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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문학의 인프라> 시낭송회 견문록/엄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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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2,407회 작성일 04-01-04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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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회 견문록



엄 경 희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강사)




1. 지루하고 어색한 시낭송회
시낭송을 하는 모임에 참가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루하고 어색한 느낌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관객의 입장이 되어 몇 번의 참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도 이런 느낌은 오히려 시에 대한 참맛을 덜하게 하곤 한다. 시낭송을 관람하고 나면 시낭송에 매혹되어 다시 그곳을 찾고 싶다는 생각 또한 사라진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 풍부한 경험이라 할 수는 없지만 시낭송에 있어 나의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세 사람의 시인이 있다. 어느 TV 프로에서 백기완 선생이 자신의 시를 낭송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의 표정과 음성이 내면의 절박함을 너무도 간절하게-그것은 그야말로 간절함이었다-드러낼 때 그의 시는 단순한 심정 고백 이상의 것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정현종 시인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한 북한산 등산길에서 「내 어깨 위의 호랑이」라는 시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즉석에서 낭송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낭송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자연의 맑음과 시인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한몸이 되어 너무도 자연스럽게 시의 매력을 되돌려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정진규 시인의 시낭송은 어느 곳에서든 어색한 분위기를 제압하는 힘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시가 지닌 고귀함을 그의 독특한 호흡과 음색이 고스란히 살려내곤 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에는 주어진 상황을 넘어서는 자연스러움과 관객 앞에서의 자신감이 중요한 요건으로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에 시를 누구보다 잘 낭송할 수 있는 문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낭송회는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을 자아내는 것이 사실이다. 시낭송회의 주요 관객은 시인이며 거기에 몇몇 평론가들이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회자가 호명하는 대로 한 사람씩 나와 자신의 시를 읽고 끝나면 관객들은 무덤덤하게 박수를 친다. 모든 시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낭송을 하고 있는 당사자 자신도 불편함과 어색함을 드러내며 겨우겨우 시를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반대로 울먹이는 음성으로 혹은 격앙된 목소리로 시 구절을 낭송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감정에 겨운 목소리를 받아내기에는 낭송의 공간과 분위기가 너무나 건조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여전히 어색한 기분 속에 빠져 있는데 낭송하고 있는 시인 자신만 도취해 있는 경우 그 어색함은 극에 달하고 만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서 낭송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유쾌한 사담이나 나누며 시원한 맥주로 혀를 적실 수 있길 바랄지도 모른다. 낭송회를 찾아온 시인들도 낭송을 듣기 위해가 아니라 가깝게 지내는 문우들을 만나기 위해 그곳을 찾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시낭송은 그저 어느 잡지사의 행사에 끼워져 있는 지루하고 어색한, 그러나 안 할 수도 없는 행사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시낭송이 문학으로부터 파생한 또 하나의 예술 행위라면 그것이 관례적 행사 이상의 의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잡지사 홍보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회원들을 결속시키기 위한 매개가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온전한 문화 행사로 자리 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시낭송은 분명 혼자 소리 없이 시집을 읽는 행위와는 다르다. 그것은 육성을 통해서 시가 담고 있는 감정과 정서, 메시지 등을 재현해내는 독특한 구현 방식이다. 이때 시의 언어는 보다 생명적인 것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며, 보다 생생한 감흥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2. 시낭송도 공연 예술이다
시낭송도 일종의 공연 예술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인식은 매우 소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조창을 하는 경우 그것에 맞는 무대와 의상이 갖추어지는 것처럼 시낭송에도 나름대로의 격식이 필요하다. 몇몇 문우들의 사적 자리에서 즉석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낭송이 아니라면, 낭송회의 형태를 빌어 기왕의 잔치 판을 여는 거라면 낭송회의 주체나 낭송을 하는 시인 모두는 그것이 예술적 행위임을 스스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 때로 어색함에 압도되어 성의 없이 느껴지는 태도로 자신의 시를 읽는 시인을 보면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을 접을 수 없다. 무대에 오른 사람은 관객에게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와 더불어 대부분의 시낭송 무대가 너무나 구태의연한 형태로 꾸며진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때론 마이크 이외에 아무런 무대 장치도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당연히 낭송자는 몸둘 바 없는 냉랭한 공간에서 무미건조하게 시를 낭송해야 하는 것이다. 이 어색한 분위기는 곧바로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전염되곤 한다. 그나마 무대 장치가 되어 있는 경우에도 기껏해야 낭송자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쏘아주는 것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이런 무대야말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진부함이 무엇인지 확연하게 보여준다. 거기에 천편일률적으로 깔리는 비장한 음악들! 개인의 독특한 창의성과 개성을 늘 강조하는 오늘날의 미의식에 비추어볼 때 이는 얼마나 몰개성적인가! 예를 들어 목월이나 미당의 시를 낭송할 때와 띄어쓰기를 무시한 이상의 시를 낭송할 때, 그 질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무대와 음악이 각각 보조역할을 해야 하는가. 황지우나 박남철의 도상적 형태의 시를 무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들이 필요한가. 전통 서정성의 맥을 잇고 있는 문인수의 시와 포스트모던한 이원의 시를 하나의 무대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제대로 된 시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별한 기획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준비 과정 속에는 낭송할 시와 그것에 맞는 무대와 음악이 함께 조응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영국에서 온 어느 젊은 시인이 힙합(hiphop) 리듬으로 자기의 시를 줄줄 외어 낭송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고전 음악만이 아니라 때로 대중 음악을 시낭송을 위한 배경음으로, 예를 들어 황성옛터나 첨단의 기계음을 믹싱한 불협화음을 낭송의 배경음으로 깔면 어떨까. 한 줄기 벼락치는 소리나 북소리는 또 어떤가. 그리고 낭송자는 한 편의 시의 목숨을 되살려내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오브제화하면 어떨가. 살바도르 달리의 자서전을 보면 달리는 어느 연설을 위해 잠수복을 입고 두 마리의 그레이하운드를 끌고 연단에 오른 적이 있다. 기괴하지만 그의 예술 세계와 너무도 닮아 있는 연출이 아닐 수 없다. 연설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퍼포먼스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감격했으며, 그런 그의 해프닝이 현대 예술의 감각을 관객들에게 일깨워준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만일 그로테스크한 감각의 시를 낭송한다면 넥타이를 맨 정장 스타일보다 바디 페인팅을 한 몸이 더 시적 묘미를 일깨우는 데 효과적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요구에 대해 시인들에게 광대노릇을 하란 말인가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시인은 배우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놀이판을 창출해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예술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유희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글에서 두 가지 제안하고 싶다. 하나는 테마가 있는 시낭송회의 필요성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예술 장르와의 결합된 형태의 공연 무대이다. 다양한 시를 낭송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의 테마 속으로 관객을 이끌고 갈 때 보다 응집된, 그리고 긴장감 있는 무대가 연출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관객에게 놀이와 더불어 시가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갖도록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다른 예술 장르와의 결합은 구태의연한 기존의 시낭송 무대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라 생각한다.
․문학의 인프라
시낭송회 견문록|엄경희․

3. 시 대중화를 위한 전략
시가 좋은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이 시대에 시의 가치가 온전히 대접받고 있다고 자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는 여전히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아주 좁은 영역에 갇혀 있는 예술 장르인지도 모른다. 시와 일반 독자와의 교류는 겨우 학교 강의실에서나 이루어지는 것이 고작이다. 말하자면 시 독자의 대부분은 시인 자신이거나 평론가라 할 수 있다. 한편 삼 년이나 오 년 간격으로 나오는 개인 시집은 단돈 오천 원으로 매매되고 그나마 그것도 잘 팔리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가끔 문학의 대중화 논쟁이 일어나곤 하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문학의 대중화는 작품을 쉽게, 혹은 통속적으로 써야 가능한 것이라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문화의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보다 미적이고 보다 질적으로 뛰어난 예술을 생산해야 하는 것은 필수 과제이다. 그러나 독자가 없는 문학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시낭송회는 많은 대중들에게 시를 알릴 수 있는 훌륭한 문학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낭송회에 과연 독자가 대거 참여한 적이 있는가? 시에 관심 하는 사람들이 시인이거나 평론가인 것처럼 시낭송회에 초대되는 사람들 또한 문학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이는 서글픈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일반 독자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은 이런 형태의 낭송회가 갖는 의의가 무엇인지 우린 다시 되물어야 할 것이다. 폐쇄된 세계, 고립된 세계 속에서의 도취란 그야말로 ‘당신들의 천국’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위 이상의 것이 못 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시낭송회를 개방하는 것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볼 것이 없는 어색한 자리를 누가 열광하겠는가. 독자의 열의를 자극할 수 있는 성의 있는 자리를 만들지 않는다면 한두 번 낭송회에 참석했던 독자들도 곧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볼 것이 있는, 들을 것이 있는 시낭송회의 무대를 창안해냄으로써 난해하고 어렵다고만 여겨졌던 시의 절묘한 맛을 되돌려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독자와 시인 그리고 시가 하나로 교감할 수 있다면, 이는 문학의 영토를 확장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문학의 사회적 기여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잡지사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주최한 시낭송회가 국민적 차원의 축제 문화의 ‘전통’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불가능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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