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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공연장의 인프라> 극장의 아우라가 변하고 있다/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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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아우라가 변하고 있다.
김 남 석
(문학평론가. 고려대 강사)
1. 옛날 극장의 냄새
나는 가끔 혼자서 영화관에 간다. 혼자 갈 때는 가급적 강북의 오래된 영화관을 찾아간다. 단성사, 중앙극장, 스카라극장, 대한극장, 그런 영화관들이 있는 사대문 안이 내겐 진짜 서울이다. 주변에 나직한 집들이 늘어서 있는 그런 동네의 뒷골목에서는 항상 생선 굽는 냄새가 난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기 위하여 명보극장에 혼자 갔다. 너무나 오랜만에 찾아간 탓으로 영화관이 매우 현대적인 신축 건물인 데에 놀랐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서울이 마음속에서 점점 낯설어져간다. 표를 사고나니 영화 상영시간까지 한 시간 넘어 시간이 남았다. 옛 친구 같은 진짜 서울의 한복판에서 이렇게 남아도는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혼자서 영화구경을 가는 재미의 중요한 부분이 이 창자 속 같은 옛날 거리를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한가함에 있다. 초겨울 볕이 가득히 고인 가게도 기웃거리고 전지, 싸구려 시계, 공구, 가위, 테이프 등을 늘어놓고 파는 노점 앞에 서서 들여다보기도 하며 이런 동네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면 마음이 느긋해진다. 문방구, 지물포, 짜장면집, 도장방, 구멍가게, 옛날의 모습과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김화영, 「냄새와 기억」, 『바람을 담는 집』
김화영의 글은 현실보다 아름답다. 그의 글은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현실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낡은 것에 향기를 입히고 빛을 잃은 것에 광택을 입힌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사라져 가는 세상을 안타깝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것은 현실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이 담아내지 못하는 기억을 소담하게 옮겨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고 나면 그러한 기억을, 그러한 감식안을 갖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러나 아름다운 김화영의 글도, 과거의 영화관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붙잡아두지 못 한다. 김화영은 명보극장의 변한 모습에 놀랐다고 했지만, 그를 놀라게 했던 명보극장보다 더욱 놀라운 극장들이 서울 곳곳을 점령하고 있다. 기억과 냄새를 잃고 허물어지는 옛 극장의 폐허에, 더 거대하고 더 복잡하고 더 화려해진, 그래서 과거의 향수조차 좀처럼 떠올리기 힘든 현대식 건물들이 휘황한 외관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새로이 신축된 명보프라자는 지상 7층, 지하 4층 규모의 5개관으로 완공되었으며 1관 494석, 2관 378석, 3관 432석, 4관 432석, 5관 304석 등 총 좌석수 2040석 규모의 국내 최대의 상영관을 자랑하였다.
한편 극장설계는 1992년 대한민국 건축대상을 수상하고 <예술의 전당>설계를 담당했던 김석철 씨가 직접 맡았었는데, 김석철 씨는 1994년 건축대상출품작으로 <명보프라자>를 선정하여 출품했으며 그 해 최고로 아름다운 건축대상을 수상하여 명실공히 실용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극장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다.
1994년 새로이 개관한 명보프라자는 각종 최첨단 시설을 구비하여 대고객 서비스에 만전을 기하였는데, 먼저 영상 시설의 영사기 부분에 있어서는 무인 자동 영사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영사사고 예방을 가능하게 하였고, 대한민국 최초로 최첨단 음향 시설인 THX(루카스 사운드 시스템)와 DTS(돌비 디지털 사운드 시스템)을 설치, 고음에서도 깨끗한 음질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이때부터 음향면에서는 국내에서 명보프라자를 따라올 곳이 없었으며 음향=명보프라자라는 등식이 성립하였고, 국내에 디지털 사운드 음향시대를 열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1994년 국내최초 5개관으로 멀티플렉스 극장의 시대를 선두해 오며 새롭게 오픈한 명보프라자는 그후 다수의 멀티플렉스 극장이 국내에 설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오다가 보다 편리한 고객편의를 위해 또다시 2001년 9월부터 약 3개월에 걸쳐 극장내부의 인테리어 및 좌석간의 간격을 기존 극장보다 넓은 105㎝~120㎝로 넓히는 공사를 했으며 그간 사용해 오던 명보프라자란 명칭을 <명보극장>으로 정식 변경하여 또다시 새롭게 태어났다.
―「영화관 소개―명보극장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http://www.myungbo.com/theater/cinema00.asp
위의 인용문은 명보극장(현재 정식 명칭은 명보프라자이다) 홈페이지에서 빌려왔다. 자신의 영화관을 소개하는 글이라서 과장된 측면이 다소 있지만, 가감하고 살펴보면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상영관이 많다는 것이다. 지금은 14개의 상영관을 가진 멀티플렉스 극장이 출현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5개는 대단한 수준이었다. 이것은 다양한 영화를 동시에 상영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기 위함이다.
둘째, 극장에서는 영화만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거두고, 영화관 자체를 하나의 아름다운 볼거리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명보극장은 뛰어난 건축물에 수여되는 상을 받게 된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여건이 보다 중요해졌음을 뜻한다.
셋째, 극장의 내부 시설이 고려되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지어져서 관객들이 그 설계에 온몸과 시청각 감각을 맞추어야 했던 시대는 지났다. 영화관은 보다 편안하고 쾌적하게 영화 관람을 할 수 있도록 부대 시설을 배려해야 한다. 음향 시설과 좌석 시설은 선전문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중요한 점검 사항이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개선 주기가 짧아졌다. 명보극장이 1957년 8월 25일 그레이스 켈리, 빙 크로스비 주연의 <상류사회>를 시작으로 1234석 규모의 단관으로 개관하였다. 그러던 것이 1993년에 와서야 대대적인 개축을 시도한다. 그런데 개축한지 10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개축을 시도한 것이다. 이는 극장의 변화가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증개축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것은 김화영이 열거한 강북극장이 이미 맞고 있거나 조만간 맞게 될 운명이다. 대한극장과 중앙극장은 발빠르게 변신했고, 단성사는 지금 변신 중이다. 스카라극장은 비교적 10년 전의 모습을 지키고 있지만, 그것도 중간에 작은 변신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것 같다. 과거의 극장은 꿈의 자리로 남고, 그 자리에 건물이 높게 오르고 상영관이 여러 개로 분할되고 영화관에 기생하는 패스트푸드점과 문화 공간이 선물세트처럼 오밀조밀 모여든다. 지금은 이른바 멀티플렉스 극장의 번성기인 셈이다.
2. 현실이라는 기차의, 영화라는 객실 창문
요하임 패히는 영화의 전사(前史)를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영화관의 전사(前史)를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화관은, ‘영화적 지각 방식’이 응축된 물상을 가리킨다. 19세기 말에야 등장하는 영화에서부터 영화적 지각 방식이 출현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문물을 통해 이미 영화적 패러다임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그 문물로, 기차. 파노라마. 백화점. 콘베이어 벨트 등을 예로 든다. 이 중에서 기차에 대한 관찰은 무척 신선하고 그럴 듯하다. 그의 주장을 옮겨 보겠다.
1820~30년대 사이에 기차는 현실의 예술적 재현에 변화를 가져왔다. 기차는 마차와 달리, 지속적이고 안정적이고 차단된 움직임의 상을 제공했다. 마차였다면 흔들림이 있고 가끔 내려야 하고 말들의 근육적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았어야 할 풍경이, 차창 너머로 흘러가 듯 스쳐 지나가는 경험으로 대체되었다. 속도는 점차 증가되고, 차창 밖 풍경은 하나의 그림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가 지나가는 영상으로 변화된다. 이러한 변화는 시공간의 기본 개념을 흔든다. 기차를 통해서 바라보여진 세상은 공간이 죽고 시간이 산 어떤 것이다.
공간의 상실은 너무 많은 시간을 남겨 놓았다. 기차 객실로부터의 시선은 이제 움직임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보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내면으로 향하게 된다. 여행객은 자신의 생각과 꿈에 몰두하거나 새로 등장한 기차 도서관이 제공하는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이제 문학적 상상이 출발과 도착이라는 두 지점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게 된다. 나중에 객실 창문의 자리에, 기차 여행과 더불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내용을 움직임의 단순한 상에 되돌려주는 영화관 화면이 들어선다면 그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Peach, 「Unbewegt bewegt」
영화적 지각 방식의 출현을 센스 있게 설명한 글이다. 패히는 이 글에서 기차라는 신문물의 탄생이 어떻게 하여, 영화적 표현의 패러다임과 관련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여행객은 스쳐 지나가는 그래서 파악하기 힘든 외부의 풍경을 보는 것에서 내면의 풍경을 관찰하는 것으로 자신의 작업을 바꾼다. 패히는 그것을 ‘기차 도서관이 제공하는 책을 읽는’ 행위로 표현했다. 지나가는 영상은 바라보는 자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움직임으로 채워지고, 그것은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속 영상을 동작하게 만든다. 그것이 영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조금 확대하면 영화관은 마음속의 열망-사실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바라보는 자의 것이었다-을 차창 면에 투영시킨 하나의 기차이다. 아니 기차의 이미지가 집으로 변한 마음의 공간이다. 그래서 패히는 그 마음의 공간을 꿈의 공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꿈은 조금 넓은 의미로, 세상을 읽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행위 전체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인 것 같다. 기차에서 움직이던 승객은 “이제 더 이상 통과한 풍경만을 단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외부 세계, 꿈, 공포, 희망, 간단히 말해서 상상적인 것을 기록한 움직이는 상의 관찰자”가 됨으로써, 영화관 속의 관객이 된다. 그러니 영화관은 “상상의 여행을 떠나 마음의 차창을 구경하고자 하는 꿈이라는 기차”가 된다.
영화관은 삶의 외곽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련도 많았다. 보드빌 극장에 기생하기도 했고, 영화관에 영화가 아닌 것들의 군거생활을 용인해야 하기도 했다. 그러다 대중의 사랑을 얻으면서, 영화관은 점차 예술의 중심으로 편입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현실 너머 꿈을 보려는 사람들로 점차 붐비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영화관은 도시의 중심으로 옮겨 자리잡고, 도시인의 욕망과 형식을 세밀하게 모방한다.
도시가 복잡해지고 욕망이 복잡해지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복잡해지면서 영화관은 그 복잡함에 물들어간다. 영화관은 혼란과 욕망이 뒤범벅되고, 꿈과 형식이 길항하며 대립하는 공간으로 변한다. 이것은 도시의 인상 그 자체이다. 패히는 “현대적 매체인 영화관이 현대 도시와 명백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한다.
서울의 영화관도 이런 영화관의 운명을 따른다. 앞에서 말한 김화영의 영화관은 그 당시 현실을 살아가던 도시인들의 혼란과 욕망과 형식과 꿈을 말해준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혼란한 도시의 외관을 축소한 것 같은 허름한 극장들. 그러나 그 극장들은 당시 사람들의 욕망과 삶의 형식이 응축된 ‘꿈의 공장’이었다.
멀티플렉스는, 세련되게 치장된 또 다른 형식의 ‘꿈의 공장’이다. 세련된 치장은 도시의 치장에서 비롯된다. 서울은 급속하게 변화했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도시인의 마음속에서 야기되었다는 점이다. 욕망의 질감이나 표현의 방식이 변화했다. 당연히 꿈의 공장이 찍어내는 꿈의 내용도 변화했다. 멀티플렉스는 변화된 꿈의 내용을 담는 새 용기이다.
영화는 이제 문화의 핵심이다. 문화적 공간이 영화관을 감싸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문화는 생활의 중요한 일부이다. 그래서 생활 공간이 문화 공간처럼 치장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다양하다. 획일화되고 강요받는 식으로는 욕망의, 제대로 된 실현이 어렵다. 그래서 영화관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내용 못지 않게 형식도 중요하다. 아무리 영화 내용이 좋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관람객의 형식적 인프라가 충분해야 한다. 영화관의 세부 시설이 바뀌고 관람객의 편의가 고려되는 것은 이러한 형식적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해서이다.
꿈은 잠시지만 삶의 활력소가 된다. 하여, 그 꿈을 넓히려는 시도가 자주 있어 왔다. 이것이 영화관을 현실의 변두리에서 삶의 중심으로 불러들인다. 도시의 중심뿐 아니라, 생활의 중심으로. 그래서 영화관은 집과 가까운 곳으로 자꾸 이사를 오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꿈이, 현실이라는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고 싶어하는 내면의 풍경이, 소중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3. 사례 관찰에 한 보고서
3.1. 새로운 극장 문화의 선도와 활성화 : C.G.V 강변 11의 경우
본격적인 멀티플렉스 극장의 서막을 연 극장은 C.G.V 강변 11이다. 11개의 상영관을 거느린 복합 영화관이 강변역 테크노마트 내에 개관하면서, 멀티플렉스 개념과 새로운 극장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한다.
극장가에 멀티플렉스(multiplex) 바람이 거세다. 최근 서울과 인근 신도시를 중심으로 멀티플렉스 개관과 건립 소식이 줄을 잇는다. 멀티플렉스란 첨단시설을 갖춘 6개 이상 스크린에 쇼핑, 외식, 위락 시설이 함께 들어서 다양한 위락거리를 제공하는 극장을 일컫는다. 한국에는 98년 4월 서울 구의동에 11개 스크린을 거느린 이 들어서면서 본격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렸다. 지난 1년 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10여 개가 뒤를 따른다. 26일 개관하는 평촌 8개관 <킴스시네마>와 부천 중동 6개관 <씨네씨마>는 멀티플렉스 열풍이 인근 신도시로 확산됐음을 알린다. 두 극장을 운영하는 영화사 <좋은 친구들>은 지난 1월 4개관으로 출발했던 <킴스시네마>가 6개월 동안 올린 관객동원 실적에 고무되어 있다. 나경환 실장은 “인근 극장보다 객석점유율이 10% 이상 높았다”며 “그간 낙후됐던 지방도시 극장들 사이에 서비스, 설비투자 경쟁이 이어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멀티플렉스 건립을 주도하는 것은 제일제당 cj골든빌리지. 에 이어 2001년까지 전국에 8개를 세우는 계획을 확정지었다. 각각 11월, 12월 개관을 앞둔 과 에서, 2000년 12월 열 , 2001년 12월 완공할 과 까지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부산 서면(12개관)과 해운대(9개관)에 세울 2개 멀티플렉스와 대전(8개관)까지 포함하면 전국에 89개 스크린을 아우르는 막강 배급라인을 갖추게 된다.
―이동진 기자(djlee@chosun.com), 「Multiplex 이젠 멀티플렉스로 간다」, 『조선일보』, 1999년 6월 18일
멀티플렉스 극장의 열기는 한국 영화의 성장과 함께 전국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평촌, 부천, 신도시 등에 멀티플렉스 극장이 지어졌고, 그 이후에도 대전, 부산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붐을 조성하고 가열시킨 극장이 C.G.V이다. 그리고 C.G.V의 최초 극장이 C.G.V 강변 11이다.
C.G.V는 1995년 8월 제일제당 내 멀티미디어 사업본부 극장사업팀으로 시작된다. 1996년 12월 한국 제일제당(CJ), 홍콩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 호주 빌리지로드쇼 (Village Roadshow) 3개 회사가 투자하여 씨제이골든빌리지를 설립한다. 1998년 4월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 C.G.V 강변 11을 개관한다. 1993년 3월 제일제당과 빌리지로드쇼가 합작하여 씨제이빌리지 설립를 설립한다. 1999년 12월 C.G.V 인천 14를 개관하고 그후 분당(야탑, 오리), 부산(서면, 대한), 대전, 부산(남포), 서울(명동, 구로, 목동)에 차례로 멀티플렉스 극장을 개관한다. 2002년 8월 빌리지로드쇼에서 씨티그룹 CVC아시아 퍼시픽으로 주주가 변경되면서, CJ CGV(주)로 사명도 변경된다.
이러한 공식적인 연혁에서도 나타나듯이, C.G.V의 멀티플렉스 극장 설립은 한국 영화계의 배급망을 개선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도 최첨단 위락 시설을 갖춘 영화관을 보급함으로써 영화 산업의 육성과 성공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이것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한국 영화계에 끼친 첫 번째 공로이다.
두 번째 공로는 고객인 관람객에게 관람의 즐거움을 높이는 방식을 알려주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영화관은 영화관의 소프트웨어인 영화작품으로 평가받는 경향이 다분했다. 비록 현대적 시설을 갖춘 극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가에 따라, 극장의 수익과 관객의 출입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G.V의 출현으로 이러한 소프트웨어 위주의 극장 경영에 변화가 일어난다. C.G.V 는 영화관이 복합 문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첫 번째 사례이다. 관람객은 단순히 영화만을 즐기러 C.G.V를 찾지 않는다. C.G.V 가 위치한 테크노마트는 전자 제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대형 상가이다. 그리고 각종 먹거리와 일상 용품을 비치한 쇼핑 공간의 개념을 겸비하고 있다. 관객들은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사고 혹은 정보를 얻으러 테크노마트를 찾았다가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할 목적으로 C.G.V를 관람 극장으로 선택한다.
세 번째 공로는 복합 영화관의 주는 이점을 최대로 누리도록 한 것이다. 11개의 스크린에서 서로 다른 작품이 상영됨으로써, 폭넓게 작품을 선택하거나 다른 작품으로 쉽게 대체하거나 시간대에 알맞은 영화를 고를 수 있는 여건이 자연스럽게 마련된다. 이것은 단일관이나 2~3개의 상영관만을 가진 극장이 따라오기 힘든, 독보적인 이점이었다.
네 번째 공로는 상영관 내부 관람 시설의 획기적 개선이다. 지금은 많은 극장이 멀티플렉스의 외형을 갖추고 관극 시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C.G.V 이전만 해도, 객석은 비좁고 앞사람의 머리에 방해받고 등. 퇴장 입구는 혼잡하고 로비는 작고 화장실은 지저분했다. 이로 인해 관람객들은 극장 내부에서 편안함을 쉽게 얻지 못 했다.
C.G.V 는 사소하지만 불편했던 관람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한다. 내부를 관람에 알맞게, 외부를 기다림에 편리하도록, 그리고 극장의 외형을 산뜻하게 바꾼다. 각종 편의 시설도 확충하고, 복합적인 위락 시설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고심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시설(식당, 은행, 전자상가, 쇼핑센타, 오피스텔, 사무실, 이벤트 공간)이 골고루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신경을 쓴다. 이로 인해 관람객의 인식이, 영화관은 영화만 구경하는 장소가 아니라 영화관 자체도 구경하는 공간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확산되는 계기가 조성된다.
3.2. 최첨단 설비와 대규모 위락 공간 : 메가박스의 경우
<메가박스>는 삼성동 코엑스에 위치한다. 16개의 영화관과 1개의 4D 영화관을 갖추고 있다. 2000년 5월 13일에 개관했는데, 개관한 지 3개월 만에 100만 관객을 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명보극장이 1957년에 개관하여 1993년 일시 중단할 때까지 관객수가 2000만 명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관객수가 아닐 수 없다.
이 영화관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최신식 시설과 도전적 서비스 사업을 갖춘 극장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극장을 둘러싼 주변의 편의 시설이다. 이 극장은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몰 내에 있다. 코엑스몰은 현대백화점,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도심 공항터미널, 트레이드 타워, 아셈타워,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 코엑스 전시장, 코엑스 컨벤션이 모여 있는 대규모 빌딩 군락의 지하에 마련된 지하 쇼핑공간을 총칭하는 공간의 명칭이다. 지하와 지상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으며 주변은 대단히 넓은 간선도로와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다.
코엑스몰은 국제적 감각에 걸맞는 크기와 컨셉을 지니고 있다. 코엑스몰 디자인의 기본 테마는 강이다. 코엑스몰을 관통하는 길은 강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남측의 밀레니엄 광장에서 시작된 물은 산마루길, 호수길, 수풀길, 폭포길로 이어지고, 코엑스몰 중앙의 행사마당에 모였다가 다시 계곡길, 강변길, 열대길 및 바다길로 이어지고 북측의 아셈광장에서 끝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각종 상점, 식당, 은행, 박물관, 수족관, 휴식처, 이벤트 공간이 위치하고, 대략 중심부에 메가박스가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배치는 문화적 자급자족을 가능하게 한다. 소위 말하는 위락 시설과 편의 시설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 그 자체로 문화적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메가박스라는 영화관은 주변 시설의 막대한 인프라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리상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메가박스의 모토는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관’이다. 상업성을 앞세운 극장의 목표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주변 여건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모토는 사실무근은 아닐 듯하다. 많은 젊은이들이 영화관 자체의 매력에 끌려 이 영화관을 찾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객 수와 예약 현황에서 나타나고 있다.
극장 속의 필수 공간들을 점검해 보자. 극장은 관객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과 출연자나 스텝이 출입할 수 있는 양분된 공간을 갖게 마련이다. 전자를 FOH(front of house)라 부르고 후자를 Backstage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곳은 FOH이다.
FOH를 구성하는 첫째 공간은 객석(Auditorium)이다. 객석은 관람객이 앉아 영화를 보는 공간이다. 영화관에서 객석은 두 가지 관점에서 점검되어야 한다. 하나는 한 사람의 관람객에게 할당된 전용 면적의 크기이고, 다른 하나는 최적의 시야선(Sight line) 확보 여부이다. 메가박스는 두 측면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일단 좌석의 전용 면적이 커서 관람객이 편안하게 앉을 수 있고, 스크린과 객석을 가로막는 장애물의 최대한 제거되어 있다. 특히 급경사를 이루면서 정렬된 객석의 구조는 스크린과의 거리마저 적절하게 조정함으로써 보다 쾌적한 시청을 가능하게 한다.
두 번째 공간은 로비이다. 과거 로비는 통로의 기능만 부과되었지만, 최근에는 개방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관람객은 이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동행인과 사교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고 입장에 대비한다. 메가박스는 로비의 기능을 두 개로 나누고 있다. 그 분할은 개찰구가 담당한다. 개찰구 밖은 위에서 말한 개방된 행동이 가능한 로비이다. 그러나 개찰된 이후에는 단순 통로의 기능만을 하는 또 하나의 로비를 만나게 된다. 멀티플렉스는 다수의 영화관이 복합적으로 자리잡은 영화관이다. 그러므로 다른 영화관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안쪽 로비의 개방적 기능은 소거된다.
매표소(Box Office)도 멀티플렉스에서 중요한 공간이다. 많은 상영관이 있고 많은 인파들이 몰리기 때문에, 매표소는 혼잡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매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공간 배치가 멀티플렉스 극장의 고심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각종 할인 혜택과 자체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메가박스의 경우, 매표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는 편이다. 그로 인해 매표소의 혼잡이 가중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는 메가박스가 시정해야 할 사항 가운데 하나이다. 비록 10개의 부스를 운영하고 전광판을 통해 매표 현황을 보여주는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매표소의 혼란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매표 시간도 문제지만, 매표소의 혼잡으로 인해 로비에서의 차분한 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쾌적한 관람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식음료공간도 중요한 부대 시설이다. 흔히 식음료공간 운영이 예술경영인들에게 어려운 과제라고 한다. 관객 수의 유동성이 쉽게 예측되지 않기 때문이다. 메가박스는 3개의 매점과 한 개의 커피 전문점을, 로비를 둘러싼 형태로 배치해 두었다. 이로 인해 외부에서 식음료공간은 어느 정도 해결된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식음료의 극장 내 반입 허용이다. 이러한 허용은 쾌적한 관극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이 밖에도 보관소(Check Room)나 탁아시설, 화장실 같은 부대 시설이 중점 점검 대상이다. 코엑스몰은 보관소의 기능이 약소하다. 탁아시설도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이것들은 한국적 상황에서는 필요한 시설이다. 이러한 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 한 것은 약점이다. 반면 화장실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특히 개찰구 안쪽의 공간에 화장실을 배치하여 이용의 편의를 도모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밖에 흡연구역을 별도로 설치하고 있고, 공중 전화 부스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메가박스의 자체 내 시설은 대단히 훌륭한 수준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표를 구하는 것이 은근히 어렵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코엑스몰이 확보하고 있는 문화적 편의 시설로 인해 인파의 집중은 더욱 가중된다. 이것은 메가박스의 인기를 말해준다. 그러나 많은 인파와 부족한 표로 인해, 그 인기가 관극의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잔존한다. 이로 인해, 지역 주민들에게 보다 가깝고 친숙한 영화관의 설립이 요청된다.
3.3. 지역 영화관의 한 사례 : 씨네월드
8호선 강동구청 역 2번 출구로 나와 전철역에서 약 2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6개관으로 되어있으며 커다란 주차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ARS로 24시간 상영시간을 안내해주고 있으며 전화예약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극장이 당일 예매는 안 되는데 씨네월드의 경우엔 당일 2시간 전까지 예약을 받으며 상영시간 30분 전까지 매표소에 가서 예약번호 확인 후 표를 구입하면 된다.
극장 주변엔 이용할 만할 시설이 별로 없다. 영화관 건물 하나에 그 주변의 건물은 대부분 사무실이다. 영화관 안에 조그만 매점과 커피숍이 있으며 다른 곳에서 손님이 오기보다는 거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극장.
하지만 만약 차가 있고 강남 쪽에 사람이 많아 표가 없다면 이곳으로 와서 한가하게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다. 주차비도 무료인 데다가 영화관 내부의 시설도 괜찮은 편이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장점은 많이 기다리지 않고 손쉽게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http://www.cineseoul.com/movies/theater.html?theaterID=134003
한 영화 정보 사이트에서 발췌한 상영관 정보이다. 취재 기자가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위의 정보는, 대체로 정확하다. 단, 오래 전에 작성한 것인지, 전화예매가 없어졌고 상영관이 두 개 더 늘었다는 추가 정보는 나와있지 않다.
위의 정보 중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별다른 부대 시설이 없고 영화관만 덩그라니 있는 주변 배치이다. 이것은 코엑스몰 내에 있는 메가박스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다른 하나는 취재 기자도 인정한 것처럼, 손쉽게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상영관을 8개나 가진 멀티플렉스 극장이기 때문에, 도심 소재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 프로그램이 대게 갖추어져 있다. 상대적으로 관람객이 적은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경우, 편리한 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극장은 강동구에 위치한다. 주변은 주택가이고, 큰 도로를 통해 도심과 곧장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따라서 도심에서 일부로 이동해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조금 무리이다. 따라서 이 극장은 주변 주민들을 겨냥한 상영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즉, 지역적 특성을 감안해서 도심 외곽에 의도적으로 설립된 영화관인 셈이다.
이 극장은 소득 수준이 높고 주거 지역이 밀집했다는 인근 지역의 특징을 고려하여 지어졌다. 이를 감안하지 않을 경우, 이 극장은 일찌감치 재정 적자로 파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극장은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으면서 유지되고 있다. 점차 그 명성과 편리함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최신 시설, 대형 스크린, 무료 주차시설과 같은 편의 시설의 확대에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인근 지역 주민의 문화 공간이라는 개념의 확산이 있다. 휴일이나 한밤중에 가족끼리 나들이 삼아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비교적 단거리를 이동해 온 인상이다. 이것은 영화관이 편의점이나 대형 할인 매장처럼 이미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중심으로 이동해 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영화관은 작정하고 가는 독립된 문화 공간이 아니라, 지역 주민과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이 어울려 문화적 향유를 즐기는 친숙한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씨네월드는 C.G.V나 메가박스처럼 기능성 혹은 상업성 입지 조건을 두루 갖춘 상태에서 대규모 관람객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극장이 생존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또한 영화관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문화 인프라 창조의 현실적 모델이다.
4. 꿈의 공장을 꿈꾸며
「시네마천국」이나」 「마제스틱」을 보면, 영화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주는 꿈의 공장이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그들의 피로를 푼다. 영화관은 때로는 멋진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하고, 바깥 세상의 소식을 듣는 통로가 되기도 하며,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사교를 펼치는 대화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드물지만 누군가에게 직장이 되기도 한다.
마셜 맥루한은 인쇄 문화, 즉 문자 문화가 인간을 고독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인간들은 문자라는 개인적 소통 수단을 얻는 바람에, 읽고 해석하고 궁리할 공간을 자연스럽게 필요로 하게 되었고, 웃고 떠들고 대화하고 논쟁하면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공간은 상대적 중요성이 덜하게 되었다. 구술 문자가 버티던 사회에서의 군집 개념은, 문자 문화의 도래와 함께 점차 흐려져 탈부족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영상 문화, 혹은 그 이후의 전자 문화가 발달하면서 문자 문화 시대에 거부되던 군집이 새로운 형태로 재개되기 시작했고, 이것을 맥루한을 재부족화(retribalization) 현상이라고 명명했다.
영화관은 영상 문화, 혹은 이미지가 재생되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관람객들은 단일한 개체로 개인적 공간을 고집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영화관은 이미 영화관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집단에 포함될 마음의 준비와 각오를 다진 상태이다. 영화관을 선택하고 표를 사고 로비에서 함께 볼 동료(?)들을 둘러보고 기꺼이 그들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허락하는 것은, 한 공간을 공유할 누군가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부족처럼 모여, 잠시지만 서로의 존재감을 더듬는다(그들이 영화관람에서 사용하는 감각도 문자 위주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은 청각적이고, 맥루한적 의미에서 촉각적인 감각에 의존한다. 그들은 감각적 통합을 중시하고 불연속적 이미지의 나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그들은 이미 문자 문화의 세대에서 이탈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관객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군집을 이룰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영화관람을 할 수 있다. 고독하게 혼자 보는 영화는, 영화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것은 개인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비디오 관람과 다를 바 없다. 조금 과정해서 말하면, 화면이라는 독특한 상형 문자를 읽는 행위에 불과하다.
영화관은 공간을 공유하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그 사람들은 서로를 일정한 거리 밖에서 만나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군집은 자연스럽게 요망되고, 영화관은 그러한 군집이 보다 편안하고 감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최근의 극장들은 이를 위해, 영화관의 이미지 수정과 시설 개축과 관람 아이디어를 궁리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관이 문화 공간임을 인정한 처사이다.
영화관이 문화 공간임을 인정한다면, 그 공간은 문화적 컨셉과 비전을 갖춘 공간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서울과 주변 지역에서 붐처럼 일어나는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그 공간을, 편의 시설의 물리적 확충과 시각적 화려함에 지나치게 할애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주변의 위락 시설을 늘리고, 상영관을 늘리고, 좌석 수와 좌석 간격을 늘리고, 각종 혜택을 늘리고 있다. 이것은 양적 확장을 가져온다.
아쉬운 것은 그 확장 속에, 문화적 대안은 아직 미비하다는 점이다. 메가박스의 경우 대규모 부대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격조 있는 문화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거나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는 예술 공간을 확보하고 있지는 않다. 대부분이 소비 성향이 짙은 상점과 이익 추구를 위한 시설이 위주이다. 이것은 문화적 수준을 제고시키는 작업에, 문화 프로그램이나 예술 경영의 노하우가 시급히 투입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국 영화의 성장과 미래는, 영화적 인프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는 놀라운 팽창을 보였고, 이 팽창은 지금까지는 성장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상영관과 관객 수와 제작 편수의 증가가, 성장의 전부는 아니다. 그 안에는 의미 있는 질적 성장이 결부되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멀티플렉스 극장이 한국 영화의 양적 팽창을 선도하는 중요한 일익을 담당해왔다면, 앞으로는 질적 성숙을 위한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한, 그리고 우리 영화와 문화적 공간이 내실 있게 성숙하기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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