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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유계자/오래오래오래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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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시/유계자/오래오래오래 외 1편
오래오래오래 외 1편
유계자
모래밭에 구령을 맞추는 갯메꽃이 있지
바다를 향해 쨍쨍하게 나팔 하나씩 빼어 물면
자갈자갈 거품 문 게들이 발바닥에 짠 내음을 불러들이지
먼 바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 안부를
뱃길 따라갔던 갈매기들이 가끔 물고 오지
외할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갯메꽃 입술 가까이 대고 따개비 같은 주문을 외워
오래오래오래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중얼거리면
메꽃 속에서 긴 밧줄을 타고 꽃씨 닮은 개미들이 줄줄이 기어 나오지
하나 둘 개미를 세며 기다려 줘야 해
외삼촌을 기다리는 외할머니 앞에선
그러는 동안 밀물이 찰싹찰싹 발등을 간질이지
눈물 비린내 묻은
오늘도 남은 사람들은 혼자 갯메꽃 주문을 외우며
물주제비를 던지지
퐁퐁퐁 물발자국 딛고 오라고
해가 지도록 오래오래오래
바다 회사
회장은 달
회사명은 밀물과 썰물
조금 때만 쉴 수 있는 어머니는 달이 채용한 2교대 근무자
철썩,
백사장이 바다의 육중한 문을 열면
발 도장을 찍고 물컹물컹 갯벌 자판을 두드려 바지락과 소라를 클릭한다
낌새 빠른 낙지는 이미 뻘 속으로 돌진하고
짱뚱어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을 살피느라 정신없고
농게는 언제나 게구멍으로 줄행랑치기 바쁘다
성깔 있는 갈매기는 과장되게 끼룩 끼끼룩 거리며 잔소리를 해댄다
가끔 물풀에 갇힌 새우와 키조개를 불로소득 하지만
실적 없는 날은 녹초가 되어 비린내만 안고 퇴근한다
평생 누구 앞에서 손 비비는 거 질색인데
겨울바람에 손 싹싹 비벼대도 승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자별하다고 느낀 달의 거리마저 멀어지자
수십 년간 충실했던 밀물과 썰물 회사를 정리하였다
파도 같은 박수 소리
근속 훈장 하나 받아보니 구멍 숭숭 뚫린 직업병이었다
*유계자 2016년 《애지》로 등단. 웅진문학상 시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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