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3호/신작시/최은별/그냥 외 1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28회 작성일 19-07-01 22:11

본문

73호/신작시/최은별/그냥 외 1편


그냥 외 1편


최은별



진눈깨비가 송두리째 사멸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둠이 어둠을 삼킨 날들에 대해 생각했다
눈물이 눈물을 휩쓸던 순간들에 대해


이것은 오래된 기억이다


그를 분실한 후 절단된 시간에 그녀는
마음이 번잡했다 사실 번잡할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전부였고 그녀는 전부를 잃었을 뿐이다


그녀는 두 번 정도 자신을 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그 뒤 소란스러운 무늬의 옷을 입고서 초점 없이
그냥, 이라는 말만 남발하곤 했다


물처럼 흐르는 ‘그냥’에는 너무 많은 뜻이 있다
그녀의 ‘그냥’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 이면엔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나로선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고
물론 짐작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냥’이 연어처럼 거꾸로 거슬러 오른다 해도 그것엔 변함없다


진눈깨비가 모두 사라진 거리
아득하게 넓고 거친 공기가 내 안을 관통했다
진작에 그녀의 열 손톱이 나를 할퀴어 놨는지도 모른다
저기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을 할퀴었는지도


‘그냥’은 연어보다는 물과 비슷하지만
‘그냥’을 남발한 그녀를 잊는 일은 기억하는 일은
엎질러진 물을 닦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를 닦을 때마다 나의 열 손톱에서는 언제나 피가 난다
물도 상처를 낼 수 있거나 물이 아닌 셈이다


나는 오랜 착오를 거쳐 그것을 깨달았다





어른



사랑은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요
아마 동물이나 곤충이나 식물도 그럴 거예요
조그맣게 뭉친 눈덩이나 여백뿐인 노트도 마찬가지겠죠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에요
그리고 난 사람이고, 게다가 어른이 됐죠


없어요
없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
보이지도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요


이제 난 보이지 않으면 볼 수 없고 들리지 않으면 들을 수 없어요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어요
그런 멍청하고 한심한 어른이 됐다고요
성나서 해 보는 볼멘소리가 아니라, 정말이에요


그런데도 당신은 날 믿나요
왜 바람이 자꾸만 나울거리고 꽃잎이 자꾸만 떨어져 내리죠
왜 그날처럼 자꾸만 그렇죠


난 이제 당신이 바람을 통해 전하는 귓속말을 듣지 못하는데
꽃잎이 머리 위에 내려앉아도 찌그르르 끓는 가슴 따위 이제 없는데
더 이상 그런 걸로 사랑을 듣거나 보지 못하는데


사랑은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요
빛도 어둠도 그럴 거고 그 중간쯤인 것들도 그럴 거예요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고
난 사람인 데다가 벌써 어른이죠





*최은별 2017년 《문예연구》로 등단. 소설 『시인과 기자의 어느 금요일』.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