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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총론-우리 시대의 문화 인프라, 이대로 좋은가?>/김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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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민족예술’은 유효한가?
김 수 열
(시인. 제주민예총 부지회장)
1. 들아가면서
‘격동’이라는 표현이 있다. 한해가 기우는 세모가 되면 언론에서는 ‘숨가쁘게 지내왔다.’ 정도의 의미로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것 같은데 지난 2002년 앞에 올 수 있는 수식으로서는 평범한 의미의 ‘다사다난’보다는 ‘급하게 변동한다’라는 의미의 ‘격동’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붉은 상의 가운데 ‘Be the Reds’라는 섬뜩한 구호가 새겨진 옷을 입고, 신성하다 못 해 거룩하다고만 믿어왔던 태극기로 두건과 치마를 만들어 입고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을 가득 채우다 못 해 서울 시청 앞 광장을 비롯해서 제주시 탑동 해안을 온통 붉은 물결로 물들여버린 ‘붉은 악마’의 출현이 그 첫 번째 격동이다. 경기가 끝나면 그네들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너무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하면서 밤새 ‘대~한민국’을 외쳤다. 아무렇게나 머리에 염색을 하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한 손에 햄버거를 들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감히 따라 부르기조차 힘든 노래를 들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흔들어대던 이 땅의 젊은이들이 붉은 기운으로 다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의 격동은 미군 장갑차에 치여 억울하게 죽어간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촛불행렬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해 11월 27일 ‘앙마’라는 아이디(ID)의 한 네티즌이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광화문에서 미선이 효순이와 함께 수천 수만의 반딧불이 됩시다. 토요일, 일요일 6시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걸읍시다. 6월의 그 기쁨 속에서 잊혀졌던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합시다. 한 분만 나오셔도 좋습니다. 저 혼자라도 시작하겠습니다. 광화문을 우리의 촛불로 가득 채웁시다.”
‘촛불 하나를 들고 혼자라도 시작하겠다’라는 절절한 호소는 수많은 시민의 가슴에 파고들어 각종 게시판에 옮겨졌고, 촛불 시위는 이제 전국으로 확산돼 ‘횃불’을 이루고 있다. 이 횃불의 움직임은 중심이 따로 없다. 참여한 사람 모두가 주인이고 중심이다. 그야말로 자발적이고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확산은 단순한 ‘추모’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건 ‘주권회복운동’이 되어 전국적으로 피어오르고 있다. 촛불을 치켜들고 부시 미국 대통령의 직접 사과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의 개정을 요구하면서 민족적인 자존심에 불을 당기고 있다.
새삼스럽게 ‘붉은 악마’와 ‘촛불 세대’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아직도 유효한가? 하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만약 ‘민족’이라는 개념이 그 효용성을 상실했다면 ‘민족예술’을 표방하면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은 21세기에 있어서 조직의 성격과 예술의 방향에 대해 분명한 자기점검과 아울러 환골탈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며, 아직도 ‘민족’이라는 개념이 유효하다면 현재가 요구하는 ‘민족’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예술 실천을 통해 대중 속에서 검증 받고 대중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 글은 민족의 문제를 예술 활동의 중심으로 삼아 활동하고 있는 민예총은 어떤 조직이며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아울러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이하 제주민예총)의 사업을 소개함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하는 예술단체의 실상을 드러내는데 역점을 두고자 한다. 물론 민예총과 타지역의 민예총 활동을 객관적으로 집어냈을 때 민예총의 실체가 보다 분명해지겠지만 그러한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점검은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2. 민예총은 어떤 단체인가
민예총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기존의 문화․예술활동이 가졌던 한계를 극복하고, 남북문화교류를 비롯하여 소외된 다수 국민을 위한 문화적 욕구를 수렴하고 문화 관련 정책 대안을 제시함으로서 보다 나은 문화예술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을 포함한 장르별 예술단체들이 민족예술운동을 하나로 통합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에 의해 결성되었다. 민예총 정관 제3조(목적)를 보면 ‘본 연합은 민족예술을 지향하는 예술인들의 상호 연대와 공동 실천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민족 통일 그리고 민중의 복리증진에 기여하고 만족문화의 발전에 헌신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제4조(사업)에는 12항의 주요 사업을 명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사업을 소개하면 1) 민족예술의 창작을 지원하기 위한 사업 2) 민족예술의 각 장르 간의 연대를 증진시키기 위한 사업 3) 민족예술의 교육을 위한 사업 4) 문화예술의 정책 개발 사업 5) 민족예술의 세계 진출과 국제교류를 위한 사업 6) 민족예술인의 권익을 옹호하며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사업 7) 민중의 주체적 문화 활동을 지원, 육성하는 사업 등을 시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988년 12월 23일 서울 YWCA 강당에서 열린 창립총회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839명의 예술가들의 참여로 시작된 민예총은 2003년 현재 서울, 인천, 충북, 대구, 부산, 제주 등을 비롯하여 전국 경향각지에 40개의 지부, 지회를 두고 있으며 장르위원회로는 민족건축인협의회, 민족굿위원회, 한국민족극운동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미술인협회, 민족사진가협회, 한국민족음악인협회, 민예총영화위원회, 민족춤위원회, 민족서예인협회 등 10개의 장르를 두고 활동 중이며 현재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의 수는 1만 명을 훨씬 뛰어넘은, 우리나라문예 단체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예총이 이룬 성과 내지는 사업에 대해서는 낱낱이 설명할 수 없으나 굵직한 사건들만을 간추려 보면 1989년 작가 황석영(당시 민예총 대변인)의 방북, 1991년 음반법 투쟁과정에서의 문예 실천과 지도부의 삭발 투쟁, 그리고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91 자, 우리 손을 잡자> 공연, 1992년 문예아카데미 개소, 1993년 민예총의 사단법인화 결정 그리고 남과 북, 해외 미술인들이 처음으로 만나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렸던 <코리아 통일미술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업들을 실천해 왔다.
3. 섬, 그리고 민족예술
제주민예총은 1994년 2월에 창립이 된다. 민예총의 목적과 강령에 뜻을 같이 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몇 차례의 토론을 거치면서 창립하게 되는데 당시 장르분과로는 문학․미술․음악․굿․연극 등의 위원회로 출발하였고, 창립을 선언한 예술인들도 40명 안팎의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다가오는 2004년이면 제주민예총 창립 1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10년을 눈앞에 둔 지금 제주민예총은 풍물․영상․민요 등의 분과위원회가 결성되어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으며, 부성기관으로 (사)전통문화연구소를 두어 제주의 전통문화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실천하는 기구로 거듭나고 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회원은 140여 명의 회원이 활동 중에 있다. 제주민예총이 창립과 함께 가장 역점에 둔 사업으로 조직의 정체성과 맞물려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사업이 바로 4․3예술제이다. 그리고 4년 전서부터 교류사업의 하나로 산으로 둘러싸인 충북민예총과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민예총이 꾸중하게 예술적인 교류 사업을 실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민예총은 지자체의 문화예술정책에 대해 ‘대항’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 역점을 두면서도 부득이한 경우 지자체과 정면 승부를 피하지 않고 분명한 정책 대안을 제시함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섬집아기>노래비 건립 반대 운동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사업이 있으나 이 세 가지 사업을 중심으로 제주민예총을 소개할까 한다.
3-1. 4․3문화예술제
아홉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4․3문화예술제를 뭉뚱그려 설명하는 것보다 지난 2002년 제9회 제주 4․3예술제의 주요 골간을 집어보면서 이야기를 풀어가겠다. 4․3예술제에서 우리가 상당히 중시하고 있는 것은 ‘4․3’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이다. 지난해는 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그 진상규명이 정부차원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은 원혼에 대한 해원을 넘어 4․3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적극적 의미의 예술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또 한 가지는 바로 10년 전 다랑쉬 굴레서 발견된 11구의 시신이 한줌의 재가 되어 두 번의 죽임을 당했는 데도 불구하고 10년이 되도록 죽은 원혼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하지 못 한 후손으로서의 불찰을 반성하고 그들을 죽음을 역사의 지평 위에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의미 등 두 가지를 기본으로 하여 예술제를 준비했다. 전자의 중심 행사가 4․3전야제-역사맞이 거리굿 <들꽃 피는 이 사월에>이고 후자의 중심 행사가 다랑쉬 동굴 유골 발굴 10주년 기념 해원상생굿 <살아남은 자의 흰 그늘>이 바로 그것이다.
거리굿은 현재 제주 행정의 중심인 제주 시청 광장을 출발하여 4․3항쟁의 직접적인 동인이 된 3․1시위의 현장인 관덕정까지의 동선을 기본 축으로 한다. 거리굿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삭제당한 역사를 복원하는 장소의 부활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역사적 행위의 장소로서의 전이과정을 거쳐 오늘날 대중의 기억에 파편화된 역사적 사건을 다시 짜맞추면서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행위를 통해 미래까지 연결지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역사적인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역사맞이 거리굿은 4․3 발발의 직접적인 동인에 해당하는 3․1시위 발포 사건을 바로 그 현장에서 재현하는 극행위를 시작으로 하여 다양한 연행 매체들이 죽은 자의 넋을 위무하고 우리의 결의와 각오를 다지며 결코 잊지 말 것을 호소한다.
2003년에도 4․3거리굿은 바로 이 현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특히 올해는 4․3의 정신계승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으며 오늘날 제주 현안 문제로 떠오른 화순항 해군기지 건설반대 투쟁, 우리 농업 지키기 투쟁 등을 전개하고 있는 제주 민중들이야말로 4․3정신의 계승자라는 판단 아래 그러한 단체와 함께하는 역사맞이 거리굿을 준비하고 있다.
다랑쉬 동굴 유골 발굴 10주년을 기념해서 제주민예총이 다랑쉬굴 현장에서 마련한 상생굿 <살아남은 자의 흰 그늘>은 제9회 4․3문화예술제의 백미였다. 이 행사는 지금까지 행해진 흔한 위령제가 아니라 예술로서 ‘보시’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예술이 역사를 안고, 인간의 업보를 안고 예(藝)와 기(氣)로서 제(祭)를 지낸 것이다. 11구의 억울한 주검을 상징하면서 죽음의 액(厄)을 벽사(辟邪)하는 11마리의 돌까마귀 솟대를 원형으로 세우고 시렁목끈으로 조여맨 공간에서 죽음을 살림으로, 음을 양으로, 반목과 질시를 만남과 화해의 장으로 만들어 ‘살아남은 자의 흰 그늘’을 광명 천지에 드러내고자 하는 제의였다.
충북 청주에서 위령제를 보기 위해 현장을 찾은 도종환 시인은 그날의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다랑쉬를 향해 가는 길에 들어서는 순간 나를 압도한 것은 길 옆에 흰 천과 검은 천으로 세워놓은 만장이었다. 검은 만장과 흰 만장은 삶과 죽음, 저승과 이승 사이를 떠도는 마음들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백과 흑의 명료한 색상대비, 생과 사, 가득 참과 비어 있음, 시작과 끝의 끝없는 순환을 말하고자 하는 듯 만장은 구부러진 길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만장 사이로 세워진 열두 저승문 저승질을 지나 다랑쉬굴에 도착했다. 설치미술은 다랑쉬 가는 길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망월동 가는 길에 세워져 있던 안티비엔날레 만장을 접하던 때의 울컥임과 같은 것이 솟아오르게 하면서도 그때와는 또 다른 명료한 인상을 심어주는 작품이었다.……(중략)……이애주 선생은 억새밭과 구덩이에 온몸을 던지며 춤을 추었다. 삶의 공간이며 동시에 죽음의 공간인 흰 그늘에 몸을 던지는 살풀이였다. 6월항쟁의 한복판, 아스팔트 위에 몸을 던져 죽은 넋들을 위로하던 그 절절함을 오랜만에 다시 보는 듯하였다. 그의 팔뚝에는 억새줄기에 베였는지 나무뿌리에 긁혔는지 상처가 나고 피가 맺혀 있었다. 그가 춤을 추는 도중에 뿌린 피의 꽃잎 몇 장을 주워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건 동백꽃잎이 아니라 죽어간 이들이 흘린 피였다. 피의 꽃잎이었다. 그러면서 남은 우리들, 우리 문화예술을 한다고 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3-2. 충북․제주 문화예술 교류
신경림 시인이 ‘못난 놈들끼리는 얼굴만 보아도 흥겹다’고 했던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충북과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의 문화예술인들이 교류를 하기 시작했을 때 다른 지역의 많은 문화예술인들로부터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발상이 참 독특하고 매우 바람직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앞서 있거나 힘 있는 문화가 그렇지 못 한 문화를 흡수 변용하는 방식의 문화적 충돌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교류로서 두 문화 간의 이질성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자기 문화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거울효과로서의 만남이라 할 수 있겠다. 4년 전 교류를 처음 시작했을 때 서로 확인하고 싶었던 점은, 충북의 내륙문화와 제주의 해양문화의 이질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또한 충북과 제주를 잇는 이른바 ‘민족예술’의 바탕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놀랍게도 두 지역은 판이한 지리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서로 통하는 접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충북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으로 해서 고립된 지역이었고, 제주는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외부와의 차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적인 사건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제주에 ‘4․3’이 있는가 하면 충북에는 ‘노근리 학살’이 있다는 점이다.
충북과 제주의 교류는 해마다 상호 방문을 하는 방식으로 주로 장르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문학은 작품집을 한데 묶으면서 출판기념회를 통해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는가 하면 미술은 공동의 전시를 통해 교류를 하고, 연행 장르들은 서로 합동 무대를 만듦으로서 교류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예술 기행을 병행함으로서 상대 지역의 역사와 예술을 이해의 깊이를 한층 더해가고 있다.
지난 해 7월에는 충북의 예술가들이 제주를 찾았다. 충북민예총의 회원으로 제주를 찾은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는 ‘2002 충북․제주 문화예술교류’ 참가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제주․충북 문화예술 교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경험이 일천한 제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겠습니다만, 양쪽의 문화적 특수성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험케 하는 초기 행사의 성격을 탈피하여, 보편적인 문화적 행사로 그 중심을 옮겨야 하지 않을까 우선 생각해 봅니다. 가령 문학의 경우라면, 양쪽에서 배출한 문인들을 참여시켜 지역성은 물론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보편적인 가치까지 매개하는 업그레이드된 잔치가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점에서 타지로 나간 출향(出鄕)문인들을 인적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양쪽 지역의 인적 자원이나 문화적 유산들을 풍부하게 해야 합니다. 지역성의 가장 위험한 함정이 배타성이니까요. 또한 양쪽에서 발간하는 ꡔ제주작가ꡕ와 ꡔ충북작가ꡕ 사이의 활발한 작품 교류도 정례화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3-3. <섬집아기> 노래비 건립 반대 투쟁
제주 민예총이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역점을 두고 행한 사업 하나를 들라면 바로 <섬집아기> 노래비 건립 반대 투쟁을 들 수 있겠다. 먼저 제주도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노래비 건립 사업의 내막이 무엇인지부터 간략하게 살펴보자.
지난 2001년 7월 제주에서 제1회 탐라전국합창축제가 열렸다. 이때 개막합창곡을 위촉받은 한국종합예술학교 이영조 교수(동요 <섬집아기>를 작곡한 이흥렬의 차남)가 행사 참가차 제주에 내려와 구좌읍 종달리 해안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선친이 만든 동요 <섬집아기>가 이곳의 풍경과 어울린다면서 노래비를 세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제주도는 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제주도는 ‘동요 <섬집아기>조각비 건립’이라는 제목의 문건에서 사업의 필요성으로 ‘국민적인 동요인 <섬집아기> 노래비를 건립함으로써 관광명소화하여 제주도를 음악의 고장으로 개발하고자 함’을 내세우면서 제주도의회에 추경예산으로 도비 1억 5천(노래비 제작건립 5천, 섬집아기 음향제작 설치 등 4천, 주변 조경 및 섬집아기 모형 설치 등 6천)을 신청하면서 사업일시는 2001년 11월부터 2002년 7월까지로 명시하고, 사업시행기관으로는 제주문화예술재단을 지정하였다. 이러한 예산안은 제주도의회에서 ‘도민공감대 형성’을 전제로 승인되었으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제주 지역의 문화예술인은 물론 제주도민에게 전혀 공개되지 않은 채 밀실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섬집아기>라는 동요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음을 모르는바 아니다. 누구나가 한번쯤은 불러봤을 노래라는 것도 알고 있다. 문제는 그 노래가 제주와 정서적으로도 맞지 않고, 작사자나 작곡자도 제주와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더군다나 친일음악인으로 역사의 낙인이 찍혀있는 이흥렬이 작곡한 그 노래의 비를 이 곳, 제주에 세우겠다는 데 있다.
제주민예총은 2002년 1월 성명서를 통해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성명서의 끝부분은 다음과 같다.
제주도가 나서서 추진해야 할 사업이 있고, 동요 <섬집아기> 노래碑가 세워져야 할 곳이 따로 있다. 더군다나 도민의 혈세로 이루어지는 사업에 대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 아닌가?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적기임을 명심하고 제주도는 동요 <섬집아기> 노래碑 건립 계획을 즉각 취소하여 제주도민의 자존과 지역 예술인들의 명분을 훼손시키는 일을 그만두기 바란다.
그래도 제주도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제주민예총은 2002년 10월 「<섬집아기> 노래비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정책토론회를 마련하고 <섬집아기>의 작곡자인 이흥렬이 대표적인 친일문학인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이른바 <섬집아기> 논쟁은 친일문제로 비화되면서 전국적인 이슈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우선 ‘제주’ <섬집아기> 노래비 ‘건립 추진에 대한 전국 민예총 소속 40여 개 지역 조직과 10개 장르 조직의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섬집아기> 노래비’ 건립이 철회되어야 하는 여섯 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다. 이 성명서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의 이유를 보면 첫째, <섬집아기> 노래가 제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 둘째, 추진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점. 셋째, 제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노래비 건립을 통해 초래될 수 있는 제주문화의 정체성 혼란과 도민 분열에서 오는 갈등이 심각할 것이라는 점. 넷째, 작곡자인 이흥렬 씨는 분명한 친일 음악인이라는 점. 다섯째, 1억 5천에 해당하는 도민의 혈세를 들이는 사업의 추진이 너무나 졸속이라는 점. 끝으로, <섬집아기> 노래비 건립에 대한 다른 대안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고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에서도 성명서를 내어 ‘제주도의 문화행정, 일방적인 관행에서 벗어나라’는 입장을 밝혔다.
제주지역에서도 16개의 사회 단체가 <섬집아기> 노래비 건립을 취소하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제주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초진과정에서 제주도민을 철저하게 소외시켰을 뿐 아니라 대표적인 친일 음악인의 노래비를 제주섬, 그것도 항일 투쟁의 현장에 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광복회 제주지부에서도 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파 이흥렬의 노래비 건립은 즉각 철회되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제주도는 지난 1월 24일 <섬집아기> 노래비 건립을 백지화하기에 이른다. 지자체에서 도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안하무인격으로 추진하려던 사업이 도민에 의해 제동이 걸린 사례를 남기게 되고 만 것이다.
4. 여전히 ‘민족예술’은 유효하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글로칼리즘의 21세기에 웬 민족, 웬 민족예술이냐고. 우리는 공세적 내지는 공격적 민족주의가 파시즘적 제국주의화되는 과정을 역사를 통해서 배웠다. 우리가 말하는 ‘민족’은 그야말로 강한 ‘타자’로부터 약한 ‘우리’를 스스로 보호하자는 의미의 ‘민족’을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민족의 삶과 맞물린 예술행위로서의 ‘민족예술’은 현 시점에서 유효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조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붉은 악마’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촛불행렬’을 통해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제주민예총의 중심 사업으로 펼치고 있는 4․3문화예술제 또한 민족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이다. 4․3은 제주라는 변방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라는 약소 지역이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미국이라는 거대한 패권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는 점이다. 얼마 전에 서울 대학로에서 모 극단에서 4․3을 형상화한 작품이 올려지고 있음을 언론을 통해 듣고는 일부러 구경을 간 적이 있다. 물론 제주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연출가와 배우들이 제주말을 사용하면서 제주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이 있으나 그 내용은 한마디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4․3의 문제는 제주 사람만이 다룰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술적 감성 이전에 바른 역사 인식 즉 민족적 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월말 필자는 TV화면을 통해서 미국 부시 대통령의 새해 국정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지난해와는 달리 북한에 대해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인식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 거듭 드러났다. 그는 북한을 ‘국민을 공포와 굶주림에 속에서 지배하는 억압적 정권’으로 지목하면서 ‘미국과 세계가 직면한 중대한 위험을 주는 무법국가’로 규정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이라크 문제가 해결되면 다음은 북한’이라고 했다. 소름끼치는 발언들이다. 어디 그뿐인가? 효순이 미선이를 장갑차로 죽여 놓고도 무죄라고 하는 저들 앞에서 우리는 과연 민족을 버려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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