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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신작소설> 절망뿐일 때 오히려 미치도록 아름다울..../조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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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2,343회 작성일 04-01-0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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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뿐일 때 오히려 미치도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친구, 수마가 온통 할퀴고 간 강릉에서 나는 느낀다네. 지옥보다 처참한 하늘 아래에 그래도 이곳이 사람들 사는 땅이라고 느낄 수 있는 건 천국보다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친구, 말하고 싶어. 저녁이면 철천지원수처럼 까닭도 없이 싸움을 하다가도 아침이면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며 눈물을 감추는 사람들에게 나는 무슨 낯짝으로 옷을 팔고는 돌아서 눈물을 훔쳤는지······ 옷들을 모두 나눠주고 나서도 부끄러움은 멈추지가 않아. 지랄맞게도 옷을 나눠주는 내 손이 떨리는 걸 나는 느낄 수가 있었던 거지. 잔뜩 굽은 허리를 하고 옷을 받아든 할머니 한 분이 돌아서다 말고 멈칫멈칫 내게 다가와 속옷 깊숙이 넣어두었던 꼬깃해진 천원짜리 한 장을 어여 받으라고 자꾸만 고개를 끄덕일 때 나는 자네에게 돈을 빌려 사들인 옷들이 나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네. 그래서일까? 마음속 저미는 울음이 자꾸만 웃음으로만 비집고 나오던걸······ 친구, 며칠 전에 어렵게 자네의 음성을 듣고부터 줄곧 마음이 편치 않아. 내 절망에 눈이 멀어 자네가 보이지 않았던 거지. 절망보다 희망이 우리 가슴에 더 많이 남았을 때, 절망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 썼던 소설로 자네의 깊은 우정에 대한 나의 그 많은 빚을 다 갚을 수 없다는 걸 안다네, 그러나 친구. 지금은 이곳에 오기가 힘들었던 것처럼 이곳을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 



조 헌 용



이른 장마였다.
이르고 긴 장마 속에 잠깐 맑은 날이다. 황씨는 오랜만에 떠오른 해마냥 밝은 모습을 하고 논에 나간다. 풀잎에 매달린 이슬방울들이 아침놀을 받아 금빛 얼굴을 하며 반짝인다. 논두렁을 따라 걷는 황씨의 발길이 툭툭 풀들을 건드린다. 금빛 이슬방울들이 더러는 논두렁에 우수수 머리를 박기도 하고 더러는 황씨의 아랫도리에 더뎅이진다.
황씨는 논 모서리 콤바인 자리를 만들면서도 마음이 마뜩찮다. 이제라도 보리들을 거둬들이겠지만 장마가 몇 날만 늦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햇볕을 그만큼 더 받은 보리들이 트질하게 살올라 밥상에 그대로 올라도 좋았을 것이다. 그런 보리를 거둬야 사람삯이라도 빠질 터인데 장마가 이른 데다가 길기까지 해서 보리들이 시답잖기가 말할 수 없다. 제값받기는 이미 틀려버린 꼴이다. 장마 끝나면 한 몇 날만이라도 햇볕을 쬐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넓은 들에 벼를 심지 않은 논들이 몇 배미 보이지 않을 만큼 벌써 모내기철을 놓치고 있었다. 그나마 저 시답잖은 보리라도 벨 수 있도록 햇볕을 내어 주는 한울님께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콤바인 들어올 자리가 다 만들어지도록 해는 아직 먼 산에 숨어 해뜩한 빛만으로 해무늬를 만들고 있다. 논 모서리에 가지고 온 낫과 숫돌을 놓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온다. 다시 이슬방울들이 떨어진다.
마누라가 차려놓은 밥상에는 막걸리가 한 병 올려져 있다. 밥보다 먼저 마른 목을 막걸리로 축이고 숟가락을 든다. 밥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황씨는 말문을 연다.
“어이 한 그릇 더 주소. 칠성이 놈한테는 무슨 기별이 없었는가?”
“약조를 했으면 바로 오것지 연락은 무슨 연락이라요. 그리고 남들은 아직 눈도 안 떴을 시간인디요.”
어젯밤 티브이에서는 고작 한 이틀 밝은 뒤에 다시 비가 계속될 것을 알렸었다. 빗속에 벨 수 없었던 보리를 이제라도 거두겠다는 생각에 황씨는 잠이 쉬 오지 않았다. 비옷을 입고 논물을 빼기도 하며 발서슴하던 황씨는 마침내 새벽녘에 비가 그치는 하늘을 보고는 논두렁을 걸었던 것이다. 덩달아 마누라도 잠을 설쳤다. 황씨는 스르르 눈이 감겼다. 마누라가 건네 준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면서 막걸리도 한 병을 다 비운 터였다. 날을 해뜩 새운 피로에 술기운이 겹쳐온다. 황씨는 마루 기둥에 기대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마누라가 상을 물리며 한마디 거든다.
“아 글씨 그런 방퉁이질이 어디 있다요. 콤바인 자리를 만들던 물을 빼던 새벽에 일어나 하면 될 터인디 통밤을 새더니, 아 그리 졸며 고집 피우지 말고 칠성이 아제도 올라면 아적 시간이 있으니 들어가 한숨 주무시오. 그래야 보리를 베든 자루를 나르던 할 것 아니오.”
시계를 보니 이제 여섯 시가 조금 넘었다. 지금이라도 칠성이 놈을 부르고 싶었다. 황씨는 수화기를 들다가 내려놓는다. 아침도 먹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마누라 말대로 눈이나 붙이기로 하고 황씨는 아직 그대로 깔려있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콤바인을 따라 다니며 보릿자루를 나르는 일도 제법 힘이 들어가는 일이니 마냥 졸면서 일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칠성이 놈이 오려면 한두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때까지 눈을 붙이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까까 울어대는 까치 소리에 눈을 떴다. 창으로 스며 들어오는 햇살이 꽤 밝다. 마당 미루나무 우듬지에 가시버시인 듯 까치 두 마리가 앉아 가슴깃을 다듬으며 해바라기에 한창이다. 먼 산에 숨어 있던 해가 어느새 우듬지에 걸려 있다. 이, 이런 씨벌······ 황씨는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열한시 십팔분. 내리 다섯 시간을 자도록 마누라가 깨우지 않은 모양이다. 텅 빈 집안이 쓸쓸했다. 마누라 혼자서 콤바인을 거들며 보리를 베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황씨는 논으로 내처 달렸다. 며칠 전에 지붕에서 떨어져 다친 허리가 아파 왔다. 물새는 지붕을 돈 주고 고치기가 아까워서 올제 올제 하고 있다가는 장마 온다는 소리에 제 손으로 고쳐 보겠다고 올랐었다. 외려 병원비가 더 들었다. 입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이퉁이 피우며 통근 치료를 해서 그나마 돈이 적게 드나 했더니 조금만 무리를 하면 허리가 넉신거렸다. 그래도 마누라 혼자 그 힘든 일을 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조금만 가면 보리들을 베고 있는 콤바인이 보일 것이었다.
황씨는 뛰던 발을 멈췄다. 이, 이런 참말로 씨벌······ 멀리 보이는 논에 콤바인은커녕 마누라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일일까? 마누라는 어디로 간 것인가? 해만 보이면 틀림없이 성님집 보리를 먼저 거두자던 칠성이 놈은 또 어디로 간 것인가? 품삯을 더 준다는 다른 곳에서 콤바인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황씨는 머리끝까지 치미는 부아를 발길질로 달래야만 했다. 칠성이 놈이야 어디 가서 딴 논일을 보고 있다고 해도 미련한 여편네라니, 오지 않는 콤바인에 대해 한마디도 없이 어디서 처 자빠져 있는지······ 입술을 감물고 돌아서는 황씨의 옷깃을 바람이 건드리고 지나갔다.
집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황씨는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따르릉거리는 기계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몇 차례나 다시 수화기를 들고 내릴 때에 마누라가 들어왔다. 황씨는 우선 칼벼락부터 놓는다.
“시방 어디 다녀오는 거여. 응? 미쳤어, 미쳤는가? 이제라도 보리를 베자고 누구는 잠도 안 자고 이 지랄인디 어딜 글케 싸돌아 댕기는 것이여, 응? 칠성이놈이 안 오면 나를 깨워서 무슨 수를 써야지 오늘 내일 보리 못 베면 땅을 그대로 엎어야 할 판에, 이런 씨벌, 응, 참말로?”
“아따, 당신도 어찌 그리 성부터 낸다요. 당신은 깨워도 안 인나고 칠성이 아제는 전화도 안 받고······ 내 가슴이 벌겋게 달아오른 숯덩인디 참말로. 후딱 칠성이 아제한테 댕겨왔구만······.”
그제서야 황씨의 몽니난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려. 아따 거······ 근디, 칠성이 놈은 어디 딴 논에라도 나갔대?”
“칠성이 아제가 어디 남이간디 그런 말을 한다요. 이번 장마통에 콤바인이 비를 맞아서 그러는지 시동이 안 걸린다네요. 지금, 수리센타에 싣고 갔다더만······ 동상은 칠성이 아제가 그랬땀서 아무래도 다른 콤바인을 알아보는 게 빠를 거라고······.”
“니미 빌어먹을! 누가 그걸 모르간디. 지금 남는 기계가 어디서? 기계가 없어서리 마녘 기계까지 올라와서 벤다는디. 그게 있어? 없지! 니미, 거참. 나 수리센타에 좀 다녀올라네이.”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작아지기를 기다렸다가 나선 거리였는데도 비는 매섭기만 했다. 미친놈의 비에서 미친놈의 새끼로, 어느새 다시 불어난 샛강처럼 적의(敵意)도 불어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돌아오는 분노라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적의는 자꾸만 불어나 마음을 어지렵혔다.
녀석이 옷 좌판을 벌여보겠다고 했을 때, 해서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에게 돈을 안겨주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나기를 나는 바랐다. 제발, 녀석의 희망하는 것처럼 옷이 날개 돋힌 듯 팔리기를 그래서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재수 없게도 녀석이 옷을 사들인 며칠 뒤부터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이상 기후의 영향을 받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전국을 강타했다. 실상 그것은 ‘내린다’가 아닌 ‘퍼붓는다’라고 해야 옳았다.
우산 속으로 달려드는 빗줄기들처럼 녀석은 어느새 우리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어째서 녀석은 우리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모두들 녀석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 전체수석을 했다는 녀석은 개강을 하고 서너 주가 지나도록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녀석에 대한 온갖 소문들이 해뜰 무렵의 반딧불처럼 희미해질 즈음에 녀석은 봉두난발한 머리와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과 씻지 않아 얼룩진 얼굴에 커다란 지게 배낭을 지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거지도 상거지 꼴이었다.
죄송하네요. 정문서 수위가 자꾸만 잡아놔서유.
삐걱이는 문소리와 함께 녀석이 들어섰고 누굴랄 것도 없이 모두들 놀란 눈을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최 교수조차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누구신지······ 손에 쥔 안경을 몇 번이나 머리에 두드린 다음 최 교수가 그렇게 물었을 때 녀석의 입을 통해 나온 이름은 우리들을 술렁이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누구, 누구누구로 시작한 웅성임은 삽시간에 조용한 강의실을 시장 한가운데로 밀어넣었다.
녀석에게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에도 우리가 녀석 주위로 몰려들었던 건 코의 감각을 이기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대전을 지나 조치원을 지나 천안과 평택을 지나고 오산을 지나 수원을 지나는 그 먼 거리를 녀석은 걸어서 왔노라고 했다. 걷다가 지치면 배낭 위에 말아놓은 침낭을 펴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는 다시 걸었노라고 했다.
아니여, 요새 세상에 누가 그 먼 길을 걸어? 기차를 타고 올 생각으로 논산역이루 가는디 그 앞이서 어떤 할머니가 글쎄 가슴을 찢으믄서 통곡을 하잖여. 방학이 지난도록 못 준 손자놈 수업료를 어찌어찌 만들어서 가져가는데 오토바이 탄 놈들이 휙허니 채 갔다믄서······ 가만히 셈해보니까 내가 갖고 있는 돈하고 거의 맞춤허잖여······ 차비, 그걸 빼면 수업료가 못자라는디······ 그래서 그냥 그렇게 걸어왔구만······ 거, 미안하지만 나중에 묻고 누가 밥 좀 사면 안될까? 굶은 지가 하도 오래돼놔서······.
녀석을 끌고 우리는 그동안 단골이 되었던 막걸리집 포천으로 들어갔다. 반찬 겸 안주로 시킨 술국에 밥을 네 공기나 비우고 나서야 녀석은 우리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위장에 가득찬 막걸리가 정신을 얼큰하게 물들일 때까지 녀석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문예창작과에 우리들을 달뜨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모두들 꼭지가 돌게 취하고 나서 우리는 으레 차례가 되어버린 경도장으로 향했다.
몸이 비에 젖어 갈수록 막걸리 생각도 점점 깊어갔다.
건물에 비해 남달리 크게 빨간색으로 칠한 성공농기계수리센타 간판, 바람이라도 불면 위태위태 흔들리더니 이번 장마에 마침내 성공을 땅으로 박고 제자리에서 떨어져 있다. 그 밑으로 고장난 기계에서 뽑혀진 부속품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다. 그 옆으로 모내기를 하다가 고장이라도 난 듯 모판에 모가 그대로 실린 모심개도 있다. 어린 모가 사나운 햇볕에 말라 가고 있다. 황씨가 다가서자 윷을 놀던 사람들이 알은체를 해 온다.
“성님, 어쩐 일로 이리 다 오시오? 그러고 섰지 말고 이리 와서 같이 놀으십다.”
“옜기 이 사람, 남의 것이나 그저 뺏을 생각 말고 가서 일들이나 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아따 성님도 만날 그 소리요이. 기계는 안 고쳐지고요, 헝께 이러고들 안 있소. 글지 말고 성님도 이리 와 막걸리나 한잔 허시요, 예.”
“되았네 자네들이나 실컷 놀게. 그건 글라치고 칠성이놈은 어찌 안 보이는가? 이리 왔다고 허더만.”
“그놈 지금 콤바인 부속 사려고 시내 나갔써라.”
그제서야 얼굴이며 옷이며 할 것 없이 시커먼 기름때를 묻힌 <성공농기계수리센타>의 박 사장이 나와 황씨에게 알은체다.
부속만 사오면 콤바인은 금세 고쳐질 터이니 들어가서 쉬고 있으라는 박 사장의 말을 듣고 돌아왔을 때 마누라는 텃밭에서 푸새다듬이 한창이었다. 흙을 털며 일어나 부엌으로 가 점심을 차려온 마누라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황씨의 얼굴을 보고 꾹 참는 눈치다. 황씨가 차려 온 점심을 뜨는 둥 마는 둥 물리고서야 조심스레 말을 걸어온다.
“어찌 됐다요?”
“조금만 있으면 쓰겠네. 부속만 사 오면 다 고친다고 허니께 나는 논에 가서 따대감[地神]이랑 막걸리나 한잔 허야 쓰겠네. 막걸리 한 병 주소. 무슨 기별 오면 바로 알리고.”
황씨는 막걸리 한 병과 점심상에 올랐던 김치를 들고 다시 논두렁을 걷는다.
이른 아침에 만들어놓은 콤바인 자리를 마주 보고 앉는다. 막걸리를 한 그릇 가득 따르더니 고시래, 소리를 지르며 논바닥에 휙 뿌린다. 다음 그릇이 황씨의 차례다. 단숨에 한 그릇을 비우고 다시 한 그릇을 들이켠다. 목젖이 위아래로 떨린다. 다시 따른 술을 따라 가만히 논두렁에 두고 담배를 한 개비 빼어 문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 논두렁에 두었던 막걸리를 마신다. 아직 마르지 않은 땅에서 축축함이 황씨의 온몸에 스며들었다.
햇빛이 설핏해졌다. 담뱃갑을 살피던 황씨가 주머니를 뒤져 꽁초들을 꺼내 그 가운데 긴 놈을 입에 문다. 낫을 들더니 휘적휘적 콤바인 자리로 걸음을 옮긴다. 해마저 설핏해지도록 오지 않는 콤바인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황씨는 제 손으로라도 보리를 베어볼 생각이다. 이렇게 마냥 기다릴 처지도 못되는 것이다.
허리를 숙여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며 낫질을 한다. 콤바인 자리를 만들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깜부기가 유달리 많이 띈다. 깜부기 하나를 뜯어서 바지에 툭툭 털어 입에 넣고는 아작아작 씹어본다. 입안이 텁텁하기만 할 뿐 아무 맛이 없다. 황씨는 쓴웃음을 흘린다.
어릴 적 생각을 해본다.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던 시절이다. 배가 고프던 그 시절 보리밭에 난 깜부기를 동무들과 뜯어먹었었다. 그러다 몰래 보리를 한주먹 뜯어먹기도 했었다. 그때는 날보리는 말할 것도 없이 깜부기도 그렇게 달고 맛있을 수가 없더니 지금 먹는 깜부기는 쓰고 텁텁하기만 하다.
얼마나 베어 나갔을까 황씨는 들고 있던 낫을 옆에 있는 배미에 휙 던지고는 논두렁을 향해 휘적휘적 다시 걸음을 옮긴다. 지금 저 많은 보리들을 제 손으로 다 벤다고 해도 그네 하나 찾아보기 힘든 요즘 어디서 타작을 하고 바심을 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해 보았다. 이래저래 보리를 거둘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저 혼자 이 지랄을 떨어도 아무 쓸모 없다는 생각에서다.
남은 막걸리를 생보리 하나 꺾어 안주삼아 마시고 나서 허험허험 나오지 않는 헛기침을 하고 황씨는 논을 향해 노랫가락을 뽑는다.
잘도나 허네 잘도나 허허네 우리 농군 잘도나 허네 아이고 답답 설움이야 잉어가 노네 잉어가 노오네 장포밭에 잉어가 노오네 아이고 답답 설움이야 잘도나 허네 잘도나 허허네 우리 농군 잘도나 허네······.
받쳐주는 곳에 갑자기 목소리 하나가 더해진다. 답답 설움이 높기만 하다.
아이고 답답 설움이야 아이고고 답답 설움이야.
빗소리에 눈을 떴을 때, 알알한 겻불내가 목안으로 스며들었다. 잠깐 맑던 하늘에서 다시 비가 내리는 모양이었다. 지독해, 지독해. 저절로 체머리가 흔들렸다.
발만 동동 구르던 아버지가 기어이 수리센터로 달려간 뒤 녀석과 나, 그리고 또 한 친구는 하릴없이 마당에 나 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되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마치 무슨 거대한 축복처럼 떠들어댔다. 거개가 음담패설이거나 그런 쓸잘데기 없는 이야기들 가운데 아주 간혹 문학을 이야기한답시고 진지해지는 구석이 있기는 했었다.
누가 먼저였는지 시작한 무협지 이야기는 유하의 무림일기로 이어졌다. 유하의 무림일기를 학교에 빗대에 패러디하기로 정하고 우리는 다시 한 번 킥킥거렸다. 학교를 ‘실전비무를 원칙으로 하는 한성무림전문 문창방의 벽보가 붙은 지 20년’이라고 했고, 다섯 명의 교수를 들어 ‘문창방 노 오사부 관장권법 초극파천왕 최일훈, 창도제일권 몽상잠왕 최학풍, 독극무림 묘사해왕 오규, 월은풍어권 심월지왕 박한기, 여류제일모사 무심여왕 금지혜’라 했었다. 시를 써오는 학생들에게 머리를 갸웃거리며 ‘왜 썼어?’라고 묻는 야박한 교수가 있었다. 누구라도 그 말에 몇 번씩 상처 입었을 터여서 우리는 ‘금지혜의 애쓴검풍, 검풍이 태풍 같다는 전설/그러나 천만의 말씀./애쓴검풍, 묘한 미소로 상대방의 진기를 흐린 뒤/입 속에 숨긴 일만 일천 개의 왜 썼어 암기를 날리는/무림 최고의 암기술/그녀의 무림 선배 묘사해왕 오규를 제외하고/애쓴검풍 앞에 무릎 꿇지 않은 자 없다’라고 했다.
덜 깬 술기운 때문인지 자꾸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신이 맑아오면서 몸은 점점 더 타들어갔다.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는 내 몸이 기우뚱 허당을 짚은 사람처럼 균형을 잃었다. 술기운 때문만은 아닌 듯 싶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낯선 풍경 사이로 기억들이 아슴푸레 스며들었다. 경도장이었다.
녀석과 더불어 엉뚱하기를 희망했던 엉터리 같은 우리 세 친구는 유하의 무림일기 패러디를 빌어 ‘전음수법으로 포천주막에서 도원결의를 맺었으니 그 이름 찐따 삼의협이었다.’라고 했다. 찐따라니? 그래, 그때의 우리들은 절름발이였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했지만 세상은 이미 싸울 걸 잃어비린 지 오래였다. 다만 세상은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릴 뿐이었다. 우리들의 걸음걸이는 그래서 절름발이였다.
절름발이 걸음으로 녀석은 사라졌었다. 녀석의 좌판은 사납게 퍼붓는 장대비를 견디지 못했을 터였다. 녀석이 거창하게 떠들었던 사업이, 틀림없이 성공할 옷 장사가 망하거나 말거나 사실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한때 우리의 걸음걸이가 찐따여서 서로 어깨를 빌려주자는 약속 따위는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고 혹시 아직 남아 있는 약속의 끈이 있다면 나는 내가 빌려준 돈으로 그것을 끊어 없애려 했다. 그런데도 나는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 있느냐고, 돈은 갚을 수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것은 나에게로 향하는 또 한 번의 배신이라는 걸, 깊은 수렁이라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번번이 나는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랬다. 사라진 녀석의 답하지 않는 빈 전화기에 몇 번이나 음성을 남긴 끝에 보내온 녀석의 소설을 읽으며 생기는 묘한 감정은 그리움이었고, 녀석에 대한 배신감이었고, 또 뒤미처 달려드는 황당함이었다.

설움가를 부를 때 슬몃 다가온 일복은 보리에 불을 놓겠다고 했다. 한 서너해 전이던가도 산 보리에 불을 놓은 적이 있다.
“인건비도 안 빠지는 보리 베서 뭐예 쓴다요. 그냥 불이나 처질러 버릴라요.”
“옜기 이 사람, 지지난해 그꼴이믄 됐지 산 곡식에 또 불을 놔. 글지 말고 이참에는 마녘 기계까지 올라와서 보리를 벤다고 하는디 어서 알아보아, 응.”
“성님도 딱도 하요. 그놈들 삼십만 원 주라고 헙디다. 이십만 원을 줘도 인건비나 빠질까 말까 허는 판에 어디 보리 속에 금송애지를 숨겼다믄 몰라도 그 걸 벨 수가 있다요. 이제 더 늦으면 모도 못 심게 생겼는데 후딱 불지르고 모라도 심을라요.”
“또 그짓을 어찌하나······.”
“성님 이제 글럿써라우. 우리 같은 농투성이들이 무엇을 알것서라우마는 아 대한민국 정부가 좆같은 정분께, 애초부터 틀린 일이었서라. 글씨 보리값 올려준다고 보리 심으라고 헌지가 얼마나 되았다고 나 몰라라 이 지랄이다요이. 나가 의붓자식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의붓국민이란 말은 못 들어봤응께요. 근디 우리가 의붓국민도 아니고 이제 저도 꼭두각시 노릇은 안 헐라요.”
일복은 가지고 온 홰에 불을 붙였다. 논을 돌며 보리에 불을 놓았다. 오랜 장마 속이라 불은 쉬 붙지 않더니 불길을 머금은 보리논은 햇빛까지 삼킨다. 갑자기 저 불길에 모든 걸 맡기고 싶다. 불처럼 타오르고 싶다. 화끈 달아오른 기운에 놀란 황씨가 서너 걸음이나 물러선다. 자신도 불이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논에도 불이나 놓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불길보다 더 뜨겁게 달려들었다. 저놈들 얼마나 뜨거울까, 이. 참말로 얼마나 뜨거울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제라도 콤바인이 오고 밤새 논일을 하면 보리는 다 벨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거둬들인 보리는 생각보다도 한결 적다. 석 마지기 한 배미에서 겨우 콤바인 삼십 킬로 열여덟 자루뿐이다. 아무리 시답잖다고 해도 스물 다섯 가마는 나와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참으로 사람삯도 빠지지 않는다. 그래도 황씨는 고맙기 그지없다. 산 곡식에 불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이라도 이렇게 가을부채가 되지 않고 거둬들일 수가 있는 것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해가 진 자리에 별들이 떠올랐다.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사이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검은 밤하늘에 박혀 있다. 한 시간이면 석 마지기 한 배미 베기는 충분한 시간인데 긴 장마에 논이 축축이 젖어 있어서 콤바인이 가다 서고 가다 서고 그렇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일곱 시에 일을 시작해서 열 시가 되도록 두 배미째 베고 있다.
황씨는 마누라가 차려 온 저녁을 먹을 때 말고는 담배 한 개비 피워 물지 못하고 콤바인이 토해 놓는 보릿자루를 논길 옆에 나르고 있다. 그렇게 날라다 놓은 걸 마누라가 차곡차곡 쌓는다. 이번에도 콤바인이 멈춰 섰다. 질은 땅을 가다가 으레 한 번씩 서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번에는 서 있는 시간이 길다. 황씨는 나르던 보릿자루를 그대로 논바닥에 내려놓고 콤바인 쪽으로 내처 걸음을 옮긴다. 수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미덥지 못하고 마뜩찮다.
“칠성이 무슨 일인가? 기계에 또 무슨 탈이 붙었는가?”
“성님도 보리 못 벨까비 이렇게 내처 달려오셨소. 그 게 아니라 땅이 하도 질어서 힘이 팽기는 모냥이네요. 조금만 쉬지요. 기름도 넣어야고요.”
“그려, 글고 한 번도 쉬덜 안 했네. 미안허구 고마우이.”
“성님, 무슨 섭한 말씀이래요. 성님 없으면 지가 어찌 이런 기계라도 몰고 다닌다요. 서울서 사업한다고 전답 다 팔아먹고 돌아왔을 때 다들 거들떠도 안 보는디 성님이 그래도 이놈 기계 보증이랑 안 서 주셨소. 그때 생각하면······.”
둘이 피워 문 담뱃불이 하늘에서 별이 내려온 것처럼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난다.
밤을 해뜩 새운 피로가 몰려오는지 황씨는 연신 하품을 해 가며 보리를 날랐다. 벌써 열두 시가 넘어서고 있는데 아직 두 배미째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이렇게 늦어지면 보리를 다 벨 수 있을까, 걱정이다. 허리까지 넉신거린다. 곁두리를 만들겠다고 간 마누라가 와야 쉴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누라는 쉬 오지 않는다. 황씨는 입술을 감물며 일을 하다가는 콤바인을 향해 소리친다.
“어이 칠성이, 쉬었다 하세. 허리가 넉신거려서 안 되것네.”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기계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지 대답이 없다.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고서야 푸릉푸릉푸르릉 콤바인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황씨가 먼저 논두렁에 앉는다. 콤바인에서 내린 칠성이 그 옆에 앉아서는 황씨에게 담배를 내민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일어서려 할 때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구니를 머리에 진 황씨의 마누라다.
막걸리를 마시며 포기김치를 흙 묻은 손으로 쩍쩍 찢어 먹는다. 황씨도 칠성이도 황씨의 마누라도 막걸리를 마신다. 처음에는 사양하더니 추위라도 참으려면 먹어 두라는 황씨의 말에 그네도 좋다. 한잔하자, 한 그릇 쭉 들이켠다. 한 시가 넘었다.
여섯 마지기 한 배미 논에서는 그래도 제법 보리를 거둬들였다. 콤바인 삼십 킬로 자리로 쉰 네 자루를 거둬들였으니 석 마지기 한 배미에 비해 풍년인 것이다. 두 배미를 다 베고 쉼을 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가 넘었다. 이른 아침부터 다시 비가 내린다고 하더니 이대로라면 아무래도 남은 석 배미를 벨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 남은 배미는 석 마지기 하나와 두 마지기 작은 논 둘뿐이다. 황씨는 부지런히 시간을 셈해 본다. 여섯 마지기를 열 시에 시작해서 두 시인 지금 끝냈으니 네 시간이 걸린 것이다. 거기서 참을 먹은 시간을 빼고 한다면 세 시간 반, 지금 남은 논이 일곱 마지기다. 부지런히 벤다면 비가 오기 전에 남은 논보리를 모두 벨 수 있을 거라는 셈이 나왔다. 황씨가 셈을 마칠 무렵 별똥이 하나 떨어진다. 별똥별이 사라지기 앞에 별똥별을 보고 바람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황씨가 올제에 조금만 늦게 비가 오면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때 별똥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추억의 어느 장면을 빌어 내가 경도장이라 생각한 곳은 그러나 내부수리를 끝내고 명동모텔이 되어 있었다. 세상은 이제 퀴퀴한 경도장을 버리고 세련되고 우아한 명동모텔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녀석의 거침없고 뻔뻔한 행동은 우리에게 조금씩조금씩 짐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우리는 연극과 학생들과 싸움이 붙은 적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매타작이었다. 우리는 맞았고 연극과 학생들은 때렸다. 장독대라 불리는 곳에서 술을 마시던 녀석이 갑자기 우리를 학교 설립자 동상 앞으로 끌고 갔다. 개새끼, 빌여한 일제 앞잡이 새끼. 말을 마친 녀석은 말릴 겨를도 없이 동상에 오줌을 갈기기 시작했다. 두리번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나머지 찐따들도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갈기기 시작했다. 묘한 쾌감이 속에서 일렁거렸다. 그리고 뒤미처 아픔이 달려들었다. 옆에서 연극연습을 하고 있던 연극과 학생들이 학교 설립자에게 무슨 짓이냐며 우리를 짓이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셋이었고 상대는 많았다. 상대가 될 리 없는 싸움이었다. 눈 주위가 퍼렇게 오른 얼굴을 하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킥킥거렸다.
기다려, 내 항복문서를 받아올게.
다음 날 그렇게 말하고 사라진 녀석은 수업을 몇 시간이나 빼 먹은 뒤 종이 한 장을 보란듯이 흔들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분명 연극과 학생회장 도장이 들어 있는 항복문서였다. 연극과 수업을 하고 있는 대강당에 들어간 녀석은 쏜살같이 무대 위로 올라가 교수의 마이크를 뺏어들었다.
어제, 이 앞에서 좆나게 맞은 사람이네유.
모두 어리둥절 웅성거리기만 할 때 녀석은 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그리고 실실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퍼 죽겄구만유. 씨벌. 근디, 아무래도 억울해서 안 되겄슈. 유치진이 글믄 일제 앞잡이지 뒤잡인감유. 아니지유? 아닌디 왜 그렇게 개패듯 팼슈? 힘이 없어서 그랬쥬. 힘이 없어도 문창과가 힘이 없남유. 내가 힘이 없지유. 항복하슈. 항복이유.
미친놈처럼 실실 웃는 모습이 더 섬찍했으리라. 녀석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들으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학교가 생긴 이래 계속해서 연극과에게 주눅들어 있던 문예창작과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어쩌다가 녀석은 우리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집으로 돌아와 다 읽지 못한 녀석의 소설들을 읽는 동안 달라붙은 혹처럼 녀석이라는 존재가 또 다시 나를 괴롭혔다. 문장도 문맥도 엉망이었고 무엇보다 어설픈 사투리는 나의 눈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미친 새끼, 아마도 그 어름에 쓰여졌을 엉터리 같은 소설을 읽으며 나의 내부는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스스로 원해서 우리들은 자취방 한쪽을 녀석에게 내어주었다. 며칠 혹은 몇 달, 그렇게 옮겨다니는 생활이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고, 우리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녀석의 동가식 서가숙이 길어질수록 친구들은 녀석을 꺼리기 시작했다. 씻기를 싫어한다거나 어쩌다가 일주일에 한 번 양치를 할 때 제 것인 양 남의 칫솔을 쓰는 것도 봐줄 만했다.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덜렁 거렁뱅이에게 벗어주고는 방에 걸려있는 옷을 제 것인 양 입고 다니는 것도 봐줄 만은 했다. 제 먹을 것 하나 스스로 건사하지 못하는 녀석이 탑골 공원이나 종묘 공원에서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설렁탕을 먹이고 그 때문에 파출소로 달려가는 것도 그런 대로 봐줄 만했다. 녀석은 그저 밥 한 그릇과 옷 한 벌이면 그뿐 남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그런 녀석이 어느 날 애인의 임신을 핑계로, 그 애인이 무슨무슨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제법 큰 수슬을 해야 할 때에,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져 또 돈이 필요할 때에, 우리는 귀찮아지기 시작한 녀석에 대한 감정을 미안해하며 서둘러 돈을 마련해 주었다.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어서 녀석이 다시 활기차고 명랑하고 그래서 엉뚱하고 엉터리 같은 웃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거기서부터였다. 녀석은 그러고도 몇 번이나 갖은 이유를 만들어 우리에게 돈을 빌리려 했다. 학생이었던 우리에게 한계는 금방 드러났고, 해서 우리는 의심을 품게 됐다. 녀석이 다단계에 빠져있다는 사실은 금세 드러났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살고 있는 녀석에게 다단계의 유혹은 대단했던 모양이어서 우리의 반대에도 녀석은 쉽사리 그곳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다.
아니야. 돈 벌어야 돼. 돈 벌어야지 지난번에 우리가 말한 것처럼 서울 외곽에 문학원도 짓고 그러지, 안 그려······ 몇 달이면 된다니께.
그때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던가. 녀석은 오래 전 어느 술자리에서 했던 말을 결단코 실행에 옮기겠다는 자세였다. 그러나 녀석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 말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몇 달이면 된다니께, 제법 붙기 시작한 서울말과 아직 남아있는 사투리를 섞어가며 녀석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녀석에게 돌아간 것은 경멸의 눈빛뿐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녀석을 점점 괴물 쳐다보듯 했다. 아니 솔직히 우리는 그런 일이 생기기를 그래서 이제 귀찮기만 한 녀석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뒤에는 녀석이 걸어온 그 먼 길이 사실은 지도 위에 그려진 길뿐이라는 소문이 나 돌았다. 해서 우리는 슬그머니 녀석이 숨겨놓은 엉터리 보물지도를 훔쳐보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녀석의 보물지도를 마음껏 휘저어 놓았다. 녀석이 받아온 항복문서도 위조에 지나지 않았고, 담배농가를 도와주고 얻어왔다는 담뱃잎도 그랬고, 이대흠의 ‘작침’을 보고 까치집을 털어 가져왔다는 돌멩이가 그랬다.
녀석은 찐따들에게도 씩 웃고 말뿐 변명을 하지 않았다.

세 시가 넘어 석 마지기 보리를 거의 베어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콤바인이 쿠다다탕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보릿자루를 나르던 황씨도, 그의 마누라도 콤바인 곁으로 다가갔다. 칠성이가 내려 콤바인을 바라보고 있다.
“어이 칠성이 무슨 일인가? 소리가 요란하던디 혹 기계가 고장이라도 난 것은 아닌가, 응?”
“글씨, 저도 잘 모르것는디 뭐에 걸린 모냥이네요. 성님 후레쉬가 있써야 쓰것는게라.”
칠성이가 라이터로 콤바인 밑을 비춰보다가 안되겠다 싶은지 황씨에게 말을 건넨다. 황씨가 그 말을 받아 마누라에게 건넨다.
“어이 후딱 집에 가서 후레쉬 좀 가져와.”
그네가 논두렁을 따라 뜀박질을 하자 황씨는 일복이 홰를 두고 가는지 모른다며 일복의 논으로 달린다. 발을 헛디뎠는지 황씨가 넘어진다. 칠성이 달려와 황씨를 일으킨다. 이번에는 칠성이가 찾아보겠다며 일복의 논으로 간다. 황씨가 넉신거리는 허리를 받치고 그 뒤를 따른다. 일을 하면서 줄곧 허리가 넉신거리더니 넘어지면서부터 그 정도가 한결 심하다. 라이터를 켜 가며 찾아보지만 어둠 속에서 홰는 여간 잘 찾아지지 않는다. 황씨는 무릎을 꿇고 땅을 더듬으며 홰가 있을 법한 자리를 훑는다. 칠성이의 라이터가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십여 분을 그렇게 땅을 더듬던 황씨가 마침내 홰를 찾아 들고는 칠성이를 부른다.
“어이 찾았네. 불을 붙여야 쓴께 라이타 좀 가지고 오소.”
칠성이 가지고 온 라이터로 홰에 불을 붙였다. 아직 기름기가 남아 있는 홰는 제법 밝은 빛을 만들어낸다. 황씨는 칠성에게 횃불을 맡겨 먼저 보내고는 타복타복 걸음을 옮긴다. 아무래도 허리에 탈이 붙은 모양이다. 점점 넉신거리는 정도가 심해진다. 콤바인에 겨우 다가 와서 황씨가 칠성에게 묻는다.
“무슨 일인가?”
“글쎄요, 아무래도 후레쉬가 있어야 쓰겄는디. 별일이야 있겠서라.”
논두렁을 따라 달려오는 불빛이 점점 밝아 온다. 불빛 보다 닭 우는소리가 먼저 황씨에게 달려든다. 마음이 급해진다. 그 불똥이 마누라에게 튄다. 아 빨리 안 오고 뭐해. 마누라는 숨을 헉헉 몰아 쉬며 손전등을 칠성에게 건네고서야 숨을 고른다. 손전등을 받아 든 칠성이 콤바인 밑으로 기어 들어간다. 이윽토록 나오지 않더니 제 멋대로 꼬인 낫을 하나 들고 나온다. 황씨가 어쩌지 못하고 서름히 서있다.
“성님, 이게 지랄같이 무슨 일이라요. 언 놈이 낫을 던져놨는지 쳉에 걸려서 기계가 다 작살이 났서라. 이를 어찐다요.”
“······.”
“기계는 근다치고 성님 보리를 못 베서 어찐다요. 큰일인게라.”
“······어이 칠성이 미안하이, 그 낫 아까 참에 논두렁서 나가 혼자 앉아 술 한잔 허다가는 자네는 안 오고 하도 답답혀서 홧김에 던진 것인디······.”
“그게 참말이요. 아따, 우리 성님이 연장을 다 던졌어라?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겄구만요,이. 그것도 모르고 나가 우리 성님 욕을 해부렸네요, 하하.”
희멀겋게 밝아 온 하늘 아래 다시 닭 우는 소리가 와락 달려든다. 숨을 고르며 가만히 듣고 있던 황씨의 마누라가 말문을 연다.
“여보, 인자 어쩐다요?”
“어쩌긴 뭘 어쩐당가 이 사람아. 칠성이 기계는 물어주면 쓰는 것이고 보리는 확 불 처질러뿔면 되지.”
“아따, 성님도 참말로 서운한 말씀을 해분지시네요. 지가 언제 성님한테 기계 물어 달라요? 저는 되았응께 성님 보리 벨 연구나 흐잔께요.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콤바인이 저러고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한께 나가 성공 농기계 박 사장한테 전화를 혀봐야 쓰것네요. 저 기계 가져가고 남쪽서 온 기계라도 있으믄 보내라고 헐 것인께 성님은 보릿자루나 가져가기 좋게 옮기셔라.”
칠성이 휘적휘적 걸어가는 논두렁 뒤로 보이는 먼 산에서 해뜩한 해무늬가 일고 있다. 여섯 시가 거의 다 되었다. 칠성이 보릿자루를 옮기려고 했지만 넉신거리는 허리가 심해져서 엄두도 못 내고 가만히 논두렁에 아그려쥐고 앉아있다. 마누라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 눈치지만 말을 못하고 그 옆에 가만히 서있다. 황씨의 얼굴이 쓸쓸했다. 남의집살이 열 해만에 얻은 다섯 배미 논이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남의 것 도둑질하지 않고 악착같이 일해서 겨우 장만한 것이 알천 같은 다섯 배미 논이다. 농번기에는 농사일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시내에 나가 막일하고, 그렇게 새끼들 키우며 살아온 날들이다.
보릿자루를 옮기는 사이 는개로 내리던 것이 이슬비가 되었다. 비는 점점 더 굵어질 모양이다. 이제 남은 배미의 보리들이 걱정이다. 어제 하루 사납던 햇볕에 마른 보리들이 많지도 않은 비에 다시 축축히 젖어있다. 저대로 갈바래질도 못하고 불을 지른다고 해도 축축히 젖어 타 들어가지도 않을 터였고, 가슴만 탔다 녹았다 탔다 녹았다 아리기만 하다.
언제 왔는지 비옷을 입은 일복이 황씨에게 담뱃불을 건넸다.
“성님, 어찔라요? 인자 불 놓기도 힘들겄는디·····.”
“글씨 말이세, 자네 말대로 어제 그냥 확 불을 처질러 버리는 것인디. 인자는 어찌면 쓰것는가?”
“성님, 기름이라도 확 찌글어서 불을 놓아뿔지요. 참말로 이번 참 놓치면 모내기도 못 헐 판인디 어찌 그리 태평하단가요.”
황씨는 귀가 번쩍 뜨였다. 남은 배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놓는다면 젖은 보리라도 타 들어갈 것이다. 이윽토록 쓰러진 보리들을 바라보던 황씨가 그의 마누라에게 말을 건넨다.
“어이 가서 석유 한 말 사오소.”
마누라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황씨를 쳐다본다.
“참말로 기름을 찌글라 한당가요. 땅에 기름이 있으면 모가 건뎌내지를 못할 것인디······.”
“아 누구는 그걸 모르는감. 글면 자네가 방법을 한 번 찾아보소. 사오라면 사올 것이지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탄가.”
마누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네가 아무런 말도 없이 논두렁을 걷는다. 일복이 황씨를 달랜다.
“성님, 화 내지 마셔라. 언 놈이 그 높은 보릿고개 다 깎았다고 자랑 지랄이던디. 어디 우리 같은 놈한테는 보릿고개가 쬐끔이라도 깎여능께라. 외려 산업환지 지랄인지 허는 것 땜시 젊은 놈들 다 도시로 빠지고 이 늙은 것들만 이 땅을 지키는 것이 보릿고개지라. 우루콰쾅인지 우루과인지가 보릿고개 아니고 무엇이당가요. 성님 우리 올해부턴 보리 심지 맙시다. 값 올려준다는 말에 속아 니미 우리들 가슴만 타들어가고 이게 무슨 꼴이요, 참말로 니미럴.”
황씨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휘적휘적 아직 보리를 베지 않은 논에 나가 생보리를 몇 개 뜯어오더니 일복이에게 하나를 내민다. 일복이가 씩 웃고는 생보리를 받아 든다. 황씨가 보리의 까칠한 털을 뜯어내고 아작 아작 씹어먹었다. 그제야 일복이도 손에 든 보리를 입안에 넣는다. 달콤하고 텁텁한 맛이 입안에 맴돈다.
황씨는 지난 새벽에 찾아 두었던 홰에 불을 붙였다. 물먹은 보리들에 불을 놓아 보지만 불은 쉬 붙지 않고 연기만 잔뜩 뿜으며 조금씩 조금씩. 마누라 말대로 기름을 뿌린 논에서는 아무래도 어린 모가 견디지 못할 것 같다. 기름 한 말 무게가 작은 것도 아닌데 자신의 괜한 고집에 마누라만 마음고생, 몸고생이라고 황씨는 생각했다. 황씨가 일복에게 홰를 맡긴다. 넉신한 허리를 하고 마누라 걸어간 논두렁에 내처 달렸다. 눈속이 갑자기 개진개진 차올랐다.

내게 보리를 태우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러나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서너 해에 한 번 꼴로 보리는 타 들어갔고 그 때마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다시는 보리를 심지 않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다음 해에 어김 없이 겨울 길고 매서운 추위를 견디어낸 어리고 씩씩한 보릿잎들이 푸르게 논을 뒤덮고는 했다. 해서 나는 그 해 녀석과 같이 보리를 태운 일 따위는 오래 전에 잊었던 터였다. 비는 그때의 내 기억에 내리지 않는다. 다만 콤바인을 빌려 보리를 거두기에 보리값은 너무 형편없었다. 보리는 불에 잘도 탔고 보리가 타 들어가는 논을 바라보며 우리는 막걸리를 마시며 잉걸에 보리를 구워 먹으며 킥킥거렸다.
킥킥거리며 나는 녀석이 보내온 메일을 삭제했다.
졸업을 하고도 한동안 녀석에 대한 소문은 우리들에게 날아다녔다. 돈 많은 과부에게 장가들었다는 소문이 도는가 하면, 어느 고아원에서 보았다고도 했다. 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거나 그곳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회사에 나가거나 개인사업을 하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월부책이며 싸구려 도자기를 팔러 다닌다고도 했다. 모두를 고개를 흔들며 녀석을 비아냥거리에 여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마다 나도 그 장단에 맞춰 고개를 흔들며 덩달아 녀석을 험담했다. 그러면서도 내 어느 한쪽에서는 어쩔 수 없이 녀석에 대한 부채감으로 시달려야 했다.
그저 웃음 하나로 모든 걸 받아들였던 녀석이 어느 날 찐따들을 불렀다. 역시 포천에서 술을 마시던 녀석이 뜬금없이 말했었다.
내가 했던 행동들 넘들 말처럼 다 거짓이고 다 사기구먼. 근디, 누가 뭐래도 나에게는 진실이었어. 난, 단지 소설처럼 살기를 바랬으니께. 그것뿐이여. 그것뿐이라고······.
어디서 돈이 생겼는지 녀석은 생전 안 하던 계산을 하고는 우리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다단계에 정신이 팔려 기어이 어디론가 떠난 모양이라고 우리는 맘 편하게 생각했다.
졸업을 앞두고 교내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 응모할 시를 정리했다. 아무리 추려봐도 마음에 드는 시는 여덟 편에 지나지 않았다. 열 편 내외의 응모 편수를 맞추기 위해 고민하던 나는 문득, 녀석이 내 컴퓨터에 남겨 놓은 시 몇 편을 떠올렸다.
그저 구색을 맞춘다는 생각으로 녀석의 시 한 편을 살짝 끼워넣었다. 그 해 운 좋게도 나는 그 문학상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맙소사! 당선된 것은 나의 시가 아닌 녀석의 시였다. 내 시 몇 편이 들어 있기는 했지만 그건 분명 녀석의 상이었다. 뻔뻔스럽게도 상을 챙기고서 나는 상금을 모두 술 마시는데 허비했다. 다만, 제발 녀석이 나타나지 말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졸업식,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 어느새 녀석이 나타났다. 전장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보다 빠르게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녀석이 손을 내밀고 ‘축하해.’ 한마디를 남긴 뒤 사라지기까지 짧았던 시간이 그대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리고는 녀석이 생각날 때마다 화면처럼 느리게 재생되면서 나를 괴롭히곤 했다. 해서, 녀석이 정말이지 마지막 부탁이라며 이백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도 나는 아무 소리 없이 전세 보증금을 올려주려고 가지고 있던 돈을 헐었던 터였다. 당선금이 이백만 원이었으므로 어차피 녀석의 돈일 뿐이라고, 이것으로 지독했던 녀석과의 관계를 끝맺는 것이라고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받을 생각도 없이 돈을 건네고 나서 나는 그제야 겨우 그동안 녀석에게서 느껴야 했던 채무감을 덜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녀석을 찾지 않으리라, 이제 다시는 녀석을 찾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집주인이 애초에 했던 말처럼 보증금을 오백만 원만 올려달라고 했다면 나는 녀석을 찾지 않았을까? 처음 했던 말과 달리 집 주인은 천만 원을 올려달라고 했다. 이곳저곳에서 돈을 마련하던 나는 녀석에게 빌려준 돈이 생각났다. 녀석에게서 훔쳐온 시의 값어치가 결코 이백만 원이 될 수 없다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의 다른 시가 없었다면 녀석의 시는 한낱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해서 나는 받지도 않는 녀석의 전화기에 대고 그렇게도 많은 말들을 남겨두었다.
미친 새끼, 미친 개새끼. 녀석이 보내온 메일을 삭제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녀석에게서 온 메일을 삭제해버렸다.
아직 소설과 시가 여전히 우리들에게 유효한 꿈이었던 시절, 녀석은 그 어름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태우고 또 태워도 다음 해면 어김없이 푸르게 돋아나는 아버지의 보리논처럼 녀석은 여전히 그 어름에 살면서 아직도 퀴퀴한 경도장의 밤이 있노라고, 시궁창을 달리는 쥐새끼처럼 소설은 그 곳에 살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행간 깊숙이 숨겨놓은 비수가 자꾸만 소설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알게 뭐람, 빌러먹을.
술기운 때문인지 자꾸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데, 녀석은 정말 강릉에 있기는 있는 것일까? 킥킥거리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자꾸만 신경을 어지럽혔다.



조헌용
․전남 고흥 출생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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