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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시 계간평/경계 위에서 시쓰기/박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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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228회 작성일 04-01-0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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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위에서 시쓰기
박정선



1. 들어가며
근대적 공간에서 자연은 주체로부터 분리된 타자로서 자리한다. 근대적 배치는 자연을 주체에 대한 대상의 자리에 위치 지웠고 이에 따라 자연은 분석과 탐구의 대상이 되거나 이용하고 개발해야 할 무엇이 되었다. 오늘날의 담론은 이러한 근대적 사유를 끊임없이 반성하고 이분법적 경계를 허무는 일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경계’를 문제삼는다는 것, 그리고 이를 넘어서거나 해체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구분으로 작용함으로써 가져다주는 용이함보다는 그것이 행사하는 폭력적이거나 억압적인 속성이 보다 크게 자각되고 있음을 지시한다. 동시에, 다양한 사항들을 함께 인식하고 논의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보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새로운 경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을 또한 지시한다. 원근법적 구분과 경계가 해체의 대상이 되고 넘어서야 할 무엇으로 인식되면서 시인들은 주체와 객체, 자아와 대상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나는, 보다 포괄적이고 확장된 시적 공간을 탐구한다.
소월이 「산유화」에서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꽃을 노래함으로써 자연과 인간, 자아와 대상이 이루는 거리와 간극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었다면, 그리고 그 안에서의 소외와 고독 혹은 좌절을 보여주었다면, 현대의 시인들은 이러한 거리와 간극을 해체하는 방식을 통하여 주체와 객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시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경계를 허물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그러므로 현대의 시인들이 이전 시대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적인 지도를 그리는 일에 해당될 것이다. 최근에 출판된 이재무의 『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와 박태일의 『풀나라』(문학과지성사, 2002), 그리고 채호기의 『수련』(문학과지성사, 2002)은 주체와 자연, 삶과 자연 혹은 언어와 자연의 경계에서 시적 사유를 전개한다.

2. 나무로 웃는 웃음―이재무, 『위대한 식사』
이재무의 새 시집 『위대한 식사』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에 기반한 생태학적 사유 속에서 일상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조화롭고 풍요로운 자연에의 지향성과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이 자리하는 현실을 향한 방향성을 함께 지님으로써 개별 작품들은 이상적인 공간으로의 초월을 시도하기보다는 현실 공간 안에서의 진정성을 모색하는 긴장을 유지한다.

비 온 뒤 연달아 피어오르는 안개의 혀
큰 산의 나신 핥는다
뱀의 등허리가 되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되고
아아, 안개는 내 여인의 가는 허리가 되고
큰 산은 쑥스러워 靑靑 웃는다
가도가도 구절양장의 길 구절리
한 굽이 돌 때마다 거기, 우리에 아픈 생의
내력 있다는 듯 자동차 바퀴에 튀어
옆구리 퍽, 질러오는 묵언의 저 돌멩이들.
노변, 싸리나무꽃이 있었다
볼우물 수줍은 그녀
내 어릴 적 공부에 게으른 날
종아리 파랗게 아프게 하더니
오늘은 불룩해진 아랫배 쿡 찌르며 웃는다
길 좇다 길 잃고 길 잃으니
내 잠시 비워두고 온 세간
저렇듯 반짝이는 녹엽으로 멀리서도 환하다
산사가 차려주는 저녁공양
달게 비우고 山心에 젖어 어둠이
어둠을 낳는, 밟을수록 더욱 싱싱해오는
산길 한 마리 산짐승 되어 꿈틀꿈틀
내려온다 이미 밤은 깊어서 광 속처럼
빼곡히 들어찬 어둠의 속살
나는 상장 받은 아이인 양
내일이 전혀 두렵지 않다
한낮에 본 사랑에 눈먼 철부지 안개 처녀들아
큰 산 데불고 다들 어디고 갔나 벌써 그것들
내 안에 들어와 꽃으로 웃고 있는지
내 몸은 산으로 의젓하고 또, 얇은
종잇장 되어 한없이 가볍게 날아오른다
―이재무 「구절리 가는 길-길 잃으니 환하게 길 잘 보인다」 전문

인용한 작품의 처음 부분에서는 ‘큰 산’과 ‘안개’가 어우러진 풍경이 관능적이고 감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자욱하게 피어난 ‘안개’는 “뱀의 등허리”, “물고기의 지느러미” 그리고 “여인의 가는 허리”가 되어 ‘큰 산’을 휘감아 ‘핥고’, 안개에 둘러싸인 산은 “쑥스러워 靑靑 웃는다”. 화자는 이러한 관능적이면서 순수한 풍경을 보며 자동차를 타고 “구절양장의 길 구절리” 길을 오른다. 화자는 ‘구절리’의 굽이를 돌면서 ‘아픈 생의 내력’을 떠올리기도 하고 ‘싸리나무꽃’을 보며 어린 시절 종아리를 맞았던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구절리’의 풍경들은 화자에게 이러저러한 정서와 기억들을 환기하면서 창 밖을 스쳐간다.
길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과 그 풍경이 환기하는 정서들이 서술되는 상황은 화자의 ‘길을 잃었다’는 진술을 계기로 하여 이전과는 다른 배치를 갖게 된다. 이때 풍경은 화자의 바깥에 있으면서 화자를 스쳐 지나가는 정경으로 자리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정서나 기억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화자에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풍경은 화자의 ‘세간’이 되고 화자는 풍경 속에서 “한 마리 산짐승”이 된다. ‘山心에 젖어’ ‘꿈틀꿈틀’ 산길을 내려올 때 화자의 흔적은 자연을 훼손하거나 일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산길’을 더욱 ‘싱싱’하게 만든다. 편리를 위해 없던 길을 만들고 자연을 재단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호흡 속에서 함께 호흡할 때 산길은 “밟을수록 더욱 싱싱해”진다. 자연이 인간으로 인해 더욱 ‘싱싱’해지고 인간이 자연 속에서 평온함을 누리는 조화의 공간에서 화자는 “내일이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외부의 풍경과 주체의 몸이 서로 경계를 허물 때 자연과 인간의 몸바꾸기는 보다 적극적인 것이 된다. 작품의 시작 부분에 제시된 관능적인 풍경은 이제 화자의 “안에 들어와 꽃으로 웃고 있”으며 화자의 ‘몸’은 ‘산’이 되어 커다란 산처럼 ‘의젓하고’ “또, 얇은 종잇장 되어 한없이 가볍게 날아오른다”.
이재무의 경우, 자연과 몸이 서로 동화되는 조화와 포괄의 사유 건너편에는 ‘생활’ 혹은 ‘도시’ 등의 일상적이고 인공적인 현실이 놓인다. 작품 「몽상」에서 화자는 화자의 ‘몸’이 ‘물방울’이 되고 ‘나무’가 되어 “도시의 빌딩 쓰러뜨리고 푸하푸하, 웃는” 꿈을 꾼다. 작품 「가재는 일급수에 산다」에서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가재’를 찾아내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재무에게 있어서 자연 혹은 풍경은 ‘생활’ 혹은 ‘도시’ 등으로 대표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통로이며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잣대이다.
시인은 도시적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연과의 합일을 이룸으로써 보다 거대하고 둥그런 화해의 세계를 보여준다. 몸과 산, 몸과 물방울, 몸과 나무가 서로 경계를 없애고 하나가 되는 순간 시인은 일상의 ‘길’과 일상의 규율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길, 더욱 환한 길을 발견한다. 이러한 자연 친화의 사유와 태도는 “죽음을 껴안고 살고 있”는 “부패한 살”의 물고기가 화자로 등장하는 「중랑천 물고기」와 같은 작품에서 파괴적인 도시적 삶의 현실을 드러내는 생태학적 사유로 이어진다.


3. 저승길 종이꽃처럼 피는 바다―박태일, 『풀나라』
박태일의 새 시집 역시 도처에 자연에 대한 묘사와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자연 풍경을 인위적 것 혹은 도시적인 생활에 대한 대척점에 자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풍경 안에 가난하고 쓸쓸한 현실을 겹쳐놓는다. 이재무가 도시적인 현실의 반대편에 자연의 조화로운 공간을 놓았던 것과는 달리 박태일은 현실적 삶을 자연 풍경에 투영한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그리움의 대상 혹은 이상향으로서 그려지기보다는 그 안에 현실의 아픔과 고통을 이미 포함하고 있는 풍경으로서 그려진다.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젖쟁이 노랑쟁이 나생이 잔다꾸
사람 없고 사람 닮은 풀들만
파도밭을 담장으로 삼고 사는 나라
예순 아들이 여든 어머니 점심상을 차리고
예순 젊은이가 열 살 버릇대로
대소사 상다리 이고 지는 마을
사람만 봐도 개는 굼실 집 안으로 내빼
이름 잊혀진 채 그저 풀로만 불리는
강바랭이 씀바구 광대쟁이 독새기
이장 댁 한산 할배 마을 회관 마룻바닥에
소금 전 양 등줄 꺼지게 누운 마을
토광 옆 마늘 종다리는 무슨 힘으로
아침 저녁 울컥벌컥 잘도 돋는데
한때 마흔 이젠 스무 집 어른들
집집 다 버리고 마을 회관 두 방
문지방 내외하며 자고 먹는 풀나라
굴 양식 뜰것이 아침마다 허옇게
저승길 종이꽃처럼 피는 바다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박태일 「풀나라」 전문
인용한 작품의 첫 문장은 신석정의 대표작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첫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신석정의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간이며 현실 공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하고 이상적인 관념의 공간이다. 이에 비하여 박태일의 ‘그 먼 나라’는 현실 공간 안에 자리하지만 소외된 자들의 공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멀어진 공간에 해당된다. “사람 없고 사람 닮은 풀들만/파도밭을 담장으로 삼고 사는 나라”, “한때 마흔 이젠 스무 집 어른들/집집 다 버리고 마을 회관 두 방/문지방 내외하며 자고 먹는 풀나라”는 힘없고 가난한 노인들만이 남은 쓸쓸하고 황량한 바닷가 마을의 풍경과 겹친다. ‘풀나라’는 “사람 없고 사람 닮은 풀들만” 사는 스러지기 쉬운 풀과 같은 사람들의 공간이고, “이름 잊혀진 채 그저 풀로만 불리는” 익명성의 소외된 공간이며,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자리를 “울컥울컥 잘도 돋는” ‘풀’이 채우는 공간이다. “굴 양식 뜰 것이 아침마다 허옇게/저승길 종이꽃처럼 피는” 쓸쓸함과 덧없음이 이 공간을 채운다.
이 작품에서 나열되는 다양한 풀들의 이름은 풍성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을 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생명력을 상실한 ‘저승길 종이꽃’이 ‘허옇게’ 뜬 공간에 자리한다. ‘풀나라’는 사그라져 들어가는 목숨이 ‘이름’도 ‘잊혀진 채’ 살아가고 있는 나라이다. ‘풀나라’는 아름다운 고향도 아니고 생명력이 넘치는 풍요로운 자연도 아니다. 훼손되고 잊혀져 가는 마을의 풍경을 통해 시인은 친근했던 풍경이 ‘먼 나라’로 밀려 나가는 현실에 대하여 노래한다. 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라고 묻는 물음에 그리움과 친근함이 묻어 있는 것에 비하여 박태일의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에는 살아가는 것의 아픔과 슬픔이 묻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박태일의 작품에서 아픔이나 슬픔은 일정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그의 작품들이 현실의 황폐함을 폭로하는 것으로 의미화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사람 닮은 풀”이 처연하고 슬픈 사람살이를 닮아 있기 때문이며 개인의 삶이 유려한 음악성 속에서 노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청상 마흔 해 잘도 건넜는데 기어이/도시 아들 짐 된다고 목멘 마산댁”(「신행」)의 사연이나 피난 와서 질곡 많은 생을 산 ‘이옥기’ 할머니의 사연(「앵두의 이름」) 혹은 “울산 방어진 어느 구들 낮은 주소”로 떠나는 ‘순애’와 ‘어머니’의 이별(「어머니와 순애」) 등 구체적인 삶의 한과 아픔들을 자연 풍경 속에 혹은 음악적 가락 속에 스미게 한다.

4. 건조한 검은 흔적과 젖은 흰 수련 사이―채호기, 『수련』(문학과지성사, 2002)
시집 『수련』에서 채호기는 ‘수련’을 시적 대상으로 삼는다. 이때 ‘수련’은 순수한 자연 세계를 표상하거나, ‘수련’의 표상을 통해 환기되는 삶의 어떠한 모습이나 정서를 지시하지 않는다. 시인은 ‘수련’을 시적 대상으로 삼으면서 ‘수련’을 표상하는 것과 ‘수련’ 그 자체에 대한 관계, 즉 표상하는 언어와 표상되는 사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다. 다소 긴 작품에 해당되는 「수련」은 이러한 사유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는 작품 「수련」의 부분들을 살펴봄으로써 시적 대상으로서의 ‘수련’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수련’ 하고 외치면
수련, 너는 듣느냐? 들리느냐?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증명해 줄 것인가
내가 너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수련, 너를 사랑하는 나의 간절한 외침이
식물의 고요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린다면
이제, 너의 아름다움이 너를
불러 깨어나게 할 것인가?

송상일이 시집의 해설에서 말한 바 있듯 채호기의 「수련」 첫 부분은 “시인의 호명에 의해 비로소 ‘꽃’이 되는” 김춘수의 「꽃」의 상황과 구별된다. 김춘수의 ‘꽃’은 실존적인 인식과 감각에 기댄 대상이다. 그러한 인식의 가운데에는 인식하고 감각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자리한다. 반면 ‘수련’은 ‘나’의 호명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수련’을 ‘깨어나게’ 하는 것은 ‘수련’을 부르는 “나의 간절한 외침”이 아니라 ‘수련’ 스스로의 ‘아름다움’이다. 이 작품에서 ‘수련’은 화자의 호명에 의해서 비로소 피어나는, 인식의 대상으로의 꽃이 아니다. 오히려 화자는 수련을 호명하는 자신의 외침을 ‘증명’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확실한 것은 ‘나’의 인식이나 의식이 아니라 ‘수련’의 존재이며, ‘수련’을 부르고 ‘수련’을 향해 외치는 ‘나’의 행위는 ‘증명’되기 어려운 불확실한 것이 된다. ‘수련’은 그것 자체로 존재하며 화자는 그러한 ‘수련’에게서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수련’을 향한 화자의 ‘간절한 외침’은 “식물의 고요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나’의 호명과 ‘나’의 외침이 수련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를 통해 수련을 표현하는 것 또한 수련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한다.

나는 너를 부르는 간절한 힘으로
너를 쓴다. 내 말을 네가 듣지 못하는 것처럼
검은 글자들은 너를 표현해내지 못할 것이니
‘수련’이라고 쓴다고
어느 누가 너의 아름다움을 읽겠느냐.

그 여름날, 네가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너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네 말을 받아 적으려 했지만
글자로는 불가능하여 그 하얀 목소리를
바라보기만 했었다

(……)

‘수련’이라는 글자를 아는 것은
너를 아는 것이 아니다.
‘6월과 8월에 걸쳐 꽃이 피는
수련과의 다년생 수생식물’이라는 지도가
너에게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너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화자는 ‘수련’을 부르는 ‘간절한 힘’으로 ‘수련을 쓴다’. 그러나 화자의 ‘간절함’이 ‘수련’을 불러오거나 표현할 수는 없다. 화자는 ‘검은 글자들’로 쓰여진 글씨가 수련의 아름다움이나 ‘목소리’를 드러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는 수련의 아름다움이 말이나 글로 형용하기 어려운 경지에 있어서라기보다는 언어 자체의 한계에서 기인한다. <‘수련’이라는 글자를 아는 것> 혹은 <‘6월과 8월에 걸쳐 꽃이 피는/수련과의 다년생 수생식물’>이라는 사전적 지식이 수련에게 ‘다가가는 길’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언어와 글자를 통하여 ‘수련’을 섬세하고 정밀하게 표현한다고 할지라도 ‘수련’은 자신을 표현하는 글자와 문장으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온다. ‘이것이 수련이다’라고 정의하고 규정하는 순간 수련은 언어의 그물망을 빠져나간다. 수련을 “백지 위에 옮기려면” 수련을 “죽여야만 한다”. 수련의 죽음을 통해, 수련으로부터의 미끄러짐을 통해서만 수련은 표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지에 가로 세로 그은 흔적”으로서의 <‘수련’>을 “읽는 순간 놀랍게도/그것은 연못 위에 하얗게 피어 있다”. 이는 <‘수련’>과 <수련> 사이의 간극과 긴장에서 기인한다. “건조한 종이에 바짝 붙어 있는” “어긋나는 작은 직선들의 건조한 검은 흔적”으로서의 <‘수련’>이라는 글자와 “나를 그토록 매혹시키는” “매혹적인 육체”인 <수련>은 서로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의존적이다. ‘젖은 흰 수련’은 <‘수련’>이라는 ‘언어’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지만 이 ‘언어’를 배태하는 자궁이다. 또한 ‘건조한 검은 흔적’으로서의 <‘수련’>은 ‘젖은 흰 수련’을 표상할 수 없으나 <‘수련’>이라는 언어만이 인간을 수련에게 데려다 준다. 시인은 “당신은 ‘수련’이란 언어를 타고/건조한 검은 흔적과 젖은 흰 수련 사이를/메아리 처럼 방황하는 중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대상을 파악하거나 인식하는 것은 언어와 사물 사이를 “메아리처럼 방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은 흰 종이에 쓰여진 “건조한 검은 흔적”인 <‘수련’>과 물 위에 뜬 ‘젖은 흰 수련’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표상과 사물, 언어와 대상이 이루는 긴장을 보여준다.

5. 나오며
이재무, 박태일, 채호기의 최근 시집은 동일하게 자연을 시적 대상으로 삼아 타자로서의 자연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재무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통해 풍요롭고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었다면 박태일은 인간이 빠져나간 공간을 자연이 채움으로써 그리고 인간 삶의 처연한 슬픔을 자연 안에 담아냄으로써 또 다른 방향에서 자연과의 화해를 모색한다. 채호기는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에 대한 시적 탐구를 통해 주체와 자연의 관계에 대하여 모색한다. 이들 세 시인은 전통적인 시적 공간과 구별되는 공간 속에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모색함으로써 시적 주체가 놓인 자리를 새롭게 배치하고 이전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박정선
․199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한경대, 서울신학대 강사

추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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