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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초점/평문-불온한, 그러나 매력적인 공간들/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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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그러나 매력적인 공간들
김남석
1. 문학의 불온함, 불온한 문학
소설은 불온하다. 아니, 모든 이야기는 불온하다. 신화와 전설과 민담이 그러하고, 잡담과 소문과 스캔들이 그러하다.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식량이 되거나 살 공간을 마련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의 시간을 빼앗고, 정신적인 긴장을 완화시키며, 생의 의욕과 생존에 대한 집중력을 둔화시키기도 한다. 견고해야 할 삶의 성채를 호시탐탐 노리는 무서운 적과 같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 불온성으로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기도 한다. 김현은 문학은 아무 것도 억압하지 않기에 우리가 받는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런 어법을 빌려본다면, 문학은 불온하기 때문에 온당한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온당한 것이 당연한 것이고 우리 곁에 있어야 할 것이라면, 우리는 불온함을 통해 온당함이 결여된 세계의 모습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온당해질 수 있는 대안을 찾게 된다. 문학에 부여된 공리적 역할이란, 아무리 문학이 불온하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 불온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온당함을 추구한다고 믿는 데에서 생성된다.
따라서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불온하고, 소설이 근본적으로 불온하며, 그것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불온하다. 그러나 불온한 문학은, 불온한 독서와 창작은, 온당함을 멀리 그리고 암시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온당하다. 이 글은 문학의 불온함과 주제적 온당함에 대해 생각하고자 쓰여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일정한 제약을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가급적 특이한 사회 문제에 대해 색다른 반응을 보이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 불온함이 끼치는 혹은 조성해내는 문학적 공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문학적 공간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문학 공간은 언어로 재현된 저작 내의 관념적 질서를 통칭할 만큼 방대할 수도 있고, 장면 내의 인물이 놓여 있는 물리적 배경을 지칭할 만큼 지엽적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가급적이면, 작품(단편) 단위로 자연스럽게 경계를 이루는 문제적 현실(사안)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2. 자살에 대한 은밀한 유혹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가장 이단적인 문학 공간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내에 있다. 이 공간은 자살의 권리를 배포하는 한 청부업자의 행동 궤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는 자살할 위기에 처하거나 자살할 가능성을 가진 인물을 찾아, 자살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말해주고 선택을 종용한다. 고객들은 그의 방문을 받는 순간부터, 생존의 이유와 죽음의 유혹 사이에서 고민한다. 대부분의 고객들이 청부업자의 요청을 따르는데, 이것은 자살이라는 사회적 금기가 실제로는 인간의 본능과 어긋날 수 있다는 작가적 전언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법률과 종교와 도덕과 관습과 가르침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정신적 몸짓이 자살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살에 대한 일반인의 생각은 단호하다. 그것은 범죄 행위이며 신성 모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영하는 정형화된 생각의 제단에 틈새를 만들고 매력적인 이단 신앙을 불어넣는다. 자살은 권리이며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선택이라고. 이러한 생각은 불경스럽다. 자살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아니 자살은 권유되거나 선택되어서는 안 된다는 묵계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자살에 대해, 그리고 자살을 금지하는 이유에 대해 묻게 만들고, 자살과 생존의 온당한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필요하다. 만일 자살청부업자의 존재 가치가 있다면, 진정한 온당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대두되는 현안 가운데 자살에 관련된 것도 있다. 인터넷상에서 자살을 도모하거나 권유하는 사이트가 은밀하게 성행하고 있으며, 이 사이트에 가입하거나 동참하는 사람의 숫자가 무시하지 못할 속도로 늘어가고 있다. 또 최근 개봉된 한 일본 영화는 자살에 관한 코믹한 설정으로 눈길을 끈 적이 있다. 물론 이 영화는 자살을 조장하거나 부추기고자 하는 취지를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자살을 영화의 흥미로운 소재로 삼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중의 의식이 예전에 비해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위험신호이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어떤 방법으로든 분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인 것이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현안에 대해 생각하고 그 대안을 궁리하게 만드는 작업과 어느 정도 연관된다. 비록 궁리와 생각이 처음부터 면밀하게 고안된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 사회의 환부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 아쉬운 것은 사건 전개의 개연성이 상실되거나 작법 상의 미숙함이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죽는 이유가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 그들의 자살이 절실한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것은 불온한 상상력이 극대화될 때, 생겨나는 허점이라고 할 수 있다.
3. 옐로우 저널리즘과 본격 소설의 점이지대
이병천의 소설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지강헌 일당의 탈주와 인질극의 전모를 다룬 「홀리데이」가 대표적이다. 이 사건은 전국민의 관심을 끌었고, 여러 차례 소설의 소재로 인용되었다. 장정일과 백민석이 소설의 삽화로 이용했고, 기형도도 「가는 비 온다」를 지어 특별한 기억을 남겨두었다. 그러므로 소재적 선택만을 놓고 보면 특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병천은 같은 사건이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한다. 화자의 시점을 인질극의 한복판으로 잠입시킨 것이다. 잠입을 위해 두 가지 설정을 한다. 하나는 화자의 신분을 당시 진압 경찰로 삼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자의 아내를 당시 인질로 삼은 것이다. 이로 인해 독서의 현실감이 증폭된다. 텔레비전 중계로 이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막연한 추억이 될 수 있고, 낭만적 일탈의 빌미가 될 수 있지만, 당시 정황의 처참함과 인질의 절규를 기억하는 이에게는 하나의 문제적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총탄과 피로 얼룩진 이 이단적인 공간은 현실적 문제점의 발흥지가 된다. 이 소설에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부르짖은 지강헌 일당은, 불쌍하고 힘없는 이 땅의 소외자들의 대변인 구실을 한다. 이병천은 그들의 일탈적 행위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기운을 읽어내려 애쓴다. 또 인질이 되어 정신적 상흔을 깊게 입은 불행한 인간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애쓴다. 우리가 텔레비전으로 지켜 본 여자 인질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침착했었다. 그래서 그녀가 겪었을 마음의 상처와 고통스러운 기억을 간과해버린 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소설 속에 등장한 그녀는 다르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다. 그녀로 인해 남편마저 오래 전 기억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하나의 문제적 사건이 가져온 정신적 파산인 셈이다. 소설은 이러한 문제 의식을 담보하고 있다. 이것은 불온한 소설적 공간이 탄생하게 된 이유이고, 그 공간을 뒷받침해주는 당위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슈의 종류와 강도는 달라지는 것 같다. 최근에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확산으로, 신종 사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유명 연예인의 정사 장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의 유통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무슨 양 비디오>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몇 건의 사건은, 우리 시대의 성이 가진 문제점을 요약적으로 반영한다. 먼저 풍문으로만 떠돌던 연예인들의 성도덕 문란을 부분적으로나마 확인시켰고, 성을 상품으로 사고 팔거나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삼는 연예계의 불법 거래와 검은 마수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들었고, 타인의 몸과 정사를 훔쳐보고 싶어하는 욕망이 은밀한 사적 공간을 넘어 대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만큼 변질되었음을 자각시켰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백조들 노래하며 죽다」에서 소설로 꾸며진다. 여기서도 개성적 시점(point of view) 설정이 눈길을 끈다. 화자는 섹스 비디오 파문의 주인공인 한 가수의 매니저이다. 그의 발언과 시각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가수를 길들이려 했다는 고백 때문이다. 이병천은 매니저의 입을 통해 잘못된 연예계의 관습이 낳은 폐해와 화려한 갈채 뒤에 깔려있는 늪지를 공개한다.
성이 상품처럼 거래되고 출세를 위해 몸을 희생해야 하는 연예계의 풍경은 소설에서는 대단히 낯설다(굳이 예를 들자면, 김승옥이나 윤대녕의 경우에는 연예인을 주요한 등장인물로 삼은 소설을 발표한 바가 있긴 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문 가판대 한 구석에 진열된 연예 신문이나, 독자들의 관심을 자극하려는 삼류 잡지 혹은,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도색 사진첩에나 어울릴 법하다. 그런데 이병천은 저속하고 선정적인 사건을 소설적 공간에 접목시킨다. 이것은 옐로우 저널리즘적 영역과 문학적 공간의 겹침이다. 사태를 보는 심각성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확대이고 제법 의미 있는 개척인 것 같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기존의 소설 공간에서 보지 못했던 불온한 시도라는 점이다.
4. 사랑과 몸의 이질적 만남
과감한 성적 묘사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90년대 이후 문학에서 전반적으로 고조된 현상이기도 하다. 문학이 성애와 육체에 대해 개방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러한 현상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 중에서 동성애는 충격적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동성애는 낯선 사랑의 형식이다. 우리는 이성애를 전통적이고 합법적인 사랑의 방식으로 이해해왔고 또 그렇게 인정해 왔다. 문화적 주변 영역에 동성애가 잔존하고 있다 해도 그 사연은 언제나 극비에 붙여졌다. 문학도 은밀함에 대체로 동조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많은 작가들이 앞다투어 동성애에 관한 소설을 발표하면서, 동성애 문제는 문학의 표면으로 부상된다. 작가들의 명단에는, 장정일을 비롯하여 윤대녕․김영하․전경린․박상우․하성란․백민석․송경아․성석제 등 90년대 새로운 소설적 흐름을 선도하는 선두주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순서대로, 「아담이 눈뜰 때」, 「수사슴 기념물과 놀다」, 「거울에 관한 명상」, 「다섯 번째 질서와 여섯 번째 질서 사이에 세워진 목조 마네킹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붉은 달이 뜨는 풍경」, 「당신의 백미러」, 「내가 사랑한 캔디」, 「첫사랑」이 그 작품 목록이다.
이 중에서 두 작품을 보자. 먼저 박상우의 「붉은 달이 뜨는 풍경」이다. 이 작품의 라스트 씬(scene)은 레즈비언 커플의 은밀한 회합과 그 회합을 훔쳐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꾸려진다. <별장을 등지고 저수지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았다. 알몸과 알몸, 그리고 마주 잡은 손. 갑작스럽게 세상에 붉은 기운이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미친년들, 더러운 년들, 오동나무 주변을 혼자 맴돌며 욕설과 침을 뱉어대던 아버지의 모습이 기괴한 음화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남자가 사랑했던 여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였다. 둘은 남의 눈을 피해 한적한 숲 속에서 성애를 즐기고 있고, 이를 훔쳐보는 남자는 어릴 적 기억을 상기해낸다. 기억의 물꼬를 따라, 동성애자였던 어머니를 욕하던 아버지의 분노가 스쳐간다.
화자는 기억 속의 풍경이 <기괴한 음화>라고 했지만, 현재 화자가 속한 풍경 전체가 <기괴한 음화>이다. 상궤에서 벗어난 섹스 형태, 몰래 엿보는 남자, 그리고 남자의 시선을 빌어 이를 엿보는 독자들 모두 <붉은 달이 뜨는> 음산한 풍경의 주역들인 셈이다.
다음, 윤대녕의 작품 「수사슴 기념물과 놀다」는 비교적 상세하게 동성애를 묘사한 점에서 주목된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마음만 먹으면 동성애의 동영상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본격 문학 내에 동성애 장면을 옮겨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윤대녕은 이를 실행했다. 이 점에서 그는 과감하다. 문학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정보를 일정 부분 알려준다는 명제를 염두에 두면, 이것 역시 하찮게 치부해버릴 일이 아니다.
성애와 육체에 대한 관심은 엽기적인 섹스 행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가령 백민석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그의 소설적 관심은 빈번하게 폭력과 섹스에 집중된다. 그가 주시하는 인물들은 끔찍한 폭력 현장 주변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동물 살해나 사소한 주먹다짐은 예사이고, 납치, 구금, 구타, 신체 절단, 심지어는 살인과 유기(遺棄)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범죄마저 주저 없이 선보인다. 격렬한 섹스의 현장도 위반적인 성향을 답습한다. 동성애를 비롯해서 강간, 윤간, 수간, 난교, 관음증, 근친상간, 가학적 피학적 변태 정사에 이르기까지 일탈적이고 엽기적인 성행위가 거리낌없이 묘사된다. 두 경우는 대게 서로를 동반하거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는 허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이나 농밀한 포르노의 줄거리와 흡사하다.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배태된 것 같다.
섹스 비디오 테이프 사건에서 확인된 것처럼, 섹스는 대중적인 관심사가 고이는 지점이다. 그래서 옐로우 저널리즘의 집중적인 포화지점이 된다. 백민석의 소설은 가십거리를 다루는 과감성을 보이지만, 가십거리를 넘어서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문학적 불온함은 그 불온함이 추구해야 할 온당한 목표를 함축한 경우에만 유효한 문학적 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백민석의 소설은 유희적이고 자극적인 취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결과에 함부로 긍정하기 힘들다. 현실에 유효한 작가적 전언을 찾아보기 힘들다면, 우리는 그 문학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교훈은 동성애의 경우에도 대체로 부합된다. 동성애가 자극적인 소재나 취향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불온한 소재나 취향이 삶의 구체적 지점을 공격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불온함을 다루는 태도에서 진정성이 감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엽기적이고 일탈적인 성의 묘사가 조성한 문학적 공간은 만들어질지언정, 그 공간을 여행하고 감촉해야 할 이유는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5. 당당한 베끼기의 미학
포스트모더니즘 문학관에서 원상(原象)과 모상(模像)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원래의 것이 있고 그것을 베껴 만든 것이 있다고 할 때, 전통적인 문학관에서 그 우열과 가치는 분명하다. 베끼는 것은 결과에 관계없이 가치 없는 일이며 심한 경우에는 부도덕의 소치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베껴서 만들어진 공간, 즉 원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문학 공간은 상대적으로 폄하당하기 일쑤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문학계도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영향권 아래 일부 편입되기 시작한다. 많은 작가와 평론가가 이 사조의 명칭을 이용하게 되고, 그 입장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것의 존재를 염두에 두게 된다. 이와 함께 베껴낸 것을 정식으로 밝히고 그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움직임도 일어난다.
베끼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의식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남의 것을 무분별하게 가져다 사용하는 경우와, 문학적 전략의 일환으로 남의 것을 빌려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려 노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전자는 도덕적으로 찬성하기 힘들고, 후자는 적어도 창작자의 도덕적 혐의를 따지기 힘들다. 전자는 표절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고, 후자는 긍정적인 문학적 기법으로서의 패러디로 이해할 수 있다. 린다 허천은 패러디를 <비평적 거리를 가진 모방>이고 <차이를 내포한 반복>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원작을 모방하고 원상을 반복하되, 그 모방은 원작과의 자의식적 거리를 가진 것이어야 하며 그 모상은 원상과 차이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패러디는 단순한 베끼기여서는 곤란하다.
젊은 작가들은 패러디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이다. <세상 아래 더 이상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격언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래서 전대의 명작을 재현하는 작업에 거부감도 덜하다. 그 결과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패러디 작품이 출현한다. 이순원의 「말을 찾아서」, 박성원의 「런어웨이 프로세스」, 은희경의 「빈처」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차례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이상의 「날개」, 현진건의 「빈처」에서 발상이나, 구성이나, 배경이나, 비유나 묘사법 등을 빌려온다.
이 중에서 이순원의 「말을 찾아서」는 특히 성공을 거둔 경우이다. 이 작품은 노새를 끄는 양아버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양자(어린 화자)가, 집을 나간 양아버지를 찾아가 함께 돌아오는 여로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여로가 봉평에서 대화로 이어지는 「메밀꽃 필 무렵」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옛 것의 <반복>이고 <모방>이다. 그러나 길은 옛 길이되,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다. 이것이 <차이>이다.
이 소설의 압권은, 부자(父子)가 걸어가는 길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진부옥을 나온 다음 아부제와 나는 밤길을 걸었다. 아니 걷지 않고 마차 앞자리에 타고 밤늦도록 이목정까지 나왔다. 달이 없어도 별이 좋은 밤이었다. 아부제의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가 조금도 싫지 않았다. 노새는 연신 딸랑딸랑 방울을 울리고, 길 옆은 온통 옥수수 밭이거나 감자밭, 올갈이 무와 배추를 뽑은 다음 씨를 뿌린 메밀밭이었다. 꽃 향기도 좋고 저녁 바람도 시원했다.
“수호야.”
“야.”
“니가 날 데리러 완?”
“야, 아부제.”
“니가 날 데리러 여게까지 완?”
“야, 아부제.”
“수호야.”
“야.”
“니가 날 데리러 이 먼데까지 완?”
“야, 아부제.”
“니가…… 니가…… 나를 애비라구 데리러 완?”
“야, 아부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부제는 그 말을 묻고 또 물었다.
위의 풍광은 이효석의 인상적인 묘사를 밑그림으로 하고 있다.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는 달>과 <대화까지의 밤길>이 있고, <숨이 막힐 지경으로 핀 메밀꽃>과 <시원한 나귀들의 걸음>이 있는 그 옛 길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별과 메밀꽃과 나귀는 그래서 우리의 기억에 특별하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밤길을 가는 두 사람이다. 원작에서 허생원과 동이는 부자관계로 암시된다. 물론 어수룩한 허생원의 일방적인 추측이기 때문에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패러디된 작품에서 이 부분은 변주된다. 비록 육체적․혈연적 부자관계는 아닐지언정, 두 사람은 정서적․정신적 부자관계를 맺게 된다. 부자를 꿈꾸는 두 아버지의 입장은 같되, 그 입장을 받아들이는 아들의 태도가 다른 셈이다. 그래서 어눌하게 이어지는 부자의 대화가 각별한 울림을 주는 것이다.
이남호는 「메밀꽃 필 무렵」에서 <언어로 만들어진 미학적 공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순원의 패러디 작품은, 이미 <만들어진 미학적 공간의 아름다움> 위에 새로운 언어로 <짜여진 풍경과 마음의 조화로운 아름다움>마저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이것은 베낌이라는 불온한 언어가 낚아 올린 보기 드문 아름다움이다.
6. 삼류 무협지에 담긴 진실
무협지는 통속 문학의 대명사이다. 하지만 수준 높은 감식안을 가진 문학인 중에서도, 무협지의 매력을 인정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것은 무협지가 현실의 불만을 상당부분 해결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게츠비 같은 부자나, 삼손 같은 천하장사나, 제갈공명 같은 지략가를 꿈꾸지만, 그 꿈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직장에는 복종해야 할 상사가 있고, 일상에는 함부로 하기 힘든 연장자가 있다.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도 일방적으로 내 뜻을 관철시킬 수 없다. 모든 상황에서 크건 작건 욕망의 한계와 자아의 위축을 경험한다. 그런데 무협지 속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욕망의 충족과 자아의 팽창을 이룬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삶과 행동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고 대리만족을 얻는다. 이것은 적어도 독서 도중에 막대한 포만감을 던져준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무협지 속의 만족은 더 절실해진다고나 할까.
그러나 독서 후의 포만감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주인공의 모험이 종결되면 우리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현실적 결여감은 더욱 커져 있다. 무협지는 그래서 중독성이 강하다. 그곳에서 빠져 나왔을 때 느껴야 할 패배감과 아쉬움을 느낄 사이 없이, 계속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협지를 좀처럼 일류 문학으로 만들기 어려운 요인이다. 현실 적응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책읽기를 통한 반성적 거리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독서는 일종의 마취제처럼 우리를 잠시만 편안하게 해줄 뿐이다. 삶과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 방법을 사용해서 말이다.
문학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와의 교섭을 포기시키는 경향을 갖게 마련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현실의 문제를 잠시 밀쳐둔다. 우리가 이른 바 좋은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이렇게 밀쳐둔 문제를 다시 상기하게 만들거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축적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좋은 문학처럼 그 안에서 중지된, 삶에 대한 의문들을 상기하게 하거나 다른 각도에서 그 답을 구하게 만드는 무협지가 있다면 삼류 문학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하다. 김현의 비판은 일정한 통찰력과 화두를 더할 것이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의 복수담은 그들이 사회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을 ‘과장하여’ 내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무술은 일상인이 배우는 학문․처세술이며, 그들의 상대인 마두의 독은 자기 내부의 욕망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헤매는 미로는 일상인의 불안과 초조이다. 이러한 분석을 행함으로써 나(김현:인용자)는 무협소설이 일상인의 본능을 왜곡하여―상상력이란 항상 왜곡하여 사실을 내보여주기 때문이다―소설의 세계를 꾸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233면)
사회인으로 안주하게 되는 것이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의 한 염원이다. 반대로 교양소설의 주인공들은 사회인으로 안주하기까지의 과정을 행동한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생의 의미란 미리 주어져 있으며,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에게는 존재의 무의미성, 존재의 다면성이란 없다. 생의 의미는 단 하나이며 그들은 그것을 위해 싸운다.(236면)
―김현의 「무협지는 왜 읽히는가」
김현은 무협지가 현실의 반영이되, 이 반영은 심하게 일그러진 상태라고 말한다. 무공의 숙성은, 전문지식과 인격의 숙성에 비견된다. 악한이 사용하는 독은, 자아 내부의 충동적이고 야만적인 욕망 즉, 길들여지지 않은 이드이다. 주인공들은 출구와 목적지를 찾지 못하는 미로에서 헤매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일상의 출구 없는 답답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뜻한다.
김현은 현실과 일상의 층위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현상에서 무협지 모티프의 중요한 근원을 찾고 있다. 이러한 관찰은 대단히 재미있다. 게다가 관찰을 더욱 확대할 여지도 있다. 주인공의 강력한 적수는 인생의 목표이다. 우리는 크든 작든 일정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목표는 좀처럼 이룩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목표 달성의 험난함은 주인공만큼 높은 무공을 소유한 호적수를 극복하는 어려움으로 나타난다. 많은 여자와 보물과 권력집단이 주인공의 여정을 방해하거나 때로는 돕는데, 이것은 사회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동조해야할 협조자이거나 극복해야 할 장애물의 비유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사람들은 상대들과 제휴하기도 하고 겨루기도 하면서, 나름대로의 전략으로 삶을 영위한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처럼, 삶은 합종연횡과 전략전술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곳이다. 이렇게 예를 확인하면, 무협지 속의 세계가 현실의 어떤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김현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게 된다.
세상살이가 험난한 것은 우리가 믿는 정의와 신뢰와 가치가 올바로 구현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종종 말해진다. 천변만화하는 세상에서 옳고 바르고 정당한 것은 그 수명이 길지 않은 경우가 많고, 변질되어 그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런데 옳고 바르고 정당한 것 그래서 변질되지 않고 찬란하게 빛나는 가치들이 <단 하나의 생의 의미>라면, 왜 사람들이 무협지를 읽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김현은 이 생의 의미가 <기존 윤리의 확대>이며 <성공한 인간의 확인>에 불과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회의하고 고민하도록 하지 않기 때문에 무협지는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고 폄하했지만, 세상에서 사라진 덕목을 지상(紙上)에서 확인하려는 열망과 목적은 무시 못할 독서의 이유로 작용한다.
무협지의 매력은 협객 행각에 있다. 그 매력은 아름다운 여인과의 로맨스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무예연마의 흥미진진함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피맺힌 복수를 달성하려는 강력한 의지로 발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이 의협심과 도덕적 정당성을 지킬 때에 가능한 일이다. 주인공이 지고한 덕목을 지키지 못한다면 도덕적으로 심각한 결함을 안게 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그 매력 역시 반감될 것이다. 무협지의 매력에 대해 다른 장르―예를 들면, 영화나 만화나 시뮬레이션 게임―의 관심은 대단한 편이다. 그러나 본격 문학에서는 그리 활발하게 인유되지는 않는다.
그러던 것이 최근, 본격 문학 내에서도 무협지의 영향력이 감지되고 있다. 먼저, 유화의 시 「무림일기」를 떠올릴 수 있다.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서사는 기발하다. 그 기발함은 혼탁한 정치 현실에 대한 참신한 비유를 생성한다. 김영하의 『무협학생운동』도 비슷한 상상력으로 축조된다. 전통 무협지의 문법을 학생 운동의 상황에 대입한 작품이다. 다음으로, 이병천의 소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를 들 수 있다. 대개의 무협지가 중국을 배경으로 삼는데 비해, 이 작품은 조선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시간적 배경을 동학운동기로 설정해 조선 말기의 역사적 상황과 서민들의 애환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마지막으로, 성석제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성석제의 경우는 뚜렷하게 무협지의 주인공을 표방한 경우는 없다. 그러나 그의 입담과 인물 설정과 대결 묘사 장면에서 무협지의 관습을 따른 흔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바둑을 소재로 한 「고수」와 같은 작품은 두 대가의 만남과 겨루기의 긴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공대결의 아슬아슬함과 통하는 구석이 많다. 또 「왕을 찾아서」에서 건달들의 신상 내력과 특기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무협지 속의 고수들의 장기와 인상을 소개는 방식을 빌려온다. 「조동관약전」의 조동관 같은 인물 창조도 무협지적 상상력에 의거한 경우이고, 『순정』의 이치도도 성장, 학습, 직업, 타인과의 관계에서 무협지적 정황을 떠올리게 하는 경우이다.
무협지적 상상력과 특수한 공간 창출은 부수적으로만 본격 문학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그 효과는 상당한 편이다. 독자들의 묘사 방식과 서사 기법으로 인해 독자들의 이목을 끌고, 현실에서의 패배감을 대리 충족시킬 정도의 영웅심과 호쾌함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것은 가독성의 창출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생의 의미>를 음미할만하게 변주한 경우는 없어, 아직은 미진한 아쉬움이 많은 편이다.
7. 컴퓨터 게임과 음란 채팅에의 탐닉
컴퓨터의 보급은 놀이 문화에 변화를 가져왔다. 각종 전자 게임이 놀이 문화의 중심으로 틈입한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놀이는 물리적 행동을 동반한 경우가 많았다. 몸을 움직이고 규칙을 지키고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타인과 접촉하고 집단의 소속감을 느끼는 일종의 사회화 과정이었다. 그런데 컴퓨터를 이용한 게임은 사회화 과정을 대폭 삭감시키거나 완전히 거세한다. 사람들은 혼자서 게임을 즐기고, 타인과의 접촉은 사이버 공간에서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집단 개념도 희미해져서 소속감을 느끼거나 단체 정신을 함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풍조는 놀이 문화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측면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자연히 문학도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는 빈도가 늘어난다.
가령 김영하의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이나 「바람이 분다」를 보면 전자 게임을 즐기는 인물이 등장한다.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에서는 현실을 피해 게임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남자가 나온다. 이 남자는 실적을 위해 후배의 공을 빼앗고 옛 동료들이 모여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게임 속으로 도피한다. 「바람이 분다」는 한 사무실에 근무하다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 커플에 관한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마음을 나누는 방식이다. <왜 이렇게 살아요? 어느 날 그녀가 물어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어서 나는 조금 당황하여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화면 속에 고정돼 있었고 손은 열심히 키보드 위에서 놀고 있었다. 이렇게 사는 게 어떤 건데요? 나 역시 같은 자세로 되물었다. 그녀는 두 걸음쯤 물러나 앞차기와 돌려차기로 반격을 가해왔다. 나는 재주를 넘으며 뒤로 피했다. 내가 사장님이라면 이렇게 안 살 것 같아요. 그녀가 다가와 업어치기로 나를 메치고는 다시 발길질을 해댔다. 화면 속의 나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무예의 고강함을 겨루는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 상대에게 공격하면서 동시에 서로에 대한 대화도 진행시킨다. 현실 언어와 육체적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던 연인들 사이의 심리전이, 시뮬레이션 대결로 바뀌고 다른 한편으로 보완된다. 시뮬레이션 게임에의 탐닉은 차근호의 희곡 「암흑영웅전설」에서도 나타난다. 주인공은 현실에서의 비참한 처지를 잊고 절대 강자가 되기 위해 가상 세계로 잠입한다. 그들에게는 현실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가상 공간이 중요하며 또 익숙하다.
컴퓨터 게임에의 탐닉은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현실을 피해서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전자 게임의 세계로 도피하는 세태를 반영한다. 현실 언어는 쇠잔해지고 전자 언어(시뮬레이션 동영상)는 중요해지는 상황이 초래된다. 이러한 상황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섹스라는 비상식적 개념을 낳기도 한다.
이병천의 「우리들 사이버 키드」는 사이버 섹스를 시도하는 남녀의 이야기이다. 남자는 과외선생으로 여고생인 여자아이를 만난다. 설정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그것을 빌린 것이지만,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원조 교제>나 <음란 채팅>과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 그들은 모니터로 전달되는 문자 언어를 통해 성적 욕망을 부추긴다. 참다 못한 여자애가 신체적 유혹을 하지만, 특이하게도 남자는 이를 거부한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밀의 방>이라 부르는 가상 공간 속에서만 서로를 탐한다. 이 섹스의 형식은, 피부 접촉과 언어적 교감을 중시하는 기존의 성적 관념으로 이해하기 곤란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도된 음란함의 극치이다. 영화 『숏컷』을 보면, 가정주부가 전화로 상대를 애무하여 성욕을 자극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화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번성해 가는 비정상적인 성적 관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변질된 섹스의 한 양태이다. 인터넷상의 음란 채팅은 변태적인 성욕을 넘어서는 것으로 더욱 새롭게 대두되는 성적 관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이버 세대>가 낳은 퇴폐적 현상에 해당한다.
8. 비교(秘敎)와 원시성(原始性)의 창궐
90년대 문학은 사조직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윤대녕의 출세작 「은어낚시통신」은 세상에서 상처입고 지하로 도피한 자들의 모임을 보여준다. 이 모임은 은밀하게 그리고 신비하게 집전되는 제의(祭儀)를 연상시킨다. 어떤 측면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에 나오는 고성의 섹스 파티와도 닮아 있다. 김영하의 「피뢰침」은 벼락을 맞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젊은이들의 모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대게 벼락을 맞은 경험이 있는데, 그 희열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낙뢰연구와 탐뢰여행을 한다. 이것 역시 고대 종교의 의식을 연상시킨다. 박상우도 「사탄에 마을에 내리는 비」에서 사특한 인상의 한 모임을 폭로한다. 이 모임의 멤버들은 요란한 음악과 광란의 춤이 흐르는 술집에서 만난 젊은이들이다. 불량한 인상의 이 젊은이들은 누군가의 안내로 음습하고 괴기한 방으로 초대되고, 그 곳에서 세기말의 혼란과 현대적 불모성을 체현하게 된다.
이 세 모임은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비밀스러운 모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다 보니, 마치 고대 비교(秘敎)의 의식 내지는 이단적 종파의 신비한 회합을 닮아 있다. 윤대녕은 <은어>를 문장으로, <생의 비의>를 경전으로, <거슬러와야 한다>는 암호를 주문으로 삼는, 신비종파를 창건한 셈이다. 김영하는 벼락을 신의 부름처럼 인생의 최종 목적처럼 처리하여, <하늘의 신성한 불>을 섬기던 원시 샤마니즘을 부활시킨 느낌이다. 박상우의 경우에도, 히피족에 비견될 만큼 허무와 광란에 휩싸인 <세기말 족>을 만들어낸다.
세 모임은 양지에서 활성화되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어클럽>이 좀처럼 찾기 어려운 장소에서 모임을 갖고, 벼락동호회 <아다드>가 내부인에게만 정보를 완전 개방하는 인터넷 사이트로 운영되며, 사특한 이단아들이 모여든 장소가 지하에 숨은 방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현실에서 용납되기 힘든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지상인의 눈을 피해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고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평적 개입을 떠나, 우리 사회가 아직 이들을 수용할 상태가 아님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 중에서 「피뢰침」은 묘한 매력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 매력은 다양한 해석적 통로로 인해 증폭된다. 그 통로는 세 가지로 간추려진다. 하나는 벼락을 맞고 의사 죽음을 체험하고 그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설정이, 다층적인 물음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벼락을 맞는 행위는 무모하지만, 카타르시스를 동반한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창작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소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생활 필수품이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그것을 만드는 희열이 있을 따름이다. 이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소설론 혹은 예술론을 소설적 육체를 빌어 풀어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새롭게 정립되는 모듬살이 방식의 제시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가상 공간에 기초한 모임에 빠져들고 있고, 이러한 추세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이 소설은 현실적 동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
마지막 하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미래 사회의 어떤 측면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맥루한은 전자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 오히려 젊은이들이 육체적인 풍습이나 원시적인 취향을 띠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예언한 바 있다. <토착적인 것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대두되고, <밀림 속의 부족>같은 삶의 패턴이 확산되며, <특이한 스릴을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육체를 보는 기계적 육체관>이 강화된다. 문신, 피어싱, 바디 페인팅 같은 신체적 치장을 선호하고 야만적인 놀이를 즐기고 원초적인 생존 방식을 동경하는 것이 그 징후이다. 맥루한의 주장은 <아나드>의 젊은이들이 왜 벼락을 맞는 일에 집착하는지 짐작하도록 돕는다. 그들은 자극과 스릴과 원시성을 지향하고 숭상하고 있다.
또 최근 호평 받고 있는 천소영의 작품에 담긴 세대론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한다.
여덟 개의 바늘을 알코올 램프에 달구어 각각의 바늘귀에 명주실을 꿴다. 바늘 끝에서부터 0.5센티미터가 남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명주실을 감는다. 명주실을 감을 때는 실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만 잉크가 뭉치거나 한꺼번에 나오는 일이 없다. 바늘귀 부분에는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1센티미터 정도 맨 몸으로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명주실에 먼저 베네치아 레드를 묻힌다.
살에 꽂는 첫 땀.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 숨을 죽이고 살갗에 첫 땀을 뜨면 순간적으로 그 틈에 피가 맺힌다. 우리는 그것을 첫 이슬이라고 부른다. 첫 이슬이 맺힘과 동시에 명주실이 품고 있던 잉크가 바늘을 따라 천천히 흘러 내려온다. 붉은 색 잉크는 바늘 끝에 이르러 살갗에 난 작은 틈 속으로 빠르게 스며든다. 마치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들이 입 밖으로 시원하게 나와주는 듯한 기분. 바늘땀을 뜰 때 나는 더 이상 말더듬이가 아니다. (……) 문신을 끝낼 때마다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듯한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바늘」
화자는 문신을 새겨주는 여자이다. 여자는 침착하게 바늘을 준비했다가, 제물을 봉헌하는 사제처럼 첫 땀을 놓는다. 준비된 바늘이 살 속 깊이 파고드는 순간, 강렬한 피 냄새와 자극적 색채와 손끝의 떨림이 숨죽였던 공기의 결을 따라 일시에 퍼져나간다. 인물의 내면에도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면서, 기묘한 흥분이 온몸으로 번져나간다. 바늘을 쥔 여자는 그렇게 차가운 흉기의 유혹에 몸을 맡긴다.
이 소설에는 문신을 새기는 과정이 문면(文面)에 자세하게 새겨져 있다. 문신을 새기는 여자의 떨림과 흥분도 문장 안에 교묘하게 새겨져 있다. 문신을 새기는 과정은 날카롭고 뾰족한 물체가 살갗을 파고드는 감각적 섬뜩함을 전해주고, 인물의 내면에 웅크린 가학적 공격 본능을 확인시켜 심리적 선뜩함을 일으킨다. 더구나 화자의 어머니가 살해 도구로 사용한, 짧게 잘린 바늘 끝이 남겼을 인체 내부의 상처는 일종의 공포가 되어 우리를 전율시킨다. 정리하면, 바늘은 파열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흥미로운 것은 파열의 이미지가 신체적 희열, 섹스의 쾌감과 연관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맥루한의 전언과 다시 만난다. 맥루한은 원시 부족화된 젊은이들은 <특이한 스릴의 체험>을 희구한다고 말했다. <아나드> 회원이 벼락을 맞고 난 이후에 극도의 성적 쾌감을 느꼈던 것처럼, 문신 새기는 여자 역시 문신 작업 후에 성적 쾌감을 만끽한다. 이것은 육체적 스릴의 극한적 표현이다.
천운영의 소설을 일관하면, 바늘의 이미지가 다른 흉기들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숨」에서 살가죽을 발려내는 <접칼>, 「월경」에서 아내와 정부(情夫)를 난자하는 <잘 벼린 칼 한 자루>, 「당신의 바다」에서 곰장어 머리에 박힌 송곳, 그리고 「유령의 집」에서 쥐를 잡기 위해 설치된 <덫>은 흉기의 목록이다. 그 중에서 접칼은 대표적이다. 천소영은 이 접칼의 사용하여 소머리를 발라내는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여, 마치 원시제례의 살상의식을 보는 듯한 잔인함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인터넷이라는 첨단 과학 문명의 총애를 입은 세대이지만, 그로 인해 원시 부족화 단계로 회귀하는 첫 세대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첨단 전자 미디어 사회, 맥루한의 용어로 하면 지구촌 시대의 일원으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특히 세 번째 해석로(解釋路)를 따라 「피뢰침」으로 진입하거나 문신 새기는 여자를 좇아 육체에 피어난 핏방울을 직시하면, 그 공간이 파괴적 전율과 살육적인 냄새로 진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본능과 광기가 팽배한 공간이다. 현실의 규칙적 질서를 거부하는, 근대라는 시대적 흐름마저 되돌려 놓으려는, 야만과 역류의 공간인 셈이다. 따라서 그 공간은 앞으로 우리에게 불어닥칠, 당혹스럽고 예기치 못한 미래 세대의 예고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9. 문학의 불온성, 그 이단아와 반역자의 행보를 기대하며
더 불경스럽고, 더 이단적이고, 더 반역적인 문학 공간을 찾아 헤매는 여행을 마쳐야 할 때이다. 여행을 계획하고 해당 장소를 답사하다 보니, 한국문학의 지형이 상당히 복잡해지고 그 영역이 넓어졌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복잡화와 영토 확장은 그 자체로 고무적 현상임에 틀림없지만, 진정성과 완성도까지 보증할 수준은 아니다.
모든 문학은 온당하기를 거부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더 불온해지려는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불온함 밑에는 온당함을 지향해야 한다는 명제가 깔려 있다. 이것은 일종의 딜레마로, 문학이 지닌 고민거리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작가들은 자기만의 글쓰기 조건을 찾아 헤맨다. 남들이 미처 사용하지 않은 소재나 사건이나 인물이나 배경을 찾으려 애쓰고, 남들과 구별되는 단어나 어법이나 문체나 정조를 연마하려 애쓴다. 독자성은 모든 문학의 소망 사항으로, 흔히 온당함을 뒤집고 의외의 것을 발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독자성은 불온함과 통하는 구석이 많고, 의외성(예외적 성향)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이야기를 일반적 방식으로 늘어놓는다는 것은 이미 문학이기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예외적 방식만을 찾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문학의 불온성이 처한 한계가 여기에 있다. 불온한 기미는 다분히 형식적인 의외성(예외적 방식으로 말하기)에 의존한다. 작가 자신이 불온한 주체가 되어, 불온한 생각을 생산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자아와 사물과 세계를 보는 시각이 예외적이고 독자적일 때, 다른 말로 불온할 때, 작가의 존립 근거가 마련되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의 바램이 있다면, 불온함이 단편적(斷片的)이거나 유희적(遊戱的)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만일 사드나 카프카나 보르헤스의 문학 공간이 일회적인 특이성만 확보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과연 그들의 문학을 존중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자신만의 불온한 공간을 건립하고 이 공간을 유지 보수하는 것에 일관된 공을 들인다. 한 편에서는 개척의지가 다른 한 편에서는 수성의지가 요동치고 있는 셈이다. 이제, 한국 문학사에도 이단적이고 반역적인 공간을, 자신만의 주체적 공간으로, 그리고 평생의 공간으로 만드는 작가가 나와야 할 때인 것 같다. 만일 그러한 작가가 출현한다면, 그 때서야 불온성은 우리 문학의 진정한 질료이자 동력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김남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논문 『오태석 희곡의 개방성 연구』
․현재 고려대, 한경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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