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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기행시/하늘에 주소를 둔 사람들(히말라야 시편)/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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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주소를 둔 사람들
―히말라야 시편
김인자
1.
히말라야에 가서
히말라야가 어디냐고 물었다
사람도 산(山)도 고개를 젖는다
히말라야에선 아무에게나 주소를 물어서는 안 된다
히말라야는 땅에 주소를 둔 게 아니라
하늘에 주소를 두고 있다는 것을
나그네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영원의 다른 이름
히말라야에선 바람에게 길을 물어야한다
히말라야는 본류(本流)로 드는 물의 정거장과
눈[雪]과 바람의 정거장이 있어
매표구엔 어린 신(神)들이 하늘로 가는 표를 팔고 있다
지정된 좌석이 없으니 차표를 미리 구할 필요는 없다
과한 짐은 사절이지만
세상 돈으로 차비를 요구하는 법도 없어
풀꽃이나 경전 한 구절이면 족하다
2.
히말라야,
가서 보면 안다
우리들의 삶, 저 까마득한 하늘 가까이
돌 절벽에 화전 일구는 일일지라도
저잣거리의 욕심은 모두 헛것이고
누구에게나 태초의 시간은 그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손목에 매달린 시간을 끝내 놓치지 않겠다던 사람도
히말라야에 들면 세상의 속도는 온데 간데 없고
왜 주소가 필요없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의 막장을 지날 필요도 없이 히말라야에 가면
한가지 뜻밖의 선물에 놀라게 되는데
누구에게나 땅의 주소가 아닌
하늘의 주소를 예약받게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3.
너무 깊이 녹슬기 전에
수혈을 받으리라는 생각뿐이었다
시간 앞에 녹슬지 않은 것은 없으니,
그러나 히말라야는 예외다
신(神)들의 영토 히말라야에 가면
수천 개의 봉우리에 깃들어 사는
신(神)들을 만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욕(無慾)의 땅 히말라야에선 상처가 깊을수록
눈부신 새살을 경험하게 된다
소리는 허공에서 펄럭이고
펄럭이는 깃발 속으로 느리게 걸어가는 사람들
걸어서 만난 오늘은 수없이 경험한 어제와는 다르다
내일 다시 히말라야를 걸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오늘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가보지 못한 길이라고
언제까지 상상만 할 수는 없었다
섣부른 상상에 지쳤고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나는 갔다
왜냐고 묻지 말라
신을 만나기 위해서도, 산에 오르기 위해서도 아닌
오직 걷기 위해 갔을 뿐
히말라야, 걸어서 오르려면
신들의 허락 없이는 어림없는 일이다
갈길 너무 멀고 아득해 걷는 동안
내 몸이 만든 경전에 모두를 바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길 위에 바쳐졌으며
얼마나 처절한 방황이 내 안에서 나를 다독였는지,
때로 부질없는 꿈과 헛된 발길질로
현실을 상상처럼 안고 갈 때도 있었다
4.
하늘을 향해 오른다는 것은
보다 깊은 곳의 뿌리를 더듬는 일이어서 그것은
뼛속까지 사무쳐 끝내는 죽음 이전의 본류로 드는 일이었다
바람 외에는 누구도 가는 곳 어디냐고 묻지 않았으므로
때로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곳까지 흘러들었다
나는 나로부터 떠나왔고 세 들어 살던 세상으로부터
아니 세속의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음을
히말라야 앞에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곳
히말라야에선
외롭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 따위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
모두들 설산에 기대 사는 자연이기 때문이다
걷는다는 특별한 축복도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선택일 뿐이어서
서서히 나에게서 내가 빠져나가는 행위 이전의
어떤 교감으로부터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5.
물 속처럼 달밤의 산 속에는 그만의 고요가 있다
소리와 빛을 뛰어넘는 진공의 초극이 그러할까
삶도 죽음도 잠시 비낀 그곳은
지금까지 내가 상상해 왔던 태초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은 새롭게 태어나고
산의 정거장마다 탱탱하게 부푼 고요가 정점을 이루니
명상이라는 화두 없이도 모든 것은 명상이다
절뚝거리는 고통이 없다면 내 다리 역시 내 것은 아니다
몸도 마음도 처음엔 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여기서 ‘나’라는 존재 앞에
비로소 익명을 버리고
본류(本流)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던 것일까
밤마다 달빛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전설의 설인(雪人) 예티는 어디에도 없고
죽음 같은 설산의 고요만이 바다를 이룬다
추위에 밀려 방으로 되돌아와
한밤중 거울 앞에 서니
머리를 산발한 히말라야 거지가 웃고 있었다
예티인가?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웃고 있는 그녀
저 건너 산중턱에는 그때까지 잠들지 못한 야크들이
설산을 배경으로 느리게 걷고 있었다
황량한 고산의 추위를 그대로 안고 사는 야크들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짐의 무게나 천형의 높이란
차라리 하늘이다
6.
오르는 길은 내내 당나귀들의 똥 천지다
함께 걷던 셀파족 포터는
길을 막아선 그들의 똥을 피할 생각도 않고
기분 좋게 코를 흠흠거리는데
며칠을 내 자신 견딜 수 없는 역겨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를 보고
그래서 알았다. 나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무욕(無慾)의 땅 히말라야
사람들은 오체투지(五體投止)로 오른 불탑에다
시든 꽃잎을 바치며 세속의 상처를 어루고 있었다
내 고향 여자들은
성난 바다에 남자를 바치지만
히말라야 여자들은
저 아득한 설산에다 남자를 바친다
고산에서 한 청년을 만났다
설산을 등에 업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웃는 듯, 우는 듯, 아픈 듯, 고통스러운 듯, 그리운 듯,
허기진 듯, 체념한 듯, 추운 듯, 쓸쓸한 듯, 투시하는 듯,
여과하는 듯, 텅 빈 듯, 꽉 찬 듯, 흡입하는 듯, 갈구하는 듯,
애상에 젖은 듯 외로운 듯 무심한 듯 애원하는 듯……
어쩌면 인간 세상의 모두를 초월한 듯한 눈[眼], 눈빛
그의 눈빛에는 해독불가의 어떤 힘들이
나의 심연을 괴롭혔고 끝임 없는 질문을 던졌다
너무나 절망적이고 너무나 희망적인 눈
7.
한밤중 랜턴을 들고 살금살금 혼자
볼 일을 보러 가는 일만큼 무섭고 두려운 일은 없다
아니 그렇게 설레는 순간도 없을 것이다
깊은 밤의 봉우리들은 어떤 곳에서도 본 적 없는
너무나 또렷한 삼각형을 이룬다
안개의 실루엣이 삼각라인을
완벽한 구도로 그리고 있는 삼각산
나는 환상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랜턴을 끄고 숨을 죽인 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움직여 흐린 달무리에 걸린
산의 삼각 그림을 본다
소리조차 지를 수 없는
섬뜩한 공포가 피를 멎게 한다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밀려온 듯한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는 극악한 전율이
내 몸을 소용돌이쳐 흘러갔다
8.
하루 종일 걷다가 숙소에 들면
가장 사무치고 그리운 건 온기(溫氣)다
따스함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세상 모든 것들은 다 그립다
훨훨 타는 불가마가 그립고 너무 뜨겁다고 등을 돌렸던
그 사람도 그리워 미칠 지경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으니
알몸을 설산에 던져 냉욕(冷浴)이라도 해야할까
침낭 속으로 들어가 북― 지퍼를 올린다
추위는 지퍼 소리에도 눈을 부릅뜬 채
섬뜩한 칼날을 세운다
그러니 이 무겁고 짐스러운 몸뚱이
어느 모난 빙벽(氷壁)에 던져서라도
어디가 극한인지 가보고 싶지 않으랴
9.
고소증과 맞섰다
곧 내리막이다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는 곳은 언제나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을 눈앞에 두고서였다
계곡과 계곡 사이
독수리 울음소리 앞장서 건너니
온통 불길한 예감만이 계곡 저편으로 다리를 놓는다
예감은 우리들 생에
때로는 완강한 무기가 되기도 하였지만
히말라야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아무도 없는
비 갠 뒤 지렁이 기어간 흔적처럼
길은 절벽에 바싹 붙어 느리게 움직이고
발끝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길은 꿈틀거리며 반항할 게 분명하다
바람이 계곡을 질러가자
돌덩이들 와르르 앞다투어 뛰어내리는 소리에
울컥 멀미가 난다 어디 한 번 와보시라고
건너 절벽이 눈을 부릅뜨고 으름장을 놓으니
본류로 드는 길은 그렇게 생사의 모험을 피할 수 없다
굴러가는 절벽을 보면 무의식이 자주 소리를 질렀다
그날은 두 번이나 강바닥을 치고 올라갔다
늘 새로운 시작이 위로가 되는 건 아니듯
이만한 절벽에서 절망을 복습해선 안 된다며
나약해진 나를 타이른다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 그의 늑골을 더듬듯
구불거리는 절벽을 더듬는다
내려오는 길은 누구에게나 터무니없이 허망하다
여기서 무릎을 꿇어야 하나?
내 몸 속에서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던 나사들이
스르르 몸을 풀고 아스라한 강바닥으로 몸을 던진다
풀린 나사들 제각각 흩어져 벼랑 아래로 구르니
껍데기만 남은 몸이 기댈 곳은 오직 설산(雪山)뿐이다
아직 내 몸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고
마지막까지 희미한 의식이 고집을 부린다
10.
산의 독백을 들었다
오르막이 없는 산은 산이 아니듯
상처가 없는 몸 또한 몸이 아니라 한다
몸이 자꾸만 문을 닫으려하니
두 다리를 걸면서까지
제지하려 발버둥을 쳤으나 허사였다
얼마 후 신(神)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행복만이
나를 찾아왔다
히말라야엔 꿈을 제조하는 기술자가 따로 없다
모두가 공중에 희망이라는
내세의 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곳의 신전과
낮은 곳의 신전을 잇는 통로에는
어린 양떼와 아이들이 놀고 있다
천사가 아닌 아이들은 아무도 없고
천사가 아닌 어린 당나귀도 없다
히말라야. 걸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다르지 않고 물과 불이 다르지 않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고 시작과 끝이 다르지 않다
공중에 거처를 둔 신과 땅의 짐꾼 포타가 다르지 않고
독수리와 들꽃이 다르지 않다
경계를 지우는 것 또한 바람이거나
빙하호수의 물빛만도 아니다
걷다보면 맘쓰지 않아도 허욕은 풍장(風葬)되고
불필요한 집착도 천장(天葬)의 재물이 되고 만다
11.
히말라야는 삶을 통해 죽음을 가르치는 학교다
교사나 학생이 따로 없는 침묵하는 성자들의 집합소다
돌문에 새긴 경전(經典)을 열고 들어가면
입을 닫고 귀를 열 때 심연도 열었는지 확인해야한다
세속의 학습을 버릴 때 어떻게 말言을 버려야하며
열린 귀로 무엇을 담아야하는지 가르치는 건 침묵이다
침묵의 집들은 수억만 년 설산 위에 기둥을 세우고
너무나 견고한 벽을 가지고 있어
어떤 장비로도 허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침묵이 아니면 세울 수도 허물 수도 없는 신(神)들의 처소
히말라야는 나그네에게 무허가 건축을 허락하지 않는다
더 오랜 침묵이 벽돌을 만들기까지는,
사모하는 내 어머니의 어머니였고
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이룬
우리들의 정토(淨土) 히말라야
본류에 들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히말라야에선 내가 나를 잊을 때도 있었다
히말라야가 아니었다면 나는 안개가
어둠의 바다라는 걸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공중의 집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안개만이 빈 산 빈 마을의 주인이 되었다.
가끔 나는 안개마을에서 안개사내의 품에 안겨
안개의 아이를 잉태하는 혼곤한 꿈을 꾸기도 하였다
정글에선 길을 버리고 싶은 유혹이 자주 나를 괴롭혔으나
끝내 숲과 길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으므로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었다.
내 의지로 버릴 수가 없어서 모두 내 것이었을까?
12.
히말라야 신(神)들은 성찬(盛饌)을 즐기지 않는다
주식(主食)은 만년설(萬年雪)이거나 수억만 년 묵은 바람이거나
갓 돋아난 푸른 이끼거나 새벽 강물에 피어나는 물보라다
나무들이 두껍게 이끼를 안고 열심히 몸을 불리는 동안
안개는 미사복을 입고 아래 계곡으로 외출을 한다
혼이 없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흘러가는 강물과 바람에게 잠시 스친 나그네에게도
히말라야는 연모(戀慕)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
히말라야에 가면 개나 고양이도
스승이고 신(神)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바람 같음을
그들이 가르쳐 줄 때도 있었다
물의 사막은 공중에 정거장이 있어서
본류를 드는 순간 고행은 시작되고
바쁘게 길을 나서는 강물을 보고 돌아서면
마음은 어느새 하늘에 가 있었다
13.
본류는 가장 깊거나 높은 곳에 집을 짓는다
나는 날개가 없고 날개를 가질 수 없는 존재다
그렇다고 저 높은 산을 바닥에 내릴 수도 없으니
허물어지더라도 걸어서 올라야
내 땅이고 내 본류다
해탈(解脫)은 하늘에도 있고 내 안에도 있다
질문이 없어도 답을 주는 건 히말라야뿐이다
히말라야!
우리 모두 걸어서 가야할
최초의 땅이고 최후의 하늘이다
나는 더욱 멀고 아득한
본류를 향해 걸어갈 것이다
내 발이 만든 경전에 조용히 입맞추며
김인자
․1955년 강원도 삼척 출생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떼.와.놀.던.어.린.시.절』
․시산문집 『그대, 마르지 않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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