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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연재/시로 쓰는 시론 1/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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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시로 쓰는 시론
1.
합성(合成) 비누로 마구 닦지 마세요
귀한 몸이에요
천연 비누로 닦아야지요
가령 진선미(眞善美) 천연 비누 같은 것
그런 비누로 오래 닦으면
때만 씻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진선미의 살도 조금씩 붙게 돼요
그러나 개념을 조심하세요
개 같은 개념에 잡히면 뼈도 못 추려요
그리고 관념도요. 관(棺) 같은
관념에 사로잡히면 씨도 못 찾아요
보세요. 요즘의 ‘자유’ ‘자연’ ‘양심’ ‘사랑’―
껍데기만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큰 뿌리 잘라내는 한이 있어도
잔뿌리들 살려야 해요. 냉가슴 언 가슴
속말 입속말 헛소리 다 다 살려야 해요
저온(低溫) 숙성의 발효들, 은밀한 땅속의
햇빛들이지요. 그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해요. 하늘의 불과 땅의 물이 만나
옥동자를 낳기 위해선
2.
백년 묵은 술이 있다지요
오 백년 묵은 꿀이 있다지요
천년 묵은 소금이 있다지요
그러나 더 오래된 것이 있지요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미움
아름다운 물 아름다운 눈물
아름다운 심 아름다운 무심
아름다운 색 아름다운 무색―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방부제는
아름다움이에요
3.
날씨 흐리고 머리 띵-한 날
눈 코 가까운 원시의 변기에 앉아
식물의 대사(代謝) 같은 향긋한 구린내
동물의 대사 같은 구수한 구린내
머리 속 CO가 대장(大腸) 속 인(仁)을 만나
시원하게 빚어내는 상쾌한 구린내
그 구린내를 모르는 현대인은 불행하다
한밤중 약국 찾아가는 두통환자들처럼
사철 향그러운 화장실에 앉아 향수로
목욕을 해야하는 고급 호텔 조화(造花)들처럼
4.
새벽부터 붉어오던 동쪽 바다
빨간 수평선에서 갑자기 쏙 솟는 햇덩이!
그 이왼 시 아니다
나오겠다고 나오겠다고
온갖 요동 다 치고 엄마의 뱃속
다 뒤집어놓고 엄마가 기절할 즈음
와― 하며 나오는 아기!
그 이왼 시 아니다
이젠 더워도 조금 추워도 조금
비가 와도 조금 바람이 불어도 조금
조금조금 벌어져 마침내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알밤!
그 이왼 시 아니다
<시작노트>
시론은 시로 써야할 것 같다. 인생론 자연론이 그렇듯이
시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시 아닌 다른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김동호
․1934년 충북 괴산 출생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바다』 『꽃』 『피뢰침 숲속에서』 『시산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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