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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특집> 한국인들의 미국화 현상의 근본 뿌리/최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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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미국화 현상의 근본 뿌리
―한국의 기독교화―
최 준 식
(문학평론가)
우리 사회는 주지하다시피 그 동안 강한 미국화 현상을 겪어왔다. 이것을 각 부분에서 볼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경향이 가장 근본적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종교에서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대의 한국 사회가 보인 강한 미국화 현상은 개신교가 중심이 된 기독교의 예외적인 팽창현상이 가장 잘 설명해줄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지면에서도 여러 번 밝힌 바 있지만 우리나라 개신교는 여러 면에서 기록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개신교가 보유한 진기록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단일 교회로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신도수가 한 10만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 보니 주일마다 교회 주변은 주차 전쟁 때문에 혼잡하다는데 재미있는 것은 교회 주변으로 7일장이 선다는 것이다. 일요일만 되면 워낙 많은 사람이 오니 상인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을 것 아닌가? 생각해 보라!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00년 남짓. 그런데 세계에서 신도수가 제일 많은 교회가 우리나라에 생겼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국 교회의 진기록 행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50대(大) 교회 가운데 23개가 한국 교회였다고 하고 10대 교회 가운데에는 4개가 한국 교회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한건물에 교회가 가장 많이 들어있는 기록을 갖고 있고-개포동의 한보건물이었다나-도시 면적 비율로 교회가 제일 많은 도시도 한국에 있다고 하고-군산-도대체 한국 교회의 진 기록은 좀처럼 멈출지 모른다. 또 실제로 많은 경우 건물 하나 건너에는 교회가 들어가 있고 웬만한 교파에서는 신학교를 다 가지고 있어 신학교 숫자가 한 200개쯤 된다고 하고.
아직도 이 땅에 정착 못한 개신교
항상 하는 이야기이지만 기독교도가 천만이 넘는다는 나라가 왜 이다지도 부패했을까? 물론 같은 이야기를 불교에도 할 수 있다. 대자대비를 설파하는 불교도가 1200만이 되는 나라가 하나도 자비스럽지 못한 것도 정녕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랑과 정의를 설파한다는 기독교의 신자가 이렇게 많은데 왜 나라는 하나도 정의스럽지 않을까(아니 나라까지 갈 것도 없고, 교회 안도 하나도 정의스럽지 못하다)? 더 나아가서 이 나라에는 사랑보다는 오히려 미움, 경쟁, 시기, 협잡 등만이 판을 친다. 이건 기독교가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도 신선함이 없는 것이다. 서양의 고등종교인 기독교가 이 땅에 제대로 뿌리를 박았다면 이 땅에 새로운 문화가 펼쳐져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게다가 우리가 구악(舊惡)으로 계속 간직하고 있는 여러 사회 문제들이 교회 안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내 집안 얘기를 해서 안 됐지만 내 처가는 나름대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지만 내 처가가 중심이 돼 교회를 세우기도 했고 그 집안에 목사도 네 명이나 된다. 그런데 나는 처가에서 기독교의 체취를 거의 못 느낀다. 기독교 문화보다는 그저 한국적인 유교 문화만을 느낄 뿐이다. 이건 내가 봉직하고 있는 이화여대도 마찬가지이다. 학교 소개를 보면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졌다고 하고, 그래서 매주 학생들이 채플 듣는 것을 의무로 하지만 나는 학교에서 기독교 정신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이때 말하는 기독교 정신이란 이런 거다. 한마디로 서양의 합리적이고 관용적인 정신으로 생각하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하듯이 상대방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고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섬김의 정신과 같은 그런 거다. 나는 기독교의 이런 사랑의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실제로 서강대를 다니면서 (미국) 신부님들한테서 그런 기독교의 높은 정신을 체험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있는 이화여대에서는 그런 기독교의 높은 정신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화여대는 일반적인 한국 기독교계의 수준에 비해 볼 때 훨씬 높은 편에 속하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이것은 이화여대측의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아직도 기독교가 우리 문화에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정착되지 않았으니 원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사회 문화가 그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윗사람 말만 중요시하고 그 사람들 눈치만 보는 저질의 권위주의 같은 남루한 전통사상의 찌꺼기들이 아직도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아직 우리나라에 뿌리를 박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증거를 댈 수 있지만 근자에 있었던 일을 하나만 들어보자. 아주 작은 일이었지만 가슴이 뭉클해지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아담 (혹은 애덤) 킹이라는 이름의 한국계 입양아와 관련된 것이다. 킹은 초등학생으로 무릎 이하가 없는 중증 장애인이다. 아주 어려서 버려져 입양되었다가 미국 부모의 따뜻한 사랑으로 장애를 딛고 귀국한 것이다. 무릎 이하는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의 주인공의 어릴 때처럼 쇠로 만든 인조 다리로 되어 있다. 이 아이가 우리나라 프로 야구의 시즌이 시작되는 날 운동장에 와서 시구를 하는 모습이 브라운관에 잡혔다. 참 가슴이 뭉클해지고 정말 감동 어린 장면 중에 하나였다. 감동의 물결이 지나자 곧 반성의 소리가 내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과연 저 어린이가 한국에 계속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보나마나 병신이라고 버려져서 온갖 고생을 하든지 아니면 초기에 냉대나 실컷 받다가 세상 뜨든지 하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일 게다.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은 뻔할 뻔 자이다. 보통 애들도 버려지면 한국 안에서는 입양이 잘 안 돼 서양으로 보내지는데 킹 같은 장애아는 정말 아무도 반기지 않을 게다.
그런데 이 아이가 미국 가서 정말로 좋은 대우를 받고 티없이 맑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된 일일까? 미국인이라고 무슨 인종적으로 더 착하겠는가? 그럴 거 하나도 없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그러면 미국 사람으로 대표되는 서구인들은 버려진 아이들에 대해 어찌 그리도 관심이 많을까? 그것도 우리는 사람 취급도 안 하는 ‘병신’들한테 말이다. 이건 모두 아직도 서구에는 기독교의 정신이 살아있다는 징표이다. 서양 사람들이 아무리 교회를 안 나가고 기독교를 외면하고 있는 듯 보여도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항상 기독교 정신이 깔려 있다. 이때 말하는 기독교 정신은 무엇일까? 바로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천시받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사랑을 말한다. 예수님은 별칭이 많았는데 그 중에 ‘창녀와 세리(세무 공무원)의 친구’라는 것이 있다. 창녀와 세리는 당시 제일 천시받고 따돌림받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 편에 섰고, 이 사람들을 바로 예수 자기로 생각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정신을 이천 년 동안 소지하고 있는 서양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 정신에 젖어 킹 같은 사회의 ‘버림아’들을 입양해 장애를 고쳐주고 자식으로 키워 사회에 내놓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크리스챤들은 왜 이렇게 안 되나? 이것은 기독교의 드높은 정신이 아직 이 나라에 뿌리박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를 보면 일반 사회문화가 그대로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 위주의 권위주의가 횡행하고 사회 개혁보다는 샤머니즘(?) 식의 개인적인 구복만 판을 친다. 기독교의 심볼 사상과 같은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제대로 실천된다면 우리나라가 입양아 수출 최고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래도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기관은 대부분 기독교 관련 단체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활빈교회의 그 유명한 김진홍 목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가 우리나라의 차세대 사상이 되려면 우리 사회 전체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이 혼탁한 한국에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비근한 예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원동력이 되었던 불교의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삼국 중 가장 어리고 보잘것없었던 신라는 불교를 수입해 나라의 기둥 사상으로 삼으면서 전 국민이 하나가 되었다. 원효와 같은 불세출의 사상가가 나왔고 석굴암이나 석가탑, 속칭 에밀레종 같은 최고의 물질문화를 산출하면서 우리나라 고대 문화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지금 과연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넣어줄 수 있는 힘이 약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회 전체를 통합하는 힘은 더 더욱이 약하다. 기독교가 정말 우리 사회를 이끄는 주도 사상이 되고 싶다면 개과천선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모습으로 보아서는 개과천선할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는 교회가 왜 이렇게 많을까? ―그 작은 설명
교회 많다는 얘기하다 이리로 빠졌는데 교회가 많아진 것에 대한 근인은 물론 신학교가 많이 세워져 그 결과 그곳에서 목사들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먹고살려면’ 교회를 세워야 했고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는 다방보다 교회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신학교 숫자가 200개 남짓이라는데 이중에 교육부에서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는 10개 안팎밖에는 되지 않는단다. 나머지는 자기네 교파 안에서 임의로 만들어 그냥 서로 안수 주고 목사를 만드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나와 경쟁적으로 교회를 세우니 교회가 많을 수밖에 없다. 물리적인 원인은 그렇다 치지만 교회를 아무리 많이 세워도 사람들이 안 가면 교회가 많아질 수가 없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가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회에 왜 그렇게 많이들 갈까? 이것은 정말로 큰 주제이다. 그런데 신학 학술발표 대회에서 이 주제로 광범위하게 다루는 것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신학도 ‘실학(實學)’을 해야할 텐데 너무 말만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교회를 ‘왕창’ 나가고 있는 현상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접근해야 한다. 신학적이나 종교학적인 시각도 가능할 테고 사회학적인 접근도 가능할 게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 모든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그저 내 눈에는 우리나라에 기독교 신자가 많아진 것은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미국화 현상과 맞물린 것 같다. 우리가 무서운 속도로 미국화 되면서 다시 말해 경제나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문화적으로 미국에 종속되면서 기독교도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영원한 이상적 모델이자 전범(典範)인 미국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으니 너도나도 미국 시민적 정서에 가까이 가기 위해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게 한 번 유행되면 별 생각 없이 그냥 따르는 집단성이 매우 강하다. 이런 경향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속칭 ‘삐삐’와 휴대전화를 가지고 이미 설명했다. 그저 남이 삐삐 사면 나도 사고 남이 휴대전화 사면 나도 사는 것, 그뿐이다. 그래서 변신력이나 임기응변력은 대단하다. 그러나 도무지 곰곰이 생각하는 건 싫어한다. 이 전화가 나한테 필요한 건지 아닌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성황은 우리나라에 기독교 신자가 늘어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될 듯싶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기독교로 가니까 너도나도 별 생각 없이 교회로 향한다.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기독교를 내 인생관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깊은 성찰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기독교인이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심해서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말이다. 물론 그런 신자들도 적지 않게 있을 게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건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지 개개인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만일 이런 성찰이 있은 연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다면 한국 기독교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게다.
그 다음에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기독교를 보편적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절대적 진리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하기야 신앙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절대적으로 안 받아들이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다시 말해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절대 진리를 반영하는 ‘하나의’ 진리로서가 아니라 기독교만이 절대 진리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곤란한 생각이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보편진리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특수한(particular)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특수성이라는 비좁은 문틈을 통해 보편성을 살짝 맛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간사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변치 않는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정말 역사나 문화를 모르는 사람이다. 굳이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사랑과 봉사, 정의와 같은 기독교의 근본 정신인데 그것 빼고는 전부 변한다. 심지어는 유태교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신에 대한 생각도 역사적으로 숱한 변화를 겪어 왔다. 초기의 질투와 복수의 신에서부터 예수가 생각하는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까지, 또 자연 위에서 군림하는 하느님에서 자연을 돌보는 하느님까지, 등등 정말 병립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기독교의 신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거기 어디 절대적인 게 있는가? 계속 변화하면서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인간의 필요에 따라 바뀌어간 것뿐이다.
왜 한국인은 기독교 성서(기독경)만 성서 혹은 성경이라고 부를까?
기독교 성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의식하는지 못하는지 모르지만 특정 종교인 기독교의 경전을 보통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 특정한 종교의 경전을 그냥 보통명사로 써서 성경이라고 할까?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한 물품을 보통명사로 부르는 경우는 그 특정한 물품이 같은 종류의 다른 물품을 완전히 압도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승합차를 보통 ‘봉고‘라고 부른다. 봉고란 무엇인가? 기아에서 만든 승합차로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봉고 이전에도 승합차는 꽤 있었다-만든 승합차의 이름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다른 승합차도 봉고라 부르는가? 그것은 봉고가 대 힛트를 쳤기 때문이다. 그래 고유명사가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예는 많다. 가령 포클레인으로 불리는 차의 경우를 보자. 독자들은 포클레인이 땅을 파는 일반적인 차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자동차 회사가 붙인 고유명사라는 것을 아시는가? 정확히 말하면 이 차는 굴삭기라 불러야 한다. 굴삭기라는 이름 자체는 아무 하자 없는 보통명사 아닌가? 그런데도 포클레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워낙 그 차가 대박을 터뜨려서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굴삭기에는 포클레인이라는 차밖에는 없는 것이 된다(이 외에 선글라스를 ‘라이방(ray ban)’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라이방도 제품의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독교 성서를 아무 다른 수식어 없이 성경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종교 경전에는 기독교 성서밖에 없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혹은 기독교 성서야말로 다른 종교 경전을 훨씬 능가하는, 혹은 차원이 다른 최고의 경전이라는 뜻도 된다. 이런 까닭에 영미권에서는 기독교 성서를 ‘디 북(The Book)’이라고 부른다. 유일한 책이라는 뜻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기독교 성서야말로 다른 어떤 책보다, 아니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의미를 가진 책으로 되어 있다. 다른 책들은 이 책 앞에 오면 색이 다 바래진다. 이러한 상황은 서양에서라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기독교는 그들의 전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 성서를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물론 신자들이 이렇게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정확히 하려면 사실은 ‘기독경’이라고 해야 한다. 왜 다른 종교의 경전은, 불교의 경우는 불경이라 하고 유교의 경우는 논어라는 고유명사로 부르면서-불경도 ‘불교의 경전’이라는 뜻이니 고유명사적인 표현이다-기독교 경전만 성경이라는 보통명사를 쓸까? 이런 까닭에 종교학에서는 성경과 같이 특정 종교에 치우친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종교학에서는 BC나 AD처럼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나눈 시간의 구분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BCE 혹은 ACE라는 용어를 쓴다. BCE란 Before Common Era의 약자이고 ACE는 After Common Era의 약자이다. 말뜻은 있는 그대로 “공통 시대 이전”과 “공통 시대 이후”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적인 것을 왜 이다지도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할까?
이런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아무 생각 없이 성탄절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예수님의 생일을 부를 때 성탄절이라는 보통명사를 쓰는 것은 예수는 성인 중에 가장 출중하신 분이든지 아니면 유일한 성인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것은 누가 들어도-기독교 신자들 빼고-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성인들은 숱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은 예수님 생일도 성탄절이 아니라 ‘기독탄일’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이 단어가 매우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을 테지만 부처님의 생일은 ‘불탄일’이라고 불러도 하나도 안 이상한데 기독탄일이 이상하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야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성인들의 생일 가운데 이 날이 가장 먼저 휴일로 지정된 것도 사실 이상한 일이다. 해방되고 곧 휴일로 지정되었는데 당시 기독교의 교세로 보면 그렇게 쉽게 휴일 지정된 게 이해가 잘 안 된다. 우리 문화에 영향 끼친 정도로 보면 불타나 공자의 생일이 먼저 휴일로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풍문에 의하면 해방 뒤 미군정 시절에 미군정 당국에서 일방적으로 크리스마스부터 공휴일로 정했다고 한다.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렇게 보면 우리가 얼마나 미국에 경도되어서 모든 것을 미국의 시각으로 보는가를 알 수 있다. 기독교는 분명 훌륭한 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보편 종교라 할 수는 없다. 이 세상에 보편 종교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비판 없이 기독교나 서양 문명을 보편적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 하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종교야 무슨 종교를 갖든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할 테지만 어떤 종교가 들어올 때 보통은 그 종교를 신앙한 사람들의 문화도 같이 들어온다. 따라서 한국인이 기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2~3천 년이나 지속되었던 서양의 문화를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는 비록 이스라엘이라는 동양에서 발생한 종교이지만 기본적으로 서양에서 발달된 종교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서양적인 세계관이 물씬 녹아 있다. 아니 서양적 세계관 그 자체로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독교는 서양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니 기독교 신자가 되면 아무래도 서양적으로 사고하고 그것에 가깝게 가려고 애를 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신자가 많이 늘어나게 된 것은 70년대부터였다. 해방된 뒤나 6. 25 직후에는 먹고살기도 바쁜 때라 종교에 그다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금 한숨을 돌리자 그 당시 우리의 모든 것이었던 미국에 정치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종속되는 정도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미국이 그네들의 문화를 우리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단계였다면 그 뒤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스스로 미국화하기 시작한다. 이걸 어려운 말로는 ‘식민문화의 내재화’라고 하든가? 이런 패턴은 피식민국가들 사이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식민국가가 자기들 문화를 처음에 조금 심어주면 그 다음부터는 피식민지 백성들이 알아서 그것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자기 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제국주의에 관해 우리 시대의 최고의 기인 중에 한 사람인 도올 김용옥은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써서 설명했다. 그가 든 비유를 내 식으로 버전 업(version up)해서 한 번 보자. 우선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초강대국이라고 설정하자. 인간은 무명(無明)의 존재라 항상 별 이유 없이 남을 지배하려 든다. 지금 미국도 공연히 세계의 경찰임을 자임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려 드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냥 가만있어도 사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는데 공연히 세력을 넓히려고 한다. 다 허세인 데도 말이다. 어떻든 초강대국인 한국이 작은 이유로 어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를 지배하려고 획책을 했다고 하자. 이제는 19세기처럼 대놓고 군사적으로 침공해서 식민지 국가를 만들 수 없다. 인류의 지성이 ‘고만큼은’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남을 지배하겠다는 무명의 욕망이 없어진 건 아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물론 정치․경제적으로 속국을 만드는 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그것과 더불어 정신적인 속국을 만드는 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문화를 보이지 않게 그 나라에 이식해야 한다. 우선 그 아프리카 나라의 젊은 친구들을 우리나라에 데려와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 장학금도 후하게 주어서 오기 쉽게 해야 한다. 그러면 이 친구들은 대부분 극친한파(極親韓派)가 된다. 이 친구들은 공부가 끝난 뒤 본국으로 돌아가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데에 앞장설 것이다. 이런 노력이 몇십 년이고 지속된 결과 그 나라 사람, 즉 흑인들은 일상생활에서도 한글을 밥먹듯 사용한다. 옷도 아프리카의 전통의상을 다 버리고 전부 한복만 입고 산다.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전통 음식 다 버리고 쌀밥에 된장찌개, 김치, 불고기 먹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안다. 집도 죄다 한옥으로 바뀌고 온돌에 이불을 깔고 산다. 일상생활이 완전히 한국식으로 바뀐 것이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새까만 흑인들이 한복으로 입고 쌀밥을 먹으면서 한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말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의 정신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종교를 수출해야 한다. 이때 우리의 종교는 단군교가 되어야 한다. 정부의 지원을 받든 안 받든 우리나라의 단군교 선교사들이 대거 그 나라에 파견된다. 가서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준다. 당연히 단군교 교회가 서서히 늘어나고 신자도 늘어난다. 이 백성들의 종교심이 대단해서 그네들이 몇천 년을 두고 신행해 오던 토속종교는 다 버리고 단군교 교회로만 몰려든다. 단군교 신자가 되어야 한국으로도 쉽게 갈 수 있고 그 사회에서도 지성인 대접을 받는다. 이러다 보니 단군교 교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세계에서 제일 큰 단군교 성전이 그 나라에 세워지고 한 집 건너 단군교 교회가 들어섰다. 초대 대통령은 억지로 단군교 신자를 세웠다가 그 뒤로 여의치 못했는데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단군교 신자들이 대통령을 했고 야당 총재이면서 유력한 차기 대통령감도 단군교 신자이다. 우리나라가 단군교를 전 세계에 심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건만 이 나라에서만큼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 우리나라와 크든 작든 관계를 맺고 있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중에 단군교 성직자나 신자가 이렇게 많은 나라가 없고 게다가 단군교 신자가 대통령을 하는 나라는 이 나라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과학적인 방식으로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든지 하는 단군교의 신화를 믿지 않아 급속하게 단군교를 떠나고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단군교 성전(聖典)을 곧이곧대로 믿고 실천하려는 사람이 나이에 관계없이 많다. 이 나라에서는 단군이 재림한다면 한국이 아니라 자기들 나라에 와야 된다고 공공연히 말하곤 한다.
자, 비유는 이 정도에서 그치자. 원래 것에 내 생각을 많이 보탰는데 그렇다고 원래 비유의 취지가 변한 것은 없다. 나는 도올의 이 비유를 읽고 그 절묘함에 감탄했는데 위에 열거한 비유를 읽은 독자들도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아니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한 나라를 이렇게 종속시킬 수 있을까? 이런 건 가상의 이야기이지 결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면서 부르짖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 아닌가? 단군교를 기독교로 바꾸고 우리나라를 미국으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를 한국으로 바꾸면 정말 그대로의 현실 아닌가? 물론 종교에는 저런 제국주의적인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경향이 그러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게다.
도올은 더 나아가서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서 극성으로 부리면서 마구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소련이나 중국,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남한의 군사독재 정권들을 비호하고 지원했지만 동시에 독재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기독교 세력을 또 지원했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은 내버려두면 자칫 반미로 갈 수 있으니 길들이기 위해 다른 세력이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기독교 세력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독재정권에 대항해 싸운 사람들이 초기에는 거의 기독교인들뿐이었고 김대중이나 김지하와 같은 반정부 인사들이 마지막 의지처로 삼은 곳은 기독교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얼마간의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미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독교를 지원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기독교화 정책은 계속 가속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기독교가 치성한 나라가 되었다. 이제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남은 일은 무엇일까? 보다 더 주체적인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 아닐까?
(본 원고는 졸저 『콜라독립을 넘어서』(사계절, 2002)에서 발췌한 것을 수정한 것이다.)
최준식
-미국 Temple대 수료. 종교학 박사
-저서 한국종교이야기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등 다수
-현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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