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3호/제9회 리토피아문학상/한용국/“본다”와 “잠시” 사이에 펼쳐진 시의 “들판”, 세계의 “들판”―허문태 시세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02회 작성일 19-07-01 10:48

본문

73호/제9회 리토피아문학상/한용국/“본다”와 “잠시” 사이에 펼쳐진 시의 “들판”, 세계의 “들판”―허문태 시세계


“본다”와 “잠시” 사이에 펼쳐진 시의 “들판”, 세계의 “들판”
―허문태 시세계


한용국



  언어는 상징적 기호여서 세계에 가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언어로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한 세계를 상실하고야 마는 것은 언어 기호의 숙명이다. 언어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세계의 그림자일 뿐이다. 언어가 지시하는 순간 세계는 저만치 달아난다. 시를 언어로 세계를 감각하고자 하는 행위라고 말할 때, 시는 불가능한 언어의 숙명을 떠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는 그 불가능을 끝내 불가능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시는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게 된다.
  허문태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허문태 시인의 시들이 그 불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불가능성을 초월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자세를 취할 때, 시는 자칫 관조의 세계로 넘어가고 마는 위험을 가진다. 시적 주체가 세계를 초월한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허문태 시인의 시들은 세계 내적 초월의 자리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것을 허문태 시인의 시들에 자주 드러나는 시어인 “본다”를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허문태 시인의 “본다”는 단순한 응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세계의 내부에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것이다. 이 “본다”라는 행위를 통해 허문태의 시들은 세계의 내부를 있는 그대로 감각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내고, 그 자리에서 다시세계를 “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두 가지의 “본다”라는 행위에는 일종의 시적 전환의 순간이 필요하다. 즉 세계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시는 언제나 그 ‘순간’을 위하여 진행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하여 허문태 시인이 취하는 자세가 바로 “본다”는 “바라봄”의 자세인 것이다. “본다”는 행위가 근저에 놓인 ‘바라봄’의 자세는, 우선 “본다”에서 출발하여 사유를 통해 전개되다가 끝내는 “본다”는 행위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감각할 수 있는 순간과 자리를 향해 진행된다.


7월 한낮 마이산 돌탑을 보고 있다
돌이었다가, 산이었다가, 강이었다가, 바람이었다가,
거기까지는 캄캄하다
무너지지 않는 돌탑은 무너지기 전에 보고 있는 것이고
이 돌 저 돌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평생 사는 것이고
윗돌에 짓눌려 고개 한 번 들어보지 못하는 서러운 것이고
저렇게 버티다 무너지면
이끼 낀 돌멩이 하나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묻혀버리는 것이고
확! 허물어버리고 뛰쳐나가
공깃돌도 되었다가, 누름돌도 되었다가, 수석도 되었다가
분노를 움켜쥔 투석도 되었다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다가
암돌 수돌 생긴 대로 껴안고 사는 것이
떠받들고 떠받들리면서 사는 것이
간절히 염원 하나 간직하고
돌을 쌓아 탑을 세우고 그 탑이 또 하나의 돌이 되어 또 다른 탑을 세우고 또 다시 그 탑이 돌이 되어 또 다른 탑을 세우고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망게나무 덤불 속에서 푸드득 직박구리 날아오르고
구름 몇 조각 숫마이봉 너머로 흘러간다
옴짝달싹 못하던 돌탑이 제 그림자만큼 걸어나와 다시 탑을 쌓는다
햇빛 쏟아지는 암마이봉 절벽에 능소화 층층이 환하다
―「돌탑에서 걸어나온 능소화」 전문


  시인은 “7월 한낮 마이산 돌탑을 보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 돌탑의 세부를 묘사하는 순서로 진행하지 않는다. “산이었다가, 강이었다가, 바람이었다가, 거기까지는 캄캄하다”라는 시구를 통해 시는 우선 사유의 세계로 들어선다. 어림짐작이지만 이 사유는 불교적이다. “산,강,바람”이었던 것은 어쩌면 돌탑의 전생을 더듬어 보는 것이고, “거기까지는 캄캄하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무너지지 않는 돌탑은 무너지기 전에 보고 있는 것이고”는 일견 불교적 ‘무상’의 세계관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는 종교적 세계관으로 빠지지 않고, 다시 삶의 내부로 급선회한다. “이 돌 저 돌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평생 사는 것이고”, “윗돌에 짓눌려 고개 한 번 들어보지 못하는 서러운 것이고”에서 보이듯, 저마다 서럽고 힘든 삶의 세목들로 돌 하나하나에 구체적 삶의 형상을 불어넣는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묻혀 버리”거나, “공깃돌, 누름돌, 수석, 투석”이 되거나 하는 삶의 밀려남, 억눌림, 분노들을 팽팽한 긴장으로 “버티는”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버티는” 일이 가능한 것은 “암돌 수돌 생긴대로 껴안고 사는 것”, “떠받들고 떠받들리면서” 사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받아들임은 단순한 받아들임이 아니다. ‘돌’이 쌓여 하나의 ‘탑’이 되고, 그 탑이 다시 ‘돌’이 되어 또 다른 ‘탑’을 세우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그 뿌리에 “간절한 염원”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의 끝에서야 시는 “망개나무 덤불 속에서 푸드득 직박구리 날아오르고/구름 몇 조각 숫마이봉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을 꺼내놓는다. 어쩌면 시인이 바라본 것은 “7월 마이산 돌탑”이 아니라, 바로 그 풍경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순간을 만나고 난 뒤에야, “옴짝달싹 못하던 돌탑이 제 그림자만큼 걸어 나와 다시 탑을 쌓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그 탑을 따라 “암마이봉 절벽에 능소화 층층이 환한”, “능소화탑”이 삶 그 자체임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비탈에 선 상수리나무가 곧은 자세로 슬쩍 등을 보인다
저녁 강의 물결처럼 이파리가 반짝인다  
똑같아 보이지만 다 다른 이파리들
걸음을 멈추고 반짝이는 이파리를 보고 있다


햇살이 산 너머 능선을 기웃거릴 때
멧새 한 마리 상수리나무 부드러운 가지에 포르르 날아들어 몇 번 깃털을 가다듬더니 이파리가 된다
누룩뱀 한 마리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기웃기웃 기어오르더니 그 옆에서 이파리가 된다


들바람은 들에서 불고, 산바람은 산에서 불고
바람은 불어온 곳이 있어, 바람은 불어 갈 곳이 있다   


마주치면 거수경례하는 아파트 후문 경비 아저씨
납품한 물건 값 한 푼 주지 않고 부도낸 성남물산 정 사장
노점상 강 씨. 친목회 박 총무. 전동 휠체어 타는 동민 아버지. 슈퍼 하는 최 씨. 생선집 오 사장. 희망수선집 과수댁

오후 여섯 시 무렵 상수리나무 이파리가 바람결에 반짝인다
      ―「오후 여섯 시 무렵」 전문


  “후문 경비아저씨, 성남물산 정사장, 노점상 강씨, 친목회 방총무, 동민 아버지, 최씨, 생선집 오사장, 희망수선집 과수댁”은 모두 우리 이웃 사람들이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삶은 너무도 평범해서 빛날 일 없는 삶이다. 하지만 그 삶들이 빛나는 순간을 시는 찾아낸다. 바로 “오후 여섯시 무렵”이다. 낮과 밤 사이의 시간, 어스름이 깔리는 골목에 하나 둘 씩 전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저녁, 살풋 흔들리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시인은 그 골목을 살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을 것이다. “들바람은 들에서 불고, 산바람은 산에서 불고/바람은 불어온 곳이 있어, 바람은 불어갈 곳이 있다”는 이웃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사유를 보여준다. 그 골목에 흘러든 이웃들은 모두 저마다 “불어온 곳”이 있고, “불어갈 곳이 있”는, 저마다 사연을 지닌 채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오래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시인의 눈에 비로소 들어오는 것은 “비탈에 선 상수리 나무가 곧은 자세로 슬쩍 등을 보이”는 모습이며, 그 이파리들이 “저녁강의 물결처럼”, “반짝이는” 모습이다. 오후 여섯시 무렵 바라보는 이웃들이 “똑같아 보이지만 다 다른 ”, “반짝이는” 이파리들임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이파리들은 나무가 피워낸 이파리들이 아니다. “포르르 날아들어 몇 번 깃털을 가다듬은”, “누룩 뱀 한 마리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기웃기웃 기어오르더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흘러드는 것들을 나무가 품어낸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골목 그자체가 된다. 이런 시적 사유는 나무를 오래 바라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이웃들을 오래 바라본 데서 온 것이다. 이런 ‘바라봄’을 통해서 시인의 시선은 삶을 만나고 나무를 만나 세계의 가장 내밀한 자리,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자신의 시를 내려놓는 것이며 세계를 그 자체로 감각할 수 있는 “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움켜잡아도 잡히지 않는다
얽히고설킨 골목을 빠져나왔을 때 환하게 마중 나온 햇살이 잡히지 않는다
절벽 담장을 추락 없이 올랐을 때 어깨를 도닥였던 바람이 잡히지 않는다
담장 위에 호박덩굴손
움켜잡고 오르는 것만 익히고 익혔는데
뙤약볕은 한사코 등을 때린다
따개비 검은 등에 출렁이는 바다를 볼까, 호박 덩굴손이
가문비나무나 자작나무의 겨울을 꿈꿀까, 호박덩굴손이
호박덩굴손은 호박덩굴손의 방식으로
잡히지 않는 허공을 익히고 또 익힐 뿐이다
단단한 것이 말랑말랑할 때까지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할 수 없을 때까지
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담장을 넘어 날아갈 때까지
천 근 호박이 노랗고 둥그렇게 익는다
담장 위로 둥근 달이 둥실 떠오른다
달이 담장을, 마을을, 들판을 읽는다
     ―「호박덩굴손, 익히다」 전문


  호박덩굴손은 담장 위에 오르기 전까지, 담장을 “움켜잡고 오르는” 것만을 익혔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담장 위에 도달하자 더 이상 잡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담장”과 달리 “햇살”과 “바람”은 잡고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움켜잡고 오르는” 것으로는 더 이상 뻗어나갈 수가 없다. “따개비 검은 등에 출렁이는 바다”, “가문비나무나 자작나무의 겨울”은 호박덩굴손이가 이제 시작해야 할 일이다. 그 꿈을 꾸면서, 호박덩굴손이는 이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익기 시작하기로 한다. “허공을 익히고 또 익힌” 다음에야, “단단한 것이 말랑말랑해”지고,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단단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인위적인 것들의 속성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오르는 것을 넘어서 익을 수 있을 때, 인위를 벗어나 자연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그럴 때에야 자연의 교감에 가까워질 수 있다. 비로소 “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담장을 넘어 날아가는” 일이 가능해지고, “천근 호박이 노랗고 둥그렇게 익”어 담장 위로 둥실 ‘달’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달’은 ‘비추는’ 달이 아니라, ‘읽는’ 달이다. 그 ‘읽기’는 “움켜잡고 오르”고 “허공을 익힌” 뒤에야 가능해진 것이다. 이 “읽기”는 이 시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함께 겪고 더불어 익은’ 뒤에 비로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인의 ‘바라봄’의 뿌리에는 ‘함께 삶’이 더불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허공 속에 마침표가 있듯이/먹이 속에도 물음표와 쉼표와 느낌표와 마침표가 있다/밥은 둥근 식탁에 둥글게 둘러앉아 먹어야한다”(「거미밥이 되다」)에서 보이듯 ‘함께 밥먹기’로 드러난다. 그것은 결국 ‘함께 있기’, ‘함께 살기’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단지 사람 사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자연, 사람-세계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 비의 속도는 초속 1955km였다


알 수 없는 높이에서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지상에 떨어질 때 속도만 움켜줬다 속도에 갇히는 순간 모든 기억은 하얗게 사라졌다

담쟁이처럼 달라붙던 순애 앞에서 회색벽도 되어주지 못한

화살 맞은 다리로 절룩거리며 저자거리를 헤매던
해당화만 보면 일상의 초점이 풀리던
역마살과 방랑기를 평생 구분 못했던 무지몽매가
꿈처럼 사라졌다
 
속도가 베푼 세상이다
가시 돋친 푸른 가지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것도
땅바닥을 기던 애벌레가 나비 되어 어머니의 하늘을 나는 것도
별빛 머금은 비의 속도에 갇힌 세상이다


투명하게 지상에 안착했다


한 무리의 별들이 투두둑 지상으로 넘어오는 밤
산과들 염원의 강가에 꽃들이 반짝반짝 피어난다
     ―「비의 속도」 전문


  위의 시에 따르면 시인의 바라봄의 시학은 어떤 한 순간의 깨달음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젊은 시절은 “담쟁이처럼 달라붙던 순애 앞에서 회색벽도 되어주지 못”했고, “화살맞은 다리로 절룩거리며 저자거리를 헤멨”으며, “해당화만 보면 일상의 초점이 풀리던”, “역마살과 방랑기를 평생 구분 못했던 무지몽매”의 세월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젊은 시절은 인위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려던 삶의 행로에서 기인한 것이었던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그의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것은 바로 “비의 속도”였다. 그가 알게 된 비의 속도는 자연의 속도다. 인위의 속도가 광기와 죽음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자연의 속도는 평온과 재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체험이 이런 인식을 가능하게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시에서 유추하기 어렵지만, 시인에게 그 체험이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음은 짐작가능하다. “속도가 베푼 세상이다/가시 돋친 푸른 가지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것도/땅바닥을 기던 애벌레가 나비 되어 어머니의 하늘을 나는 것도/별빛 머금은 비의 속도에 갇힌 세상”이라는 시구들은, 이 세계가 문명의 속도가 아니라 자연의 속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한 결과임을 보여준다. 그 자연의 속도를 통해서 시인은 “투명하게 지상에 안착”할 수 있게 되었고, “지상의 밤”에서 “한 무리의 별들”을 보고, “산과들 염원의 강가”에 “반짝이는 꽃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바라봄”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은 어떤 계기를 통해 ‘자연’과 ‘세계’가 넘나드는 시적 시선의 위치를 ‘자연-세계’에 동시에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동시적 시선은 단지 자연과 세계에 국한되지 않고, ‘나-세계’ 또는 ‘세계-세계’로 확장되어 나간다. 그러므로,


초록은 초록으로 시작해서 초록으로 끝나지 않으므로
아직 바닷빛이나 하늘빛은 아니다


마음껏 다시 한 번 해보라 한다
몸에 딱 맞는 작업복이 좋다
     ―「초록」 부분

  에서처럼 어떤 상황에서든 새로운 시작을 시도하게 하는 낙관을 가능하게 하고, 새로운 시작에 열린 전망을 부여하는 일 또한 가능하게 한다. 다른 시 「벚꽃」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언뜻 세월호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이 시에서, 시인은 “벚꽃”을 보며 아이들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현상한다. “목젖이 보이도록 웃는” 아이들 앞에서 시인은 눈부셔 한다. 그 눈부심은 위장된 연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는 데서 오는 것이다. 벚꽃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듯, 시인의 내면에서 터져나오는 것은 아이들의 밝고 환한 웃음이다. 잘못된 사회구조의 비극적 희생자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장 화사한 벚꽃의 한 때에서 수학 여행가는 아이들의 목젖이 보이도록 웃는 모습을 기억하는 시인의 추모의 방식 또한 비극을 비극으로 끝맺지 않는 또 다른 열림으로서의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엄밀히 말해서 나름 낭만적이다”(「적이다」)의 “낭만”과 “적이다”는 평범하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대립과 분열로 점철된 “적”들의 세계에서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일종의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 “낭만”은 그러므로 변증법적 지양의 형식으로서의 낭만이다. 이 낭만을 통해 ‘나-세계’ 사이의 열림과 넘어섬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라는 것도 보인다는 것도 들판의 문제다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문득 들판의 문제다
어느 봄날 민들레꽃을 한없이 보고 있었던 것은
노랑나비가 앉아 있는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냇물의 소리는 부딪치는 소리라서
나보다 맑다고 생각했다
다 들판의 문제다 지금은
겨울 들판에서 저수지가 보였을 때 기러기는 저공비행을 한다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서너 명씩 너덧 명씩 식탁에 둘러앉았다
일인용 식탁은 없고 사인용 식탁에 혼자 식사하는 경우는 있다
잠시 뭔가가 보일 때 얼른 봐두자
꽃이 피는 곳은 어디고 나무는 어디로 걸어가는지
나는 아직 늙어서
손에 굳은살이 두툼한 사람들과 식사를 한다
괘종시계 초침소리가 잠시 멈춘다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전문


  기발표작 중에서 가장 빼어난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은 “잠시라는 것도 보인다는 것도 들판의 문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시인은 보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는 존재로 앉아있다.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헤어졌는지”로 구체화되는 “들판의 문제”는 삶 전체를 망라하는 질문이어서 시인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이 질문은 들판의 질문인 동시에 시인의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노랑나비”와 “냇물의 소리”는 시인이 꿈꾸던 삶의 전망의 미학적 표현이겠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들판에 속한 것이다. 들판이 저수지를 보고, 기러기를 보고, 식당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잠시 “꽃이 피는 곳은 어디고, 나무는 어디로 걸어가는지” “잠시 뭔가가 보일 때 얼른 봐두자”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이 본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이미 이 시에서 해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꽃이 피는 곳”도, “나무가 걸어가는 곳”도 들판인 것이다. 그 들판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매일의 일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손에 굳은살이 두툼한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사인용 식탁”의 삶 말이다. 그러나 그 일상의 깨달음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괘종시계 초침소리가 잠시 멈추”는 특별한 순간에야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순간에서야 “아직 늙어서”라는 역설의 시간이 가능해진다. 그 시간 속에서만이 들판을 응시하던 시인이 들판에게 보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바 그것은 ‘바라봄’ 즉 “본다”는 행위로서 세계를 그대로 감각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시인과 자연과 삶이 서로의 그림자가 되는 일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시인의 바라봄은 중층적인 바라봄이 된다. 그것을 통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 시의 자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적 초월이라고 할 만한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자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끝없이 움직이는 자리다. 그러므로 허문태 시인의 시편들은 한 편 한 편 그 자리를 향해 끝없이 움직이는 시편들이다. 그 움직임이 허문태 시인의 시에 양각과 음각의 세계를 동시에 부여하고 있으며 독자들은 시들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음영 속에서 함께 그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본다”는 행위를 통해, 끝내 “보이”고, 그 “보임”이 다시 “본다”는 행위로 전환되는 시적 전환, 그 전환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펼쳐지는 스밈과 열림의 “들판”, 이것이 바로 허문태 시인의 시들이 빚어내는 독특하고 깊은 미적 울림이다.





*한용국 200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그의 가방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