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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를 내면서/엄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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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너무나 야만적인
엄경희(본지 편집위원)
새로운 천년을 인류의 역사는 다시 ‘전쟁’으로 시작하고 있다. 전 세계는 연일 전쟁 반대 구호를 외치며 미국에 항거했으며, 한 목소리로 미국이 평화를 선택하기를 촉구하였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전쟁을 막아보고자 했던 인간 방패들까지 동원되었던 평화 시위가 있었지만 미국은 이라크를 무참하게 공격하고 나섰다. 이라크에서 벌어진 살상과 질병, 강간, 폭력, 파괴 그리고 사회적 대혼란은 오로지 한 거대 국가의 야욕이 불러온 참상임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20세기에 벌어졌던 전쟁은 얼마나 많은 반성과 인간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던가. 지난 세기에 이루어졌던 그 모든 반성적 자각을 다시금 분서갱유하는 이 전쟁의 논리 앞에서 우리는 분노와 무기력함을 동시에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인이 갈망했던 평화는 짓밟혔으며 약소국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접어버리고 미국에 동조하면서 자체 분열을 감당해야만 했다. 이는 또한 우리의 착잡한 현실이기도 하다. 국회에서 이라크 파병이 결정되는 순간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은 다시 한 번 손상되었으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손상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 앞에서 우리의 무력함 또한 확인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의와 진실을 외면하면서 우리의 손에 쥐어진 손익계산서에는 잔혹한 생존의 논리가 다시금 기록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탈식민주의에 관해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라크 사태가 심각하게 문제되고 있을 즈음, 본지의 편집위원들은 대학로의 어느 음식점에 모여 “우리 문학과 문화 속에 잠복되어 있는 미국”을 점검하자는 고명철 편집위원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우리의 근대사는 미국을 선망하면서, 혹은 미국에 대해 분노하면서 그에 동화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우리 문화 깊은 곳에 침투해 있는 미국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온당한 것인가에 대한 점검은 문화 바로 세우기와 더불어 우리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될 것이다.
이번 특집에 실린 글들은 모두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식민성과 탈식민성을 문제삼음으로써 자기 정체성의 회복과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 문화의 길을 마련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논의를 위해 마련된 ‘초점’란에 특별히 미국에 관한 서적들을 서평한 글을 집중적으로 실었는데, 이 또한 미국을 바로 알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를 대변해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서 세계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의 진정한 얼굴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서방 선진국이 지금까지 이룩한 부와 자국의 안정이 대부분 식민지 경영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서방 세계가 보여주고 있는 근대의 찬란한 문화와 풍요로운 생활의 질, 그리고 다수의 국민을 위해 마련된 갖가지 사회 보장 제도들, 이 모두가 식민지의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이룩된 것이라는 점에서 선진과 야만이 밀월 관계에 놓여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만성을 제압할 길이 요원함을 이번 전쟁은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라크 전쟁은 강대국의 이익의 논리가 모든 가치와 진실보다 우선한다는 부조리한 현실 구조를 각인시킴으로써 정의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국의 이익과 실용주의만이 살 길이라는 불합리한 가치를 사람들에게 심어줄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제국주의의 전횡에 맞설 대항적 가치가 과연 무엇일 수 있는지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이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진정한 대항적 가치 생산을 과제로 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번 호의 글들이 이러한 현실의 과제를 고민하고, 그 길을 모색하는 데 작은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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