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9호 <문학의 인프라> 문학기념관은 지역의 ‘문화적 진지’다!/고명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2,930회 작성일 04-01-04 14:16

본문

문학기념관은 지역의 ‘문화적 진지’다!



고 명 철
(문학평론가. 광운대 겸임교수)




1. 본격적 논의가 필요한 문학기념관
한국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문화 또한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문화의 성격이 어떻든지 간에 서울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문화의 상징자본을 손쉽게 그리고 많이 획득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놓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바, 서울로 표상되는 “지배이데올로기는 확대 재생산되고
공간 구성원을 특권화시키며 다른 관념들(피지배이데올로기)은 종속”되는 현실에서 서울로의 문화 집중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서울 중심의 문화 집중화로 인한 문제에 대해 비판적 성찰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판적 성찰에 값하는 문화적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떠올려볼 때면, 비판의 동어반복을 목도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특히 문학 분야에 국한시켜보면, 이 문제의 심각성은 가볍게 간과할 수 없다.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출판자본(출판사, 대형서점), 언론, 문예매체, 문학교육 기관 등은 문학의 서울 집중화를 부채질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서울중심의 문학 인프라를 더욱 공고히 구축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아무리 문학의 본래적 속성을 탈 중심성(혹은 변방성)이라 강변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작동․형성되는 문학의 인프라는 정반대적 속성을 띠고 있으니, 실로 아이러니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문학의 모든 게 서울 집중화를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할 이른바 문학기념관은 앞서 언급한 문학의 본래적 속성인 탈 중심성을 실천하고 있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한국에 세워진, 그리고 앞으로 세워질 문학기념관은 다행스럽게도 서울이 아닌 전국 각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 문학기념관은 해당 지역에 연고를 둔 작가의 문학적 생애를 기림과 동시에 그 지역의 문학적 역량을 고양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문학기념관 건립을 통해 그 지역의 문화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생산적 계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서울 중심의 문화 편중화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역할마저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기념관이 이러한 순기능만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전국 각 지역에서 앞다투어 건립되고 있는 문학기념관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점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제부터라도 충분히 논의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학기념관은 단순히 지역에 연고를 둔 작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둔 축조물로 파악해서는 안 되며, 행여 지역 문화예술행정의 사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화 분야를 의식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구색 맞추기 위해 집행한, 전시행정의 하나로 인식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기념관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서울의 문화 집중화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 대안이라는 데 주목하여, 현재 문학기념관이 당면한 문제와 실태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 그 과정에서 도출되는 제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지자체의 선별적․집중적 재정 지원이 요구되는 문학기념관
문학기념관의 실태를 살펴보는 데 우선 검토되어야 할 것은 문학기념관의 운영상의 문제다. 현재 전국 각 지역에 세워져 있는 문학기념관의 대부분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는데, 그 지원 규모에 따라 운영 방식에는 차이가 있으나, 지자체가 전면에 직접 나서서 문학기념관의 모든 것을 관리․운영하고 있지는 않다. 그 대신 민간에 위탁하여 운영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실 이러한 운영 방식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지자체가 직접 나서서 문학기념관을 운영하는 것은, 자칫하면 문학기념관의 특수성을 인식하지 못 한 채 여타의 기념관 및 박물관과 동일한 지역문화예술행정을 집행함으로써 문학기념관 본래의 목적과 기능을 상실할 소지가 농후하다. 이와 달리 문학과 관계를 맺은 개인과 단체가 문학기념관 운영의 주체가 된다면, 문학기념관의 본래적 속성을 견지하면서 설립 목적에 부합되는 문화공간을 창출하는 데 좀더 문화적 역량을 결집시킬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이처럼 지자체가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하되, 민간에 위탁하여 운영하도록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문학기념관을 운영하는 데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 중 가장 큰 것은 재정이다. 특정 지역에 연고를 둔 작가의 문학적 생애를 기리는 기념관을 무턱대고 덩그렇게 지어놓으면 시체말로 ‘잘 굴러가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하면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형태의 기념관과 박물관도 그렇지만, 지속적인 사후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아무런 문화적 반향이 없는 골칫거리 콘크리트 더미에 불과하다. 더욱이 염려되는 것은 아무렇게나 방치된 문학기념관이 그동안 축적된 작가의 문학세계에 도리어 흠결을 가함으로써 아예 문학기념관을 짓지 않은 것보다 못 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문학기념관은 다른 형태의 기념관과 다른 특수성을 띤다 하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문학기념관의 성격을 보다 구체화하는 대목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 강조해둘 점은 문학기념관만의 역할을 극대화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지역문화예술에 대한 지자체의 재정적 지원의 세부적 문제를 시시콜콜히 논의하지는 않겠다. 다만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아직도 지자체의 문화예술에 대한 재정 지원은 과거의 행정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 하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골고루 나눠주기 식의 재정 지원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로는, 역량 있는 개인과 문화예술 단체에 집중적으로 재정을 지원한다 하면서도 실제 재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는 그동안 보였던 관행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쉽게 지켜볼 수 있다. 지자체는 지역에서 일하는 여러 문화일꾼들의 불만을 피하기 위해 재정을 균등하게 안배하는 데만 치중한 나머지 지역 문화에 실질적으로 공헌하는 데 대해서는 선별적이면서도 집중적 지원을 기피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지자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데 뒤따르는 고질적 병폐 또한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것 또한 현실이다. 지자체가 지역의 문화발전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특권을 행사하는 양 지역의 문화일꾼들에 대해 고압적 자세를 취하는 것은 비일비재하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회의 여러 부문이 많이 달라졌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지자체의 공무원들에게 관의 특권의식적 잔재가 남아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역의 문화일꾼들이 지자제를 향해 벌이는 해묵은 폐습(특히 지역의 경우 지연, 혈연, 학연 등의 고리가 뒤엉킨 전근대적인 청탁문화의 악습에서 말끔히 벗어나 있지 못 하다.) 또한 여전하다. 참신하고 생산적인 문화기획도 강구하지 않은 채 다른 문화단체도 지원을 받으니, 우리도 받아야 된다는 구태의연한 문화적 욕구는 예전의 해묵은 폐습을 되물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이러한 지자체와 지역 문화일꾼들의 전근대적 관계 속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시키듯, 지역 문화의 창조적 발전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오해하지 말자. 그렇다고 지역의 모든 지자체의 공무원들과 문화일꾼들이 이러한 고질적 병폐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힘주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지자체의 문화예술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선별적․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데 따라 누적된 고질적 문제를 다시 한번 환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문제는 문학기념관도 예외일 수 없다. 문학기념관을 민간에 위탁하여 운영하는 데 따른 재정을 지원하면서도 지자체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지역의 다른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과 구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문학기념관이라고 다른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게 지자체의 공통된 행정적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가령, 지자체는 문학기념관을 민간에 위탁하면서 수익사업을 통해 재정 자립도를 높일 것을 요구하는데, 여기에는 수익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제반 시설과 문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추어놓지 않고서는 한갓 구호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문학기념관만 덩그렇게 지어놓으면 수익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수익사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학기념관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야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관람객들이 많아야 문학기념관 자체의 수익사업의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러자면, 문학기념관에 대한 홍보는 물론, 지자체가 문화관광사업의 일환으로 문학기념관을 문화상품화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문학기념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을 위한 교통, 숙박 등의 최소한의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어놓고서 문학기념관의 민간 위탁자에게 수익사업을 요구해야지, 아무런 부대시설과 조건도 마련하지 못 한 채 무작정 수익사업을 통해 재정 자립도를 높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탁상행정의 전형인 셈이다.
여기서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문학기념관을 여타의 기념관 형태의 축조물로서 인식한 나머지 지자체의 문화예술에 대한 전시행정의 일환으로 자족하여, 지역문화에 대한 의례적․상투적 관심을 갖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역문화의 실질적 창조를 위해 문화적 보탬이 되는 문화공간이 되도록 지자체의 선별적․집중적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그동안 구태의연하면서도 안일하게 인식되곤 하던 지역문화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말할 필요 없이 이것은 지역문화예술 행정을 직접 담당하는 공무원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대충 지금까지의 행정적 관행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무사 안일하게 예술행정을 집행하는 것은 지역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위해서는 시급히 청산해야 될 고질적 습속이다.
어떻게 보면 예술과 행정은 불협화음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모른다. 예술의 본질적 속성이 우리의 일상을 전복시킴으로써 일상에 젖어 있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성찰’의 길로 인도한다면, 행정은 복잡한 사회적 계약 관계로 뒤엉켜 있는 우리의 이해관계에 합리적 규율을 강제함으로써 ‘삶의 안정’을 찾도록 하지 않던가. 때문에 이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게 예술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나는 예술의 속성을 등한시 한 채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예술행정이어서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이 같은 문제에 대한 발본적 해결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문학기념관이 우려되는 것은, 지역문화의 창조적 발전에 문학이 중요한 한몫을 하는 만큼 지자체의 예술행정 담당자의 문학에 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흔히들 문학은 다른 예술에 비해 개인의 언어예술 행위이므로, 겉으로 보여지는 볼거리로서는 빈약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문학기념관에 대한 선별적․집중적 재정 지원에 대한 행정 효과를 크게 볼 수 없다는 판단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기우(杞憂)는 다음의 장에서 논의될 문학기념관의 구체적 운영 실태와 문화행사를 통해 불식될 수 있다. 이제 문학기념관은 지역문화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되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는 것이다.

3. 지역문화의 창조적 문화공간으로서의 문학기념관
문학기념관 하면, 으레 상투적으로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투명한 유리 전시관 너머 전시되어 있는 빛 바랜 사진 몇 장, 누렇다 못 해 곰팡이가 핀 원고지에 잉크가 번져 있는 글씨, 작가가 평상시 사용한 이러저러한 유품, 작가의 문학적 생애와 관련된 자료, 그리고 기념관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작가의 흉상(혹은 전신상). 이것만 연상되어도, 문학기념관은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추었다 할 것이다. 문학기념관도 일종의 전시공간인 만큼 특정한 작가의 문학적 생애를 기리기 위한 최소한의 전시물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학기념관은 이처럼 ‘보여주기’에만 그 역할이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문학기념관이 전시공간으로서의 역할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말한다. 지금까지 문학기념관은 전시공간으로만 자족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문학기념관의 역할은 이제부터 전시공간뿐만 아니라 지역의 숨쉬는 문화공간의 역할로서 탈바꿈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문학기념관은 해당 작가의 문학적 열정과 작품 세계를 널리 이해함으로써 그곳을 찾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문학적 쉼터이면서, 예술의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기념관은 문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문학과 인접한 예술 장르와의 창조적 만남을 통해 그 지역의 문화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문화적 진지’로서의 역할도 맡아야 한다.
문학기념관에 대한 이 같은 역할을 기대하는 데에는, 적어도 문학기념관은 다른 형태의 기념관과 달리 수동적으로 어떤 자료들을 전시하고 보여주는 것으로만 자족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연유한다. 문학기념관은 더 이상 고정적이고 수동적 전시공간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문학기념관에 대한 이러한 변화된 인식은 문화공간이 무엇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문제에 직결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문학기념관이 전시공간의 역할을 넘어서서 또 다른 문화공간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문학기념관을 접할 기회가 있어 한 사례로써 소개해보기로 한다.
‘김유정 문학촌’. 강원도 태생인 작가 김유정을 기념하기 위한 문학기념관의 명칭이다. 이곳 역시 겉으로 볼 때는 다른 지역의 문학기념관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 한다. 작가의 생가를 복원하고, 작가와 관련된 문학 자료들을 전시하는 기념관이 서 있는 것은 그다지 생소하지 않은 문학기념관의 전형적 외양이다. 하지만 이곳은 다른 지역의 문학기념관과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김유정 문학촌’이 작가 김유정의 문학을 화석화시키는 게 아니라 현재까지 살아 숨쉬는 문학으로 되살려내고 있는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이렇다할 교육시설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김유정과 관련된 문학교육 및 창작교육이 정기적 프로그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의 문학단체에서 ‘김유정 문학촌’을 방문하여 각종 세미나 행사와 문화행사를 가짐으로써 ‘김유정 문학촌’은 강원도의 중요한 문화공간으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김유정 문학캠프’는 전국의 중고등학생과 강원도의 작가들이 김유정의 문학 세계를 함께 이해하는 자리인바, ‘김유정 문학촌’이 그 본래의 설립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의미 깊은 행사다. 문학기념관이 문학 자료를 전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문학기념관을 찾은 사람들에게 문학적 체험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기존의 문학기념관이 간과해 왔던 중요한 문화공간으로서의 창조적 역할을 ‘김유정 문학촌’은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기왕 ‘김유정 문학촌’이란 사례를 통해 문학기념관에 대한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검토하면서, 내가 주목하는 또 다른 면은 문학과 인접한 다른 예술 장르와의 만남을 통해 지역문화의 메카로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김유정 문학촌’인 경우 기존의 문학기념관과 달리 다양한 문학 행사를 통해 문학기념관의 본래 목적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사례다. 하지만 ‘김유정 문학촌’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문학기념관은 문학뿐만 아니라 지역의 다른 문화 예술 분야까지도 포괄하여 문학과 소통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게 바로 ‘김유정 문학촌’에 주목하는 이유다. 김유정의 작품을 연극화하여 ‘김유정 문학촌’에서 공연한 것이라든가, 일반 사람들이 직접 접하기에는 생소한 마임 공연을 개최한 것이라든가, 대중음악 공연의 무대를 제공한 것 등 ‘김유정 문학촌’이란 문학기념관은, 말하자면 ‘문학-연극-마임-음악’이 한데 어울린 열린 무대로서 ‘복합 문화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가히 김유정을 매개로 한 예술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바, 근래 예술간의 단절이 심화되는 현실을 감안해 보건대, ‘김유정 문학촌’을 중심으로 한 이 같은 예술간의 소통은 문화공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할 수 있는 한 사례라 소개할 만하다.
그런가 하면, ‘김유정 문학촌’에서 주관하여 실시하고 있는 프로그램 중 지나칠 수 없는 게 ‘향토작가 알리기’ 행사다. 가뜩이나 지역문화에 대한 소외감에 젖어 있는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김유정을 비롯한 강원도의 작가를 알리는 문학교육을 통해 지역문학과 지역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은, 다른 형태의 문학교육이 담당하지 못 하는 ‘향토작가 알리기’ 나름대로의 특장(特長)을 충분히 살린 행사다. 문학기념관에서 실시되고 있는 이러한 문학교육은 현재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파행적으로 치닫고 있는 학교의 문학교육을 보완해준다는 점에서도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문학기념관의 역할이다. 물론 이 같은 문학교육의 역할을 문학기념관만이 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있는 각 문학단체의 프로그램과 지역의 여러 문화센터 문학강좌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들에 많은 청소년들이 참여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프로그램에는 장기적 안목을 지니고 다수의 지역 청소년들로 하여금 참여의 기회를 갖게 함으로써 지역의 문학과 문학에 대한 자긍심에 토대를 둔 지역문화의 창조적 발전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게 중요하다. 이 같은 목적을 효과적으로 거두기 위해서는 문학기념관이 기획․실천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프로그램과 접맥함으로써 문학교육이 일회적 이벤트 행사로 그치는 게 아니라 청소년들로 하여금 지역문화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갖도록 하여, 궁극적으로는 지역의 문화적 정서를 이해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성찰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길러내는 데 있다. 이렇듯이 지역의 문학기념관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교육에 기대되는 문화적 효과는 자못 큰 것이다.
이처럼 ‘김유정 문학촌’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문학기념관의 문화적 콘텐츠를 어떠한 것으로 채워넣느냐에 따라 문학기념관은 지역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서 고유의 몫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협소한 문학 자료의 전시공간적 성격을 지양하여, 지역의 문화예술간의 교류와 지역 청소년들을 향한 문학교육 등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의 개발과 실천이야말로 지역의 문학기념관을 생산적인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원동력인 셈이다.

4. 지역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문학기념관
나는 문학기념관이 단순히 문학 자료를 전시하는 전시공간으로 자족하는 게 아니라 지역문학과 지역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독자적 문화공간이란 점에 주목하여, ‘김유정 문학촌’을 중요한 사례로 삼아 논의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문학기념관은 지역문화를 일구어내는 ‘문화적 진지’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문화공간을 지금까지 별다른 관심을 쏟지 못함으로써 우리가 방치해놓았던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역에 세워져 있는 문학기념관은 마치 외계에서 날라온 우주선처럼 해당 지역에 낯설고 괴기스런 축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통념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학에 문외한인 지역민들에게 특정한 작가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을 세운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역민과 문학기념관의 관계는 괴리되며, 그에 따라 여러 문제가 야기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지역에 세워진 문학기념관이 해당 지역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 한다면, 이것 또한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문학기념관이 지역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학기념관을 운영하고 이용하는 문화예술인과 청소년, 일반시민은 물론, 해당 지역민들의 자발적 참여 역시 중요하다. 정작 문학기념관이 세워진 지역민들은 문학기념관에 대해 방관자적 자세를 취한 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한다면, 문학기념관은 지역문화의 창조적 발전은커녕 지역의 경제적․문화적 발전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학기념관이 어떻게 하면 지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도 ‘김유정 문학촌’의 경우를 잠시 살펴보자. 내가 우선 주목한 것은 ‘김유정 문학촌’이란 명칭이다. 대부분의 문학기념관인 경우 ‘아무개 문학기념관’이란 명칭을 붙이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김유정 문학촌’은 ‘문학촌’이란 명칭이 눈에 확 띈다. ‘김유정 문학기념관’이 아니고 말이다. 바로 여기서 나는 ‘문학기념관’이란 명칭 대신 ‘문학촌’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 나름대로의 연유를 생각해보았다. 김유정의 작품 세계의 산실인 김유정의 고향을 일부러 의식한 이 명칭은 김유정의 문학적 생애를 기리기 위한 문학기념관이 김유정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김유정의 작품의 주요 공간인 김유정의 고향 전체(실레마을)를 포괄한 문학적 상징성이 내포된 명칭이 아닐까. 그리하여 ‘김유정 문학촌’이 세워진 지역민들과 함께 김유정의 문학을 공유하고, ‘김유정 문학촌’이 지역민들과 별도로 존재하는 문화예술인들만의 문화공간이 아니라 지역민들의 생활 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문화공간이란 점을 자연스럽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게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김유정 문학촌’의 운영 책임을 맡고 있는 작가 전상국(‘김유정 문학촌’의 문학촌장)은 김유정의 고향 마을에 있는 금병산의 산길에 이름을 붙이기를, 김유정의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를 빌려오는가 하면, 김유정 마을을 지나치는 철도역의 이름마저 유정역 또는 실레역으로 변경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유정 문학촌’을 중심으로 들어선 상가의 상호마저 김유정의 문학과 관련된 명칭으로 변경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명칭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것은 지역에 세워진 문학기념관의 지역적 인지도만을 높임으로써 마치 그 지역의 모든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문학기념관과 관계되거나 해당 작가와 관계를 맺은 명칭을 자연스럽게 사용함으로써 문학기념관에 대한 지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어 문학기념관이 해당 지역민의 생활 현장 속에서 친연성을 띤 쉼터이자, 문화공간으로 자리잡고자 하는 게 목적이다.
물론 지역민의 참여가 이처럼 지역의 주요 공간적 명칭을 바꿈으로써 활발해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야말로 지역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지역 경제에 어느 정도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나 지역의 문학기념관이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지자체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는 만큼 문화관광사업의 훌륭한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제 문화도 하나의 문화상품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어떠한 문화상품을 개발하고 문화시장에서 떳떳이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확보하느냐, 즉 문화경쟁력을 가져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문학기념관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논의에서 도출되듯, 다른 형태의 기념관과 다른 문학기념관만의 독자적 기획과 실천이 요구되는데, 제 아무리 좋은 기획을 수립하고 그것을 실천할지언정 해당 지역의 경제활동과 무관한 것이라면,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대안이 제시되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자칫하면 문학기념관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경제활동의 본말이 전도된 채 문학기념관은 어느새 슬그머니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되어, 실상 온갖 상행위만이 판치는 곳으로 뒤바뀌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그동안 너무도 자주 목도하고 있다. 지역의 유명 관광지라고 하는 곳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확연히 알 수 있을 터이다. 여간 곤혹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문학기념관이 세워진 지역민의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과 문학기념관 본래의 취지와 목적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여러 가지로 상충되는 관계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한국의 문화예술행정은 무사안일하게 관행에 입각한 예술행정을 집행해서는 안 되며, 문학기념관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주체와 해당 지역민들의 유기적인 관계 역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처럼 제기되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구두선(口頭禪)에서 원칙적인 것만을 확인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가령, ‘김유정 문학촌’인 경우 운영위원회란 조직을 두고 있는데, 여기에는 강원도의 문화예술단체장, 언론인,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민, 지역의 기관장 등 약 20명으로 구성되어 ‘김유정 문학촌’의 예산과 사업에 관련된 내용을 심의하고 집행하는 등 문학촌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전반적 사항을 검토한다. 물론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지역민들의 대표가 참여하여 자신의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문학기념관의 사업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운영위원회란 제도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문학기념관으로부터 비롯된 여러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될 수 있다고 나는 기대한다. 지자체와 몇몇 문화예술 명망가 중심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보다 이처럼 지역민과 함께 참여한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지역의 경제활동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문학기념관의 운영 방안을 모색한다면, 그동안 야기되었던 문제점들을 최소화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그 지역의 특색에 따라 궁구(窮究)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문학기념관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
본격적인 지방자치의 시대를 맞이하여 전국 각 지역에서는 지역 나름대로의 문화적 역량을 결집시켜 지역문화의 융성을 일구어내고자 지혜를 모으고 있다. 그 일환의 하나로 지역문학에 대한 관심 역시 커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노력이 뒤따르고 있다. 그 중 특정 지역의 연고를 중심으로 앞다투어 세워지고 있는 문학기념관은 한 작가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데 궁극의 목적을 두기보다 해당 지역의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의 창조적 발전을 위한 문화공간의 역할을 다 해야 되는 것이다. 단지 과거의 문학 자료를 ‘보여주기’에 급급한 전시공간으로서 자족한다면, 이것은 구태의연한 문학기념관의 역할을 벗어날 수 없다. 지역의 문화적 소외감을 문학기념관 건립을 통해 눈속임으로 가려서는 곤란하다. 문학기념관이 특정한 작가의 문학 세계를 우상 숭배하는 축조물이 아닌 만큼 이제부터라도 문학기념관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요구된다.
물론 이 인식의 대전환은 내가 힘주어 강조했듯, 문학기념관이 수동적으로 고정태로써 존재하여 문학적 위엄을 갖춘 화석화된 문화공간이 아니라, 직접 문화대중을 찾아나서며 그 작가의 문학적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문학적 열정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그리하여 문학적 체험을 문화대중이 극대화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실질적으로 자리잡는 것, 또한 문학을 비롯한 인접 예술 장르와의 창조적 만남을 통해 예술간의 장벽을 허물어 예술적 소통의 망을 형성하는 것 등을 실현화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이것은 문학기념관이 지역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화적 역량을 결집시킴으로써 지역의 문화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문화적 진지’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이제 문제는 이러한 문학기념관의 잠재적 힘을 어떠한 문화적 실천을 통해 구체적으로 발현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미 앞서 논의했지만, 지역민의 자발적 참여가 동반되지 않는 문학기념관의 문화적 실천이 한갓 공염불이기 십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문학기념관이 지역의 문화창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진지’이자 문화공간인 만큼, 지역민의 생활 현장 속에서 친연성을 갖고 지역민이 자발적으로 문학기념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다양한 문화행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사안이다. 지역민과 더불어 함께 지역문화를 일구어내고자 하는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지자체의 문화예술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 역시 전진적인 자세로써 지역의 문화 인프라를 생산적으로 구축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더 이상 그동안 보여왔던 구태의연한 행정 관행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노력들이 구체화될 때, 문학기념관은 지역의 ‘문화적 진지’로서 제몫을 다할 수 있으리라.

추천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