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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2002년 겨울호) <문화산책> 『말레나』를 만나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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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나』를 만나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
―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말레나』 읽기 ―
김남석
(문학평론가)
1. 아름다운 창녀, 억울한 희생양 : 말레나의 입장에서
『말레나』의 도입부에서, 아이들은 개미떼를 불로 태워 죽이는 장난에 열중한다. 장난 씬(scene)은 외출을 서두르는 말레나의 씬과 평행구조(Parallel Action)를 이룬다. 두 씬의 교차편집으로, 제물이 된 개미의 처지와 희생양이 될 말레나의 운명이 상징적으로 관련된다. 수사적으로 바꾸면, <강력한 인간이 개미를 장난의 제물로 삼듯, 난폭한 군중은 희생양 말레나를 집단 처벌하게 된다>인 것이다.
그렇다면 말레나는 개미처럼 억울한가. 마을 사람들이 그녀에게 죄를 물을 정당한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말레나』를 마을 사람들의 입장이 아닌, 말레나의 입장에서 보게 만든다. 일단 그들이 묻는 죄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독일군의 노리개가 되어 개인적 영달을 추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 남자들을 유혹해 관습을 어지럽힌 것이다. 하나의 논점으로 정리하면, 말레나가 선택한 창녀라는 직업에 대한 문책이다. 창녀가 되지 않았다면 독일군의 노리개가 될 리도 없었고, 이웃 남자와 관계를 맺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반론도 가능하다. 처음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창녀가 되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암묵적으로 이러한 선택을 종용했다. 마을은 그녀에게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을 거부했으며, 생존의 기회를 박탈했다. 억울한 누명을 근거도 없이 씌웠고, 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몸을 탐할 수 있기를 고대했다. 말레나가 창녀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많은 남자들은 그녀의 담배에 기꺼이 불을 붙여주지 않았던가.
마을 사람들이 먼저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포기한 셈이다. 그러니 배신을 했다 해도, 동족들이 먼저 말레나를 배신한 것이다. 또한 암묵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창녀가 되는 것에 동의한 셈이니, 이웃의 남편을 탐한 죄를 묻기도 곤란하다할 것이다. 그러니 여자들의 문책은, 자신의 남편을 말레나에게 빼앗겼던 것에 대한 분풀이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말레나는 정당하지 못한 폭력의 희생물이 된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네 가지 상투형을 정리한 바 있다. 첫째, 사회는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고, 둘째,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범죄가 저질러졌으며, 셋째, 집단의 구성원 사이에서 이질적 특성을 가진 존재가 희생양으로 선택되어, 넷째,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박해 행위가 시행된다고 주장했다. 오이디푸스가 살았던 테베는 가뭄과 전염병과 기근에 시달렸고(중대한 위기), 근친상간과 존속살해라는 중대한 범죄가 저질러졌고, 이방인과 신체적 기형(발이 부은 것)이라는 이질적 특성을 가진 사람이 지목됐고, 그리고 추방이라는 집단적 가해가 이루어졌다. 『말레나』도 마찬가지이다. 마을은 전쟁 중이어서 인심이 흉흉했고, 배신과 간통이라는 사악한 범죄가 횡행했고, 아름답다는 이질적 특성을 지닌 말레나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고, 광장에서 집단 처벌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처벌의 정당성은 집단의 관점에서 찾아졌다. 테베 주민의 명분은 가뭄과 질병 퇴치였고, 시칠리아 주민의 명분은 관습 복원과 민족 반역자 처벌이었으며, 많은 인류 문명의 명분은 질서 유지와 종교 정립이었다. 사회를 이루고 문화를 이룬 집단은 그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부의 폭력적 욕구를 쏟아부을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중대한 위기가 있다해도 그것이 처벌의 직접적 원인이 될 수 없으며, 중대한 범죄를 지적하지만 실제로 그 범죄는 누군가의 일방적 책임이 아니거나 그 죄를 물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또한 그 모든 것이 인정된다고 해도, 집단에 의한 광기어린 처벌은 이성과 질서를 신봉한다는 인간에게는 걸맞지 않는 행위이다. 그런데 말레나는 그러한 처벌을 당한다. 그녀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생존의 터전마저 빼앗기고 어디론가 추방당한다. 진정한 이유는 재판의 변호인의 말을 빌리면, 말레나의 부도덕이나 행실에 있다기보다는 그녀의 뛰어난 아름다움에서 유래한다.
『말레나』는 단지 아름다운 여자의 수난기가 아니다. 엽기적이고 화려한 생을 추구한 여자의 실패담도 아니다. 한 여자의 운명을 둘러싼 집단의, 집단에 의한, 집단을 위한 광기와 폭력성을 고발하는 영화이다. 그 고발의 방식이 차분해서 좀처럼 그 안의 진실을 살피지 못한다. 그러나 진실을 살피는 자에게 『말레나』는 정신적․문화적 충격이 된다.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 사회의 근원적 폭력성을 점검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 『말레나』를 만나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2. 관음의 미학과 은밀한 성장 : 소년의 시선으로
『말레나』는 2차 세계 대전에 휩싸인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이탈리아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시칠리아이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은, 쥬세페의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그 중에서 『스타메이커』는 시칠리아를 가장 잘 묘사한 영화이다. 주인공은 배우가 될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서 영화사에서 파견된 촬영기사이다. 카메라는 떠도는 그의 시선을 빌어 시칠리아의 구석구석에 위치한 마을을 소개한다. 프레임에 포착된 마을의 인상은 대체로 비슷하다. 좁고 굽은 길을 달리면 비좁은 골목과 힘겨운 언덕과 협소한 광장이 나타나고, 그 사이로 누추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열악한 주거환경에 시위라도 하듯 창백한 빨래들이 나부끼고 있고, 사람들의 표정은 헌 옷의 남루함을 물씬 닮아 있다.
말레나의 마을도 이러한 이미지를 물려받고 있다. 가난의 기미는 덜 하지만, 지치고 불안한 기색의 주민들이 엑스트라처럼 대거 옮겨와 있다. 이러한 풍경 속에서 한 소년(레나토)이 눈에 들어온다. 그 소년은 유난히 짙은 눈썹과 반바지 차림으로 누군가를 주시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그의 시선은 주목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그의 시선에 비친 말레나와 그녀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려지기 때문이다.
새 자전거가 생긴 날, 소년은 멀리서 걸어오는 말레나를 보게 된다. 이 날은 이탈리아가 선전포고를 한 날이어서 마을 안팎이 몹시 시끄럽고 흥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말레나는 도시의 소음과 혼란을 일시에 압도한다. 날씬한 몸매, 빼어난 용모, 무심하게 내려깐 눈으로 뭇사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길가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모자를 쓴 사람은 슬며시 모자를 벗는다. 그녀를 대하는 눈빛은 설렘으로 떨린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열망을 담고 있는 듯도 하다.
말레나에 대한 애욕은, 소년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레나토는 말레나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레나토의 주변에 모여 앉은 아이들은 아예 말레나의 외출을 보기 위해 외출할 정도이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아슬아슬하게 아이들의 곁을 스치면, 화면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는 아이들, 그 중에서도 레나토의 눈에 고정된다. 레나토의 눈은 화면 밖으로 우아하게 멀어지는 말레나에 대한 열망으로 물들어간다. 그 열망은 관음증적 욕구로 분출된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대목은 관음증적 욕구에 시달리는 어린 화자의 내면 풍경에서 탄생한다. 말레나와의 충격적인 만남 이후, 어린 화자는 말레나의 주변을 맴돈다. 그녀가 외출하는 경로를 대담하게 뒤쫓기도 하고 마을 광장에서 정면으로 스쳐 지나기는 연기를 감행하기도 한다. 그녀를 따라 그녀의 아버지 집을 염탐하기도 한다. 밤이 되면 홀로 있는 말레나의 집을 방문하여 벽 틈으로 그녀를 엿본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엿보고, 남편의 사진을 끌어안고 불쌍하게 춤추는 광경을 엿보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엿본다. 변호사의 야욕에 짓밟히는 안타까운 현장을 엿보기도 한다. 이 영화는 이러한 엿봄의 미학을 통해, 말레나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녀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레나토의 성적 욕구는 팽창하여, 급기야는 관음증적 행위만으로 억제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소년기는 유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중간 시기이다. 이 시기에서는 여러 가지 욕구가 불거지지만, 그 중에서 제일 비밀스럽고 중요한 욕구는 성애에 대한 갈망이다. 레나토가 자전거를 얻어 또래모임에 받아들여지고 긴바지를 입어 제법 어른티를 내지만, 성욕의 차단은 결정적으로 성장을 유예시킨다.
따지고 보면, 쥬세페의 영화에서 성애의 욕망은 빠짐없이 거론되는 화두이다. 『시네마 천국』에는 첫 경험을 하는 토토의 모습이 삽입되어 있다. 영화관에서 영업하는 창녀와 관계하는 토토는, 기계적이고 희화화된 동작으로 심드렁하게 동정을 버린다. 반면 『스타메이커』의 첫 정사는 정갈하고 엄숙하게 진행된다. 길게 누운 햇살을 등진 호젓한 정원에서 여자는 고이 간직한 순결을 남자에게 내준다. 남자 역시 이러한 여자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준다. 두 경우는 모두 통과의례의 꼴을 갖추고 있다.
『말레나』에서는 이러한 의식성이 더욱 강조된다. 그것은 참석한 아버지 때문이다. 레나토의 문제를 눈치 챈 아버지는 아들을 창녀에게 인도한다. 그리고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처럼, 창녀에게 이끌려 들어가는 아들을 지켜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른이 될 마지막 관문을 제시한 것이다. 말레나를 닮은 여인을 지적하는 소년과 이를 지켜보는 아버지. 말레나를 꿈꾸며 소년은 성장의 아픈 대가를 치루어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과 이제는 몰래 훔쳐보던 말레나를 마음 속에서 지워야만 한다는 진실을 체득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세계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장의 통과의례를 넘어선 아이에게 세계는 허상으로 전락한다. 소년은 그러한 허상을 깨닫고는 말레나를 지워야 함을,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열망을 묻어야 함을 스스로 자인하게 된다. 내밀한 깨달음과 성장은 『말레나』를 돋보이게 하는 두 번째 매력이다.
3. 폐허가 된 집 밖에서 : 남편의 내면으로
말레나의 남편(니노)은 『말레나』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인물이다. 그는 국가와 마을을 대표해서 전쟁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온다. 불구자가 된 몸은, 그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겪었을 고통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에 대한 위로는 없다. 그를 반기는 것은, 폐허가 된 집과 무단 점거인들과 마을 사람들의 경계심과 아내의 부재이다.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불합리하다. 자신이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은 그만큼 안락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아내와 집은, 남은 자들에 의해 소중하게 보호되었어야 마땅했다. 자신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열광적으로 찬동한 전쟁에, 대표로 참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이 영화의 첫 씬은 무솔리니의 선전포고와 이에 열광하는 시칠리아 주민들이었다). 그러니 희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약속받고, 존경받는 영웅의 반열에 올랐어야 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을 훼손시켰고, 정숙한 아내를 농락했으며, 그나마 추방해버렸다. 자신에게 주어져야 할 환영을 거부했으며 오히려 멸시와 따돌림만 퍼부었다. 남편(니노)이 전쟁을 치르면서, 끊임없이 열망했던 회귀의 이유가 박탈된 것이다.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영화를 보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헤매는 인물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그러하고, 『스타메이커』의 영화기사도 그러하다. 특히 『시네마 천국』의 토토는 고향을 떠난 지 몇십 년이 지나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돌아올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판명된다. 알프레드라는 상징적 아버지의 죽음을 기화로 고향에 돌아오고 나서야 그는 그 이유를 절감한다. 자신이 돌아오지 못했던 진짜 이유는 알프레드의 충고 때문이 아니라 그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자신이 기다려야 할 아내가 없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첫 사랑인 엘레나 없는 고향 마을은 더 이상 자신의 집으로서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사실을.
말레나의 남편은 처음부터 토토와 다르다. 말레나의 남편은 아내를 향해 불구의 몸을 이끌고 귀환한다. 별다른 논평은 없지만 그의 귀환은 아내를 향한 것이다. 그의 과묵한 태도는 이점을 분명하게 한다. 그는 마을의 어떤 동요에도 굴하지 않고 집으로 향한다. 오직 그 길만이 남은 마지막 길이라는 듯이. 그러나 그의 기대는 사라진다. 집은 훼손되었고 아내는 사라졌다. 아내가 사라진 이유조차 가르쳐주지 않을 만큼 인심은 사나워졌다. 영웅이 군중에게 화답받던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처참한 대접이었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장 고전적이고 모범적으로 그린 작품은 『오딧세이』일 것이다. 『시네마 천국』 중에 삽입된 한 편의 영화는 쥬세페의 귀향 욕구를 『오딧세이』에서 찾도록 힌트를 준다. 여름 시즌을 맞아 토토의 영화관은 야외 상연에 돌입하고, 엘레나는 부모님을 따라 반강제적인 휴가를 떠난다. 엘레나와 떨어져 있게 된 토토는 실의에 빠진다. 실의의 빠진 토토를 넘어, 시원하게 펼쳐진 스크린에는 귀환하려는 자의 역투가 벌어지고 있다. 외눈박이 거인의 끈질긴 방해를 피해 집으로 가는 배의 돛을 세운 오딧세이가 그 역투의 주인공이다.
이 영화는 대단히 상징적이다. 강력한 집념으로 귀향하려는 오딧세이의 마음은 토토의 마음인 동시에 멀리 떠난 엘레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문 하나를 던져보자. 오딧세이는 왜 귀환하려고 하는가라고. 오딧세이를 사랑했던 칼립소와 같은 여신은 페넬로페의 미모를 능가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왜 오딧세이는 머물지 않았을까라고 다시 물을 수도 있다.
오딧세이는 아름다운 여자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아내를 찾아온 것이다. 아내가 지키는 집을 찾아온 것이다. 집으로 귀환하려는 자의 마음은, 아내를 찾는 마음이다. 여기서의 아내는 미모의 여자뿐 아니라, 가족과 고향과 안식처와 자신의 삶의 기반을 통틀어 일컫는 대명사가 된다. 즉 안식과 같은 삶의 상징인 셈이다.
<엘레나>라는 토토의 집이었고 상징적 아내였다. 그 집을 그리는 토토의 마음이 절실했을 때 오딧세이는 순항을 하게 되고 엘레나도 돌아온다. 엘레나 역시 먼 길을 돌아 자신의 집(토토가 있는 마을)으로 돌아온다. 두 사람의 재회는 이타카로 돌아온 오딧세이가 페넬로페를 만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오딧세이의 이야기를 좀 더 따라가자. 오딧세이가 도달한 집은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존재하고 있었다. 오딧세이의 아내는 현명하고 정숙했기에, 거듭되는 유혹과 암담한 절망과 남편에 대한 불운한 소식에도 자신을 지킨다. 오딧세이는 복수에 착수한다. 괴롭힘을 참고 견디었던 아내와 가족을 위안하고 구원하고자 한다. 자신의 일상과 삶의 안식을 되찾기 위해서.
그런데 말레나의 남편은 어떠한가. 그는 아내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를 꿈꿀 수 없다. 괴롭힘에 피폐해진 아내를 구원하는 것도 힘겨워 보인다. 일상적인 안식도 요원하다. 세계는 영웅이 되어야 할 자에게 자격과 기회와 의지를 빼앗아 버리고, 또 하나의 희생양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이는 말레나의 남편이 고발하는 세계의 무자비한 실체이다. 집단은 말레나를 꾸짖고 처벌하는 순간에 광기와 폭력과 야만성을 드러냈었지만, 이에 대해 항의하려는 자에게는 논리와 이성과 질서와 체계와 안정을 주지시킨다. 개인의 독단적 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아니 처음부터 그러한 행동의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다.
신화나 문화 인류학적 진실을 살펴보면, 영웅과 희생양을 구별하는 잣대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일정한 규준으로부터 벗어난 자라는 공통적 특성이 발견되기도 한다. 오이디푸스와 같은 경우에도 영웅에서 순식간에 희생양으로 변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말레나의 세계는 처음부터 영웅이 될 수 없었고 끝까지 희생양의 운명만 강요되었다. 복수도 구원도 안식도 불가능한 세계, 전쟁보다 더 참혹한 일상과 무자비한 집단에 둘러싸인 세계, 그럼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생을 연장해야 하는 세계, 이 세계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집을 지어야 하는가. 아니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랄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을까. 복잡한 상념과 질문을 겨냥하고 있는 점은, 『말레나』의 세 번째 매력이다.
4. 영화란 무엇인가 : 이 시대의 관객에게
쥬세페 영화에서 영화는 그 자체로 영화적 질료이다. 그의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규정해도 넘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시네마 천국』을 보자. 이 영화는 끊임없이 영화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영화는 아버지가 없는 가난한 토토에게 놀이 상대였으며, 새로운 아버지에 해당하는 알프레드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보다 영화가 더욱 소중했다. 소년이 된 토토에게 영화는 생계의 수단이었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목표였다. 영화상연기사라는 어엿한 직업으로 어머니의 생계 부담을 덜어주었고 지친 마을 사람들에게는 유희의 기쁨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자부심이 넘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성년의 토토이다. 그에게 영화는 사회적 권력과 당당한 직업과 국민적 숭앙을 안겨주는 지표이다. 그러나 성년의 토토는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 영화도 예전처럼 행복을 안겨주지 못한다. 다시 물어보자. 성년의 토토에게 영화는 무엇인가. 그에게 영화는 삶을 지탱해주는 힘인가, 다른 사람에게 힘을 제공하는 원천인가. 영화를 보고싶어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광장의 한 귀퉁이를 베어내어 상연되던 영화는 군중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가.
『시네마 천국』에게 너무 무리한 질문은 금물이다. 이 작품에서 쥬세페의 생각의 단초를 엿보아야지 모든 해답을 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토토를 참조하면, 영화는 한 인간에게 삶의 목적이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통찰을 얻게 된다. 토토는 어릴 적 그토록 열망하던 키스씬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웃는다. 영화는 어린 날의 추억을 생각하듯 인생을 돌아보게 할 수 있고, 또 즐거움을 줄 수 있다고 깨달은 듯하다.
『스타메이커』는 보다 구체적으로 묻는다. 사람들은 왜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하는가라고.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 말한다. 내가 호모임을 밝히기 위해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서, 누군가를 사랑해서, 못다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변호하기 위해서, 영상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 생각한다. 영화는 인간의 꿈이라고, 소원이고, 억눌린 감정의 해방이고, 그래서 삶의 출구라고. 오갈 데 없는 우리네 인생의 활력소라고. 그러나 그런 우리의 꿈은 사라진다. 막강한 현실의 힘 앞에.
『말레나』를 보자. 이 작품에서 영화라는 질료는 크게 두 가지로 활용된다. 먼저 형식적 측면이다. 『말레나』에는 세계적인 명화의 유수한 장면이 패러디되어 있다. 말레나와 만나는 레나토의 환상은 영화 속의 설정을 빌어 표현된다. 레나토는 서부에서 로마에서 그리고 갱들의 세계에서 말레나와 만난다. 이러한 상상력은 무척 흥미로워서, 『말레나』를 찾는 네 번째 이유가 될 만하다.
내용적 측면으로 들어가 보자. 『말레나』에서 발견되는 영화에 대한 자의식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이전까지는 영화라는 매체적 특성을 활용했는데, 이 작품에서 이러한 자의식은 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화두로 바뀌어 있다. 매혹적인 육체의 신비를 담아내야 한다, 전쟁의 아픔을 고발해야 한다, 소년의 성장과정을 지켜보아야 한다, 마을 사람들로 대변되는 집단의 광폭한 힘을 증언해야 한다, 침묵을 강요당한 영웅의 쇄말을 기록해야 한다, 처참한 이 세계의 비극성을 드러내야 한다, 복수도 원한도 안식도 구할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의 가혹한 정착을 씁쓸하게 보듬어야 한다. 혼란스럽지만, 이 영화는 열거된 모든 것에 대해 일정한 촉수를 뻗치고 있다.
영화관람은 어떤 측면에서는 관음증 환자들의 집단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관음증(Voyeurism)은 상대방의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를 주시하여 시각적 쾌락을 획득하는 것을 일컫는다. 특히 상대의 은밀한 사생활이나 성적 욕구 등을 몰래 엿보는 행위가 문제가 된다. 이것은 대게 윤리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며, 응시 주체에게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크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관음증 환자의 시선을 도용하지만 관객은 당당한 관람 주체로 격상된다. 스크린은 이러한 주체에게 시각적 쾌락(절시증)을 합법적으로 제공한다. 이때 관객의 특성은 문제가 된다. 관객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썰렁한 영화관은 관극의 흥미를 반감시킨다. 그렇다고 관객 모두가 친밀한 사이가 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객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되, 그만큼 익명성이 보장된 상태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밀하게 타인의 삶을 엿본다는 의식만 같이 할 뿐, 서로가 공개된 상태여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영화란 관객에게 정당한 응시의 권리를 주고 내밀한 타인의 삶을 정당하게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문화적 장르에서 영화만큼 폭발적인 인기와 수효 증가를 누리는 것이 드문데,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영화의 관음증적 현시에 있지 않을까 싶다. 따지고 보면 레나토 엿봄은, 이러한 영화관객의 욕구를 카메라라는 매개 없이, 그리고 영화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풀어놓는 행위이다. 소년은 관객의 관음증을 영화 내부에서 실현하고, 엿보는 자의 모습까지 이중으로 엿볼 수 있는 기회마저 제공한다. 우리는 소년이 행하는 관음증적 행위를 통해 말레나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시각적 쾌감을 얻지만, 또 한편에서는 영화에 대한 유용한 통찰을 얻게 된다. 크리스티앙 메츠는 이를 일컬어, 영화는 관객을 관음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의 관객들은, 불꺼진 영화관에서 집단적으로 타인의 삶을 관음한다. 단순한 시각적 간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역할은 그만큼 축소될 것이다. 아무래도 관음증의 최종 결과는 자아/타자/집단이 이루는 관계 혹은 삶과 현실에 대한 통찰이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말레나』는 이러한 통찰에 접근해 가는 한 아이의 모습을 통해, 영화의 관음적 태도가 겨냥하는 바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소년은 이해해 나가기 시작한다. 말레나의 진실과 아픔과 진정한 모습을, 그리고 거친 삶에 내재된 인간의 배신과 비겁함을. 말레나를 둘러싼 현실의 어려움을 알게 되고 추악한 사회의 가려진 면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똑같은 어려움이 조만간 지워질 것이라는 사실도 넌지시 예견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부쩍 자란 레나토의 모습은 이를 웅변한다. 영화는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점이 『말레나』에 영화라는 요소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이 배제되어 있는 데도, 영화에 대한 물음을 상기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것이 『말레나』를 만나야 하는 다섯 번째 이유이자 마지막 매력이다.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현재 공연과 미디어 연구소 간사, 본지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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