사의 수도 55여 명(2002년 현재)으로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3.5명이니 최고의 명문대학 부럽지 않을 수준이다. 위와 같은 수많은 매력 때문일까, 지원하는 학생들의 수준도 이에 못지않다. 입학자격이 매우 까다롭게 되어있음에도 충분히 지원자를 확보할 수 있고 개중에는 토플시험 만점자나 해외에서 역유학해 온 학생까지 있다하니 학생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내적, 외적 조건이 두루 갖추어진 이 학교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3. 몇 가지 풍경들
비록 현재까지 ‘민사고’를 구체적으로 기술한 책자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학교를 소개하는 자료는 매우 많다. 수많은 신문과 잡지에서 학교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생생하게 학교의 모습을 일반인들에게 보여준 것은 아마 방송이 아닐까 한다. 그 중에서도 KBS의 <제3지대 현장르포: ‘횡성 산골의 공부벌레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민사고’의 일상생활과 그 에피소드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과
먼저 그들의 일과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자정까지 그들의 일정은 다음과 같이 매우 타이트하게 짜여져 있다.
위의 표에서 나타난 것처럼 학생들은 일요일을 빼고 매일 8시간 수업을 받고 5시간 자율학습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식 일과이고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도 자율학습이 가능하며 기숙사의 소등 시간 역시 새벽 2시에 이루어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이후에도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다. 방송에 소개된 어떤 학생들은 비상 랜턴을 준비하거나 기숙사 복도의 불을 이용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매일 하루에 13시간에서 15시간 혹은 그 이상을 공부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기숙사
이같이 꽉 짜여진 그들의 일상은 기숙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지하 1층, 지상 12층의 최신 설비의 기숙사는 학생들의 모든 활동을 뒷받침하기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만한 시설은 2인 1실의 쾌적한 학생들의 방에 저마다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사감실에 설치된 CCTV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학생들이 자율학습시간에 졸게 되면 즉시 사감이 깨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모든 기숙생들이 모일 수 있는 강당이 기숙사 안에 있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혼정신성(昏定晨省)이라는 인사를 사감에게 하는데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도서관
기숙사 못지않게 이 학교에서 아주 자랑으로 삼는 것은 도서관이다. 이용자들의 접근성과 쾌적한 학습 환경을 위해 학교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충무관), 가장 넓은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관장과 2명의 전문 사서가 근무하고 있다. 방학기간을 제외한 기간에는 항시 이용자에게 개방된다. 1999년 개관하여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장서의 구입과 기증으로 단행본 18,000여 권(국내서 14,000권, 원서 4,000권), 멀티미디어 자료 2,000종, 정기간행물 60종 4,0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는데 참고로 2002년 11월 23일 도착한 원서들을 살펴보면 학생들이 신청한 것을 포함하여 40여 권인데 T. S. 엘리엇의 ꡔThe Waste Landꡕ 같은 고전에서부터 매우 전문적인 서적들도 있었다. 또한 2003년 도서관이 구독하는 정기간행물은 해외 정기간행물이 21종, 국내 정기간행물은 39종에 이르고 있었다.(해외간행물에는≪Time≫에서≪Golf Digest≫,≪Economist≫,≪Nature≫ 등 다방면에 이르고 국내 간행물 역시 ≪인물과 사상≫, ≪씨네 21≫ 등 개성적인 잡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민족 6품제
이 학교의 건학 이념(建學理念)이 가장 잘 살아있는 독특한 제도가 앞에서 잠시 소개한 민족 6품제이다.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학생들에게 영어품, 예술품, 심신수련품, 독서품, 봉사품, 정보품 등 6가지 종류의 전문 능력 및 품성을 함양하여 졸업 전까지 일정한 수준에 이르기를 요구한다. 먼저 영어품이란 국제화 정보화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영어 활용능력으로 민족반은 졸업 전까지 공식토플 점수가 580(PBT)/ 235(CBT) 이상이 되어야 하고 국제반은 졸업 전까지 공식토플 점수가 630(PBT)/ 265(CBT) 이상이 되어야 한다. 심신수련품은 몸을 단련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심신수련으로 전교생이 매일 아침 40분씩 운동을 하고 검도나 태권도를 1단 이상 따거나 태극기공협회의 인증을 졸업 전까지 받아야 한다. 예술품은 한국인으로서의 혼과 전통을 잇고 자신의 정서를 윤택하게 하기 위하여 전통악기를 일정 수준 이상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남학생은 대금과 단소 중 하나, 여학생은 가야금에서 무형문화재의 전수자로부터 인증서를 받아야 한다. 봉사품은 자기보다는 이웃과 남을 배려하는 정신을 기르기 위하여 봉사활동 시간이 졸업 전까지 80시간 이상 돼야 한다. 일요일이나 공휴일 및 방학을 이용하여 개인별로 공인된 봉사기관에서 활동하고 그 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 정보품은 졸업 전까지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인정한 정보소양인증대상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정보 산업 과목 2단위 이상을 이수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독서품은 인격 도야와 학문 연구의 바탕이 되는 교양을 쌓기 위하여 학교에서 선정한 양서 50권을 2주일에 1권씩 읽고 정규 교과목인 ‘독서’에서 85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특히 도서목록에는 한국역사연구회의 ꡔ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ꡕ, 토마스 쿤의 ꡔ과학혁명의 구조ꡕ, 일린의 ꡔ인간의 역사ꡕ, 마빈 해리스의 ꡔ작은 인간ꡕ, 플라톤의 ꡔ국가ꡕ 등 수준 높은 책들이 포함돼 있다. 이상 총 6개 분야에서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일정 수준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인증서를 수여하는 제도이다.
■EOP와 3STEP EDUCATION
또, 하나 민사고의 특색은 EOP(English Only Policy)와 3STEP EDUCATION제도의 도입이다. EOP란 각계 각층의 세계적인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세계의 공용어라 할 수 있는 영어를 학생들이 상용화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국사와 국어를 제외한 모든 수업은 물론 학교의 공식적인 행사는 모두 영어로 진행되고 학생들의 일상 생활 용어도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교사들을 위한 영어학교(KENST)와 학생 자치회 안의 EOP DEPARTMENT가 있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3단계 교육이란 민족사관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이루어지는 영재를 위한 교수 학습 방법으로 ‘가르치고(teaching)-토론(discussion)하고-쓰는(writing)’과정을 말한다. 학습 내용에 대한 교사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배운 학습 내용을 중심으로 토론의 과정을 통해 창의적 사고 방식과 비판의식을 함양하며, 이를 토대로 자신의 주장이 담긴 논문식 과제를 작성하는 교과 지도의 과정이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해당 과목에 대한 도서 자료, 수업 기자재, 실험도구 등 학습 자료가 가득한 교사의 연구실에서 수업을 받게 된다. 따라서 교실과 교무실이 없이 교사의 개인 연구실만 있고 수업 단위는 13명이 기준이다. 실제로 방송에서는 예비 입학생들이 외국인 교사로부터 세계사 수업을 영어로 받고있는 모습이 소개되었는데 교사가 학습과제를 제시하면 학생들은 스스로 도서관과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찾고 교사는 이를 도와주고 있었다.
이밖에도 학교의 특징은 여러 곳에 있다. 일례로 학생 법정을 살펴보면 매주 토요일 학생 자치회 주관으로 열리는 학생 법정은(기숙사 10층에서 모든 진행은 영어로 이루어진다.) 학생들 스스로 검사와 변호사, 재판장(자치회장)을 맡게 된다. 학교 규정을 위반한 학생(주로 지각이나 청소불량 같은 것)이 피고가 되면 검사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호를 거쳐 재판장은 규정에 의한 벌칙을 선고하는데 준비된 채찍으로 상당히 가혹한 체벌(3대에서 15대)을 받게 된다. 이는 미래의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될 소양과 의식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라 하는데 학생들은 교사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고 규정에 의해 공정하게 집행된 처벌이므로 설사 가혹하더라도 기꺼이 수용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상 달리는 말에서 산을 바라보듯 대충 살펴본 것만으로도 이 학교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수준과 책무가 얼마나 높고 과중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 13시간 이상 부과되는 학업과 그밖의 여러 가지 과외 활동 때문에 학생들은 항상 뛰어다녀야 할 정도로 바삐 움직여야 하고 언제나 수면 부족에 시달려야 한다. 틈만 나면 깊은 잠에 빠지고 방마다, 학생들마다 너댓 개의 자명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학생들이 이런 상황에 매우 잘 적응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학생들은 15시간도 모자라 비상등을 켜고 계속 더 공부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부과되는 과제와 시험, 수준 높은 수업과 가혹한 경쟁체재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만든다고 할 수도 있다. 이곳 학생들이 받고 있는 수업 중에는 미국 대학생들의 교과서도 있으며 매주 영어, 수학 시험이 있고 정기고사와 토플시험 등이 정신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에 재학하는 학생들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별 무리 없이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방학도 일반 학교보다는 훨씬 짧아 여름, 겨울 방학이 각각 14일 밖에 되지 않는데 그 방학중에도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학생도 있었다. 물론 이들도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학생은 크게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어떤 여학생은 힘껏 춤을 추거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대체로 그들은 주어진 여건에 불평 없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은 학교당국의 치밀한 계획과 학생들의 적극적인 호응은 당연히 각종 경시대회와 대학입학 성적에서 빛나는 성과를 이룩하게 된다. 그 동안 국내외 경시대회 및 올림피아드에서 ‘민사고’는 매우 두드러진 성과를 이루었으며 해외 명문 대학 진학실적으로 매스컴의 집중조명을 받게 되었다. 한편 이 같은 입시성적은 필연적으로 학부모들의 깊은 주목을 받게된다. 오늘날 대한민국 학부모들에게 명문대학 진학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죽하면 과학 영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과학고등학교도 외국어 교육을 통해 국제사회에 크게 기여할 인재를 기르기 위한 외국어 고등학교도 오직 명문대 진학 준비 학원으로 전락한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4. 과연 대안일 수 있을까
그러므로 ‘민사고’가 일개 고등학교로서는 유례없는 언론의 관심과 세간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교육부장관 2명이 연이어 학교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로 우선 지정된 것은 당연한 귀결처럼 보였고 모든 고등학교가 지향해야 될 하나의 귀감이요, 당면한 우리교육의 제 문제를 해결해줄 최종 해답 같았다. 과연 그렇다면 ‘민사고’는 오늘의 우리 교육의 모범 답안일까?
물론 지금까지 ‘민사고’가 이룩한 놀라운 성과를 외면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한 명이라도 명문대학 합격자 숫자를 늘릴까 하는 타성에 빠져있는 기존의 일반학교에 비해서 새로운 도전과 시도를 감행하는 ‘민사고’는 그만큼 돋보이는 존재였다. 과외가 필요 없는 학교라고 자부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뛰어난 영재들을 모아야 했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많은 자본을 투자했다. ‘민사고’의 가장 큰 경쟁력인 셈이다. 또 ‘민사고’ 의 운영체제 역시 기업가가 설립자인 것에 아주 부합하게 매우 효율적이고 성과위주이다. 학교의 주요 조형물로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를 위해 좌대 15개를 설치한 것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그만큼 가시적인 성과를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가 설립될 때 이상으로 삼았다는 이튼스쿨보다는 학교 스스로 밝힌 바처럼 ‘민사고’의 학사운영은 미국의 사립학교들을 참고하여 주로 미국 동부의 명문대학 입시준비에 초점을 맞춘 것 같았다. 명칭은 그럴듯하게 민족사관학교이고 설립이념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 주체성을 가진 나라의 지도자들, 즉 제 2의 이순신․정약용을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 비록 영어를 상용화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수단이고 결코 목표는 아니라고 한다. 이른바 동도 서기(東道西幾)라는 셈이다. 때문에 학생들은 민족혼을 살리고 그 얼을 기리기 위해 한복을 입고 전통음악과 악기를 익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펴본 ‘민사고’는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붕어가 없는 붕어빵처럼 민족사관이 결여된 민족사관고등학교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진정한 민족사관이 고작 개량 한복이나 입고 전통악기 한두 개 배운다고 형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학교에서 상징인물로 내세우는 충무공의 난중일기나 다산의 목민심서 한 부분쯤은 제대로 학생들이 익혀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 대다수 우리나라의 기독교 선교학교를 보면 성경을 필수적으로 가르친다. 그만큼 학교 설립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사고’ 역시 일제의 식민사관 극복을 위해 친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하고 올바른 민족사관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백범일지 정도는 이해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학교에서 그렇게 자랑하는 민족 6품제에도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분야일 것이다.
하긴 모든 것이 디지털화하고 인터넷이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되는 21세기 지구촌 시대에 민족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시대에 뒤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인류는 말 그대로 모두 한 마을에 사는 한 형제가 되는 시기에 이른 것이다. 피부 색깔에 따라서 이념과 종교에 따라서 편을 가르고 증오와 대립을 부채질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애초 학교의 이름을 민족사관고등학교라고 정한 것부터 약간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 설립 당시나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올바른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세계가 한마을이 되고 모든 인류가 한형제가 되더라도 아직도 우리는 우리만의 꼭 해결해야 될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무조건 각자의 고유성마저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일 온 세계가 모두 한 가지 색깔로만 칠해진 그림이라면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하겠는가? 같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러기에 ‘민사고’가 우리의 전통악기를 배우도록 시도한 것 등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거기서 멈춰버린 것에 ‘민사고’의 한계가 있다.
5. 우리가 바라는 학교
최근 어느 신문에 소개된 미국 일리노이 수학과학고(IMSA)는 교과서도 없고 학생들의 성적표도 없다고 한다. 학생들은 자기 시간표에 맞춰 등교하고 어디서든 내키는 대로 공부한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뿐이라 한다.<한국일보 2003. 1. 13 독립심이 영재를 만든다-미 일리노이 수학 과학고> 진정한 영재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민사고’의 영재교육 방법도 다시 한번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렇게 많은 수업시간이 획일적으로 요구되어야 할까? 참고로 다시 한번 ‘민사고’의 설립 모델이라는 이튼스쿨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아주 놀랍다. 하루 5시간 남짓 수업을 받는 이튼스쿨은 오후 일과는 학생들마다 특성에 맞게 달라지는 것 같았다. 또한 그들의 소등 시간은 오후 9시 30분이다. 이에 반해 ‘민사고’ 학생들은 이미 살펴본 바처럼 학과 수업 이외에도 매일 5시간 이상 거의 강제적으로 자율 학습이 실시된다. 기숙사 방마다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통해서 졸고 있는 학생은 즉시 깨운다고 한다. 그런 여건 속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과연 이 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온실 속에서 잘 재배되는 식물이거나 멋지게 조립된 성능 좋은 로봇의 모습은 아닌지? 하버드나 예일이라는 천국 티켓에 눈이 먼 학부모들과 그들에게 세뇌된 신도들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지나칠까? 지난 해 6월 이 나라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감동과 열광의 도가니에 빠질 때 그곳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효순이, 미선이를 슬퍼하면서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일 때도 그들은 묵묵히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는지?
혹시 민족의 지도자 양성이라는 학교의 교육 목표가 학부모들에게 자기 자식만은 대를 이어 항상 계급사회의 정점을 누리고자 하는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로 어필한 것은 아닌지? 비록 수단과 방법이 순수하고 올바른 것일지라도 그 숨겨진 의도가 순수하지 못 할 때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이때 그 수단이 효율적이고 완벽한 것일수록 그 결과는 더 비극적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처럼 처음 의도와는 전혀 다른 괴물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 천재성이 넘치는 자유로운 영혼이거나 민족혼이 불타오르는 그런 학생이 아닌 지극히 시험 잘 치고 품행이 단정한, 타에 모범적이고 매사에 똑똑한 인물들만 양산하지는 않을까. 그런 학교는 지금 있는 것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민사고’가 많은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의 모범이 될 것을 생각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당면한 우리 교육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비판은 쉽지만 대안은 결코 손쉽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부분적인 개선은 가능할지라도 언제나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따르는 것이다. ‘민사고’를 비판하면서도 보다 뚜렷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나라처럼 교육 열기가 이상과열인 나라에서는 오히려 아무 대책 없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지난 정부의 의욕 과잉의 교육 개혁이 오늘날 어떤 결과를 빚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일찍이 맹자가 말한 것처럼 그저 즐거움으로 천하의 영재들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참된 본분이 아닐까.
차라리 우리가 바라는 학교는 어느 후덕한 설립자의 호의에 의해 경제적인 지원만 충분히 받는 학교이면 좋겠다. 시설은 너무 좋고 교사들도 매우 너그럽고 여유가 있다. 학습 방법은 가르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재미있는 방식이다. 어쩌다 시험은 쳐도 성적은 매기지 않는다. 학교나 학부모들이 특별히 기대하거나 바라는 바도 없다. 교육 목표나 교훈도 스스로 만들어가면 된다. 학비는 꽤 비싸지만 장학금도 충분해서 누구라도 돈이 없어도 배울 기회는 있을 것이다. 학교 이름도 없다. 그저 설립자의 이름을 따라 명재스쿨이라고 부를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민족사관을 심어주고 싶지만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이념이나 전통 역시 언젠가 저절로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 열매가 맺게 될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이다. 이튼스쿨의 역사가 500년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너무 조급하게 너무 많은 것을 ‘민사고’에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전글9호 <교육의 문화 인프라> 교사들이 체험하는 교육문화 인프라/박진우 04.01.04
- 다음글9호 <교육의 문화 인프라> 교육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위하여/고미숙 04.01.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