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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젊은시인조명/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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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183회 작성일 04-01-2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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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웅 신작시



초저녁별 외 8편



들판을 헤매던 양치기가
하룻밤을 세우려고
산중턱에서 피우는 모닥불처럼
퇴근길 주머니에 국밥 한 그릇 값밖에 없는
지게꾼이 찾아갈 주막처럼
일찍이 인생이 쓸쓸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창문을 열어놓고
뻐끔뻐끔
혼자 담배를 피우는
저 별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서



언젠가 한번 와 본 적이 있다
깊고도 환한 몸 속
달빛이 스미는 순간
아아 가쁜 호흡과 함께 터지는 사랑에
내 영혼 뜨거웠던 적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꿀벌이 꽃잎 속으로 들어가듯이
아득하고도 먼
향기 속에 얼굴을 묻는 순간
오오 그 속에서 연애하는
젊었을 적 아버지와 어머니
창문 밖에 연등을 걸어놓고
환한 꽃그늘
깊어가던 사랑과 뜨거움에
화들짝 열리던
그 분홍 치마 속.




햇빛이 지나갈 때



햇빛이 각도를 바꿀 때마다 늑골이 아팠다
온몸 구석구석 감추어져 있던
추억 같은 것들이 슬픔 같은 것들이
눈이 부셨나보다 부끄러웠나보다

접혀져 있던 세월의 갈피갈피들이
어느 날 불쑥 펼쳐져
마치 버려두고 왔던 아이가 커서 찾아온 것처럼
와락 달려들 때가 있다

문득 돌쩌귀를 들추었을 때
거기 살아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지나간 모든 것들은 멈춘 것이 아니라
남겨진 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물지 않고 살아있는 생채기로
시린 바람이 지나가듯이 자꾸 옆구리가 결렸다
기억의 갈피갈피 햇빛이 지나갈 때
남겨진 삶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봄 무사



햇빛을 조심하렴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눈부시니까 아프니까
내리쬐는 햇빛에 그만
견뎠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니까
쨍 하고
깨져버리니까




적막강산



다 살지 못하고 간 모든 것들은
세상에 적막으로 남는다
매미들이 뚝
숨을 끊은 자리
돌진하던 넝쿨들이 그만
멈춘 자리
사랑해라고 말했던 자리
못을 뽑아놓은 것처럼
흔적만 남아있는 자리
너무나 커서
너무도 적막한,
살다 만 그 자리




허공 속 풍경



처마밑으로 제비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허리둘레가 넓은 아버지처럼 든든해 보이던
장독대 항아리들과
병정 같은 펌프가 우뚝 서있던 마당
툇마루에 모이던 햇빛이 담장을 지나
지붕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할머니는 아깝다며
소쿠리에 굴비 몇 두릅을 더 얹으셨다
햇빛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남은 생이 아까웠던 할머니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반지르르 닦아놓으시던 경대 위로
세월이 비껴가는 줄만 알았다
돌아보면 햇빛이 거두어가 버린 집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집
어른거리는 골목길 너머 장독대 너머
할머니는 아버지는 모두 허공을 살다간 것이었을까
제비들이 처마밑으로 물고 오던
씨줄의 공간과 날줄의 시간들이
잡히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있는
저 허공 속




하현달



하늘에도 툇마루가 있었구나
월급봉투 여기저기 쪼개주고
이번 달 어떻게 살까 근심에
방문 열고 나와 걸터앉은 어머니처럼
이마에 손등을 얹고
저 달의 인생도
쪽마루에 앉아 살아가야 할 날들
걱정하고 있구나




목련꽃 지는 자리



밤새 큰누나가 뒤척이던 흔적
흐트러진 이불처럼
어지러워라
한 번도 서로 만나보지 못한
늦은 외사랑이 지는 자리
미색의 그리움들이 그만
후드득
하혈처럼 쏟아지는 자리




통 화
―故 손혜경 화백께



달빛이 나뭇잎을 흔들며 마당에 내려올 때마다 바람이며 나뭇잎이며 그 빛의 입자들이 분명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요한 그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문득 우리가 사는 이곳은 공간의 버전만 다를 뿐, 서로 스치며 지나가는 둥근 회전문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오버랩 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햇빛이 꽃잎의 비밀을 열 때마다 하늘 저편에 무지개가 걸릴 때마다 질량불변의 법칙처럼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고 이곳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영혼이 더 성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아지랑이가 아닐까? 봄바람이 아닐까 이제 막 솟구쳐 오르는 새순이나 꽃봉오리가 아닐까? 햇빛으로 혹은 달빛으로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을 당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




권대웅
․1962년 서울 출생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ꡔ당나귀의 꿈ꡕ ꡔ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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