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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박윤근/도마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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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박윤근/도마 외 1편
도마 외 1편
박윤근
문 닫은 횟집 앞 도마가 누워 있다
분주하던 칼 소리 비운 자리
햇빛이 빈 허기를 채우고 있다
도마를 도마 이게 하는 것은
비린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폐항구뿐,
푸른 서슬을 온몸으로 받아냈을 도마를
사람들은
봉분의 정적이 모이는 피의 재단이라고,
잠시 칼을 접은 검객의 칼집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날을 삼킨 저 내공이면
떠도는 풍문쯤은 일순 가라앉힐 만한데
검을 내려놓은 장수처럼
햇빛 속 묵언 수행 중이다
왜 지난 시간은 모두
서로 사선으로 얽히고 잇닿은 상처를 지니게 되는지
가만히 도마의 빈자리 들여다 본다
후두둑 빗방울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물 속 검 흔 낱낱에 푸른 날이 선다
바닥을 부유하던 햇살들,
어느 검객이 내친 필살의 초식에
순간 눈 베이며 파닥인다
피비린내가 항구를 지나 먼 바다까지 닿는다
비로소 어둑해진 해안선을 따라
누 떼처럼 둑을 빠져나가는 근육질의 사내들이 보였다
장마가 시작됐는지 도마 속 무늬,
너울처럼 선명하다
스텝
오늘 당신의 발끝이 발랄하다
점핑하는 스텝에 잠들었던 선율이 깨어난다
발끝에서 당신의 표정이 달라지는 건
밤 새 안녕한 당신의 얼굴이 물속 잽싼 가마우지 주둥이처럼
맨발 안으로 오버랩 되기 때문
그 표정은 마치 촘촘히 가죽을 잇댄 북소리처럼 둥글고 깊다
그렇다면 발은
바닥이 지닌 표정의 먼 근원일 수도 있겠다
뒷골목 먼 소실점도 점점이 그려내는
얼굴의 표정이 발끝에 오래 닿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때 어머니 멈춘 걸음의 정적 속에서
집을 잃은 발끝이 자꾸만 뒤돌아보며 옛집을 읽는 심정을 본 적 있다
〉
조금은 늦은, 그러나 너무 늦지 않게
단단히 묶었던 신발 끈을 푼 맨발의 표정이
발끝을 깨문 듯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때가 있다
*박윤근 2015년 《문예바다》로 등단. 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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