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9호 <공연장의 인프라> 연희단거리패의 작업과 삶의 공동체 밀양연극촌/최 영
페이지 정보

본문
연희단거리패의 작업과 삶의 공동체 밀양연극촌
최 영
(연희단거리패 공연기획팀장)
1999년 9월을 기점으로 연희단거리패는 밀양연극촌이라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건설하며 기존의 극단작업으로부터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1986년 부산 가마골소극장을 거점으로 시작한 극단의 역사는 크게 나누어 세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가마골소극장이라는 전용극장을 운영하며 출발한 연극작업이 부산이라는 지역적 한계 속에서도 직업극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며 지속적으로 서울무대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나간 단계를 1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1994년 서울에 우리극연구소를 설립하며 부산과 서울 두 지역에 확고한 거점을 확보하고 연극작업의 폭과 깊이를 심화시켜 나간 단계를 2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윤택, 김광림, 윤광진, 이병훈 이렇게 네 사람의, 당시 한국연극계에서 가장 의욕적인 연극작업을 해오던 40대 연출가들이 의기투합해 우리극연구소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이름 그대로 우리극연구소는 우리극의 양식을 탐구하는 공연 및 연구집단입니다. 우선 우리의 전통연희로부터 오늘의 공연양식으로 재구성해낼 수 있는 요소들을 실험하고, 해외극을 우리식으로 수용, 창조해내는 작업을 또 한축으로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신진 작가 및 연출가들을 발굴해내는 무대를 지속적으로 올렸으며, 매년 한 차례씩 연기자 훈련과정을 개설하여 교육시키면서 연극인력 양성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더 이상 변방의 게릴라들이 아닌, 한국 연극계의 중심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집단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구축하려하는 시기 돌연 연희단거리패는 대학로를 등지고 밀양의 한 폐교로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초기부터 공동체적인 작업 성격이 유난히 강했던 집단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폐교를 생활 근거지로 하며 공동생활, 공동작업의 기치를 걸고 밀양연극촌을 건설하려는 실험은 당시로서는 실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많은 우려 속에서 출발했습니다.
당시 대학로의 30평 남짓한 지하 연습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우선 갈수록 방대해져 가는 극단작업의 양적⋅질적 규모를 그 공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복잡한 주택가 틈에서 손바닥만한 연습실을 비비며 대형 음악극에 필요한 연습과 장치 및 도구, 의상 등을 제작한다는 것이 더 이상 공간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십 명의 단원들이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각자의 일상에 한쪽 발을 담근 채 작업은 작업대로 일상은 일상대로 가져가며 연극을 만든다는 것이 작업의 집중도 측면에서도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1999년 2월 <어머니> 공연관람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밀양시에서 5년 무상임대의 조건으로 폐교의 사용을 수락해 주었고, 상반기 동안 차근차근 이주 준비에 들어가 9월 1일을 기점으로 밀양연극촌 건설이 시작된 것입니다. 답답한 도시를 벗어나 깨끗한 들판의 공기를 마시며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설렘으로 다가왔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였지만 그 속에는 새로운 무언가를 한다는 흥미진진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어있던 학교 건물을 우리의 작업과 생활공간으로 만드는 일과 목전에 닥친 대형 공연을 준비하는 일은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는 것으로 부족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과 작업으로 보내는 날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50명 정도의 인원이 한곳에 모여 살다보니 발생하는 공동생활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었습니다. 강력한 결속력과 자체규범을 가진 극단이었지만 모두가 함께 살면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낯설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단원들 개개인에게는 적잖은 고민거리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나름의 해결책을 찾게 되고 연극촌만의 고유한 규범과 기준을 하나씩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과정은 인류의 꿈이었던 이상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과정이었다고도 평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밀양연극촌은 세상과 떨어져있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독자적인 연극인들의 삶과 작업의 공동체로서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새천년을 맞으며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였고, 새로운 해를 띄우자는 의미를 담은 작품 ‘일식’을 준비하고 공연하며 새천년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 밀양, 부산, 서울을 차례대로 순회하며 무사히 공연을 마쳤고 또 다른 도약을 위해 밀양으로 돌아와 호흡을 가다듬게 됩니다.
소박한 동네극장에서 키워진 꿈
1999년 10월 29일, 공식적인 밀양연극촌 개원식을 열며 운동장에 야외무대를 만들고 국립극장 시연회를 앞둔 ‘일식’의 밀양판 시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천여 명의 밀양시민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운 개원식 현장에서 우리는 시민들을 위한 공연을 하루 빨리 성사시킬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봄, 사각의 운동장 한켠에 야외극장을 세우는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듬성듬성 나무들이 자라고, 자갈 반, 잔디 반 깔려있는 빈터에 우리가 직접 제작한 덧마루를 깔아 80평 남짓의 무대를 만들고 인조목 벤치를 깔아 삼사백 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객석을 만들었습니다. 이름도 소박하게 그냥 ‘숲의 극장’이라고 지었습니다.
당시는 일본 토가페스티발 참가를 눈앞에 둔 <햄릿>과 같은 일본 이다페스티발에 참가할 <산너머 개똥아>가 연습 중인 때였고, 2000경주세계문화엑스포 주제공연인 <도솔가> 연습이 맹렬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도솔가>는 엑스포행사장인 야외공연장에서 공연될 작품이었고, 셰익스피어극인 <햄릿>과 가족극인 <산너머 개똥아>는 야외공연으로는 더없이 좋은 작품들이었습니다. 정식개관을 앞두고 단체캠핑 온 학생들을 관객으로 두어 차례를 공연을 올려본 우리는 확신을 갖고 숲의 극장 개관공연을 갖게 됩니다.
지역 일간지에 보도자료를 돌리고, 밀양 시내 구석구석에 포스터를 붙이고, 자주 가는 단골집을 중심으로 예매처를 잡고 시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미리 예매표도 팔고 하면서 여느 공연과 다름없는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계절이 봄을 넘어 초여름으로 접어들 6월초, 밀양연극촌 숲의 극장은 정식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사백 석 객석이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관객들이 찾아왔고, 사모님과 함께 연극촌을 찾은 시장님은 “여러분 인자 연극촌 연극 공짜 아입니데이.” 하시고 만원을 내시며 표 두 장을 끊고 들어가는 흐뭇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엄마 품에 안겨온 갓난아기부터 동네 구경 놀러온 듯 지팡이 짚고 마실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그 해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숲의 극장은 세대를 초월한 관객들을 만나며 많은 얘깃거리들을 남겼습니다.
그 해 서울과 부산, 그리고 해외공연까지, 우리가 올린 모든 공연들은 먼저 숲의 극장 관객들을 통해 검증을 받고 무대화되었습니다. 일정한 관객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객석을 앞에 놓고 공연의 집중도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달라붙는 모기를 쫓아가며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울음 소리를 꿰뚫고 배우가 자신의 소리를 전달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발성과 집중력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작품이 배우들의 기량과 무대술을 검증받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정식 극장 무대를 밟게 되었으니 이를 통해 연희단거리패 연극이 지니게 된 에너지와 집중력은 기존의 대학로 무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숲의 극장을 통해 만난 관객들 또한 대학로에서 만난 관객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연극은 고상한 예술 감상의 유희도 아니었고, 리포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보아야만 할 숙제도 아니었습니다. 가족, 친구, 연인과 주말 나들이 가듯 일상을 툭툭 털고 나와, 으리으리한 무슨무슨 회관도 아니고, 침침한 지하소극장도 아닌, 탁 트인 운동장 한편에 소박하게 세워진 무대와 객석에서 배우의 움직임 하나하나, 날아 들어가는 한 줄기 빛과 소리 하나하나가 그들에겐 신기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볼거리와 재밋거리의 홍수인 서울이란 곳에선 연극을 본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일을 만드는 것이지만 여기선 ‘이번 주말엔 연극촌에나 한번 가볼까’ 하고 가족들과 차를 몰고 나와 즐겁게 놀다 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여가활동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일천만 서울 인구 중 극소수에 불과한 준비된 관객을 뒤로하고 밀양에 내려오니 십삼만이라는 새로운 관객의 바다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 중엔 전혀 연극을 접해보지 못 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이 즐기고 이해하지 못 한 연극은 한편도 없었습니다.
한겨울을 보내고 이듬해가 되어서는 무대작업장으로 썼던 공장식 건물을 개조해서 실내극장으로 만들게 되면서 추운 겨울이나 장마철에도 쉬지 않고 주말극장을 운영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완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는 공연예술축제를 개최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됩니다.
연극촌을 아껴주는 시민들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 본 공연 출정에 앞서 완성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겠다는 현실적인 목적에서 주말극장은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파생된 가능성은 실로 무궁무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하나씩 현실화시켜 나가면서 연희단거리패는 밀양연극촌을 거점으로 일개 극단이 연극으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간단히 뛰어넘어버렸습니다.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 젊은 연극인들이 만드는 또 하나의 중심
2001년 6월, 기존의 밀양실내체육관을 공연장 용도로 개조한 밀양시민문화체육회관이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기초 설계작업이 시작된 시기가 2000년 1월이었으니 1년 6개월 만에 신속히 완공된 공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의 기본 구조에는 전혀 손대지 않고 체육관 바닥 일부를 피트식으로 상하이동이 가능한 무대로 만들고 조명과 음향 기자재를 설치하는 수준의 초보적인 공사였으며 실제 공사에 들어간 기간은 두 달이 넘지 않았습니다.
설계에서 공사의 첫 삽을 뜨는 때까지는 공사의 착수 여부를 결정하는 시기였고 그 기간 동안 연극촌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밀양 시민들의 가십거리에 자주 오르락내리락했던 것입니다. 얘기인즉, 체육관은 체육인들이 사용하는 공간인데, 연극촌이 시장과 친하니까 양자가 합심해서 체육관을 공연장으로 만들어 연극촌에서 사용하도록 만들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체육인들이 나서서 개조반대 서명운동도 하고 지역 언론에도 여론화시키고 시청에 청원도 하고 했던 모양입니다.
비록 인구 십삼만의 소도시이지만 공연을 관람할 제대로 된 문화시설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시에 제안한 의도였고, 예산 부담이 많은 문예회관 공사보다 기존의 체육시설을 공연장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도록 개보수하는 방안이 더 현실적이라는데 시와 의견이 일치했던 것입니다. 결국 시당국의 확고한 추진의지로 2001년 정초에 공사추진이 확정되었고, 우리는 곧바로 여름공연예술축제 기획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아비뇽축제가 교황청 마당에서 출발했듯이,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는 연극촌 안에 있는 야외, 실내 두개의 극장과 시내의 문화체육회관, 이렇게 3개의 공연장을 가지고서 단촐하게 그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체육관 마루바닥이 행사용 야외의자가 깔린 객석이 되고, 음향이 사방으로 울리는 불비한 공연조건은 오히려 숲의 극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에 천 명의 관객이 공연을 보고 즐기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서는 밀양시민 어느 누구도 문화체육회관의 의미에 대해 문제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었으면 소수의 배드민턴 동호회 사람들이 쓰고, 가끔씩 체육행사에나 썼을 체육관이 모든 밀양시민들이 이용하고 밀양여름축제의 주공연장으로 전국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3개의 공연장 중 어느 한군데도 대학로 소극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설조건을 가지고서 축제를 시작했지만 2주의 축제 기간 동안 총 20편의 연극이 올려졌고, 밀양뿐 아니라 부산, 대구, 마산, 울산 등 인근 지역에서도 많은 관객이 찾았고, 멀리 서울에서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공연을 보고 워크샾도 수강하며 연극에 파묻혀 여름날을 보내려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내려왔습니다.
시에서 나온 2천만 원의 지원금 외엔 사전에 준비된 예산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축제였지만 입장수입과 참가비, 부대수익 등으로 거의 수입과 지출을 맞추어낸 자립적인 축제로 치르어냈다는 점이 1회 축제의 최대의 성과라고 하겠습니다. 이 힘으로 좀더 발전된 형태의 2회 축제를 고민할 수 있었고, 축제의 예술적 성취를 좀더 분명한 목표로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2회부터는 축제에 참가하는 작품의 성격 구분을 보다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삼십 대 젊은 연출가들이 참가하는 ‘젊은 연출가전’을 축제의 메인 프로그램으로 설정하고 한편에는 대학생들의 싱싱함이 묻어나는 ‘대학극전’을, 그리고 또 한편에는 연희단거리패의 레퍼토리 중 축제의 성격에 맞는 작품을 엄선하여 ‘이윤택의 명작시리즈’라는 이름으로 공연 프로그램을 짰습니다. 그리고 문예진흥기금도 지원받아 젊은 연출가전에서 입상한 작품은 두둑한 상금을 지급하여 우수한 작품을 계속해서 공연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첫 수상작인 그룹 여행자의 ‘한여름밤의 꿈’은 축제에서 초연된 다음 서울과 부산에서 지속적인 공연을 하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극단 청랑의 ‘안티고네 인 서울’ 또한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공연을 했습니다. 작품을 제작하려 해도 대관료 마련할 자금이 없어서 제작을 망설이는 열악한 한국연극계의 상황 속에서 젊은 연극인들에게 그들의 작품을 공연할 기회를 주고, 우수한 작품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공연이 가능하도록 시상금을 지원하는 방식은 시행 첫해부터 그 성과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변방의 게릴라에서 출발해 서울이라는 중심에 깃발을 꽂고서 다시 중심을 벗어났지만, 이제 밀양은 축제를 매개로 전국의 젊은 연극인들을 불러 모으고 거기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중심으로 커가고 있습니다.
지역이벤트를 변화시켜내며 얻은 성과들
밀양연극촌이 생긴 지도 이제 햇수로 5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해 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공연 매표수입에만 의지해서는 우리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지역에서 요구하는 각종 축제에 참여해 공연을 제작해주고 그 제작비로 연극촌 살림의 상당부분을 감당해 왔고 올해도 어김없이 많은 이벤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이벤트라도 우리는 소득 없는 작업으로 우리를 소비시키지 않았습니다. 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기반해 지역민들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그들의 얘깃거리를 재탄생시켜주었습니다. 지리산 시골선비 남명 조식 선생의 삶은 산청에서 준비한 선비문화축제를 통해 다시 살아나 한국 연극계를 평정하고 경남의 거의 모든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되어 지역민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의 기억을 남겼으며, 학계에서도 새롭게 조식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재조명하게 하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김해가락제에 제작된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이야기는 결국 2002아시안게임 식전공연으로까지 이어져 30억 아시아인들 앞에 선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의 왕성한 식욕은 지역의 이야깃거리를 섭취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역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연희양식까지도 흡수하여 우리의 작품 속에 녹여내며 새로운 공연양식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심신을 단련하는 무예였던 택견이나 선무도가 연극 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몸짓으로 새롭게 태어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한동네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밀양백중놀이의 범부춤과 덧뵈기를 연극적 호흡으로 받아들인 우리 배우들의 몸짓은 어지간한 무용수의 그것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평가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연을 맺은 지역의 예술가들과는 여전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또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작업은 지역의 관객들을 탄생시키고, 지역의 예술가들을 자극시키고, 지역의 자치단체들을 변화시켜내고 있습니다. 밥그릇 지키기에 여념이 없던 지역의 예술가들과 타성에 젖어있던 지역행정가들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파이 자체를 키워낸 우리의 놀라운 추진력에 텃세를 부릴 여유조차 가질 틈이 없었습니다.
연극촌의 힘
3회째를 맞는 2003년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는 해외 공연팀이 참가하면서 국제적인 공연예술축제로 거듭날 도약기를 맞고 있습니다. 아비뇽이나 에딘버러의 예를 들며 세계적인 축제가 가지는 문화적⋅경제적 효과에 대해 구구절절이 설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의 축제가 언젠가 아비뇽이나 에딘버러 같은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오리라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아마도 지금은 전혀 예상하지 못 한 또 다른 어떤 작업에 매진하며 그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숨가쁘게 달리며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나을지도 종종 잊고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 눈앞에는 연극과 생존, 이 두 가지가 우리의 화두였지만, 작업과 삶을 위해 우리는 밀양연극촌이라는 확고한 보금자리와 공동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확고부동한 물적, 정신적 기반이 있었기에 세상 어디에 나가서도 우리의 소리를 낼 수 있었고, 그것을 구체적인 결과물로 만들어내며 세상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 이전글9호 <공연장의 인프라> 국립극장의 냉수마찰/임준서 04.01.04
- 다음글9호 <공연장의 인프라> 극장의 아우라가 변하고 있다/김남석 04.01.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