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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기획/우리 시대 웃음의 의미-웹 애니메이션의 서사와 웃음/김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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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애니메이션의 서사와 웃음
김진량
벤처의 몰락과 함께 인터넷의 신화에서도 거품이 걷히는 것일까? 최근 <조선일보>에는 작가 김영하가 인터넷을 “시골 장터”에 비유했다는 기사가 실렸다(10월 22일. 21면). 시골 장터라는 표현은 한때나마 그가 인터넷에 주목했던 이유가 다른 무엇보다 수익성 여부였을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데, “모든 게 있다는 인터넷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선언이 인터넷의 가능성과 한계를 빼어나게 통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듯하다. 물론 그의 ‘모든 게’ 곧 ‘돈’일 것이라는 유추 하에서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오늘 김영하가 시골 장터의 “쓸쓸한 좌판”이라 절묘하게 비유한 인터넷의 웹 사이트를 뒤적거려 무슨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야 할 참이다. 물론 좌판을 기웃거리는 대가로 돈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운 좋으면 거저 얻을 수도 있고 눈치봐서 줍기도 할 작정이다. 큰돈 바라고 좌판에 나앉은 사람에게야 안된 노릇이지만, 때로는 구경꾼들이 가져갈 만한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 흐뭇해하는 이도 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웹 애니메이션도 대개는 거저다. 물론 회원 가입이라는 최소한의 절차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지만 나는 기왕이면 내 것처럼 퍼다 쓸 수 있는 곳이 좋다. 웹 애니메이션은 대개 플래시라는 전용 도구로 만든다. 모든 소프트웨어가 마찬가지이지만 플래시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만들어낸 결과물은 천차만별이다. 현재 <야후! 코리아> “플래시 애니메이션” 카테고리 아래에는 작품 제목 기준으로 60여 개의 카테고리와 40여 개의 사이트 목록이 뜬다. 야후!의 특성상 제목 카테고리 아래에는 최소 1개에서 많게는 20개 이상의 사이트가 들어있다. 이제 이들 가운데 몇 개를 골라 그들이 지닌 웃음의 수사학을 서사적 관점으로 풀어볼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소프트웨어 “플래시”를 살펴본다.
플래시: 기술 그 이상의 무엇
플래시는 간단히 말해 컴퓨터 그래픽 저작 도구이다.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에 그려놓은 그림을 읽어들여 편집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라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포토샵, 페인트샵 프로 따위와 마찬가지로 글자 이미지나 로고를 만들 수 있고 사진 이미지를 다룰 수 있다. 다만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이 점(pixel)이 아니라 곡선(bezier curve)이라는 점이 이 둘과 다르다. 비트맵이 아니라 이른바 벡터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플래시는 이미지 가장자리가 계단 꼴로 찌그러지는 현상을 막을 수 있어 축소, 확대와 상관없이 선명한 선과 색을 구현할 수 있다.
그래픽 도구로서 플래시는 특히 컴퓨터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데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다. 가령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이를 스캔한 다음 파일 속성을 벡터 형식으로 바꾼 뒤 플래시에서 불러들여 크기나 색상을 조정하고 연속된 프레임으로 만들어 재생하면 흔히 말하는 ‘만화 영화’가 된다. 애니메이션을 구현할 수 있는 그래픽 도구는 많이 있지만 플래시는 기능이나 사용 편의, 선호도 면에서 다른 모든 제품을 압도한다.
이 때문에 플래시는 흔히 웹 애니메이션 저작도구라 불린다. 다른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처리한 이미지도 대부분 웹 사이트 디자인에 활용할 수 있다. 단순히 웹에서 구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다면 모든 그래픽 프로그램 앞에 ‘웹’을 붙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플래시와 웹의 결합에서 우리는 소프트웨어로서 기능성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플래시가 가장 대중적인 애니메이션 저작도구로 인정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플래시는 무엇보다 웹 환경에 아주 어울린다. 어울린다기보다 효과적이라는 게 적절한 표현이겠다. 플래시로 만든 그림은 같은 선명도와 크기라도 파일 용량이 작다. 당연히 웹에서 빨리 뜬다. 또 플래시로 만든 이미지는 강력한 상호작용 기능을 구현할 수 있다. 눈앞에서 일방적으로 움직이기만 하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우스 조작에 반응한다. 상대적으로 배우기 쉽고 무궁무진한 응용 표현이 가능하며 손쉬운 음향 삽입 기능도 강점이다. 조금만 익히면 이름 없는 만화 애호가가 일약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뜰 수도 있다는 뜻이다.(약간 장난기가 있지만 “졸라맨”에서는 매 에피소드가 끝나면 스텝 명단이 죽 올라간다. 감독, 시나리오, 특수효과, 무술감독, 음향……. 각 항목 담당자 이름이 모조리 김득헌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폼나지 않는가?)
그래픽 저작도구로서 수많은 장점을 열거했지만 플래시와 웹의 만남을 의미심장하게 해주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플래시가 다른 무엇이 아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소프트웨어라는 사실이다. 애니메이션, 움직이는 만화 아닌가? 죽은 그림에 영혼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이 기술을 웹에서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사실이야말로 플래시를 단순한 그래픽 프로그램 이상의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애니메이션+인터넷=?
애니메이션 양식은 두 가지 이유에서 흥미롭다. 하나는 만화라는 장르가 발휘하는 주술과도 같은 매력, 다른 하나는 움직임을 부여함으로써 가능해진 표현력과 수용성의 확장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만화는 칸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칸과 칸을 옮겨가는 동안 그 이차원의 평면 이미지들은 매혹적인 서사와 면 배치로 우리 영혼을 빨아들인다. 이 몰입을 가능케 하는 힘을 스콧 맥클루드는 “단순화를 통한 전달 효과 확대”로 풀이한다(김낙호 옮김. 2002. 「만화의 이해」. 시공사. 38쪽). 만화가 사실화 이상의 흡인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 이른바 카툰 화법(畵法)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이와 달리 만화평론가 이재현은 “위반”의 쾌락으로 설명한 바 있다(이재현. 2000. 만화와 권력: 똥폼 잡는 권력들에게 고함,《디자인문화비평》. 02호. 100쪽). 만화를 둘러싼 주류 문화의 권력 관계를 찢어 틈새를 만들어내는 ‘위반의 체험’이야말로 만화의 힘이자 쾌락이라는 해석이다. 맥클루드의 화법이 외부 세계를 전제한 것이고 이재현이 말한 위반이 텍스트 내부의 수사법에 좌우될 수 있다면, 이 두 해석은 통합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만화는 분할된 공간(지면)의 연쇄 안에서 생략과 과장의 수사법으로 권력에 균열을 가하는 그림 양식이 된다.
만화 텍스트의 이차원성은 한계이자 가능성의 원천이다. 칸과 칸의 분할, 그 사이의 여백(gutter)에는 이른바 ‘완결성 연상’이라는 원리로 만화의 서사를 추진하는 힘이 숨어있다. 칸의 분할은 정지된 이미지에 시간과 동작을 부여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독자의 자발적인 상상력에 기댄 것이다. 그래서 만화는 어떤 매체보다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강력한 연대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재현이 말한 위반의 체험 역시 이 연대 또는 공모의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어떤가. 애니메이션은 만화의 분할된 공간을 시간성으로 대체한 양식이다. 공간적으로 병렬되어있던 수많은 칸이 동일한 공간에 연속으로 투사됨으로써 정지된 이미지는 텍스트 내부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움직인다는 것은 1초에 24장의 그림이 연속적으로 투사됨으로써 나타나는 동작 효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움직임에는 속도와 색채의 변화가 포함된다. 이 때문에 움직이는 그림으로서 애니메이션은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 또 다른 체계를 획득한다. 여기에 음향 효과와 문자 정보가 더해지면서 애니메이션의 의미 생산 체계는 더욱 확장된다. 이를 의미 수용 측면에서 보면 수용자가 향유할 수 있는 요소가 다양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움직이는 만화로서 애니메이션은 생략과 과장이라는 칸툰 화법(畵法)이 주는 강한 몰입성과 동작, 색채, 음향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복합 매체 효과가 결합함으로써 의미 생산과 수용에서 새로운 차원을 열어 보인다.
플래시는 이러한 애니메이션을 인터넷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애니메이션이 웹 콘텐츠로 창작 수용됨으로써 어떤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이는 웹과 문학적 상상력의 상관 관계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웹은 문학의 텍스트 구조뿐 아니라 상상력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이것은 웹이 통신 네트워크, 곧 다중이 참여하는 커뮤니케이션 공간이라는 사실과 관계된다. 웹에서 문학 창작과 수용은 웹의 수많은 가상 공동체 활동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웹은 컴퓨터와 컴퓨터 사이의 소통을 위해 조직된 체계이며 웹 사용자들은 이 기계적 소통을 빌어 다양한 정보 교환을 실현한다. 따라서 웹을 통한 정보 교환은 아무리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더라도 네트워크의 구성요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웹의 수많은 가상 공동체 활동이다. (포털 서비스, 검색 엔진, 동호회, 카페, 게시판, 심지어 개인 홈페이지까지 웹 커뮤니티로 볼 수 있다.) 웹에서 소설을 쓰고 읽는 것은 이들 공동체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교환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정보 교환은 웹에서 일종의 가상적 공간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 가상적 공간은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이자 개인의 상상력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개인의 두뇌 안에서 전개되던 사적인 상상 세계가 웹의 커뮤니케이션이 형성하는 가상의 공간에 현시된다. 예술적 상상이 벌어지는 두뇌(神)와 현실(物)의 관계는 컴퓨터 모니터와 현실이 맺는 관계와 같다. 문자와 종이 매체를 통해서만 표현하던 시대에는 상상세계를 두뇌 밖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그것은 두뇌 속의 상상(력)이었다. 그런데 비트로 전개되는 시대에는 상상은 영상화된다. 이제 인간의 두뇌는 사유의 기구가 아니라 영상하는 화면이 되는 것이다. 역으로 화면은 영상의 매체가 아니라 상상하는 두뇌가 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으로서 문학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상상력은 개인적 천재로서 상상력과는 다르다. 인쇄 시대의 문학 작품은 저자와 반영적이고 반성적인 관계를 이루는데, 이 관계를 통해 작품은 그의 사고를 구체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 지면은 단순히 글자가 기록된 종이라기보다 저자의 물질적 재현 또는 현존으로 비약한다. 그러나 웹의 문학 텍스트에는 단일 저자의 권위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상호관계가 반영된다. 이 반영은 문학적 창조력이긴 하나 완성된 결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미완의 과정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엄숙하기보다 유희적이고 심미적이기보다 쾌락적이다.
만화의 양식적 특성을 고려할 때 인터넷은 애니메이션에 보다 자유롭고 자극적인 ‘위반’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플래시는 이차원의 평면에 봉인된 이미지에 생명을 불어넣어 웹이라는 공간으로 이끌어내는 주술이다. 플래시의 주술에 걸린 이미지는 섬광처럼 번쩍인다. 칸에서 칸으로 고요히 미끄러지던 서사는 빠르게 명멸하는 프레임의 연쇄 안에서 통렬한 위반의 탈주를 감행한다.
웹 애니메이션의 서사와 웃음
웹 애니메이션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 이야기는 언어와 같은 또 다른 매체를 통해 전이될 수 있을 만큼 독립되어 있다.(채트먼은 이야기(story)의 전이 가능성이야말로 서사가 어떤 매체로부터도 독립된 구조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라고 말한다. (한용환 옮김. 1991. 「이야기와 담론」. 25쪽.)) 웹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그림과 음향과 문자로 이야기를 매개한다는 점에서 서사물이다. 그런데 서사적 관점에서 애니메이션의 복합 매체 특성은 이야기(story)보다 담론(discourse) 층위에 보다 뚜렷한 영향을 미친다. 움직이는 그림은 동작의 연쇄를 통해 최초의 상황에서 변화된 상태, 곧 사건의 시퀀스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지된 그림보다 스토리 구성의 자율성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지된 그림을 연속해 제시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이야기 된 사건이란 언어적 진술로 추상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에 동원된 그림은 언어적 진술을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구실이 본질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의 움직이는 그림은 ‘이야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구성하는 요소로 보아야 한다. 음향과 색채 효과, 카메라 기법 (물론 영화에서처럼 실제 카메라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점의 변화, 곧 초점화 양상을 말한다. 초점화는 서술자(누가 서술하는가), 초점자(누가 보는가), 초점화 대상(보여지는 것)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하기 전략의 다양성을 무기로 웹 애니메이션 서사는 이야기 소재와 주제, 해석의 맥락에서 소설이나 영화 등의 서사물과 구분되는 특성을 보인다.
웹 애니메이션이 이야기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주목할 것이 웃음의 전략이다. 사실 웃음은 이야기와 이야기하기 층위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이야기 층위에서 웃음은 사건의 배경 상황과 인물 성격의 충돌, 인물의 과장된 행동 등의 요소로 구성된다. 하지만 웹 애니메이션의 웃음은 이야기하기 층위의 장치들에 의해 보다 증폭된다. 사건 자체는 우습기보다 오히려 부조리한 특성을 보이지만 인물의 표정, 동작, 광고 문구를 살짝 바꿔놓은 문자 정보, 배경 음악을 포함한 음향 효과, 초점화 방식 등이 웃음을 유발한다.
웹 애니메이션의 서사는 웃음의 전략이 이야기와 이야기하기라는 서사의 두 요소 가운데 어느 쪽으로 더 치우쳐 발생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특성이 달라진다. 주로 인물의 행동과 상황 설정을 통해 웃음을 유발할 경우 이야기 층위에서 웃음 전략이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마시마로>). 이와 달리 이야기는 부조리한 상황을 제시하면서 담론 층위에서 다양한 요소를 제시하는 <홍스 구락부>의 몇몇 에피소드는 이야기하기 쪽에 웃음 전략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사이에 <졸라맨>을 놓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서사의 두 층위에 동원하는 전략 요소들은 웹 애니메이션이 체계화하고 있는 문화적 약호들이며 이를 통해 텍스트를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 해석할 수 있다.
<마시마로>
웹 애니메이션 텍스트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이른바 ‘엽기토끼’라는 캐릭터로 잘 알려진 <마시마로>이다. 김재인이 2000년에 발표한 7개의 <마시마로> 에피소드는 웹 애니메이션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 폭발적 매력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마시마로>는 웹 애니메이션을 돈 되는 콘텐츠 상품의 범주로 굳혀놓았다. 엽기토끼는 캐릭터 상품으로도 개발되어 불티나게 팔려나갔을 뿐 아니라 이후 캐릭터 개발을 목적으로 웹 애니메이션을 집단 제작하는 방식이 일반화했다.
앞에서 간단히 말했듯이 <마시마로>는 이야기 층위에서 특이한 웃음의 책략을 구사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외적 상황과 중심 인물 사이에 설정된 힘의 불균형이 통념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해소되는 데서 웃음이 발생하는 방법이다. <마시마로>의 두 번째 에피소드 “피크닉”은 이 애니메이션이 사람들을 웃기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1) 곰 부자가 소풍을 와 과일을 맛있게 먹는다.([그림 1])
(2) 마시마로가 다가와 거두절미하고 곰 부자의 과일을 제것처럼 집어먹는다.([그림 2])
(3) 아빠 곰이 가라고 하지만 무시하는 마시마로. 결국 아빠 곰이 도끼를 꺼내든다.([그림 3])
(4) 마시마로가 먹던 과일을 팽개치고 가래침을 뱉더니 병을 꺼내들고 제 머리를 쳐 깨부순다. 한 개, 두 개...([그림 4], [그림 5], [그림 6])
(5) 아빠 곰이 놀라 쳐들었던 도끼로 과일을 깎아 마시마로에게 권한다.([그림 7])
[그림 6]
(6)[그림 1]
[그림 5]
[그림 8]
[그림 3]
[그림 7]
[그림 4]
마시마로는 떠나고 곰 부자는 빈 바구니를 보며 운다.([그림 8])
[그림 2]
사건 배열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덩치 큰 곰 부자와 작고 힘 없는 (동물이라 흔히 믿고 있는) 토끼의 관계에 전제되어 있는 힘의 불균형에서 이 에피소드의 웃음은 시작된다. 토끼가 허락 없이 곰의 과일에 손을 댔을 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결과는 곰이 너그럽게 과일 한두 개를 토끼에게 양보하거나 토끼가 늘씬하게 얻어맞는 상황이다. 우리의 상식으로 대개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커보이는 것이, 그림에 보이는 곰 부자는 먹을 것만큼은 남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으리라 싶게 덩치가 크다. [그림 3]까지만 해도 사건은 예상대로 진행되는 듯하다. 그러나 [그림 4]부터 상황은 급반전한다. 토끼가 다부지게 침을 뱉어 던지고는 병을 꺼내 머리로 깨기 시작한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토끼의 반격에 곰은 비참할 만큼 쉽게 기가 꺾이고 만다. 결국 토끼는 과일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불쌍한 곰 부자의 소풍은 악몽으로 바뀐다.
이야기 층위에서 사건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토끼와 곰의 행위 또한 웃음을 유발한다. 곰이 토끼를 위협하는 방식은 손짓과 말(“가!”)->먹던 바나나 던지기->도끼 꺼내들기로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데, 처음부터 과일을 함께 먹을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 외에도 토끼를 배제하는 방식이 대단히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충돌을 예고한다. ‘도끼’라는 기표는 일차적으로 “장작을 패는 도구”라는 기의를 지니겠지만 현재 맥락에서는 “위협의 도구”로 치환되며, 이는 동시에 위협의 도구로서 도끼에 환유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폭력배, 조직, 서열화된 권력 등의 의미 계열을 소환한다. 아들까지 대동하고 소풍을 나온 곰은 일상적인 평화를 애호하는 소시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과일 한 조각도 이웃과 나눌 여유가 없을 만큼 인색하며 아주 작은 기득권을 지키는 데 도끼를 꺼내 들 만큼 무자비하다.
하지만 곰과 토끼가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토끼 역시 처음부터 상대의 양해를 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곰의 폭력에 대응해 의미적으로 동일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토끼가 보여준 ‘병 깨기’ 또한 ‘병’이라는 기표의 일차적 맥락을 이탈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 계열을 환기하고 있다. 도끼가 조직화된 폭력의 기표라면 ‘병 깨기’는 폭력의 방향이 일차적으로 자신을 향하는 “자해 공갈”로 해석된다. 이것은 같은 폭력 계열이지만 곰과 토끼에게 전제된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차이여서 위기에 몰린 약자의 자포자기적 대응 방식으로 읽힌다.
두 인물의 행위가 유발하는 웃음은 여기서 비롯된다. 토끼가 곰과 똑같이 도끼를 휘두른다면 상황은 보다 진지한 선악의 대결 국면이 되고 만다. 하지만 제 머리로 병을 깨는 것은 의외의 대응이라는 놀라움과 함께 애처로움과 같은 정서적 호응를 가능케 한다. 더구나 곰이 그 모습에 기절할 듯 놀라는 모습은 의외로 토끼의 전략이 곰에게 내재한 소시민성을 폭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시마로>의 나머지 에피소드 역시 대개는 표면적으로 거대하고 강력해 보이는 대상에 내재한 허점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를 종합하면 <마시마로> 서사의 웃음 전략은 일상성의 폭력적 전복을 통해 보다 각성된 세계 인식을 시도하는 것이라 하겠다.
<마시마로>가 이야기 요소에 웃음 전략이 집중되었다는 것은 인물, 곧 캐릭터의 특성에 서사 의존도가 크다는 의미이다. 위 그림에서 보듯 시점 이동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점, 효과 음 이외에 음향 효과나 문자 정보 사용이 상대적으로 적은 점 등도 이야기하기 차원의 서사적 요소가 약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 대신 이미 말했듯이 마시마로는 인형이나 캐릭터 이미지 판매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홍스 구락부>
“홍스 구락부”는 사실 웹 애니메이션 제목이 아니라 제작팀 이름으로 봐야 할 듯하다. 그림을 그리는 조문홍이 자신의 이름자 가운데 하나와 ‘클럽(club)’을 합쳐 작명한 이 명칭은 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활동하던 동아리 이름이었으며 현재는 같은 이름으로 웹 커뮤니티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대개 웹 커뮤니티“鴻之俱樂部”(http://www.hongsclub.co.kr/)를 통해 발표된다. 홍지구락부는 이 사이트에서 제공하고 있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코믹 무비(comic movie)” “시에프 패러디(CF parody)” “시에프 플래시(CF flash)”로 구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코믹 무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 코믹 무비는 각 에피소드마다 제목이 있지만 흔히 “홍스 구락부”로 통칭되므로 여기서도 이를 텍스트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홍스 구락부>는 <마시마로>보다 늦게 만들기 시작했지만 현재도 꾸준히 제작된다는 점에서 한결 시의성 있는 텍스트이다. <마시마로>는 캐릭터 사업에 초점을 맞추면서 애니메이션 제작은 중지되고 말았지만 <홍스 구락부>는 애니메이션 양식을 통해 나름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홍스 구락부>가 애니메이션으로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은 애니메이션 고유의 매체 특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시마로>와 달리 움직이는 그림 효과는 물론 문자 정보, 음성, 음향, 배경 음악, 다양한 시점 이동 등에서 통합 매체 요소를 최대한 동원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을 통해 <홍스 구락부>의 각 에피소드는 수용자와 접촉할 수 있는 접점을 다양하게 확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차로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가 많다는 면에서 ‘재미’를 높일 뿐 아니라 텍스트가 약호화하고 있는 지시체계가 다양하다는 면에서 중층적 맥락 읽기를 가능하게 만든다.
<홍스 구락부>의 에피소드 가운데 “교실 이데아”를 통해 지금까지 간략히 설명한 사실을 확인해보자. “교실 이데아”의 사건 배열 구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2학년 1반 교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학생, ‘똥침’ 놓기 장난치는 학생, 잠자는 학생, 그 와중에 책을 거꾸로 들고 공부하는 학생 등으로 시끌벅적하다.([그림 1])
(2) 문이 열리고 악명 높은 체육선생(의자왕)이 등장하자 교실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해진다.([그림 2], [그림 3])
(3) 체육선생이 ‘주번’ 나오라고 소리친다.([그림 4])
(4) 한 학생이 나간다.([그림 5])
(5) 체육선생의 무차별 구타로 학생이 쓰러진다.([그림 6], [그림 7])
(6) 그때 교실문이 열리며 한 학생이 선생님을 부른다.([그림 8])
(7) 새로 들어온 학생이 자신이 ‘주번’이라고 말하자 선생은 깜짝 놀란다.([그림 9], [그림 10])
[그림 9]
[그림 6]
(8) 맞은 학생은 ‘9번’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림 11],
[그림 12])
[그림 5]
[그림 10]
[그림 7]
[그림 2]
[그림 12]
[그림 8 ]
[그림 11]
[그림 4]
[그림 3]
[그림 1]
이 이야기를 보고 (또는 듣고) 웃게 되는 것은 우선 맞은 학생(점백이)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주번’을 ‘9번’으로 듣고 나갔다가 이유 없이 매타작을 당하는 상황은 일반적인 바보 이야기의 웃음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사오정 시리즈”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주번’을 ‘9번’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체육선생(의자왕)이라는 압도적 폭력성 앞에서 ‘9번’이 선생 앞에 불려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합리적인 판단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9번’뿐 아니라 나머지 학생들이 전혀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발생하는 웃음은 단순히 어리석은 행동 때문이 아니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나오는 실소이기 쉽다.
교사가 이유 없이 (우리는 아직 ‘의자왕’이 왜 ‘주번’을 불렀는지 모른다. 교실이 시끄러워서일 수도 있고 첫 시간이라 이른바 ‘군기’를 잡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그냥 기분이 나빠서일 수도 있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학생을 구타해 입에 거품을 물도록 만드는 상황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보고 웃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정할 수는 있다는 표현이다. 폭력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학교마다 한 두 명 무자비한 폭력을 훈육으로 오해하는 교사가 있게 마련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결국 <홍스 구락부>의 이야기 층위에 작동하는 웃음 전략은 배경 상황과 인물의 갈등 또는 인물의 특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야기 서술자와 수용자가 같은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야기를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 그런 면에서 이야기 층위의 웃음 전략은 간접적인 것이다.
이 부조리한 이야기가 웃음을 유발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이야기하기 차원에서 동원된 요소들 때문이다. 먼저 <홍스 구락부>의 에피소드는 문자 정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여기서 말하는 문자 정보란 인물의 대사 이외에 화면에 문자로 표현된 정보를 가리킨다. 먼저 이 에피소드의 첫 화면은 “이 만화는 다소 폭력적이기 때문에 어린이나 노약자는 절대 한 번만 보시오.”라는 경고로 시작한다. 이 경고는 성인 비디오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경고 메시지를 흉내낸 것이지만 “절대”(부정)와 “한 번만 보시오”(긍정)가 통상적인 호응 규칙을 위반함으로써 경고라기보다 오히려 부추긴다는 느낌을 준다. 다음으로 체육선생이 들어오자 교실이 물을 뿌린 듯 조용해지는 상황은 음향효과만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음에도 “졸라 조용”이라는 문자 정보를 추가로 제시한다([그림 3]). “졸라”는 청소년들이 ‘무척’ ‘대단히’ 정도의 뜻으로 흔히 사용하는 비속어인데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서술자와 수용자의 눈높이를 맞춰주는 구실을 한다. 이를 통해 수용자의 서술자를 동일시함으로써 이야기 몰입도를 높일 수 있다. 이밖에도 “공부”라고 쓴 머리띠, 칠판에 쓰인 낙서, 화살표로 점백이를 가리키며 쓰인 “찔리고 있음”, 선생의 체육복 등에 쓰인 “ADIDAKS"(상표 이름) 등은 모두 익숙한 지시체계들을 새로운 맥락에 끌어들임으로써 이 에피소드가 다루고 있는 청소년들의 일상적 삶과 욕망을 약호화하고 있다.
이야기하기 층위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체육선생이 학생을 구타하는 모습을 격투 게임 화면처럼 처리한 부분이다([그림 6], [그림 7]). 화면 하단에 ‘에너지 막대’를 그려넣는 것으로 간단히 처리한 이 장면은 구타당하는 학생의 고통을 시각화하는 효과와 함께 교사와 학생 사이의 극단적 대립 양상을 지시하기도 한다. 대립이라는 표현은 힘의 방향이 교사에서 학생으로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교사가 지닌 압도적 힘이 교육에서 학생을 철저히 배제하는 양상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것이 격투 게임 상황인 이상 학생에게 있어서도 이 순간만은 교사가 선생 또는 스승의 자리에서 배제된다. 둘 사이에는 이제 죽느냐 죽이느냐의 적대적 대립 관계만 존재한다. ‘에너지 막대’가 닳아가는 모습으로 간단히 표현했지만 이 부분은 웹 애니메이션의 극대화된 서사 전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 13]
예시한 에피소드의 이야기는 구타당한 학생이 자신의 입으로 “9번이요!”를 외치는 것으로 끝난다([그림 12]). 이때 피사체(점백이)는 화면을 가득 채운 크기에서 소용돌이치는 모습으로 점점 작아지면서 흐려지고 이야기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장면이 서서히 나타난다. 영화에서 말하는 디졸브 방식의 장면 전환이다. <홍스 구락부>에는 영화와 같은 카메라 효과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클로즈 업과 롱 숏의 교체, 시점의 빠른 이동, 앞에서 말한 디졸브 효과 따위가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런 카메라 효과는 이야기하기의 한 요소로서 초점화 방식을 특징짓는다. 초점화를 서술자, 초점자, 초점화 대상의 관계 양상으로 볼 때 <홍스 구락부>의 초점화 방법은 외부적으로 관찰 가능한 것만 서술하는 외적 초점화가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그림 3]과 [그림 4] 사이에서 시점이 서술자에서 체육선생으로, 다시 머리띠 학생으로 이동하면서 화면에 체육선생, 머리띠 학생, 다시 체육선생의 얼굴이 번갈아 클로즈업되는 장면에서는 내적 초점화가 이루어진다. 특히 머리띠 학생이 머리 속에 체육선생이 의자로 학생을 내려치는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은 내적 초점화의 구체적 사례이다([그림 13]). 뒤이어 크게 확대된 체육선생의 얼굴([그림 4])은 머리띠 학생의 눈에 잡힌 체육선생인데, 그 어떤 화면에서보다 무섭게 그려져있다.(이것을 문장으로 서술한다면 “‘머리띠 학생’은 주번 나오라고 소리치는 체육선생의 얼굴이 호랑이처럼 보였다.” 정도가 될 것이다.) 코핸과 샤이어스에 따르면 초점화는 “스토리와 관계가 있는 독자의 위치, 즉 언어에 의해 생성됨으로 해서 서술자의 ‘시점’을 뛰어넘는 위치를 그 텍스트 안에 명시해주는 일(임병권, 이호 옮김. 1997. 141쪽)”을 한다. 이를 적용하면 위 에피소드에서 시점 이동과 클로즈 업은 머리띠 학생의 시점에 독자의 시선을 일치시킴으로써 독자를 이야기 속에 끌어들이는 구실을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홍스 구락부> 서사의 웃음 전략은 부조리한 이야기와 통합 매체 효과를 결합함으로써 수용의 접점이 다양해지는 것을 기본 원리로 한다. 특히 통합 매체 요소들은 서사의 이야기하기 측면을 강화함으로써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유쾌한, 또는 신랄한 농담하기로 전환한다. 실제로 <홍스 구락부>의 몇몇 에피소드는 “삼류 유머”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제작자들 스스로 웹 애니메이션의 담론적 기능을 자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사회 문화적 층위에서 <홍스 구락부>는 일종의 주변부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홍스 구락부>가 이야기하기를 조직하는 방법과 관계가 깊다. 특히 텔레비전 만화영화, 뉴스, 광고, 가요 등의 대중문화 양식이나 버스 노선표, 상표 등 일상 소재와 관련된 의미 체계를 약호로 끌어들임으로써 전통 소설이나 영화의 서사 문법과 구별된다. 이야기하기의 주변성은 이야기 층위에도 영향을 미쳐 주로 어린 아이나 학생, 청소년, 깡패를 중심 인물로 등장시키며, 일상 속에서 흔히 직면하지만 이야기의 등장인물들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함을 재현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홍스 구락부> 서사의 웃음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서술자와 수용자의 공동 경험을 전제로 수용자와 서술자 자신을 동시에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는 자기 파괴적 양상을 보인다. 한가지 주의할 것은 이러한 파괴는 외부 세계나 자신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합리적이거나 혁명적이지는 않더라도 현실을 수용하고 살아내는 한 가지 방법이 분명하다.
웹 애니메이션의 욕망과 탈주
<마시마로>는 발표 당시 인터넷에 열풍처럼 퍼져가던 ‘엽기’라는 키워드와 어울리며 상승작용을 일으켜 ‘엽기토끼’를 스타로 만들었다. 엽기라는 낱말을 새삼스레 사전 정의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2000년 당시 ‘엽기’는 역겨움과 피비린내가 썰렁한 코미디와 뒤섞여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풍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1998년, 한국 인터넷 역사에 길이 남을 게 분명한 웹 사이트 하나가 문을 열었다. 이름하여 <딴지일보>. 아는 사람은 알지만 이 신문의 모토는 장황하면서도 명쾌하다. 한 번 옮겨 보자면, “본지는 한국농담을 능가하며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이며, 인류의 원초적 본능인 먹고 싸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우끼고 자빠진 각종 사회 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 냉소적이면서도 자의식에 가득 찬 이 선언이야말로 인터넷 엽기의 원조일지 모르겠다.) 피와 웃음이 뒤섞인 경쾌한 공포, 그것이 바로 엽기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언뜻 비정상적 심리의 표현인 듯도 하지만 그렇게 속단할 수만은 없는 속성을 지녔다. 엽기에 사회를 향한 공격 심리가 전혀 없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피와 함께 코미디, 가벼움, 경쾌함을 중요한 요소로 선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엽기는 폭력적 심리 상태라기보다 일탈적 상상력이라 보는 게 옳다.
엽기로 표현되는 일탈적 상상력이 가능한 토대는 가상공간의 익명성이다. 가상공간의 익명성은 사용자들이 자신에 관해 제시하는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런데 가상공간의 익명성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사용자들에 관한 정보의 부재는 사용자의 존재를 감추는 것이지만 필요에 따라 실제 공간에서보다 뚜렷이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다. 가령 실제로는 타인을 만나는 게 두려울 만큼 소심함 사람도 가상공간에서는 누구보다 날카롭고 공격적인 논객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 가상 공간에 등장한 논객은 새로운 ‘나’라고 할 만하다. 이 새로운 나가 사용하는 것이 일탈의 수사학이다. 일탈의 수사학은 보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어법을 사용한다. 논리나 개연성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게시판에 제목만으로 등록된 수많은 문서 가운데 하나일 뿐인 나의 존재를 일깨우기 위해 장황한 논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 잠깐 소개했던 <딴지일보>의 선언을 기억해보자. 이 선언은 이중의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 논리의 한 축은 철저한 자기 멸시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울 것 없는 비판정신이다. 이 신문의 비판은 그야말로 ‘처절한 똥침’이라는 표현에 걸맞도록 저질스럽고 안하무인이며 무논리적이다. 하지만 ‘각종 사회 비리’ 가운데 딴지의 ‘똥침’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같은 무소 불위의 비판력은 말할 것도 없이 철저한 자기 멸시에서 나온다. 더 이상 저질스러워질 수 없는 저질, 언론을 빙자하면서 스스로 사이비라 자처하는 뻔뻔스러움이 역설적이게도 딴지의 순수성을 보증하는 징표들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저 선언문을 가로지르는 수사법은 웹 애니메이션의 웃음과 상통한다. 이것은 순수성의 다른 이름이자 외로운 비판정신이 차용한 수사법이라 할 만하다. 이 수사법은 디지털 세대, 네트 세대의 감수성 또는 그 경박함의 미학을 빛나게 과시한다. 현실 사회는 온라인 사이버 공간에서 지리멸렬하고 그 통렬함은 곧 웹 애니메이션의 수사적 효과로 전이한다. 따라서 웹 애니메이션의 웃음은 가상 공간이 제공하는 대리 충족의 쾌감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 쾌감이 가장공간의 익명성이 담보해주는 폭력적 쾌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웹 애니메이션의 웃음의 수사법은 곧 일탈의 수사법이고 탈맥락화의 수사법이다
김진량
․≪문학과창작≫ 평론, <한국기독공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저서 「인터넷, 게시판 그리고 판타지소설」
․현재 한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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