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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정호/시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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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정호/시간 외 1편
시간 외 1편
정호
풋사과처럼 땡글땡글한 시간을 칼로 잰다 철모르고 서둘러 피어난 철쭉같이 두리번대는 시간의 뒷꼭지에 예리한 칼을 들이댄다 화들짝 놀란 시간이 오금에 불이 나게 줄행랑을 놓는다 부리나케도 거기서 나온 말이다 그 누가 내뺀 시간을 붙잡아 올까 허겁지겁 시간을 뒤쫓아간다 펄떡펄떡 뛰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시간의 발목을 잡고 한숨 돌리는 사이 고요 한 묶음이 두릅 엮듯 사방연속무늬의 그물로 시간의 버선코를 깁고 있다 톱니처럼 이빨 빠진 칼날 위로 일생의 시간 한 줄 순식간에 지나간다
구르는 집
물의 집은 하늘에 있네 끼리끼리 모여 둥게둥게 하늘을 굴러가네 대낮에는 반달과도 어울리고 깜깜 한밤중에는 은하수 하얀 물길에 뒤채는 돌틈 사이를 요리조리 돌돌 굴러가네
물의 집은 단색이네 희거나 검거나 수채화 섞어놓은 듯 연한 회색이네 흰 집은 한량 같은 날라리. 어떤 형상이든 변화무쌍한 변장술사. 몸 가볍게 바람과 동무하여 어디든 달려가는 바람동이. 그 구동축은 언제나 형상망각합금이네 살랑살랑 바람에 부대끼며
한들한들 굴러가네 기웃기웃 굴러가네 밥을 먹다 굴러가네 잠 자다가도 굴러가네 굴러가다가도 굴러가네
간혹 집을 굴리기가 힘겨워지면 가출하여 땅에다 축축한 몸을 부리네 흩뿌리듯 살며시 풀잎 위로 뛰어내리지만 어떤 놈은 절정의 오르가슴을 맛보듯 소리를 내지르며 부숴진 집을 가구째 내던지네 그런 날이면 인간의 집들도 우울에 젖네 빗소리에 젖네 그 사이
하늬바람 따라 구르던 집 몇 채 대관령 넘어 흔적 없이 사라지네
*정호 2004년 《문학·선》으로 등단. 시집 『비닐꽃』, 『은유의 수사학』. 다층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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