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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시인의 산문/검은 풍경―아리랑 /우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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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311회 작성일 04-01-0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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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대식
검은 풍경―아리랑


20대 초반 나는 끝없이 길을 나섰다. 내 피 끝에 도는 역마살을 잠재우기 위해 그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황폐한 한 영혼은 야간 기차 속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었으며 허름한 주막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곤 하였다. 길 위의 모든 것들이 나를 감동시켰다. 강원도 어느 산골 양지에서 보던 금강 초롱꽃, 남도 해안가를 돌아 나오다 본 붉은 황토밭, 눈이 펑펑 쏟아지는 지리산 연하천 가는 길에서 만나 끝내 동행했던 이름도 모르던 고등학생 등등 황폐한 해안가에서 서성이던 나를 물 속에서 걸어나오게 한 것들이다.
정선아라리를 찾아 헤매던 시절도 있었다. 스물두 살 무렵 신경림의 민요기행을 읽던 나는 아무 주저없이 길을 나섰다. 먼저 원주로 길을 잡고 일가들을 찾아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일가들이란 더러는 서먹서먹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먼 혈족의 흔적들로 인해 그 따뜻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원주 시내에는 외갓집이, 북원주 50여리 밖에는 친가의 일족들이 살고 있었다. 원주 성당은 내 정신적 풍경의 후면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 더 나이가 든 후에도 원주에 들어가 아무 곳도 방문하지 않고 원주성당 앞을 서성이다가 돌아온 적도 있다.
원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정선행 기차에 올랐다. 초여름의 풍경들은 어둡고 답답한 영동의 산자락들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여행은 늘 풍경과 동반한다. 가끔은 저 풍경들 속에서 죽고싶다는 매혹적인 유혹들이 활활 타오르곤 했다. 새벽에 도착한 정선역. 연당, 연하, 예미, 자미원, 별어곡, 나전, 여량, 구절. 역의 이름들은 별다른 수사 없이도 시로 들려왔다.  역사(驛舍) 긴 마루 의자에 누워 다른 먼 고장의 냄새를 즐겼다. 미명의 새벽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먼 고장의 냄새란 늘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해가 떠오를 무렵 천천히 정선 읍내를 걸어 다녔다. 조양강에서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낮게 자리잡은 집들은 아주 오랜 풍경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방에 들어갔다. 엽차 잔에 물을 따르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다방 아가씨에게 김병하 선생댁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 정도 작은 읍내라면 정선아라리를 잘 부르는 김병하 선생댁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방 아가씨는 생뚱하게 쳐다보며 잘 모르겠다고, 정선에 온 지 불과 한 달도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10시가 넘으면 마담언니가 나오면 잘 알 수 있으리라 했다. 다방 마담에게 물어 보아서 찾아간 곳은 정선 역사 끝에 붙어 있는 목재 제재소에 딸린 허술한 집이었다. 김병하 선생은 멀리 출타 중이었다. 부인 되시는 분께서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셨다. 어린 딸들은 톱밥을 놀이터삼아 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집을 나왔다. 딱히 갈 곳이 없었던 나는 다음날 임계장이 선다는 말을 듣고 임계행 버스에 올랐다.
임계는 정선과 강릉 가는 중간에 있다. 정선아라리에 나오는 강릉, 삼척으로 소금 사러가던 길이 아마 이 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긴 비포장도로는 길을 헤매던 나 같은 놈에게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계에서 텐트를 구해 하룻밤을 지냈다. 강가 물소리가 쉼없이 들려왔다. 천렵을 하던 토박일 성싶은 젊은 친구 두셋이 텐트로 다가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며 술을 권했다. 소형 녹음기에서는 정선아라리가 흘러나왔다. 지는 해는 강가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인간의 모든 몸들도 사위어가는 저녁이었다. 죽어도 좋다. 살아야겠다.
난전으로 펼쳐진 임계장은 소담스러웠다. 5일장에 나온 할머니들은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나물을 내놓고 흥정은 뒤로하고 끊임없이 나물을 다듬었다. 외지에서 온 신발 장사는 널찍이 자리를 잡고 신발들을 되는 대로 진열하였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어디서 왔는데요?”
“순대국밥 하나 말아주세요.”
대답 대신 밥을 시켜 훌훌 먹고 강릉으로 나갈 것인지 정선으로 나갈 것인지 차부 앞에서 골똘히 생각을 해보았다. 정선으로 방향을 잡았다. 꼭 다시 김병하 씨댁을 들러야 할 것 같았다. 김병하 씨를 만난다는 것은 이미 부질없다고 생각했지만 돼지고기 두 근을 사서 다시 제재소 옆 김병하 씨댁을 찾았다. 목재를 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톱밥 냄새가 향긋하게 코를 찔렀다. 그 집 아이들이 돼지고기를 지글지글 볶아서 먹는 상상은 행복했다.
몇 번 주인을 청한 끝에 마른 사내 하나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검고 그을린, 말랐지만 골기가 느껴지는 사내였다.
“어쩐 일로…….”
“어제 왔던 학생입니다만…….”
“아 이리로 들어오시오.”
나는 무작정 따라 들어갔다. 자신이 김병하라고 소개하고 어쩐 일로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노래를 들으러 왔노라고 말했다. 김병하 씨가 빙그시 웃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어린 딸을 불렀다. 당신은 장고를 잡고 어린 딸은 무릎을 굻고 앉았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탁한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움푹 패인 오두막을 나와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사내의 노래 뒤를 이어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유려하게 강물 위를 흐르는 듯하였다. 산길과 물길을 흐르며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노래라는 것이 삶이 이룩해낸 절정이라는 것을 알았던 순간이다. 삶의 지난한 상처들이 노래에 옹이처럼 맺혀 있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나는 녹음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을 먹고 가라는 간곡한 권유도 물리친 채 구절리행 버스에 올랐다.
나는 아직도 그 때의 구절리 행을 검은 계곡으로의 진입으로 기억한다. 어둡고 깊은 산의 검은 속살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풍경의 아름다움과 삶의 신산스러움이 교체되는 길이었으리라. 탄광의 흔적들, 마을 곳곳에는 더러 검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게딱지같은 낮은 집들이 몇 채 있었다. 그 오후의 살풍경 속에 나는 방을 하나 잡고 녹음기를 켰다. 마음이 검고 검은 첩첩의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푸르름이 다해 검게 되어 산 속은 눈도 오고 비도 오고 억수장마가 지고 있었다. 내 마음의 풍경이 쏟아져 구절리 계곡에 나뒹굴고 있었다. 바다 가까운 곳에 이르러 바다와는 너무나 다른 철벽의 산 속에 갇히어 나는 젊음을 멀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젊음의 풍경은 검고 검었다. 그 검은 바탕 위에 손톱으로 스크레칭하듯 원주 성당을 정선아라리 악보를 새겼다. 남해안 노도 바닷가의 짠 바닷물이 아프게 그 상처를 핥고 지나가기도 하였다. 그 후 이삼 년 동안 나는 정선에 갈 때마다 김병하 씨댁을 찾았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정선에 들렀다가 우연히 김병하 씨를 찾게 되었다. 무형문화재급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화엄동굴 관리소에 안정적인 직장도 얻고 있어 여간 마음이 기쁘지 않았다.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때 그 따님은 이제 성장하여 어엿한 처녀이자 소리꾼이 되어있었다. 다시 그 후로 다시 칠팔 년 다시 정선을 찾았을 때는 김병하 선생은 뇌출혈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젊은 날의 쓸쓸함이 다시 밀물처럼 가슴을 기어올랐다. 가난한 세월이여 어느 저녁의 들녘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가?

어은골, 너덜
북창 팔십리
소금 사러 가는 먼 길
달 뜨면 달만 보이는
정읍사(井邑詞) 같은 노랫길
―졸시 「청산길」 부분

잔인한 잔광이 들녘을 물들일 때 나는 아직 임계장의 생선 좌판 위에 각따귀이며 검은 산 속을 걷는 수도승이며 여량리 어느 주막 모주꾼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길 위에 서있다. 지난 세월이여, 나의 도반들이여.리토
피아



우대식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추천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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