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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이정원/산방꽃차례로 피는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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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이정원/산방꽃차례로 피는 외 1편
산방꽃차례로 피는 외 1편
이정원
장딴지 굵어지고 발가락이 자라
나비코고무신은 터질 듯 부풀었지
새 신을 사줘,
조바심 마르던 날들이 베란다에 걸터앉았네
더는 발 뻗을 데 없다고 수국 이파리가 뾰로통
새 신발 신기려 발을 빼보니 오갈 데 없는 뿌리들이
혈맥 그물 촘촘히 생장점을 붙들고 있네
얽히고설킨 흙의 궤도 따라
자전自傳의 바퀴 굴려 혈맥 그물을 엮고 있네
뿌리가 걸어간 거리까지 한사코 따라가 터뜨릴
산방꽃차례의
가지런한 웃음은 피멍울이지
아직도 코고무신 속 내 발가락은 나비잠을 자네
아무도 꺼내주지 않아
헛꽃의 시간이 길어지네, 발바닥 가득 뿌리만 자라네
용천혈 쓰다듬듯
조심스레 수국뿌리를 들어내면
계절 흘리지 말라고 비닐망 한쪽
새소리 발효시키라고 배양토 조금
빗물 받아 안으라고 마사토를
수국꽃 필 때까지 고요에 놓아두면
수슬수슬 상처 같은 수다가 피지
화분 발치에 앵두나무가 햇빛그물 펼치는 동안
고집을 키우던 내 발뒤꿈치 물집도 말라
나비코고무신 벗어던지고 가문 발가락을 꺼내네
새 운동화 속 치수 늘인 발바닥에서
고요가 하얗게 날개 접고 앉아
아홉 살 꽃봉오리를 야금야금 껴안고
마음의 키 휘영청 산방꽃차례로 솟고
어쩌다, 석류
잊히기 쉬운
잊고 싶은, 그러나 잊히지 않는
너의 눈동자를 꽂고 행성 바깥에 서 있었지
등 뒤 어둠이 농익어
새빨간 입술을 켜고
망쳐버린 꽃밭을 손질했지
손 안에, 어쩌다
붉은 유혹 페르세포네
석류를 쪼개다 피가 튀었지
물든 옷섶
글썽이는 심장
어둠이 먹여 키운 불안으로 미각의 심지를 돋우면
웅크린 감각이 덥석 되살아나
자지러지는 빨강 혹은 자주
누군가에게 건네야 하는
불땀을 옷 주름 속에 감추고
알갱이를 깨물까
한꺼번에 입 안에 넣을까
석류 먹는 법
피가 덜 튀는 방식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
왼손과 오른손이 엇갈려
석류가 석류인 채 흘러가는 붉은 즙의 시간
백년을,
피가 끓는 시간
*이정원 2002년 <불교신문>, 2005년 《시작》으로 등단. 시집 『내 영혼 21그램』, 『꽃의 복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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