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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서윤후/허밍버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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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서윤후/허밍버드 외 1편
허밍버드 외 1편
서윤후
새장 모형 속 솜으로 채워진
가벼운 새들처럼
앉아 있는 것이 최선이겠군요
종류가 이름이 될까봐
흰 조약돌을 알처럼 품고 있는 이름 없는 새에게
우리는 진실을 깨뜨리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군요
그해 우리는 사랑했던 사람을 반듯하게 심고
기나긴 가로수들을 지나왔군요
시외버스 맨 뒷자리에서
버튼도 누르지 않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했던 말을 또 했던 것 같군요
새는 듣고 싶은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한 낱말에 새겨 기억하는군요
고양이 세수로 겨우 어제를 헹구지만
우리는 꼭 씻겨주고 싶은 얼굴을 하고서
밥이나 먹자고 낡은 교자상을
심장 가까이 끌어당기기만 하는군요
오늘도 주소를 간신히 놓지 않았군요
새가 바라다보고 있는 자리에서
마치 비행에 실패라도 한 듯 바짝 엎드려
방바닥을 닦고 있군요
쌀벌레처럼 번성하는 침묵이
이제 더는 가렵지 않고
창밖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종류를 부르고
우리의 무엇을 열면 새는 날아갈까요
꿈에서도 더는 할 말이 없는데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는
우리에게서 저 새가 배운 것이라고는
떠날 때를 아는 것일까요
이제 새장 속에는 새가 없군요
우리는 혹시 서로의 물건을 깔고 앉진 않았는지
잠시 엉덩이만 들썩이고 있군요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만 간수하며 사는데
새가 본 새들 중에 우리는 가장
고척동
궁지에 몰린 이빨자국 하나가 피부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 흉터로 이주해온 온갖 마음들이 첨탑을 짓고 올라가서는 사다리를 거둔다
그 동네에는 유난히 점집이 많았다 칠이 벗겨진 만물의 신들이 그 동네에 모여든 이들의 생년월일 하나를 골라 화살촉 대신 쓰기도 하였다 이미 명중한 구멍들만 자꾸 커져갔다
고장 난 초인종엔 마트 전단지가 얼굴 없이 찾아들고 공원엔 도망간 거리만큼 제자리걸음 하는 일로 최선을 다해 아물어가는 사람들이었다 헛도는 바큇살처럼 공원 둘레를 걷는 이들 모두, 피를 돌게 하는 재주를 더는 숨기지 않았다
보조 바퀴를 막 뗀 아이의 자전거가 휘청거리며 나아가자 아버지는 멈추어 달려갈 준비를 한다 그렇게 서둘러 작별하게 된 사연들이 몸 어디에도 남겨지지 않은 채 욱신거린다는 게 이제 더는 이상하지 않고
재주 좋게 방안에 들어와 나갈 궁리로 온 촉수를 쏟는 사마귀와 눈 마주칠 때 기억나지 않는 문단속이 사라진 사람들을 들락날락거리게 한다 도로명 주소는 모르지만 지번 주소만 아는, 신에게서 점점 멀어지기로 약속한 사람들
매일 조금씩 좁아지는 골목을 나눠 쓴다 허물어져가는 신전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뒷짐 진 손에 사려 깊은 과일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로 몸에 감긴 태엽을 조금씩 풀어내고 있다 풍경화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자꾸 그림을 흔들고 있다
*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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