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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기획/우리 시대 웃음의 의미-희극적 상상력과 유희정신/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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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925회 작성일 04-01-0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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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적 상상력과 유희정신
강경희
(문학평론가)



웃음이란 실제적이거나 상상적이거나 같이 웃는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 말하자면 공범의식 같은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


1. 희극을 가장한 비극의 시대
인간에게 웃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쁨, 즐거움, 환호, 탄성과 같은 용솟음 치는 감정들 속에 ‘웃음’은 자리한다. 그것은 무료한 일상에 신선한 활력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때로는 억눌린 우리의 의식을 해방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만 허락된 최고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즉 웃음이야말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새롭고 건강하게 갱신시켜주는 삶의 자극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이렇듯 진정한 의미에서의 건강한 웃음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또한 현대인의 억눌린 슬픔과 분노를 걷어내 주는 통쾌한 웃음은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 속에는 이미 우리 시대의 ‘웃음’이란 인간의 감정과 정신을 순화시켜 주는 긍정의 의미로만 해석되지 않음을 함축하고 있다.
더 이상 희극도 비극도 없는 시대, 진실한 웃음도 눈물도 사라진 시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조차 무화된 시대에 현대인의 삶은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시인들의 웃음 이면에는 가벼움보다는 무거움이, 경쾌함보다는 우울한 자조적 풍경이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경향은 90년대 해체시․도시시․일상시․패러디시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특히 함성호․함민복․박상배․장경린․차창룡과 같은 시인들의 유희적 상상력은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우리 삶에 대한 풍자적이며 냉소적 태도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들 작품 속에 드러난 희극성은 무엇보다 기계화되고 종속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적하고 비판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처럼 전위적이며 실험성이 가득한 시작 방식은 도덕적 이성에 기초한 보편적 이상과 합리적 세계에 대한 믿음이 불가능해진 오늘의 혼란스런 현실을 풍자하려는 시대 정신이 반영된 결과이다. 따라서 이들 시에 드러나 있는 대중문화에 대한 과감한 패러디, 냉소적이며 반어적 어조, 우화적 상상력, 거친 입담과 비정상적 문맥은 오염되고 타락한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조소와 질시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90년대를 대변하는 가장 적절한 시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일군의 시인들의 ‘웃음’은 세계 개선에 대한 의지와 목표가 비교적 분명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의 시속에 드러난 ‘웃음’은 이러한 맥락과는 다소 차별화된 양상을 보인다. 우선 주목되는 점은 대상에 대한 뚜렷한 공격의 의지가 약화되거나 또는 미시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아마도 오늘의 우리 삶이 이중 삼중의 모순된 구조 속에 편입됨으로써 인간 주체의 어떠한 의지조차 무력화되고 있다는 위기의식과 허무의식, 또한 개인주의가 확산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특히 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일군의 신세대 시인(여기서 신세대라는 함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출생한 시인들임을 밝힌다)에게 이러한 경향은 농후하다. 따라서 이들 시인들의 ‘웃음’은 이전의 시들과는 달리 보다 가벼워지고 내면화되고 요설화되는 특징을 지닌다. 다음으로 시의 내용면에서 볼 때 환상적이며 그로테스크한 경향의 시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다양한 영상매체와 전자 매체의 영향권에서 성장한 신세대의 삶의 패턴과 깊이 관련된다. 즉 환멸스러운 현실의 자리를 대신해 그들은 자기만의 환상과 헛것이 가득한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폐쇄적이며 분열적 자아의 모습을 투영한다. 따라서 이러한 뒤틀린 자아가 만들어 놓은 세계의 모습은 왜곡되고 변형된 그로테스크한 세계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웃음’은 당대의 모순과 질곡을 예리하게 꼬집고 공격하는 간접화법이다. 따라서 오늘의 시인들의 웃음 속에는 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야말로 희극을 가장한 철저한 비극의 시대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려는 반성의 목소리인 것이다.

2. 자동화된 반복의 세계
베르그송은 웃음의 원인을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이라 파악하면서 웃음의 의미를 기계화된 인간의 삶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징벌로 파악하였다. 이는 인간의 습관적 행위(사회화의 과정)가 생명력이 가득한 우리의 삶을 고착시키며, 인간의 인식을 고정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웃음이란 궁극적으로 이러한 기계화된 인간의 삶의 방식에 일종의 제동을 거는 일탈의 방식인 것이다.
웃음을 유발시키는 가장 흔한 방식 중 하나는 반복이다. 특히 동일한 상황이나, 행위, 언어의 계속적인 반복은 우리의 고정관념에 파격을 가함으로써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즉 의도적이며 계산된 반복, 자동화된 반복은 보편적 질서체계를 넘어선 예기치 못한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내는것이다.

배가 고프다, 나,
먹고 싶다, 짜장면, 나,

아름답고, 행복한, 짜장면, 나,

그릇이 눈앞에 짜-아장 하고 나타난다
짜장면 면발이 바람에 날린다
짜장면 짜장면 나의 짜장면
먹고 싶은 짜장면 보고싶은 짜장면
아저씨 단무지 더 줘요 짜장면
짜장면 그릇 옆 바퀴벌레 비틀거리며 지나간다
너도 짜장면 먹고 싶냐
짜장면 면발 하나 집어주려다
너무 길다 반을 잘라먹고, 다시
반의반을 잘라먹고
바퀴야 너 먹어라 먹고 노래 잘 불러야 된다
배고프고, 못생기고, 더럽고, 불행한,
바퀴벌레 고맙다고 고개 숙이고
두 손 짜장면 그릇 받쳐든 나는 흐뭇하게 웃어주고
맛있다 짜장면 후루룩 나무젓가락으로
양파도 씹어가면서 보리차도 마셔가면서
먹고 싶던 짜장면, 짜장면이나 먹는다

즐겁고, 배부른, 짜장면, 나,
―서정학 「짜장면, 나」 전문

서정학의 시의 반복은 무엇보다 언어 유희적 요소가 강하다. 그에게 있어 반복은 시의 전체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되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미를 해체, 지연, 무화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배어있다. ‘짜장면’과 ‘나’라는 자동화된 반복적 시어는 전체적인 시의 의미맥락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희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그 희극성은 다름 아닌 ‘너무나도 간절히 짜장면을 먹고 싶은 나’의 돌발적이고 장난스럽기까지 한 상황이 지속적으로 거듭됨으로써 ‘먹는다’(식성)는 행위 자체가 ‘놀이’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다 증폭시키는 이유는 무엇보다 반복된 시어가 주는 속도감 있는 리듬 의식에 기인한다. 즉 이 시에서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짜장면’이란 용어가 주는 속도감은 시의 의미를 점차 모호하거나 불투명하게 만든다. 이는 반복된 리듬이 계속될수록 시의 의미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이것은 언제나 전체적인 의미와 구조적 맥락 속에서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려는 독자에게 낯선 충격을 가함으로써 가치와 의미를 존중하려는 우리의 일반적 관념을 과감하게 전복시킨다. 따라서 이 시를 읽는 독자는 거듭되는 말장난으로 인해 당혹스럽고 허탈한 웃음과 직면한다. 그러나 이 허탈한 웃음 뒤에는 실상 ‘먹는 것(짜장면)=나=즐거움’이라는 등식으로 모든 것이 수렴되는 단순하고 폭력적 세계 속에 우리 삶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즉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먹고 싶던 짜장면, 짜장면이나 먹는다//즐겁고, 배부른, 짜장면, 나,”에서처럼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먹는다’는 욕구 충족의 행위로만 한정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삶이 동물적 본능의 세계와 다르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특히 ‘배고프고, 못생기고, 더럽고, 불행한,’ 바퀴벌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다. 이는 비천하고 쓸모 없는 기생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삶에 대한 극단적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서정학의 「짜장면, 나」가 매우 가벼운 언어유희를 통해 세계의 허상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면, 이장욱의 「감자에 싹이 나고」는 시간에 의해 소멸되어 가는 인간 존재의 위기의식을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든 것은 취소되었다. 나의 신상은 평온하다.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때로는 무언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요즘엔 LG 25시의 불빛만큼 적요한 것은 없어.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문득 아주 오래된 안개가 아주 자연스러운 자세로 도시를 감싸는 풍경을 생각한다. 다만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여자아이들의 시간이 건들거리며 LG 25시의 적요를 걸어나온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히 지나가는 새벽이라는 것은. 여자아이들의 마르고 흰 다리가 어둠 속의 휘파람과 더불어 사라져가는 것처럼. 알고 있다. 이 시간에 관해서라면 약간만 익숙해지면 된다. 다만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모든 건 취소되었다. 나의 신상은 평안하다. 다만 자세를 좀 바꿀 수 있다면 LG 25시의 불빛은 다시 저렇게 고여 있다.
―이장욱 「감자에 싹이 나고 ―코끼리군의 엽서」 전문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라는 반복된 시어 속에는 어린 시절 우리가 즐겨했던 놀이문화에 대한 향수가 담겨 있다. 그것은 동화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따뜻한 정감과 동경을 환기시킨다. 또한 부제인 ‘코끼리군의 엽서’는 이러한 상상력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러나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라는 시어의 불연속적인 반복과 그 사이 사이 제시되어 있는 시의 전체적 상황과는 어떠한 유기적 관련성도 없는 듯하다. 즉 어두운 도시의 거리, 그 속을 이리저리 배회하는 여자아이들, LG 25시의 적요한 불빛이라는 무겁고 가라앉은 시적 분위기는 재기 발랄한 아이들의 음성을 연상시키는 반복어와는 서로 조응되지 않는 이질감을 자아낸다. 이 이질적 상황의 인위적 결합이 웃음을 유발시킨다. 무겁고 가라앉는 시의 전체적 분위기와는 달리 툭툭 불거져 나오는 자동화된 반복어로 인해 시는 진지한 문제를 매우 가벼운 담론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진지한 상황에 대한 화자의 인식이 개입되려는 순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어로 인해 시의 의미는 방해받고 지연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둘러싼 현실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화자의 태도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 시에서 주목할 수 있는 점은 현재의 시간에 대한 시인의 태도이다. 화자를 둘러싼 현재의 시간은 ‘적요’의 시간이며 ‘오래된 안개’에 휩싸여 있는 ‘조용히 지나가는’ ‘어둠’이 가득한 정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라져가는’ 시간이며 또한 ‘고여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현재는 존재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생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죽은 시간이다. 이 죽음의 시간을 견디는 방식을 화자는 그저 그러한 시간에 ‘익숙해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비극적 현실을 우울하거나 비관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이는 단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라는 반복 어구로 인해 시의 전체적 톤(tone)을 매우 유니크하게 변모시켜 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취소되었다. 나의 신상은 평온하다”라는 발언은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와 같이 무의미한 반복을 거듭하는 것과 같이 현실의 무게를 적극적으로 소멸시키고 무화시켜 버리겠다는 자기 합리화의 태도로 읽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지나간다. 기억. 상투적인 상처였어. 그렇다, 모든 상처는 상투적이다”(「상투적」) 라는 이장욱의 또 다른 시에서 진술한 바와 같은 지루하고 의미 없는 현실에 대한 수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력을 상실한 싸늘한 도시, 침묵과 냉정함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임을 강요당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내면의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감동과 낭만이 사라진, 추억과 아름다움이 상실된 오늘의 삶을 자극하고 질책하고자 하는 비판적 태도라 할 수 있다.

3. 서늘한 공포의 웃음
현대인은 이미 정상적이고 합리적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잃은 지 오래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상과 비정상이 무엇인지 그 판단의 근거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자본주의적 광기와 집착이 우리의 삶의 방식까지 파괴하고 해체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속에는 파편화되고 왜곡된 세계, 변형된 인간의 모습, 괴기스럽고 공포스러운 현실 묘사라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자주 발견되는데 이는 불확정적이며 전망 없는 혼돈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그로테스크적 상상력은 삶에 대한 극단적 유희정신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유홍준의 「달력 위의 벌레」는 예속화된 시간 속에서 잠식되어 가는 인간의 욕망과 죽음의 문제를 그로테스크한 희극미로 그려낸다.

서른 살 여배우의 입 속으로 벌레가 기어 들어갔다 벌레가 기어 들어갈수록 여배우는 더 빨갛게 웃었다 겪을 것 다 겪은 사람이 빨갛게 웃었다 여배우의 사타구니 밑에 지루한 팔월의 날짜와 요일들이 적혀 있었다 붉은 主日 위에 탱글탱글한 실리콘 젖무덤을 내놓고 자, 자, 여배우가 웃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예수가 나타나 여배우의 젖을 빨고 갔다 보름이 되자 여배우의 음부 속으로 석가가 지팡이를 밀어 넣었다 한 달 내내 여배우가 가랑이를 벌리고 있었다 자지 않고 가랑이를 벌리고 있었다 한 달 내내 여배우를 보며 수음을 했다 한달 내 내 식은땀을 흘렸다 마디가 일곱인 털벌레가, 빨간 반점 다섯 개인 털벌레가, 곰실곰실 기어 올라갔다 서른 살 여배우가 웃다가 죽어갔다 더럽게 빨갛게 죽어갔다. 내 검은 털벌레가 서른 살 여배우를, 다 갉아먹어 버렸다
―유흥준 「달력 위의 벌레」 전문

유홍준의 「달력 위의 벌레」는 ‘벌레’와 ‘여배우’라는 상호 이질적인 대상을 충격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기괴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선정적이며 직설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입’, ‘사타구니’, ‘젖무덤’, ‘음부’와 같은 시어는 모두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인식하는 화자의 태도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러한 화자의 모습은 모두 달력 위에 그려진 여배우의 선정적이며 희화화된 ‘빨간 웃음’으로 인해 유머러스한 상황을 연출한다. 즉 입 속에 벌레가 기어들어갈수록 ‘더 빨갛게 웃은’ 배우의 모습은 엽기적인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까지 비춰진다.
특히 ‘탱글탱글한 실리콘’과 같은 인위적이며 작위적 묘사, ‘예수가 나타나 젖을 빨고 갔다’, ‘여배우의 음부 속으로 석가가 지팡이를 밀어 넣었다’라는 속물화된 설정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인물들을 과감하게 비속화시킴으로써 권위와 위엄을 일소에 전락시키는 웃음을 유발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 삶의 귀중한 이념, 사상, 가치들마저 세속화된 욕망의 그늘 아래 잠식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윤리, 종교와 같은 절대가치조차 물질지상주의라는 자본주의의 시스템 안에서는 성적 대상으로 전락되고 희화화될 수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싸구려 달력 위에 그려진 여배우의 음란한 성적 자극은 인간에게 생물학적 욕망에만 집중하게 만들고 결국은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마는 인간(벌레)이 될 수밖에 없는 그로테스크한 웃음을 직조해 낸다. 이처럼 천박하고 비속해진 삶에 대한 병적 징후는 “숟가락 위에 고환을 떠얹고/먹을까/말까//망설이는”(「식사」)이라는 그의 또 다른 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유홍준의 시들은 모두 이질적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자기 비하적이며 냉소적 웃음이다. 그리고 그러한 웃음은 자기 자신을 조금씩 파멸시킴으로써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자기 파괴적이며 극단적 현실에 대한 참담한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
유홍준이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형상을 통해 현대인의 슬픈 현실을 희극적으로 변모시키기고 있다면 이응준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통해 전도된 웃음을 유도한다.

오늘은 기쁜 날이어요. 원수놈 하나가 제 독을 물고 저절로 죽었으니까요. 금간 화분에 갇혀 뱀똬리처럼 싹트는 희망, 나는 그저 당신이 있는 곳에 당신이 없기를 바랄 뿐이죠. 오해로 헤어지는 일 이렇게 달콤한 줄 몰랐고, 늠름하게 저주하는 법 알기도 전에 피에 젖은 눈알은 하얗게 타버렸답니다. 나는 발이 여러 개 달린, 운명이 마디마디 무지 바쁜 지네. 천적이던 그 원수놈의 얼굴은 벼슬이 죄로 곤두선 닭. 모가지가 잘려 몸뚱이만 마당을 떠돌다 방금 누워버렸으니, 오늘은 정말 미치게 기쁜 날이지 뭐예요. 하여 당신 복숭아 뼈가 탐나 질질 기어가는 이 가련한 기도를 받아주소서, 사실, 나는 지네가 아녜요. 나는 별입니다, 겨자씨보다 작은 별, 엄지만큼 가벼워 훅-불면 사람 목숨인 듯 마구 어둠 속을 날아다니는, 으이그, 우툴두툴한 징그런 별이라. 당신. 어느 애매한 여인의 행복에서 폭발할 참담한 기억으로, 구멍 뚫린 이마를 짚는군요.
―이응준 「고백성사」 전문

이응준의 「고백성사」는 제목에서부터 종교적 제의방식을 패러디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말걸기 형식’이라는 대화 구문으로 드러날 뿐 어떠한 곳에서도 「고해성사」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회와 반성은 연상되지 않는다. 이는 진지하고 성스러운 종교적 행위가 속물적이며 경박한 어조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오늘은 기쁜 날이어요. 원수놈 하나가 제 독을 물고 저절로 죽었으니까요”, “그 원수놈의 얼굴은 벼슬이 죄로 곤두선 닭. 모가지가 잘려 몸뚱이만 마당을 떠돌다 방금 누워버렸으니, 오늘은 정말 미치게 기쁜 날이지 뭐예요.”와 같은 구절은 모두 자신이 경멸하고 증오하던 대상의 죽음에 대한 기쁨과 환희의 목소리이다. 이는 죽음이란 비극적 상황을 매우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즐거움은 일상적 문맥에서의 즐거움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묘사 자체가 매우 끔찍하고 그로테스크한 상황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피에 젖은 눈알.’ ‘모가지가 잘려 몸뚱이만 마당을 떠돌다’, ‘구멍 뚫린 이마’과 같은 신체 묘사는 흉물스러운 모습일 뿐 아니라 참담한 형상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 시의 문맥으로 볼 때 ‘나(지네)’와 ‘죽은 대상(닭)’은 천적의 관계라는 사실로 인해 이 모든 사실이 쉽게 용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죽음의 실체는 찬미와 기도의 대상인 것이다.
한편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 모든 사실이 부정되고 지양되어야 하는 상황임을 암시한다. “사실, 나는 지네가 아녜요. 나는 별입니다./으이그, 우툴두툴한 징그런 별이라.”라는 구절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결국 벌레로 비유된 자기 자신을 자학하고 경멸하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 세계의 폭력성과 극단적 타락상을 고발하고자 아이러니의 언어인 것이다. 즉 시인은 표면적 화자를 통해 끊임없이 죽음을 경멸하고 멸시하지만 숨은 화자에 의해 죽음조차도 즐겁게 수용하고 있는 끔찍한 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고백성사」인 까닭은 타락한 현실 속에서 타락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죄’를 문제삼음으로써 삶을 반성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이다. 이응준의 「해지는 성찬식」, 「암흑시」, 「참회록」등과 같은 시는 모두 엄숙하고 신성한 종교적 세계관에 유희적 상상력을 결합시킴으로써 전도된 세계의 아이러니컬하게 그리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4. 환상이 만들어낸 가짜웃음
환상시는 시인의 상상 속에 비현실적이고 불가해한 시적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현실적 문맥을 비약하고 초월해 버리려는 태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환상시는 사실적 현실로부터 도주하고 일탈함으로써 현실 세계가 만들어낸 질서와 규칙을 과감하게 파괴한다. 그것은 철저히 비현실, 비사실의 세계를 그려낸다. 이처럼 환상시는 현실과 단절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지극히 주관적이며 내밀한 독자적 문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로테스크와는 다른 측면인데 즉 그로테스크가 현실 사회의 여러 가지 관계를 교묘하게 위장하고 변형함으로써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일종의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면, 환상은 ‘비논리적 비현실성’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현실을 지워버리는 거리두기의 방식인 것이다. 하지만 환상시에 있어 현실의 문제는 완전히 소거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새롭게 재구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참의 「벽에서 들리는 소리」는 환상적 기법을 통해 세계를 가벼운 농담의 세계로 뒤바꿔놓는다.

아홉시 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오전에 저는 강마을에서 낚시를 했습니다. 큰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았는데 두 놈 다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 한 놈은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려 물 밖의 물고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다음 뉴스. 자기 집에 사는 한 사내가 오늘, 자기 방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오늘 낮에 전화가 왔다. 맥스웰의 전투 행진곡이 들렸다. 전화를 건 그 여자는 아무 말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참 우스운 일이죠 죽은 놈이 알긴 뭘 알겠어요. (중략)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아요. 뉴스는 항상 거짓말투성이니까요. 다음 뉴스는 뉴스를 마쳐야 한다는 소식이군요. 그럼요. 뉴스는 항상 마쳐야 되는 거니까요. 그럼 다음 시간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김참 「벽에서 들리는 소리」 부분

현실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불신은 현실 세계에 대한 어떠한 의미도 무가치한 것임을 드러내려는 태도를 낳는다. 따라서 현실적 문맥과는 상반되는 상상의 영역 속에 시인은 사물과 인간의 위치를 전도시키고, 현실적 관념체계를 송두리째 전환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 시 는 ‘뉴스’라는 기존 사회의 양식화된 패턴 속에 지극히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환상의 세계를 중첩 시켜놓음으로써 상황 자체를 희극적으로 변모시킨다. 즉 객관적 사실을 절제되고 위엄 있게 전달하는 뉴스의 특성을 개인적 농담과 우스갯소리 치환시켜 버린다. 따라서 김참이 만들어낸 ‘아홉시 뉴스’의 주된 화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신상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 중간 중간에 화자의 주관적이며 감정적 판단이 끊임없이 개입된다. 특히 “두 놈 다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참 우스운 일이죠 죽은 놈이 알긴 뭘 알겠어요” 와 같이 비양거리는 말투는 뉴스라는 것 자체가 결국 농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이는 현실의 문맥과는 전혀 관련성 없는 개인적인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적 사실들에 대한 나열을 통해 시인이 살아가는 세계 자체가 허구적이며 작위적인 세계임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즉 ‘가짜’와 ‘거짓말’이 판치는 세계의 위악성을 시인은 아이러니하게도 환상적 문법을 통해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가장한 조작된 현실, 객관을 가장한 거짓된 세계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김참은 현실을 지워낸 자리에 환상을 심고 그 환상의 자리에 다시금 현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려는 희극적 통로를 열어둔다. 그 웃음은 현실을 탈락시킴으로써 현실을 조소하고, 현실과 멀어짐으로써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그만의 독특한 시작 방식인 것이다.

행운의 과자를 열자 문턱을 주의하라는 메모가 나온다 신장 속에 아끼던 로퍼가 놓여 있다 고속버스 티켓이 재떨이에서 가늘게 탄다 변기에 안구가 떠다닌다 갱의실이 녹물에 잠긴다 악어가 실내 풀장을 헤엄친다 악운과 복도에서 정면으로 마주친다 경비원이 출구를 차단한다 시트로앵은 가사 상태에 빠진다 庭園樹用 가위가 발가락을 다듬는다 헬기는 암모기처럼 따라온다 오아시스행 전동차가 연착된다 정액을 넘기듯이 인출기가 현금카드를 삼킨다 낙원역은 조야한 지옥이다 잿빛 벽돌담과 펜스 위로 곰팡이가 담쟁이를 사칭해 올라간 금지 구역 히트맨이 플랫폼에서 심장을 기다린다 검은 말이 무너지는 마구간에 갇혀 있다 소몰이꾼들이 올가미를 휘두른다 뒷트렁크에 몰리면 관뚜껑이 닫힌다
―이승원 「탈출」 전문

이승원의 「탈출」은 잔혹한 놀이의 방식을 통해 무서운 유희정신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 시는 ‘행운의 과자’를 여는 일종의 놀이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놀이는 비약과 비논리가 연속되는 환상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확대된다. 즉 하나의 환상은 또 다른 환상을 불러오고 그 환상은 다시 새롭게 변주된다. 하지만 이러한 놀이의 마지막은 ‘관뚜껑이 닫힌다’는 상황으로 종결됨으로써 놀이는 결국 죽음에 이르는 잔혹극이였음이 밝혀진다. 이 ‘죽음의 놀이’를 시인은 희극화한다.
‘탈출’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시는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대변한다. 하지만 끝끝내 탈출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끝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비합리적 현실이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 속에 화자 또한 동화되어가기 때문이다. 「탈출」은 끊임없이 예기치 않은 요인에 의해 배반되고 있는 절망적 현실을 연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적 환상이 심어준 삶의 요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행운의 과자’는 ‘주의’라는 경계의 대상이 되고, 어디든 자유로이 떠날 수 있는 ‘티켓’은 타버려 무용지물이 되며, 돈이 나와야할 ‘인출기’는 오히려 ‘현금카드’를 삼켜버리고 마는 배반된 현실을 보여준다. 또한 ‘낙원’이란 ‘지옥’이 되며, ‘곰팡이’는 ‘담쟁이’를 사칭해 벽돌담에 기생한다. 이러한 역전된 현실은 결국 ‘삶’이란 곧 ‘죽음’이라는 논리로까지 확대된다. “뒷트렁크에 몰리면 관뚜껑이 닫힌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물질적 욕망이 빚어낸 끝없는 좌절의 경험은 인간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끊임없이 이 세계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려는 탈출의 욕망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며, 오히려 탈출하려는 모든 시도는 존재를 더욱 옥죄이는 형틀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일개 부속물처럼 인간의 삶이란 것도 도구화된 존재일 뿐이라는 비관적 현실인식을 내포한다. 이승원의 「복마전」, 「워너 형제 활극」과 같은 작품 또한 이러한 도시적 삶의 황폐성과 경쟁의 논리에만 길들여진 기계화된 인간의 모습을 희화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5. 익살과 궤변의 웃음
모순된 세계에 대한 불만족과 불화는 자아와 세계 사이에 타협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즉 나와 세계 사이에는 결코 일치되거나 화합될 수 있는 단절적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이때 웃음은 나를 둘러싼 거대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부정하고 비판할 수 없을 때 우회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 중 하나가 과장된 궤변을 늘어놓는 수법이라 할 수 있다.
백인덕의 「가을 아침의 몽상」은 고독하고 단절된 개인의 일상을 희극적 몽상으로 전환시키면서 혐오스런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의 비극을 그려내고 있다.

살진 참새들이 날아와 창문 밖은 시끄럽고 식욕 없는 가을. 성욕마저 일지 않는 아침이면 밋밋한 커피 한 잔에 세기말의 비감한 지사가 된다.

“각하, 온 강산이 미디어로 피폐되었으니 늙은 아낙으로부터 삼척의 어린것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성은 돼지가 파먹은 감자밭 꼴상사납사옵니다. 민족의 정기가 63빌딩 첨탑에 걸린 듯 위태하오니 시급히 고가소방차라도 수입 대처하심이 마땅…”하다가 괜한 손길이 라디오를 켜면 첩과 처의 변별성을 무너뜨린 이 아무개라는 여자 DJ가 (그녀는 전생에 이론물리학자였음이 분명하다) 국제공인의 고주파에 대고 마구잡이 남성취향을 떠벌린다. 헤헤, 혹시 알까, 제도와 싸우자니 인정이 울고 인정과 싸우자니 허망이 앞을 가린다. 이 시답지 않은 암초에 걸려 해방이 해탈로 기우는 것을

참새새끼들 다 날아가고 아침문안 개 짖는 일곱시 세수하고 밥 먹고 이 닦고 똥 싸고, 오늘의 일과 끝없는 성욕, 있는 허망과 다시 동침에 돌입한다. 저녁에 깨면 슬그머니 떠오르는 첫 별을 보리라.

―백인덕 「가을 아침의 몽상」 전문

이 시는 그의 몽환시 「미완의 꿈」과 같이 세기말을 살아가는 개인의 일상에 대한 담담한 관찰로 시작된다. 즉 세상은 시끄럽고, 살찐 참새들은 날아와 나의 아침잠을 깨우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의 시끄러움과는 무관한 채 자신만의 공간에 칩거한다. 그리고 그러한 화자의 생활은 “식욕 없는 가을. 성욕마저 일지 않는” 무료하고 생기 없는 삶의 연속이다. 하지만 현실과 격리된 채 지루하고 고적해 보이는 생활과는 달리 그의 상상의 세계는 매우 유쾌한 공상이 차지하고 있다. 즉 그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근본 이유는 무질서하고 타락한 밖의 세계에 대한 분노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백인덕은 특유의 익살로 버무려낸다. “각하, 온 강산이 미디어로 피폐되었으니 늙은 아낙으로부터 삼척의 어린것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성은 돼지가 파먹은 감자밭 꼴상사납사옵니다.”와 같은 구절은 극존칭의 어법을 통해 오히려 인간성이 말살된 현실의 모순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의 풍자는 현실을 혐오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비판의 목소리인 것이다. 이는 미디어로 피폐화된 세계, 물질만이 삶의 척도가 된 세계, 인간적 윤리와 가치가 타락한 세계, 제도화된 권력에 노예가 된 세기말의 공허한 삶에 대한 질시인 것이다.
그러나 “헤헤, 혹시 알까, 제도와 싸우자니 인정이 울고 인정과 싸우자니 허망이 앞을 가린다.”라는 익살 속에는 부조리한 삶을 적극적으로 개선할 수 없는 함정이 우리 삶 도처에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에 길들여지는 것이기에 화자는 세상을 그저 불만하고 불평하는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강제가 아닌 자유로운 선택의 차원으로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다. 이 인간적 삶 속에는 “허망과 다시 동침”하지만 “저녁에 깨면 슬그머니 떠오르는 첫 별을 보리라”는 기대와 희망이 남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기말의 비감한 지사’란 개인의 가치가 희생되고 집단과 조직의 구조 속에서 왜소화된 인간성을 부활시키고자하는 주체의 의지를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적을 공격하는 무기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무기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최대한의 방어와 대상에 대한 효과적 전복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변하지 않는다. 오늘의 시속에 드러난 웃음은 바로 적을 공격하는 가장 효과적 방식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해법이라 할 수 있다. 웃음은 날카로운 비수로, 때로는 부드럽고 완곡한 목소리로 부조리한 현실을 조롱하고 조소한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문제를 자신의 방식으로 파헤치고 설파하려는 시인들의 현실 응전인 것이다.
지금까지 90년대 후반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의 시 속에 드러난 웃음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자동화된 반복의 언어로,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러운 작위적 웃음으로, 실재를 밀어낸 환상적 농담으로, 또는 익살과 자기 풍자적 언어 유희로 우리의 삶의 모순과 질곡을 해쳐나가려 한다. 이 시대 웃음 뒤에는 언제나 세계에 대한 비판의 칼날이 있다. 그러나 그 칼날은 분명한 적이 사라진 시대, 헛것만이 판치는 시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통쾌한 웃음이라기보다는 공허하고 씁쓸한 웃음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는 오늘의 세상이 그만큼 절박하고 황폐해졌음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리라.
참다운 웃음은 경직되고 인위적 웃음이 아니라 인간의 피폐화된 삶에 새로운 활력과 재생의 의지를 부여해 주는 웃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건강한 웃음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의미있고 가치있는 세계로 변모시켜 놓는 것은 아닐까. 그때 웃음은 인간적 행복감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통쾌한 웃음이 되지 않을까.


강경희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현재 숭실대, 호서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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