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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양안다/유리 새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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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양안다/유리 새 외 1편
유리 새 외 1편
양안다
창문과 함께
슬픔이 엎어지는 장면을 어떻게 그려야 할까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까 행인의 발에 치이는 돌멩이에 대해 이야기하면 좋을까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다 폐인이 되어버린 이는 어떨까
모든 마음은 외부에서 시작되잖아요
당신도 누군가를 보고 연민을 느끼며 슬퍼 우는 날이 있었잖아요
나는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
밤이 모든 새를 감추어 놓아서 나는 이 어둠이 어느 커다란 새의 입 속이 아닐까 생각했다
도시의 옥상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
저 멀리 고층 건물들이 있고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늦은 시간에도 도로가 가득 차 있잖아 이 풍경이 자꾸 나를 작아지게 만들어서
사람이 홀로 죽을 때 곁에는 창문이 함께한다는 이야기
도무지 세상의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오늘도 노트를 펼치고 일기를 적는 것입니다
〉
모월 모일 모시. 날씨 맑고 추운.
오늘 외출을 했다. 오늘 네 시간을 걸었다. 오늘 바람이 많이 불어서 목도리를 샀다. 내가 좋아하는 아주 긴 목도리를. 오늘 졸리지 않았다. 오늘 굶으려 했는데 밥을 씹어 삼켰다. 오늘 세탁기를 돌렸다. 오늘 창밖이 고요해서 빨래 마르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 읽지도 않을 책을 사 책장에 꽂았다. 오늘 늦게 자야 하는데 전구 사는 걸 깜빡했다.
아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아
그건 나의 일이 아니다
창문은 창문의 하루를 상영하는데
기하학적으로 번지는 입김
혓바닥에는 감기약 냄새
*
유리 조각으로 팔뚝을 긋던 남자가 말한다,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속도입니다
*
어제는 종일 공포영화를 연달아 보았어 친구들이 자꾸 사라지거나 죽거나 그러더라 하지 말라는 짓을 꼭 하는 사람이 있더라 사람을 잘 죽이는 방법에 대해 골몰하다가 사람을 기분 좋게 죽이는 방법에 대해 골몰했어 창밖에서 비명이 들리는데 아무도 창밖을 내다보지 않더라 나 혼자 창 앞을 서성이며 비명의 근원지를 찾고 있더라 혹시 나에게만 들리는 비명이지 않았을까?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내 목에 기름칠을 하고 불을 붙였던 게 아닐까? 형광등이 터지기 직전처럼 점멸하고 있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소음과 비명을 도대체 무슨 수로 구분해야 하는 걸까
*
창밖에서
오늘 아침에도 몇 마리의 새가 울었다 너는 지저귄다고 말하지만
맞아요 나는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뉴스 봤어? 너보다 먼저 세상이 망가졌대 네가 그럴 수 있다면 함께 문밖을 나가보는 것도 좋을 거야 네가 죽은 척하는 동안 발생했던 모든 세상의 일을 너에게 들려줄 거야
나의 마음이 너에게서 시작하듯이
〉
창문 안에서
죽는 걸 멈추지 않는 연인이 있다면
소음을 내쉬면서
신음을 참아내면서
정말?
모든 건물 위로 새들이 쏟아지고 있다고?
네가 물을 때
기하학적으로 번지는 감기약 냄새
나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들어
창가를 가리켰다
그곳에 커튼이 있었다
그린란드로 보내는 편지
안녕
우리, 만날까요
바다가 좋겠어요 아니 끝도 없는 들판이요
하염없이 눈이 쏟아진다는 나라를 마음에 들어할까요
당신은 나의 목을 졸라도 괜찮고
당신은 당신의 컵을 씻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난 꿈속에선 내가 눈을 맞고 서 있더군요 눈 닿는 피부마다
화상을 입고 나는 온몸에 구멍이 뚫린 듯
물을 쏟아냈지요 투명하고 짜고 검붉은 꿈속에서 죽어가는 동안
내가 생각한 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이었는데
끝이 없더군요 지겨워
지겹고 지겨워서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어요 멍청하게도
며칠 전에는 다들 비웃더라고요 죽고 싶다고,
죽여 버리고 싶다고 내가 말하니까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잖아요 진작 옆구리 깊숙이 칼을 밀어 넣어야 했었는데
우리가 서로의 벗은 몸을 봤을 때처럼
수치스러웠지요 내가 다 미안해요
미안했지 당신은 자꾸 나를 나아지고 싶게 만드니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만들게 하잖아요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나의 몸과 마음이 빛으로 펼쳐지고 나도 이렇게 다채로울 수 있구나 그런 걸 이해했어요
이렇게 갈라질 수도 있구나
이렇게 흩어져도 괜찮은 일이겠구나
가끔은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요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나의 슬픔을 팔죠 그 슬픔이 매우 사소한 것이라는 듯이
혼란스러워서
혼란스러워
그런데도 우리, 만나도 괜찮은 걸까요
방에 홀로 앉아 있다가도 나는 한숨과 함께
당신의 이름을 발음하기도 해요
비에 젖은 아이가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바닥을 적시던 때도 있었지요 타월로 팔다리며 등허리며 발가락이며 닦아내는데
큰소리로 웃더라고요 폭우가 내리더라고요 귀가 아파, 누군가가 중얼거려도
우리가 어딘가로 떠날 날이 오긴 하는 걸까요
활주로는 항상 빛나는 걸까요 바닥에 드러누워 비행기의 온전한 전체를 확인하고
갑작스럽게 멀어지는 하늘, 멀리 달아나는 건 비행기가 아니라 우리라며
서로를 안심시킬 수 있을까요
언제든 달아나도 좋아요 손을 마주잡은 채
양떼를 몰며 목장을 가꾸고
긴 가지를 골라 꺾어 지팡이 삼아 걷는 일상
당신 앞에서 나는 어려지니까
울거나 웃으며 당신의 품에 모든 표정을 묻어놓는 일 가슴을 망가뜨리는 일
당장이라도 증발할 듯
그러나
그러나
미래, 그곳에서
우리, 만날까요
내가 당신의 컵을 씻을 게요
그대는 내게 답신하지 않아도 좋아요
안녕
*양안다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동인 ‘뿔’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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