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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신작시/풀잎 뻗는다 외 1편/최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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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풀잎 뻗는다
분수는 하늘을 더듬어 자신이 나가야할
무게를 깨닫는다 만져진 만큼의 물줄기로
햇빛 깨쳐나가는 신경들 여름 한철
달궈진 열기가 매미 울음 울려도
풀잎은 뿌리까지 올려 꿈틀, 하늘을 파랗게 뚫는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정신과 정면 승부 한다
줄기 더 밀고 오르는 동력들
초록 빛 깨쳐 분수는 하늘의 뿌리와 뒤엉킨다
세상의 끈끈한 인연은 잘라버리고
산 속 암자를 찾아가는 수도승처럼
숨을 가슴에 쓸어모아 하늘 향해 토해낸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분수는 한 발 더 허공을 밀어 올린다
뜨거워진 현실의 골목이 풀잎 위에 얹혀
하늘로 이어진 길을 어지럽게 한다
쉴 틈 없이 솟는 물관들 오를수록
물방울 단단하게 제 마음을 허공에 붙박는다
바람 불어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부단한 정신으로부터
끝끝내 중심 잡으며 맨발로 가을 맞는다
악착스레 줄기 뻗는 진초록 분수들
중력을 버티며 창창한 가을 天井을 가른다
어쩌면 거기까지가 하늘이 지상에 닿았던
정신의 구근(球根)인지도 모른다
숨겨진 계곡
―리니지*
좋은 하루 부탁하네, F1 키 누르며
황제 목욕탕 휴게실에서 자네와 만났네
욕탕 사람들 옷 입을 때 보니 직업이 확연히 달랐네
한국부동산에 들어가 매물을 알아보았네
지도의 골목과 집들이 게임 속 싸움터 같았네
흠, 자넨 알겠지 숨겨진 계곡에선
누구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 말야
부도난 사장에게 밀린 월급이라도 받아야 했지만
고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네
사회에 대해 좀더 수련이 필요한지 되물으며
비디오 빌려 자취방으로 갈 때
참매미 울음에서 흙 냄새 풍겨왔네
벽에 붙은 이삿짐 전화번호를 외우다
킥보드 피하면 이사이사였는지
빨리빨리였는지 기억할 수 없었네
자네 말처럼 실력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 아니라네
현실은 게임보다 예측불가능해서
지난 달 레미콘 기사가 골목의 아이를 뭉갰는데
깨진 연골이 터진 수박 같았네
집으로 가는 모든 골목이 가상현실의 길을 만들어
내 안의 핏줄을 잡아당기면 달이 뜬다네
이제 이승의 삶을 클릭할 차례라네
*리니지: 온라인 게임. 게임에 필요한 무기 구입 등이 현실 속에서 실제
돈으로 거래되기도 함.
최승철
․1970년 전북 출생
․2002년 ≪작가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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