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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젊은시인조명 작품해설/김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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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그리는 풍경들
―권대웅의 신작시―
김 진 희
(문학평론가)
시인은 일찍이 인생이 쓸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초저녁별」) 일찍 말이다…….
그렇다면 이미, 삶의, 저, 도도한 심연을 보아버린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덧없는, 무상한 삶을 나의 존재론적 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그래서일까, 시인은 삶에 대해서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픔을 과장하지도 않고 고통을 비켜가지도 않는 시인의 태도에는 生에 대한 열정보다는 쓸쓸함을 이미 알아버린 자의 서늘함이 배어 있다. 이런 서늘함이 삶에 대한 관조와 거리의식을 가져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그의 시가 풍경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상을 자주 갖게 된다. 이는 그의 시가 시각적 이미지에 기대어 쓰여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시인의 내면의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삶의 고통은 존재의 근거이자 입지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무상감과 덧없음이 스며든다. 때문에 그가 삶을 말하는 방식은 하나의 대상을 가까이서 세밀하게 묘사하는 정물화가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와 정조를 통해서 자기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풍경화의 방식이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삶이란 어떤 하나로 명명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고통의 근원 역시 여러 존재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삶이 환기시키는 모든 상황들이 ‘풍경’이란 시어로 표현된다. 그가 말하듯 ‘삶은 너무 정면이어서 낯설’은 것(「낮달」, ꡔ조금 쓸쓸했던 生의 한때ꡕ)이고 ‘다가가지 못하는 것’(「마음 속의 풍경」, ꡔ조금 쓸쓸했던 生의 한때ꡕ) 이라면 ‘풍경’ 속에 드러나는 존재들을 통해 그의 내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풍경 1 ―허공의 빈집
그의 시에는 어린 시절 일찍이 알아버린 가족과 집에 얽힌 외로움 때문에 막막했던, 그래서 슬픔을 한번 꿀꺽 삼켰어야 했던 추억들이 존재한다. 그 쓸쓸했던 시간들은 유년의 한때를 어두운 풍경으로 채색하고, 성년이 된 현재까지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생채기’의 빛깔로 삶을 덧없고 아프게 만든다. 그 어린 시절의 풍경에 어둠으로 사라져가는 집이 존재하고 그 소멸을 바라보는 외로운 아이가 있다.
처마밑으로 제비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허리둘레가 넓은 아버지처럼 든든해 보이던
장독대 항아리들과
병정 같은 펌프가 우뚝 서있던 마당
툇마루에 모이던 햇빛이 담장을 지나
지붕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할머니는 아깝다며
소쿠리에 굴비 몇 두릅을 더 얹으셨다
햇빛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남은 생이 아까웠던 할머니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반지르르 닦아놓으시던 경대 위로
세월이 비껴가는 줄만 알았다
돌아보면 햇빛이 거두어가 버린 집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집
어른거리는 골목길 너머 장독대 너머
할머니는 아버지는 모두 허공을 살다간 것이었을까
제비들이 처마밑으로 물고 오던
씨줄의 공간과 날줄의 시간들이
잡히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있는
저 허공 속
―「허공 속 풍경」 전문
허리 둘레가 넓은 아버지, 병정 같은 펌프를 기억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어린이다. 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사는 집은 평화롭고 든든한 요람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가면서 햇빛이 사라지듯 가족도 집도 모두 어두운 풍경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남은 생이 아까워 열심히 햇빛을 잡고 있었던 할머니, 그리고 바람막이였던 아버지를 거두어가 버린 세월의 힘 때문에 집은 어린 화자에게 햇빛 속에서 잠시 빛나는 신기루 같은 존재였으리라.
햇빛이 사라진 집, 따스한 온기가 사라진 집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붙박히지 못한 허공 속의 빈집이 되어버렸다. 햇빛의 사라짐과 함께 어둠 속으로 저물어가는 집……,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듯 위태롭게 살아가는 유대인 가정의 슬픈 삶을 담고 있던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과 그 영화에서 울려 퍼지던 ‘선라이즈 선셋(sun rise sun set)’이 들리는 듯하다. 해가 지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자주 연주되던 이 노래는 아마도 몰락해 가는 가족과 집의 운명을 대신 했었던 것 같다.
인간에게 집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의 근원이요 뿌리와 같은 공간이다. 그러나 시인이 경험해야 했던 ‘집’은 평화와 풍요로움이 사라진 결핍과 허기의 공간이다. 채워지지 않는 안정과 따스함에 대한 갈구와 그 공복감은 시인에게 고독과 불안의 무의식으로 자리잡는다. 때문에 햇빛이 거두어 가버린, 허공 속의 집을 응시해야 하는 어린 화자의 눈에 비치는 것은 아버지와 할머니의 부재가 만들어놓은 가난과 그 삶을 지고 가야 하는 어머니의 위태로움이다. 시인은 이를 쪽마루에 걸터앉은 하현달로 묘사한다.
하늘에도 툇마루가 있었구나
월급봉투 여기저기 쪼개주고
이번 달 어떻게 살까 근심에
방문 열고 나와 걸터앉은 어머니처럼
이마에 손등을 얹고
저 달의 인생도
쪽마루에 앉아 살아가야 할 날들
걱정하고 있구나
―「하현달」 전문
이 시에서 어머니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달과 연결된다. 그러나 그 달은 풍요로움과 생명감을 환기시키는 만월, 혹은 상현달이 아니라 저물어가는 하현달로 등장한다. 이는 살아가야 할 날들을 걱정하며 힘든 나날들을 견디는 어머니가 시인의 눈에는 혹 사라져버릴 하현달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이 찾아오기 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사랑의 순간은 있었다. 시인은 이 사랑의 한때 역시 기억하는데, 봄날 달빛 아래 만발한 벚꽃 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그는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언젠가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깊고도 환한 몸 속
달빛이 스미는 순간
아아 가쁜 호흡과 함께 터지는 사랑에
내 영혼 뜨거웠던 적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와 본 적이 있다
꿀벌이 꽃잎 속으로 들어가듯이
아득하고도 먼
향기 속에 얼굴을 묻는 순간
오오 그 속에서 연애하는
젊었을 적 아버지와 어머니
창문 밖에 연등을 걸어놓고
환한 꽃그늘
깊어가던 사랑과 뜨거움에
화들짝 열리던
그 분홍 치마 속.
―「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서」 전문
그러나 외로웠던 기억보다 행복했던 추억은 그리 선명하지 않은가보다. 그래서 시인은 ‘언젠가’라고 진술한다. 시인은 ‘언젠가 한번 와 본 적이 있다’라는 두 번 반복되는 구절을 시작으로 앞의 부분에서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앞 부분의 추억을 매개로 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린다. 시인은 더 먼 과거의 시간성과 아련함, 그리고 불확실함을 강조하기 위해 ‘언젠가 한 번/와본 적이 있다’를 두 행으로 나누어 쓴다.
1행에서 5행까지는 달빛을 받으며 빛나는 벚꽃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순간을 깊고도 환한 몸속에 달빛이 스미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영혼을 흔들던 사랑의 순간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다음 6행부터도 역시 동일한 구조가 반복되면서, 꽃의 향기에 취하는 순간, 과거 속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이 기억된다. 그리고 환한 꽃그늘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는 자신, 혹은 아버지가 분홍 치마 속에 들어있다는 에로틱한 환상이 만들어진다. 한 존재가 자신의 내밀함을 ‘화들짝’ 열어 보여줄 수 있음은 영혼까지 뜨거워지는 사랑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면 어떤 영혼의 비밀도 열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쓸쓸함의 비밀을 어루만질 수 있는 힘도 가쁜 사랑, 열애의 뜨거운 풍경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가능한 것은 아닐까.
풍경 2 ―적막의 자리
그러나 그 환한 꽃 그늘도 꽃이 지면 사라지듯, 사랑도 진다. 시인은 져버린 사랑으로 아파한다.
밤새 큰누나가 뒤척이던 흔적
흐트러진 이불처럼
어지러워라
한 번도 서로 만나보지 못한
늦은 외사랑이 지는 자리
미색의 그리움들이 그만
후드득
하혈처럼 쏟아지는 자리
―「목련꽃 지는 자리」 전문
시인의 ‘언젠가 한 번’이었던 그 사랑은 어쩌면 ‘한 번도 서로 만나보지 못한’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랑 때문에 비극성은 더해진다. 뒤척이고 어지러운 그 사랑의 고통은 때를 놓친 사랑이라는 절망의식을 가져온다. 이어 내면의 고통과 상처는 붉은 피로 쏟아져 내린다. 시인은 사랑이 떠나고, 사람이 부재하는 ‘자리’, 꽃잎이 지며 소멸해 가는 ‘자리’를 기억한다. 그는 사랑과 존재 그 자체를 추억하기보다는 이별이 환기시키는 적막감에 주목한다.
다 살지 못하고 간 모든 것들은
세상에 적막으로 남는다
매미들이 뚝
숨을 끊은 자리
돌진하던 넝쿨들이 그만
멈춘 자리
사랑해라고 말했던 자리
못을 뽑아놓은 것처럼
흔적만 남아있는 자리
너무나 커서
너무도 적막한,
살다 만 그 자리
―「적막강산」 전문
위의 시에 나타나는 것처럼 시인은 지고, 소멸하고, 떠나버린 자리에 관해 사유한다. 그는 온전히 피어나지 못했던 존재들에게 연민과 사랑을 보이는데, 그런 존재들이 세상에 함께 공존하면서 적막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인식은 시인의식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삶이 가진 적막함과 고독감에의 경사는 그의 유년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에게 집이라는 공간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허공 속에 빈 자리를 만든 것처럼, 그리고 그런 추억들이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시인에게 막막한 삶의 자리를 남겨 놓은 것처럼 세상 모든 존재들이 가진 그 몰락과 소멸의 자리는 큰 적막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풍경 3 ―햇빛, 덧없는, 눈부신 삶
소멸의 자리에 주목하는 권대웅의 시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특징은 ‘빛’의 이미지이다. 그 빛은 햇빛, 달빛, 별빛, 물빛 등으로 변주되는데, 특히 ‘햇빛’으로 많이 나타난다. 최근에 출간한 시집 ꡔ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ꡕ에서도 역시 많은 시편들에서 ‘햇빛’이 주요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런데 햇빛을 향한 시인의 애정과 사라지고 떠나가는, 쓸쓸한 삶은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햇빛이나 달빛, 별빛 그들은 모두 시간적인 존재이다. 모든 존재들은 햇빛 아래서 일시적으로 완벽하고 풍요로운 존재성을 드러내지만 햇빛이 사라지면 그 존재의 아름다움은 깨어진다. 이렇게 햇빛 아래에선 세상의 어떤 존재도 또 진실이나 진리, 사랑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들은 변하거나 소멸하거나 사라진다. 어둠을 남긴 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분명치 않은 불안한 관계들이 삶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生은 덧없고 쓸쓸한 것이 되며 이런 삶에 대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수동적이고 관조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권대웅에게 있어서는 우선 그의 유년이 이런 의식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낸다. 유년의 집은 햇살이 비치는 동안은 위태롭지만 평화로운 풍경으로 서있다. 그러나 햇빛이 사라지면서 집은 어두운 허공 속의 풍경이 되어버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집을 응시하면서 그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햇빛이 거두어가는 모든 존재들의 소멸과 몰락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사랑의 한때 역시(「활짝 핀 벚꽃 나무 아래서」) 달빛 아래 이루어지는 풍경이다. 그러나 달빛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꽃도 질 것이라는 위태로운 암시가 그의 사랑을 불안한 것으로 만든다. 꽃이 지듯이, 해가 지듯이, 달이 지듯이 행복은 시간 속에 놓여있다. 권대웅의 시에서 햇빛과 함께 자연의 풍경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자연에는 순간적이고 덧없는 여러 상태들, 흘러가는 구름이나 태양 빛의 진동, 연기, 수증기, 물결, 햇빛 아래 반짝이는 꽃과 나무 등……, 일시적인 존재들이 많기 때문이다. 삶의 쓸쓸함과 덧없음에 관해 사유하는 그의 의식이 햇빛 아래 존재를 드러내다 사라지는 사물들을 詩化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덧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 ‘햇빛이 지나갈 때’ 존재는 자신의 진정성을 내비친다. 이런 이유로 시인은 햇빛의 이미지를 즐겨 사용한다.
햇빛이 각도를 바꿀 때마다 늑골이 아팠다
온몸 구석구석 감추어져 있던
추억 같은 것들이 슬픔 같은 것들이
눈이 부셨나보다 부끄러웠나보다
접혀져 있던 세월의 갈피 갈피들이
어느 날 불쑥 펼쳐져
마치 버려두고 왔던 아이가 커서 찾아온 것처럼
와락 달려들 때가 있다
문득 돌쩌귀를 들추었을 때
거기 살아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지나간 모든 것들은 멈춘 것이 아니라
남겨진 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물지 않고 살아있는 생채기로
시린 바람이 지나가듯이 자꾸 옆구리가 결렸다
기억의 갈피갈피 햇빛이 지나갈 때
남겨진 삶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햇빛이 지나갈 때」 전문
위의 시에서 햇빛은 상처를 비추고 있다. 사물들을 명징하게 만드는 빛의 속성은 시인에게도 역시 그의 심연에 가라앉은 상처들을 비춤으로써 일종의 거울을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빛 때문에 눈이 부시고 부끄럽다. 마치 인상주의자들의 시선이 햇빛 속에서 순간에 놓인 존재들의 비밀을 열어 보여주듯이 무의식의 심연에 갇혔던 상처가 햇빛 아래 드러난다. 햇빛은 그에게 아픔이 있음을 다시 일깨워준다. 빛살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시인의 추억과 슬픔의 갈피들이 새롭게 펼쳐진다.
시인은 슬픔이 켜켜이 쌓여있는 기억을 촘촘히 올려진 갈비뼈로, 층층이 쌓인 책갈피로, 무겁게 눌러진 돌쩌귀로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햇빛이 비칠 때마다 시인은 늑골이 아프다. 왜인가, 햇빛이 그의 아픔을 지탱하는 늑골을 펼치고 들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햇빛을 조심하라고 한다. 상처는 햇빛에 의해 무너져 버리고 깨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봄무사」).
그러나 시인은 햇빛 아래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그에게 아픈 추억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에게 남겨진 삶이 있다는 것을. 햇빛 아래 드러나는 그 아픔은 마치 버려두고 온 아이가 커서 찾아온 것처럼 와락 달려들거나 무거운 돌쩌귀도 끄덕 않고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다가온다. 고통과 아픔은 건재하다!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지나간 모든 것들은 멈춘 것이 아니라/남겨진 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이런 의문은 「적막강산」에서 보여주던 의식에서 한 걸음 나와 있다. 즉 그는 존재들이 사라진 자리에 크나큰 적막이 남는다고 했다. 그 적막은 부재의 의미에 가깝게 읽혔으며 존재의 소멸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는 오히려 만물들은 그 적막과 상처를 끌어안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라고 조심스레 묻고 있다. 지난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곁에서 살고 있다고 말이다.
위의 시를 통해 보자면 시인은 지난 추억들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고통을 가졌음과 그것은 내 삶의 갈피 갈피에 여러 모양으로 잠복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수락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것이 어쩌면 그가 깨달은 삶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범부들에게 아픈 상처는 시간이 치유해준다. 그러나 시인은 그 추억의 강렬함 때문에 눈이 부시고 여전히 자신의 존재가 부끄럽다. 이런 사색 속에서 시가 태어나는 것이리라.
풍경 4 ―지상 위의 영혼과 별
달빛이 나뭇잎을 흔들며 마당에 내려올 때마다 바람이며 나뭇잎이며 그 빛의 입자들이 분명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요한 그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문득 우리가 사는 이곳은 공간의 버전만 다를 뿐, 서로 스치며 지나가는 둥근 회전문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오버랩 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햇빛이 꽃잎의 비밀을 열 때마다 하늘 저편에 무지개가 걸릴 때마다 질량불변의 법칙처럼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고 이곳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영혼이 더 성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아지랑이가 아닐까? 봄바람이 아닐까 이제 막 솟구쳐 오르는 새순이나 꽃봉오리가 아닐까? 햇빛으로 혹은 달빛으로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을 당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
―「통화 ―故 손혜경 화백께」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자연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대로 적막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아름다운 영혼으로 성장하여 우리 곁에 머문다. 지나간 고통의 흔적이 시인의 내면에서 생생한 아픔으로 살아 숨쉬면서 그의 삶을 고통 속에서 늘 깨어있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면(「햇빛이 지나갈 때」) 그의 사유는 여기서 더 나아가 소멸하고 부재하는 모든 것들이 모습을 달리한 채,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 안에서 함께한다는 데까지 확장된다. 슬픔이 오래되면 영혼이 밝아지듯(「낮달」 ꡔ조금 쓸쓸했던 生의 한때ꡕ) 그것들은 햇빛 속에서 자신의 비밀을 열어주는 아지랑이로, 봄바람으로, 새순으로, 꽃봉오리로 소생한다.
‘故 손혜경 화백께’라고 부제를 부친 이 시는 이 세상에 없는 화가와의 대화이기도 하고 또 그 화가가 스며들어 있는 자연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사라져버린 존재들이 수많은 빛 속에서 다시 깨어나고 생동하는 자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신비주의적인 색채의 이 시에서 시인은 마치 영매처럼 이 세상으로 내려온 영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통화한다. 세상 만물 모두가 햇빛을 받으며 시인의 시선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자연의 수선스런 깨어있음과 그들과의 대화를 이야기하는 시인에게서 여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세상으로부터의 단절감과 소외의식이 느껴진다. 이것이 천생 시인의 운명일까.
들판을 헤매던 양치기가
하룻밤을 세우려고
산중턱에서 피우는 모닥불처럼
퇴근길 주머니에 국밥 한 그릇 값밖에 없는
지게꾼이 찾아갈 주막처럼
일찍이 인생이 쓸쓸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창문을 열어놓고
뻐끔뻐끔
혼자 담배를 피우는
저 별
―「초저녁별」 전문
그런 외로운 시인이 ‘혼자’ 담배를 피우는 초저녁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피우는 담뱃불은 초저녁 별빛으로 전환되고 있다. 초저녁부터 홀로 빛나며 떠있는 별. 이미 인생의 쓸쓸함을 다 알아버린 그 별은 초라하고 곤궁한 인생들을 어루만지며 빛난다. 상처 많은 영혼들이 바라보는 그 별은 온갖 아픔과 고통 속에서 견고해지고 투명해진 빛의 결정이다. 슬픔이 오래 되면 영혼이 밝아져 소생하듯 또 삶이 시리고 환해지면 박하사탕 맛이 나듯이(「낮달」 ꡔ조금 쓸쓸했던 生의 한때ꡕ) 말이다. 신산한 삶을 거쳐온 환한 그 별빛을 모닥불처럼, 또 주막처럼 의지하며 이 지상 위의 生들은 영위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인가. 삶이라는 쓸쓸한 풍경 속에, 지상 위의 별 하나를 그려넣어 주는 존재인가…….
권대웅의 시는 소멸로부터 소생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론 이것이 시인의식의 중심에서 쓸쓸함과 고독감이 사라져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여전히 외로움과 쓸쓸함을 즐겨하는 시인으로 남을 것 같다. 다만 이제 그의 시 의식은 쓸쓸했던 유년의 적막과 어둠이 삶을 허공 속의 풍경으로만 남게 했다는 비극적 인식으로부터 한 발자국씩 걸어 나와 그 소멸에서 생성을 읽어내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햇빛의 이미지인 덧없음으로부터 또 하나의 이미지인 명징성으로 옮겨가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런 시적 여정을 향유하는 독자들은 빛의 입자나 바람의 무늬, 무지개의 결이 만들어내는 풍경에까지 눈길을 주는, 시인의 넉넉하고 따스한 목소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진희
․1965년 서울 출생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석․박사
․주요 평론 「가상의 현실과 상상의 글쓰기」 「몸―꽃, 불온한 제국의 탄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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