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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특집>미국의 전횡적 힘의 논리를 전복시키는 우리 소설/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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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2,470회 작성일 04-01-2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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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횡적 힘의 논리를 전복시키는 우리 소설

고 명 철
(문학평론가)



굿모닝 웰컴. 식사 전에 환담을 나누시지요. 커피와 함께 여송연도 피우시구요. 국제어로 말씀하시고, 오케이 오우케이 무조건 고개를 주억거리십시오. 아시다시피 자유란 내 손으로 욕심껏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손에 조금씩 동정받는 것이라고 당신이 고집하여 믿으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도 변함없이 당신의 신념을 지키십시오. 자랑스럽게도 우리사인 백년지기가 아닙니까? 항상 당신의 동족을 경계하시고, 그 누가 보거나 말거나 내 집에 오시면 지극히 비굴하게 웃어도 괜찮습니다. 아무나 함부로 이곳에 초대되는 것이 아니니까, 당신을 특별히 선택되셨습니다. (중략) 언제라도 좋으니까, 말 못 할 사정이 있으실 때는 개 죽는소리로 신호를 보내시지요. 끼잉낑낑 끼잉낑낑. 당신의 헌신적인 친미주의가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영원히 지켜줄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땡큐 때앵큐.
―양성우의 시 「당신의 친미주의」 중에서

1. 반전․평화의 염원을 담은 소설 읽기
또다시 세계는 막강한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평화의 덕목과 가치는 그 막강한 힘을 소유한 자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제멋대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지구촌 각 나라의 안방으로 속속들이 실시간 송출된 이라크전쟁을 지켜보면서,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씁쓸히 확인한다.
이라크가 지구촌 사람들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기에, 이것을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전쟁의 명분이 얼마나 설득력이 결여된 것인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세계의 양심적 시민들은 명확히 알고 있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엄밀히 말해 영국은 미국의 들러리 역할에 불과한-이번 전쟁은 온인류의 평화를 위한 전쟁이 결코 아닐 뿐만 아니라 이라크 민중의 평화를 위한 것도 결코 아닌바,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입장을 힘의 논리로 관철시킨 ‘야만의 전쟁’에 불과하다는 점을. 과연, 누구의 평화를 위한 전쟁인가? 아랍의 사막에 엄청난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전쟁의 포연 속에서 평화의 덕목과 가치란 존재하는가?
이라크의 시인 둔야 미카일이, 전쟁은 “하늘에/미사일과 폭탄을 쏘아올려/아이들의 마음에/더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고/신을 생각하게 한다.”(「전쟁은 힘들어」)라고 노래하듯, 미국에 의한 이 ‘야만의 전쟁’은 인류의 상식과 양심을 무참히 짓밟은 폭력과 살욕의 광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때문에 인류의 양심적 시민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반전․평화를 위해 거리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지구상에 ‘야만의 전쟁’의 얼굴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는 평화를 향한 세계시민의 의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전․평화 시위에서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이라크전쟁의 한복판인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는 물론,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의 곳곳에서 반전․평화를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비록 한반도와 멀리 떨어진 중동에서 벌어진 전쟁이지만, 이번 전쟁이 다름 아니라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전쟁이라는 점은, 미국과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한반도의 시민의 삶과 전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이라크 못지않은 세계의 관심 속에서 펼치는 반전․평화 운동이 지닌 가치는 실로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는, 특정한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평화의 가치가 독점될 수 없고, 또한 그 가치가 굴절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살상시키는 전쟁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허용할 수 없고, 서로 다른 문명과 문화가 상호 공존하는 가운데 진정한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세계시민의 의지를 실천하는 일과 밀접한 연관을 이룬다.
나는 이러한 반전․평화 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소설에서 미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읽어보기로 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소설은 1980년대 이후 쓰여진 소설을 대상으로 한다. 5.18광주민주화항쟁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은 이전보다 과학적으로 인식하게 되는바, 1980년대 이후 쓰여진 몇몇 문제작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미국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관한 작가의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야말로 중동 못지않은 미국의 세계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핵심 지역인 만큼 우리 작가들이 미국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한반도에서 작동되고 있는 미국의 패권적 양상에 주목해본다. 이것은 변화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와 미국의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하는 일이면서, 미국 일변도의 팍스아메리카나를 지향하는 세계의 질서에 대한 전복적 비평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2. 미국의 제국주의적 광폭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
6.25전쟁 이후 정치․군사․경제․문화 부문에서 미국에 대한 한국의 종속성을 괄호 안에 넣고는 한미관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한국이 어엿한 주권을 지닌 독립한 국민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는 어찌된 일인지 식민지의 주종관계를 상기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과 체결한 대전협정(1950. 7. 15), 한미상호방위조약(1954. 11. 18 발효), 주둔군지위협정(SOFA, 1967) 등은 한반도에서의 군 작전 지휘권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단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미관계의 엄연한 현실 속에서 작가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미국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갖는 것이다. 좁게는 한반도에서, 넓게는 전세계에서 미국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관한 과학적 인식을 명료히 할 때,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맹목적 부정에 기반한 게 아니라 합리적 설득력에 토대를 둔 것으로 인식될 수 있기에 그렇다. 그 대표적 작품으로 황석영의 장편 ꡔ무기의 그늘ꡕ과 윤정모의 장편 ꡔ고삐ꡕ를 들 수 있다.
베트남전쟁을 다룬 황석영의 ꡔ무기의 그늘ꡕ은 미국의 실상을 예각적으로 묘파한다. 내가 ꡔ무기의 그늘ꡕ에서 주목하는 바는 베트남전쟁과 관련하여 미국을 인식하는 작가의 독특한 문제의식이다. 황석영은 베트남전쟁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갈등보다 미국으로 대별되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이해관계로 파악한다.

저 피의 밭에 던진 달러, 가이사의 것, 그리고 무기의 그늘 아래서 번성한 핏빛 곰팡이꽃, 달러는 세계의 돈이며 지배의 도구이다. 달러, 그것은 제국주의 질서의 선도자이며 조직가로서의 아메리카의 신분증이다. 전세계에 광범하게 펼쳐진 군대와 정치적 힘 보태기, 다국적 기업망의 그물로 거두어진 미국 자본의 기름진 영양 보태기, 지불과 신용과 예금의 중요한 국제적 매개체로 정착된 달러 보태기, 다국적 은행의 번창 등의 결합 위에 핏빛 꽃은 피어난다. 황석영, ꡔ무기의 그늘(하)ꡕ, 창작과비평사, 1992, 271면.


작가의 문제적 시각에 의하면, 베트남전쟁은 미국으로 대별되는 자본주의 팽창을 위한 전쟁이다. 소설에서 베트남의 한 의사가 내뱉은 “전쟁은 가장 냉혹한 형태의 장사” ꡔ무기의 그늘(하)ꡕ, 96면.
에 불과하다는 발언은 이를 압축적으로 제시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황석영에 의해 인식되고 있는 미국의 실상을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베트남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전세계를 향한 미국의 입장을 자본주의의 팽창과 관련시킨 과학적 인식이다. 물론 이 과학적 인식이 소설의 형상화를 통해 다각도로 탐구되지 못한 채 작가의 역사의식의 과잉이란 문제점을 낳은 것은 간과할 수 없다. 가령, ꡔ무기의 그늘ꡕ의 작중 인물인 한국군 안영규는 자본주의의 타락성이 베트남전의 실상임을 인식하는 과정 속에서 베트남 민족과 강한 연대감을 피력하거나,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정치적 투쟁의 목적을 격정적으로 진술하고 있는데 반해, 소설의 풍부한 형상성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다. 안영규가 베트남의 최전선의 소총수로 근무한 적이 있고, 최후방의 군수물자 암거래의 실태를 조사하는 역할도 맡으면서 미군, 베트남 정부군,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암시장의 상인 등과 두루 접촉하는 인물로서 베트남전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최적격의 인물임을 감안한다면, 미국에 대한 작가의 과학적 시각이 좀더 풍부한 소설적 형상화를 갖추지 못한 것은 ꡔ무기의 그늘ꡕ이 노정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는 황석영에게만 보이는 게 아니다. 윤정모의 ꡔ고삐ꡕ에서도 동일한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매춘 생활을 통해 생존을 연명해나갈 수밖에 없는 자매의 비통한 인생사를 서사의 중심 골격으로 삼아 전개되는 ꡔ고삐ꡕ는, 미국에 종속된 한국의 비틀린 역사적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해낸다. 하여 미국에 종속되어가는 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뿐만 아니라 미국의 폭압적 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반외세 문학의 기치를 내건다. 윤정모의 이러한 작업은 한반도에서 온갖 핍박과 역사적 질곡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국 여성의 뿌리뽑힌 삶의 현실에 대한 절절한 육성의 증언인바, 이처럼 씻을 수 없는 오욕의 상처를 안겨준 한반도의 제국주의적 광폭성을 증언하고, 더 나아가 한반도에서 일체의 제국주의적 흔적을 남겨놓지 않으려는 작가의 저항적 의지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윤정모의 이 같은 치열한 작가정신은 ꡔ고삐ꡕ 곳곳에서 생생히 숨쉬고 있다. 특히 동병상련의 심정을 지닌 자매가, 미국에 대한 천양지차의 입장을 보이면서 불화의 관계를 보이는 것은, 과연 미국이란 존재가 한국에서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가를 명확히 입증해준다고 할 수 있다. 자매로서 천륜이란 관계의 고삐를 쉽게 끊어버리고, 오직 미국식 자본주의의 편안한 삶을 절대가치로 간주한 나머지 한반도와 전세계에서 미국의 패권야욕에 따라 빚어진 문제에 대해서는 일부러 외면한 채 도리어 그러한 미국과 더욱 견고한 관계의 고삐를 채우려고 안간힘을 쏟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정확히 인식해야 할 미국의 실체임을 작가는 뚜렷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윤정모의 ꡔ고삐ꡕ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작가의 이 같은 미국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앞서 살펴본 황석영의 ꡔ무기의 그늘ꡕ처럼 소설적 형상화의 풍부함이 뒷받침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미국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대부분이 ‘법정 최후 진술’의 형식을 빌어 작품 전면에 드러나고 있는데, 그 진술의 치밀한 논리와 과학성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문제는 작가가 ‘법정 최후 진술’이란 담론을 선택함으로써 모순 투성이의 한미관계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증언하는 데 치중하다보니, 그토록 여러 각도로 진술된 한미관계의 맹점들이 한반도에서의 구체적 일상을 통해 어떻게 자연스레 ‘내면화’되고 있는가에 관한 소설적 형상화가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황석영과 윤정모의 장편에서는 그동안 우리 소설에서 미국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결여된 점을 극복하고 있다. 하여 한미관계를 무비판적으로 혹은 감상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한반도와 세계의 정치경제적 역학 관계 속에서 미국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려는 소설의 지평을 개척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그들의 성과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듯, 그들의 소설은 미국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소설의 형상화를 통해 갈고 다듬기보다 작중 인물의 격정적 진술과 토로, 법정 최후 진술이란 담론을 빌어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물론 그들 소설의 이러한 부분을 문제점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미국에 대한 그 어떠한 비판담론마저 봉쇄시킨 채 미국의 실체를 정부 주도하의 담론의 범주 안에서만 소통되도록 한 현실 속에서, 작중 인물을 통해 발언한 황석영과 윤정모의 미국에 대한 직설적 언어들이야말로 그 당시 시대적 제약을 견뎌내며 할 수 있는 작가들의 반외세 저항적 문학운동이었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이러한 소설은 미국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는 계몽의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지금껏 은폐되었던 미국의 정체를 똑바로 아는 것이야말로 작가들에게는 결코 소홀해서는 안 될 창작의 과제다. 미국의 실상을 정확히 인식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그동안 세계에 대한 자동화된 현실 인식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면서, 심지어 우리들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소시민 의식을 능동적으로 거부하여 좀더 나은 인간된 삶을 살고자 하는 작가의 실천적 행위다.
김인숙의 「성조기 앞에 다시 서다」와 남정현의 「핵반응: 허허선생 6」은 각각의 개별 서사는 서로 다르지만, 미국 문제를 다룰 때 이 같은 면에 주목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전자의 경우 작가는 노동자의 파업을 정면으로 다루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제3세계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미국의 경제적 부를 축적시키는 데만 혈안이 된 미국 자본가의 노회한 욕망과, 이러한 미국 자본가에 기생하여 그 이익을 분배받기 위해 노동자의 생존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한국 경영자의 파렴치한 같은 위선적 욕망의 작태다. 한국 공장에 투자했다가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한국 공장을 폐업하고 또 다시 값싼 임금으로 최대한의 사적 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제3세계로 공장을 옮기려고 하는 미국 자본가와 여기에 동조하는 한국 경영자의 현실은, 미국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중요성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미국의 실상을 한국의 노동자들은 파업의 과정을 거치면서 속속들이 알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결연히 다짐한다. 미국의 실상을 알아챈 이상, 자신들의 피와 땀이 스며든 삶터를 순순히 포기할 수 없으며, 자신들의 힘으로 미국 자본가와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과 맞서 싸워 노동자의 위엄을 되찾겠다고. 공장의 부품처럼 간주되곤 하던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의 신성성을 깨닫고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존귀한 존재라는 진실을 깨닫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겠다고.
그런가 하면 후자의 경우 관심 깊게 읽어야 할 것은 풍자의 태도로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신랄하게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널리 아다시피 남정현은 이미 1965년도에 발표한 장편 ꡔ분지ꡕ에서 미국을 조롱하고 비판함으로써 필화사건에 휘말린 경험을 한 작가로서 시종일관 풍자적 소설을 통해 미국의 실상을 유감없이 신랄히 비판한다. 「핵반응 : 허허선생 6」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 소설에서는 한반도에 미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데 대한 한국의 정재계 관료와 미국과 일본의 관료가 보인 반응을 대단히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풍자는 작중 인물 허허선생의 아들의 시선에 의해 포착되는바, “아니 나의 부친과 같은 그런 어이없는 인간을 신주 모시듯 떠받들어 주는 우리의 이 현실이란 것이 무슨 뿔 돋힌 유령이 아닌가 해서 문득문득 깜짝 놀라곤 하는 것이었다” 남정현, 「핵반응: 허허선생 6」, ꡔ허허선생 옷벗을라ꡕ, 동광출판사, 1993, 147면.
라고 하는 대목에서 단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친일파로서, 8.15광복 이후에는 친미파로서 기회주의적 삶을 살아간 아버지가 세계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을 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위선과 위악은 이렇다할 역사적 심판도 받지 않은 채 오히려 험난한 현실에서 카멜레온처럼 잘 적응하여 살아간, 성공한 인생으로 사회에서 버젓이 대접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비현실이다. 무엇보다 한반도에 미국의 핵이 존재함으로써 아버지와 같은 기회주의적 기득권층의 안녕을 지킬 수 있다는, 이 언어도단이야말로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비현실이다. 그런데도 이 같은 비현실이 현실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다. 남정현은 바로 이러한 현실과 비현실이 전도된 상황을 조롱하고 풍자한다. 즉 남정현의 풍자는 한반도의 핵무기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의 지배 질서를 지탱시키기 위한 것에 대한 현실을 직시하는 냉소이면서, 차마 이 웃지 못 할 황당무계한 현실이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작가의 비판정신이 동반된 지적인 웃음이라 할 수 있다.

3. 미국에 대한 한국의 종속적 현실
한반도에서 한국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에 따라 야기된 문제는 주한미군으로부터 비롯된 문제와 뗄레야 뗄 수 없다. 작가들에게 주한미군은 미국과 동등한 존재로 이해되는바, 주한미군과 관련된 크고 작은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한반도에서 미국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형상적 사유를 드러내기에 적합하다.
박병례의 「황구지천」은 이러한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가 「황구지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작중 인물 영숙의 불행이다. 돼지 파동으로 인해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이 된 영숙은 황구지리 마을 근처 미군부대의 미군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정신적 충격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하여 미군에 겁탈을 당한 이후 영숙은 미군에 대한 살의와 증오의 감정을 품는다. 그러던 도중 장마철을 맞이하여 우려되던 황구지천이 범람하면서 영숙과 마을 사람들 몇몇은 마을 회관으로 피신하여 미군 헬기의 구원을 받으려 한다. 그런데 영숙은 미군의 도움을 거부한 채 불어난 물에 자신의 생명을 던져버린다. 미군으로부터 영혼과 육체를 짓밟힌 영숙은 미군에게 구차스럽게 자신의 생명을 구원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영숙의 죽음을 향한 비장한 결단은 미군에게 입은 치욕스런 정신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 미군으로부터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그 상처가 온전히 치유되지도 않은 채 미군의 알량한 도움을 받아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 자신의 서글픈 숙명을 영숙은 과감히 거부한 것이다. 기실 영숙의 죽음과 황구지리 마을의 수장(水葬)과는 무관하게 미군 부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불야성을 보이는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비되는 이 장면이야말로 한반도에서 미군으로 표상되는 미국의 면모를 압축적으로 형상화해낸다.

광폭한 물줄기는 어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황구지리를 무섭게 흘러 들어왔다. 하지만 그 위 부대는 도깨비 소굴처럼 온갖 불빛들이 난장을 벌이며 아래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병례, 「황구지천」, ꡔ쑥 캐는 불장이 딸ꡕ, 실천문학사, 2001, 59-60면.


이렇듯 ‘주한미군=미국’에게 관심 있는 것은 자신의 안녕과 즐거움이지 한반도의 민중이 겪는 고통과 함께 하려는 게 결코 아님을 작가는 보여준다.
미군의 이러한 면모는 강영의 「원더풀 패밀리」에서도 형상화되고 있다. 미군 기지내의 병원에서 몰래 버려지는 페놀이 우리의 식수원을 오염시키는데, 미군은 그럴듯한 핑계로 이처럼 우리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을 무마하려고 한다. 미군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환경 오염을 방지하는 게 아니라 미군 부대의 원활한 운영을 하는 과정에 눈엣 가시로 간주되는 시민사회단체의 움직임을 저지하려는 데 있다. 미군에게 한반도는 그들의 미군 기지를 위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일 따름이지, 한국인을 위해 훼손되어서는 안 될 영토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주한미군=미국’에게 한반도는 자신의 국익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할 치외법권 지역의 신성불가침의 장소일 따름이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이러한 인식은 비단 미군의 군사적 문제로서만 협소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윤정모의 「빛」에서는 한반도가 미국의 경제적 침탈의 대상임과 아울러 주한미군과 함께 하는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도중에 벌어진 반인륜적 범죄 행위에 초점을 둠으로써 한반도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 문제를 첨예히 제기하고 있다.
윤정모가 「빛」에서 겨냥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우리의 농축산 시장을 위협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음험함에 대한 고발이고, 다른 하나는 주한미군과 함께 실시된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도중에 자행된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증언과 저항이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는 작가에 의해 별개로 파악되지 않는다. 미국의 값싼 농축산물을 국내 시장에 유통시켜 우리의 모든 먹거리 시장을 장악하려는 미국 자본주의의 전횡적 지배에 따른 농민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과,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벌인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도중에 우리의 어린애를 성욕의 대상으로 삼아 어린애와 그 가족에게 분노와 슬픔을 안겨다준 것은, 미국에 종속된 한반도의 문제를 극명하게 제기한다. 즉 우리 농축산 시장이 미국 자본주의에 예속해 들어가는 것과, 미국의 동북아 전략 구도에 따라 한반도가 미군의 군사훈련장이 돼가는 것은, 한미관계의 불평등과 그에 따른 문제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작가의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연유한다. 그래서인지 작중 인물들이 나눈 다음의 대화는 지금, 이곳 한미관계의 한 본질을 적확히 꿰뚫고 있으며,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어떠한 대응을 펼쳐야 하는가를 숙고하게 만든다.

“이 마을에 다시 훈련군이 들어오면 누님, 지들이 삽자루 들고 막겄시우. 할복을 허더라두 이 마을 지키겄슈. 이번(군인에 의한 어린애의 성폭행-인용자)만은 없었던 걸루…….”
“어떻게 없었던 일이 되니? 사내들은 다 그렇게 간편한 거니, 엉?”
누님의 눈에 독기가 번들거린다. 그럼에도 참담하게 일그러진 누님의 얼굴은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중략)
“이건 양놈 들러리 훈련이유. 그 병장도 그래서…….”
“그걸 알면 싸우든가 거부할 것이지, 왜 훈련은 나와? 왜?”
“그럼 누님은 어땠남유? 이런 훈련 없애라고 대놓고 항의하거나 따져본 적 있남유?”
그는 자신도 생각지 못하던 말을 울컥 내뱉고 만다.
“뭐, 뭐라구?”
누님의 입술애 딱 굳어진다. 이왕 뱉은 말, 그는 계속한다.
“용서하셔야 혀유, 누님. 그 작자나 우리나 모두가 똑같이 양놈들 들러리나 서고 사는 불쌍한 백성들이여유.” 윤정모, 「빛」, ꡔ빛ꡕ, 열림원, 1989, 57-58면.


작중 인물 이만의 주장은 누님의 어린 딸을 성폭행한 한국군 병사를 무책임하게 놔두자는 게 결코 아니다. 이만은 다소 직설적이지만, 그러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한국군이 미군 주도의 군사훈련에 참여해야 하는 한미관계의 불평등한 모순을 예각적으로 직시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럴 때 한국군 병사의 성폭행은 한국군 병사의 개인적 차원에서 파악되는 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한미관계의 사회구조적 모순 속에서 총체적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이러한 반인륜적 작태가 또 다시 반복될 수 없도록 근본적 방안을 강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작가의 염원을 간과할 수 없다.

4. 일상으로 침전된 ‘아메리카 드림’의 허구성
미국과 관련된 소설을 검토하면서 꼭 짚고 넘어갈 부분은 우리의 일상성 깊숙이 침전돼 있는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이다. 이미 앞서 한미관계의 불평등 속에서 정치․군사․경제․문화 부문에서 한국의 대미 종속성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살펴보았는데, 정작 우리가 심각히 받아들여야 할 것은, 어느덧 우리의 일상이 미국적 일상과 혼효되는 가운데, 미국과 우리는 다를 바 없다는 맹목적 관계가 고착됨으로써 우리 내부에서 싹튼 미국적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동일시로 인해 우리 일상성 속에 숨어 있는 미국 본래의 입장을 몰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작가들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김지우의 「해피 버쓰데이 투유」와 정도상의 「아메리카 드림」은 이와 같은 점에 주목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들의 작품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두 작품에서 공통적 맥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미국적 삶을 동경하는 이른바 아메리카 드림의 보잘것없는 허구성이다. 이 허구성의 마력에 우리사회가 도취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는 게 김지우와 정도상이 해결하고자 하는 소설적 과제다. 다소 길지만 작가의 문제의식이 드러나 있는 다음과 같은 두 부분을 읽어본다.

후배 교사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호기심을 표시하며 방법이며 비용을 물어보기도 했다. 들뜬 기분에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충분한 도움이 될 만한 정보와 노하우를 제공했다.
그들은 흥분하며 감탄했고, 소용되는 비용이 한화로 2500만 원 정도라는 말에 잠시 풀이 죽었으나 곧 다시 서로에게 격려와 분발을 촉구하며 깔깔댔다.
“아이의 평생을 좌우하는 일인데 그만한 돈쯤은 각오해야지뭐. 안 그래?”
“맞아 맞아. 미국 시민권만 있어봐라. 어디 가서 무슨 짓을 못하겠어? 아니할 말로 미국 사람인데 감히 누가 건드려? 왜 우리 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 봤잖아? 얼마나 대단해? 우리나라 같으면 그깟 일병 하나 구하자고 그러고 나서겠어? 미국이나 되니까 그러지. 하여간 대단한 나라야.”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긴데, 요새 부시 대통령 하는 말 들어보면 딱 전쟁 날 부분위기잖아. 미국만 맘먹으면 그날로 전쟁 아냐? 그지? 그렇지? 전쟁이야 미국 맘이잖아. 그럼 이라크 다음에 북한 아니겠어? 그럴 때 그것 하나만 있음, 그렇지, 바로 미국으로 도망가버리는 거지.”
“정말! 그렇게도 쓰겠네!”
“그러니까 이 선생님이 먼저 가셔서 터 잘 잡아놓고 오세요. 저희도 그 연줄 좀 이용하게요. 아는 사람 좋다는 게 뭐겠어요?” 김지우, 「해피 버쓰데이 투유」, 고은 외, ꡔ전쟁은 신을 생각하게 한다ꡕ, 화남, 2003, 416-417면.


두 꼬마가 놀이터에서 앞마당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걸 보면서 종석은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노란 개나리가 담장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걸 보면서 쓸쓸해지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고 아름다운 꽃처럼 각기 자기의 부모에게 어리광을 피우며 자라야 할 어린애들을 바라보노라면 가슴 속엔 분노와 함께 이상한 자괴심이 가득 차 스스로도 견뎌낼 수 없었다. 복지나 후원, 사랑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젠 사업으로 변화하는 성애원이나 콜트 아동복지회의 아이 수출, 한명당 오천 달러의 협정 가격이 매겨진 아이들. 아이 한명을 수출할 때마다 이 일을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쉬 놓지 못하는 자신의 허약함이 미웠다. 한때의 불장난으로 아버지 없이 어린 엄마에게서 태어나 버림받고, 이번엔 두번째로 자신의 조국으로부터도 버림받아야 하는 잔인한 사업인 줄도 모르고 마냥 즐거워하는 아이들에게 지은 죄를 어떻게 해야 하나. 벌써 성애원에서도 콜트를 통하여 해외 입양, 아니 수출을 해버린 아이가 꽤 많아지고 있었다.
“오우 한국의 아기들은 고급 상품입니다.”
지난 번 콜트에 들렀을 때 미국의 입양 알선기관에서 사업차 온 미국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성애원에 근무하는 자신의 입장으로서는 한 아이에게라도 부모를 갖게 해준다는 사실에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분명한데 고급 상품이라고 말하는 입양 알선기관의 그 사람들은 영락없는 장사꾼이었다. 정도상, 「아메리카 드림」, ꡔ아메리카 드림ꡕ, 인동, 1990, 349면.


「해피 버쓰데이 투유」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의 시사 문제로 곧잘 취급되곤 하는 미국 원정 출산을 다룬다. 위 인용문을 통해 읽을 수 있듯, 큰 비용을 치르면서까지 미국에서 출산을 하려는 목적은 미국 시민권을 손쉽게 획득함으로써 한반도의 분단체제로부터 빚어진 위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안녕과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개인의 천박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데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천박한 욕망을 교사가 품고 있다는 점이다. 제도권 교육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가 왜곡된 한미관계를 바로 잡기보다 자신이 도리어 그러한 뒤틀린 한미관계를 더욱 견고히 고착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곳 우리 사회가 직면한 미국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잘못을 이 땅의 모든 교사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해서는 결코 안 될 터이다. 다만 작가가 하필이면 무엇 때문에 미국 원정 출산과 관련된 사회적 현안을 교사와 관련시키고 있는지, 그 의도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다소 선정적이고 설득력이 떨어질지 모르나, 그만큼 우리 사회의 미국에 대한 동경이 한반도의 현실을 우리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 해결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미국 시민으로 편입됨으로써 한반도의 사회구조적 모순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뒤틀린 현실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비판적 성찰에 연유한다. 교사들의 이런 생각이 일상의 농담 속에 아무렇지나 않게 자연스레 표출되고 있다는 점은 얼마나 미국 시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사정이 이럴진대, 정도상의 「아메리카 드림」의 인용된 부분에서 충격으로 전해오는 해외 입양아와 관련된 문제 역시 이만저만한 사회적 현안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 십대 미혼모에 의해 입양 기관으로 보내진 우리의 어린애들은 부모를 찾아 해외로 입양되는 길을 밟는데, 인간이란 인격체로 여겨지는 게 아니라 ‘고급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인도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해외 입양의 실체가 어린애를 외국으로 수출하는 차원으로 인식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해외 입양에 대한 무관심이 어떻게 변질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점이다. 그런데 정도상은 이렇게 해외 입양된 어린애에게 닥친 비극의 실상 중 한 단면을 가히 충격적으로 고발한다. 조국의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어린애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새로운 가정 환경에서 행복을 추구하기는커녕 그 어린애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고급 상품’에 지나지 않은 채 심장병을 앓고 있는 미국 어린애의 심장 이식 수술용으로 팔린 데 불과하다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을 소설화한다. 말하자면 미국으로 입양된 어린애는 미국의 어린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미국으로 수출된 인간 장기였던 셈이다. 해외 입양은 듣기 좋은 미사여구로 포장된 것일 뿐, 생명을 수출하기 위한 제도적 절차에 불과할 따름이다.

의사는 영수의 흉선을 따라 넓게 쨌다. 갈비뼈를 벌리고는 조심스럽게 심장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복잡하고 힘든 대수술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의사는 영수의 몸에서 건강한 심장을 떼어내 스미스의 몸에다 이식했다.
스미스의 심장은 버려졌다.
그리고 심장 없는 영수의 몸도 쓰레기처럼 검은 비닐봉투 속에 버려졌다. 정도상, 「아메리카 드림」, 362면.


위 인용문은 「아메리카 드림」의 마지막 부분이다. 미국 원정 출산을 통해 미국 시민권을 얻고자 그토록 애쓰는 바로 그곳은, 오직 미국 시민만을 위한 논리가 작동되고 있는 곳이다. 미국인의 권익과 생명 보호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미국의 가공할 만한 이 엽기적 행태야말로 아메리카 드림의 허구성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하게 만드는 ‘비현실적 현실’이다.
사실 미국인의 권익과 생명 보호를 최우선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태도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미국 비자를 발급하는 데 따른 미국의 까다로운 절차는 이러한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윤정모의 「손떠퀴」와 박완서의 「J-1비자」는 이것과 결부된 일상을 다루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미국 방문 비자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겪는 미국의 상징폭력을 문제삼는다. 그것은 미국이 비자를 아무에게나 발급하지 않으며, 설령 발급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미국에 대한 종속적 관계를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제도적 폭력을 가리킨다. 가령, 미국에 유학간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 방문 비자를 신청하였으나,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남편 마저 미국에 들어간다면 온가족이 미국에 체류하게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비자 발급을 거부하는 경우와(「손떠퀴」), 미국 대학의 초청을 받아 ‘J-1비자’를 신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사무적 절차로 인해 ‘J-1비자’의 발급을 거부하며 무엇보다 미국에 들어가 취업을 할 수 있기에 비자 발급을 거부하는 경우(「J-1비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한국을 향한 미국의 고압적 자세와 미국 비자 발급의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미국의 제도적 폭력을 목격한다. 미국이 관심을 갖는 것은 미국을 방문하는 본래 목적이 아니라 행여나 미국의 이익을 앗아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자칭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은 이처럼 자신의 평화와 이익만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의 일상에 상징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윤정모와 박완서는 정당한 문제를 제기하며, 백주대낮에 부당하게 자행되는 상징폭력과 정면으로 맞선다.

그때 그는 목구멍에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여권을 던질 때 그 백인에게 꼭 들려줬어야 했던 말이었다.
“이제 당신 차례요. 당신이야말로 당신 나라로 돌아가시오. 여긴 내 나라 내 땅이오, 당신이 우리 민족에게 명령하거나 호통칠 하등의 권한이 없는 바로 우리 땅이오, 어서 돌아가시오!” 윤정모, 「손떠퀴」, ꡔ빛ꡕ, 252면.


우리는 미국정부의 한국 문화인사에 대한 무례와 부주의에 대해 분노하는 바입니다.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절차상의 지연에 덧붙여서 이창구씨는 J-1 비자를 신청하는 무슨 다른 동기가 있지 않나 의심하는 듯한 질문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태도를 취한 직원은, 그 비자는 취업이 허용된 비자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직업을 구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내린 듯합니다. 일반 한국 국민을 대하는 고압적인 태도 그대로 이창구 씨를 대했으며, 한국의 문화인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중략) 이 에피소드는 대중의 토론거리가 될 것이고 한국 지성인들을 분노하게 하는 소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되는 것을 막는 첫걸음으로서 우리는 이창구 씨에게 해명을 해주실 것을 바라며 그가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공식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완서, 「J-1 비자」, ꡔ너무도 쓸쓸한 당신ꡕ, 창작과비평사, 1995, 295-296면.


5. 온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위한 ‘반미(反美)’
나는 미국과 관련된 소설을 검토하면서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허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미국이 정식으로 외교적 관계를 맺은 지 100여 년이 흐른 현재, 과연 한미관계는 과거와 달라진 전향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선뜻 수긍할 수 없다. 한반도는 나날이 세계 열강의 첨예한 이해관계 속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미국의 동북아에 대한 전략이 가로놓여 있기에 그렇다. 지난 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두 여중생의 죽음으로 촉발된 반미시위는, ‘촛불시위’란 평화적 집회를 통해 양심적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한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항간에서 우려하는 ‘반미(反美)’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읽어보았듯이, ‘반미’ 담론의 핵심은 한미관계의 불평등 속에서 자행된 한국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바로 잡음으로써 한국의 독립된 국민국가로서의 주체성을 복원하자는 것이지, 미국이 우리와 같은 약소 민족국가에게 행한 것처럼 어떤 부당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미국이란 타자를 전적으로 배제․축출시키고자 하는 데 궁극의 목적을 두는 게 아니다. 또한 극우보수주의자들의 허황된 주장처럼 미국으로 표상되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공산주의를 신봉하자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그보다는 미국 일방적으로 재편되는 세계 질서의 파시즘적 전횡을 경계하고, 전세계의 개별 국민국가들이 상호주관적 입장에서 온 인류의 평화를 진정으로 도모하자는 차원에서 ‘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실상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미국이 강요하는 평화와 자유민주주의가 정녕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정말 온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정착시키려고 하는지, 깨어있는 자세로써 투명하게 미국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시인 박영근이 노래한 것처럼 “진달래 삼천리/반공으로 치고 자본으로 밀고/허리마저 자르고/반쪽 강산에 우뚝 섰구나/람보 아메리카/꼴리면 악수도 잘하고/밀가루도 던져주지만/화나면 무차별로 총을 돌리는 나라/아메리카”(「아메리카」)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기반한 우리의 분단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의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감히 어떤 욕망을 품는다. 20세기 냉전체제의 역사적 비극을 경험한 한반도에서 보란듯이 인류의 새로운 전망을 담지해낼 삶의 양식이 창출될 수 있기를. 미국이란 힘의 논리에서 강요되는 자본주의의 전횡적 삶의 양식이 아니라 온 인류가 공생 공존하는 평화의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차별’이 아닌 ‘차이’를 존중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창출될 수 있기를. 점점 불모화되는 소설지평에서 이러한 소설적 과제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달라고 작가들에게 바란다면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미국과 관련된 또 다른 접근을 보이고 있는 소설에 대한 기대를 가지면서 이 글을 맺는다.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및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평론집 ꡔ‘쓰다’의 정치학ꡕ ꡔ비평의 잉걸불ꡕ 등
․광운대 겸임교수

추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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