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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문학의 인프라> 문화센터의 문학강좌를 듣고/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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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2,562회 작성일 04-01-0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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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의 깊이와 삶의 파문


한 아 름
(대학생)




국문과로 맞은 2학년 첫 학기에 꽤나 가슴을 벅차게 한 수업이 있었다. 물론 대학에 와서 맞는 학기들도 중 고등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설렘과, 이번엔 뭔가 해 보겠다는 의지로 눈을 반짝였지만, 사실 학기 중반에 접어들면 자발적인 의지라는 것은 봄볕의 나른함, 그것처럼 나른하게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옹알옹알대게 마련이었다.
“우리시대의 작가들”. 이것이 그 수업의 제목이었다. 거기서 처음 현역 비평가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학생들과 발표와 토론으로 하는 수업은 사실 첫 번째 수업부터 내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김영하의 단편작들(“엘리베이터에 끼인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흡혈귀”)을 놓고 발표하게 된 나는 작품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못 한 채-심지어는 중학생 수준의 독서 감상조차도 얘기하지 못 하고-김영하라는 작가에 대한, 작품외적인 어설픈 평가만 내리고 말았다. 잘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아마 마무리를 하면서 이랬던 것 같다.
“이런 점만 작가가 변화시킨다면 아마 더 좋은 작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소름끼치는 마무리이다. 아무튼 그 수업을 통해서 내가 무시했던 아주 기본적인 것들 몇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를테면 비평은 알아듣기 힘든 말들로 그럴듯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작품을 꼼꼼히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등등을 말이다.
교수님은 충분히 학생들이 의견을 말할 시간을 주셨지만, 항상 한 작가의 작품을 정리할 때는 교수님 자신의 비평을 선보이곤 하셨다. 나는 그것이 흥미로웠다. 한데 그것이 주입을 위한 강의나 또는 이미 인정을 받은 비평이 가지는 어떤 권위와는 달랐다. 선보인다는 말에서 보듯 교수님은 한 작품에 대한 자신의 논리에 차근차근 학생들을 유도하셨고, 그렇게 유도된 사고가 작품에 대한 어느 정도의 나만의 비평으로 자리잡을 때의 순간이 아주 즐거웠다.
적어도 나에게는 교수님의 비평이 굉장한 예의를 갖춘 가르침의 방식으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런 교수님이 문화센터에서 강좌 하나를 맡게 되셨다고 하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좌를 듣기 전에 기대했던 것들은 사실상 수업에서 이미 이뤄지고 만족했던 부분들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강의를 하신 비평가가 세 분이셨기 때문에 각각의 스타일을 인정해야 하면서 자연스레 깨지기도 했다.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학교 안에만 있으면 사실 바깥 공기의 필요성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바빠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생각의 여유로움을 가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의 부족은 강좌를 선택하면서도 나 또한 느끼지 못 했다.
우선 문화센터 강좌를 들으며 느꼈던 여러 생각들을 늘어놓기 전에 할 말이 있다. 인문학 강좌는 기술적인 것을 배우는 여타 강좌들(영어회화나 방송기술 서예 등등)과는 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문학 강좌가 여타 그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술적인 정보의 흐름보다는 생각의 흐름이 주된 강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짓도 안 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도 있고, 또 공책 몇 장을 글씨로 수를 놓고도 정작 머릿속은 아무 생각 없이 돌아올 수도 있다
문학강좌에서 비평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수업(사실 이 단어는 좀 쓰기 그렇지만 편의상 쓰도록 하겠다)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현장성’일 것이다. 전선에 나가있는 사람들의 얘기니 “누구누구가 이렇더라”가 아닌 “나는 이렇습니다”의 식이고, 그래서 그들이 문학계의 누군가를 비판할 때에도 그것은 단순히 지나가는 여담의 재미가 아닌 굉장한 현실감을 가져다 준다. 또 이것은 관심을 이끄는 힘의 강도와도 연관되는데, 아무래도 현장성을 지닌 비평가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학계 전반의 관심을 넘어서 비평가 개개인들의 삶의 모습에까지 그 관심도를 확장시키고 증가시킨다.
인간 사회에서, 누군가를 글이나 다른 매체들로 간접 대면한 것이 나중에 직접 대면을 하는 계기가 되는 것과, 어떤 사람을 별 정보 없이 만난 후에 그 사람의 다른 파편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는 두 가지 관계방식이 있다면, 내가 이번 문화센터에서 맺은 것은 후자에 가깝다. 물론 이미 내 귓전을 스쳐간 몇몇 비평가의 담론이나 일화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지나치게 사건화된 것이나 가쉽(gossip)거리여서 그것을 가지고 관심을 이미 가졌었다 하기에는 무리가 좀 있다.
문화센터의 강좌에서 꽤나 분명하고 괄목할만한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강의가 장기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개방된 곳이기에, 그래서 구성원들간에 어느 정도의 생각을 교환할 만큼의 상호 나눔의 기회가 부족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강의와 나 자신의 수준차도 꽤나 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화센터 문학강좌가 3개월 만에 비평가를 육성해내는 것이 목표가 아닌 이상, 그것은 그리 단점으로 비춰지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일반인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어느 정도 자생할 수 있을 만큼의 유효한 자극을 주었다면 강좌는 성공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문학이 죽어간다”느니 “인문학의 쇠퇴”라느니 등의 말들이 나오는 것은, 어차피 그것이 점점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여름의 강의에서 선정한 작품들과 비평은 평소 학교에서 접하기 힘든 것들이어서 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도 꽤나 흥미로웠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옹호한 작가들”이란 타이틀 아래, 우리는 여러 젊은 작가들의 시와 소설을 보았다. 때로는 작품 자체가 워낙 특이해서, 때로는 작가들과 비평가들 사이의 일화들을 간간이 들을 수 있어서 강의는 재미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해당하는, 비평가들의 비평도 단순한 흥밋거리의 수준은 넘어서 다가왔다. 그 옹호 안에는 반드시 적절한 비판이 함께했고, 양념처럼 끼는 약간의 쓴소리가 개인적으로는 선정된 작가들의 작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꽤 많을 걸 느끼고 생각해 보았었지만, 지금도 많은 부분은 그대로이다. 여전히 저명한 저자의 책을 더 많이 들었다 놓았다 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내 것에 옮기길 선호한다. 이제 국문과 1년을 보낸 학생으로서 얼마나 많은 분별력이 있겠냐마는 그것이 타이틀에 대한 맹신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임을 아는 나로서는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도 강좌를 들으면서 시나브로 경계하게 된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이제는 또 다른 의지를 샘솟게 하는 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별하지만, 특이하다고만 치부할 수 없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눈 좀 돌려야 하지 않겠냐는 나름대로의 의지 말이다. 물론 지금의 마이너가 메이저가 된다면, 또 다른 마이너를 선별하여 볼 줄 아는 눈도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강좌를 들으면서 가지게 된 나의 비전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구체적으로 쓰지 못 하는 것이 내가 꼽는 나의 단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그때의 강의 주제나 포인트는 별로 인상 깊게 남지 않았다. 대신 나름의 분류 기준으로 삼았던 비평가에 대한 내 예상의 이미지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깨진 이미지, 그리고 끝에 생긴 작은 관심들이 적절히 버무려진 정도, 그 정도가 내 머릿속에 인상으로 남아있다.
2학년 둘째 학기에 이런 수업이 있었다. 교수님이 매 시간 주제작가에 대한 강제성 없는 레포트를 내 주시고 다음 시간에 그것을 써온 학생의 것만 나와서 읽게 하는 수업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듣고 이상한 점이나 궁금한 점을 질문하면 되는 방식이었다. 강제성이 없었기에 써오는 학생은 많지 않았지만, 발표문도 없이 집중해서 듣는 수밖에 없는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여간 집중하기 힘든 수업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의 발표수업이 발표자가 미리 정해져 있고, 또 발표시에 발표문을 기본적으로 나누어주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래서 발표문을 보면서 꼼꼼하게 짚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질문의 초점들은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든 문장으로 맞춰졌다. 그렇게 매 수업마다 교수님은 작게는 잘못된 문장구조를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더 나아가서는 학생이 인용한 비평문의 출처나 인용한 비평문에 대한 학생 자신의 이해 상태를 물어서 때로는 학생이 주장 자체를 번복할 수밖에 없는 치명타를 날리기도 했다.
보통의 학생들은 때로 자신의 레포트의 서두나 말미에, 딴에는 참신함이나 파격을 주려는 의도로 비평가의 비평문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고들 한다. 그것은 글 잘 쓰는 것에 유난히 신경 쓰는 국문과 학생들에게는 더더욱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처음부터 읽지 않은 비평문 원전 중 한두 문장을 자기식대로 해석해 아전인수격으로 떼다 붙이는 경우가 생겨나고, 그 해석이 맞지 않는 이상 결론이 번복되는 것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별로 재미나는 수업은 아니었지만, 들으면서 여름의 강좌를 많이 떠올리곤 했다. 그것은 한 학생이 문화센터 강좌를 맡았던 강사의 비평을 인용했다 크게 혼이 난 일이 있어서이기도 했고, 학생들이 비평문 한두 줄로 자신있게 제 글밭에 물을 대놓고 있는 모습이 강의를 하셨던 비평가들이 두 시간 동안 자신들의 보따리를 조곤조곤 조심스레 풀어놨던 모습과 대비되어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문학비평가라는 직업을 가진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그때의 경험은 아직도 참 신선하고 떨리는 기억들로 남아있다. 누군가를 만나서 무언가를 직접 나눈다는 것이 굉장히 큰 자극을 준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비평가와 나의 만남뿐 아니라, 같은 관심사로 모였던 다른 여러 분들과의 만남도 참 소중하다. 참고로 그 중엔 영어 선생님도 있었고, 가정주부도 있었다. “계속적인 만남을 하자”라고 약속한 것이 지금은 잘 지켜지지 못 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씩 전화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가 그때의 기억을 새롭게 한다.
나만 좋았을 것이라 생각되어지지만은 않는다. 듣는 사람 없는 비평과 읽을 사람 없는 작품은 사실 소용없지 않은가. 소수였지만, 기대 가운데 자리했었던 그들에게서 비평가들도 많이 느끼셨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결국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일정한 기준 없이 모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나눔 속에서, 기쁨과 새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문화센터 강좌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만남이 관심을 유지시키는 데 가장 좋은 약인 것 같다. 비평가가 여러 작가에게 관심을 가지듯이, 일반 독자들과 비평가, 작가들과의 관계도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자주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마지막 쫑파티에서, 하루 종일 굶긴 뱃속에 급히 들이켠 술 몇 잔이 그동안 이미지 꽤나 관리했던 나를 문화센터 온 식구들 앞에서 인사불성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 해도 짧았던 7, 8, 9월의 신촌의 저녁은 제발 빈 머리, 빈 가슴으로 요란히 울리지 말라고, 꽤나 시끄러웠다.

추천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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