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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신인상(시)/그 노인이 사는 법 외 5편/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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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서동인
그 노인이 사는 법
서시장 어물전에 나앉은
노파는 생선 비늘처럼 야위어간다
부둣가 병든 갈매기의 부리를 닮아가는
입술이 바삭 바삭 마르지만
새로 생긴 초대형 마트 때문인지 벌이가 수월치 않다
갈라진 손등에 소금기 섞인 비린내 스미면
노파는 한 마리 물간 생선,
좌판에 나른한 햇살이 내려앉으면
어느새 꾸벅꾸벅, 노을빛 물드는 얼굴에
봉긋 검버섯 피어오른다
떨이를 기다리는 어물전을 먹어치우는 어둠 속
간밤 꿈길에 밟힌 영감이 떠오르지만 몹쓸 사람,
애간장 타는 세월이 주름치마처럼 펄럭거린다
이 사람아,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면 환청인가 손님도 뚝 끊긴 시장통
해풍에 깎인 갯바위처럼 쓰라린 가슴 어루만지는
노파는 팔다 남은 생선 몇 마리 비닐봉지에 담아 묶는다
산동네 텅 빈 집으로 가는 삼거리
대폿집 막걸리 한사발로 허기를 달래는
노파는 스물스물, 꽃각시로
피어오르고 싶다
바닷가 사진관
카메라 앞에 곰팡이 핀 보름달 빵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천연기념물
사진사의 김치, 소리에도 부리 앙다문 새들은
어시장 소금절인 갈치처럼 웃지 않는다
성한 곳이란 하나도 없는 날갯죽지
물버짐 핀 발가락 붕대를 감은 채
환갑을 맞이한 어미새 깃털 뿌리뽑힌 가슴에
그 옛날 물 속에서 부화한 새끼들은
부리라도 비비고 싶지만
셔터를 누를 때마다 반짝이는 물이랑
가라앉아 버린 물 속의 빈집을 추억하는
거짓말처럼 살아온 날들이 되감아진다
저물지 못하는 햇살 머뭇거리는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유리창 너머
병든 어미새 남겨두고 또 다른 도래지 찾아
하나 둘 깃을 치는 철새들의 속내까지
현상할 수 있을까, 물 속 인화지 서럽게 출렁이는
남쪽 나라 바닷가 사진관
달의 고백
달빛은 항상 제 속을 감춘다
밤마다 호사스런 분장에
호기심을 느껴도 언제나 얼굴만 내밀 뿐,
지구에게는 뒤통수를 보여주지 않는다
어제는 백색가루 섞인 환한 어둠으로
세상을 문신한 눈썹이었다가
비 오는 날이면 가게문 걸어 잠근 작부처럼
형체도 없이 눈물만 흘린다
넝쿨 속 박통에 뿌리던 금가루 날아올라
별들로 박히는 새벽 귀갓길
연인들 훔쳐보는 쏠쏠한 재미도 있지만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뒷골목
제 안에 방아 찧는 어린 옥토끼
두 눈을 가릴 수 없는 그 마음이야,
세상이 널 버리지 않는 이유는
누가 보든지 어둠의 길을 가르는
기염 때문이라고 밤에만 죽는 사람들
소곤거림에 귀가 번쩍, 머리끝이 쭈뼛거리지만
아무도 모른다, 제 안의 어둠을 태우다
불살라버린 뒤통수의 비밀을
이제야 고백하니까
행복동으로 가는 길
간밤에 내린 비는 지상의 굿판을 닮은
적란운의 반란이라고,
가재도구의 비명 소리 공중으로 흩어지는 여름날 오후
젖어서 분한 마음까지 뙤약볕에 펴서 말리지만
좀처럼 펴지지 않는 아내의 주름살,
비 내려도 잠기지 않는 산동네라도 찾아가자고
졸라대는 딸아이와 셋이서 짐을 꾸린다
시집올 때 장만한 혼수품 죄다 버리고
용달차에 오르는 아내는 결혼사진도 젖었다고
액자 속 물 먹어 멍한 얼굴을 쓰다듬지만
신이 난 아이는 행복동으로 빨리 가자고,
유리병에 갇힌 종이학을 날려보낼 그 동네엔
풀벌레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야단이다
결국은 다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떠나는 길인데
차창 밖 무심한 하늘엔 또 다시 뭉게구름,
저 구름들이 충돌하기 전에 도착해야 하는데
살찐 달빛 흥건히 출렁이는 마당에는
별똥별도 귀기울이는 얘기꽃이 도란도란
분양권도 재건축 걱정도 필요 없는 행복동이
아직도 멀었느냐고 아내와 딸아이는 물어오지만
아무리 달려도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그래 바로 저기야
어서 오십시오, 여기서부터 우리들의 행복동입니다
설마, 믿기지 않아 두 눈을 비비는 순간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
아빠, 또 비 온대
당신의 바다
멀미하듯 돌고 돌아 다가선 한려수도
어머니 손금처럼 닳아버린 바다를 만났다
부둣가에 쌓인 궤짝 안의 생선들은
양복 주머니 속 알약을 눈치채 듯
눈 풀린 창녀처럼 실없이 비웃고
어깨 한 번 펴보지 못한 사람들
모닥불 앞에 서면 풀 죽은 겨울햇살도
어느새 열다섯 고추처럼 탱탱해진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되살아나는 시간들
순간, 먼 과거 속의 해일을 뚫고
걸어나오는 사내를 보았다
손 내밀수록 멀어져만 가는 젊은 아버지,
염소떼 사이로 꽃상여가 지나가고
누런 콧물 번들거리는 오른 소매
저 아이는 누군가를 닮았다
끝내 불씨는 입을 다물고 밀물지는 어둠 속에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
이젠 돌아서야지, 물수제비 뜨던 솜씨로
만지작거리던 알약을 내던지는 부둣가
여인숙 창 너머로 겨울 달은 여물어가고
철이 들면 바다도 늙어간다지
마지막 축제
누군가 수군거린다
잘 익은 복숭아를 닮았다고 관 속에 누워
못질을 기다리는 동안
여비에 보태라고 만원권 지폐 한 장
떠나는 아들 손에 한사코 쥐어주는 아버지,
손발이 묶여 한시도 자유롭지 못한 나는
그래도 비시시 웃는다
화장터가 보이자, 아버지 가슴에 박히는 빗줄기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죽어서도 맴도는 육도윤회(六道輪廻)의 바퀴살
사는 게 더 무서운 일이라고
낯익은 사내들 불길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지만
눈물 흘리는 이 아무도 없다
살아온 순간들이 화구(火口) 속으로 사라지면
극락강을 건너는 뼈들의 웃음 소리,
사람들은 묻힐 땅 한 평 없는 날 보고
마른 연기라 말하지만 수초덤불을 지나
먼 바다로 가라고,
중얼거리는 아버지의 한줌, 한줌에 흩어져
산란 후 거북이처럼 바다로 간다
<수상소감>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큰 근심도 작은 근심으로 내려앉는 정방사 해우소에서 바라본 가을 풍경, 세상 밖의 길을 안내하는 단풍의 손금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 위에 시를 어루만진 시간들이 눈, 코, 귀, 입 달린 하나의 형체를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 제 안에서 물을 들인 시의 세포들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직 설익은 상처의 기록을 내보이는 것이 쑥스럽지만, 한 겹의 허물을 벗고 나니 기쁘다. 문학의 테두리에서 도망치지 못한 그 어떤 운명의 이끌림이 이 자리에까지 인도를 한 것 같다. 이 기쁨을 고향, 여수에서 묵묵히 시를 쓰는 갈무리문학회 회원들과 나누고 싶다.
주위를 돌아보면 살아오면서 많은 도움을 준 분들이 계신다. 그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첫발을 내딛는 이 순간, ‘지금부터다’라는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해야겠다.
끝으로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리토피아 관계자 및 심사위원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평>
서동인의 시는 크게 두 개의 지향이 뒤섞이고 마찰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하나는 일상의 고단함과 눈물겨움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일상적 세계를 끌고 먼 곳으로 떠도는 낭만적 고뇌가 그것이다. 그는 먼 곳으로 가고자 하지만 결코 멀리 가지 못한다. 그는 ‘바다’로 갔다 다시 ‘골목’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그의 시가 지닌 진지함과 심각함은 여기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그 무거움이 오래 지속되고 있음을 그의 시는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시는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나이를 먹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함의한다. 그의 시의 언어가 이러한 의식 세계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의 활기와 탄력이 가라앉아 있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의 진지함이 감상이 아니라 강인한 활기와 결합될 때 보다 긴장감 넘치는 서정을 형상화할 수 있으리라. 아울러 시의 배면에 깔려 있는 80년대적 삶의 풍경 또한 이제 2000년대적 시대적 감수성으로 인화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려는 신인에게 이러한 주문을 하는 데에는 그만큼 그의 시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삶의 상처를 보듬되 그 상처를 치유하는 낭만성에 갇힐 게 아니라 새로운 살점이 돋아날 수 있는 싱싱한 기운을 보았으면 한다. 더욱 좋은 시를 쓸 것으로 기대하며, 당선을 축하한다.
―편집위원 일동
서동인
․1971년 전남 여수 출생
․2000년 제2회 <청람문예제> 시부문 최우수상
․2001년 ≪열린시조≫ 평론 발표
․방송통신대학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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