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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기획/우리 시대 웃음의 의미- 시트콤의 웃음/박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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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2,981회 작성일 04-01-0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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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의 웃음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중심으로―
박부식



들어가며
웃음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다. 모든 것이 웃음의 대상이 되고 그것은 자유로움과 개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보다는 가볍게 날리는 미소가 더 날카롭게 각인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에 반해 진지함은 고리타분하게 여겨지고 가벼운 웃음은 이제 소위 ‘쿨’한 삶의 필수적인 덕목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웃는 것이 좀 허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허망함이 순간적이라면 그 웃음의 사이를 묶어주는 것은 역시 웃으며 넘기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강제하는 이상한 이데올로기들이다. 우리는 웃으면서 울음을 삼키기고 하고 그렇게 삼켜진 울음은 고름처럼 곪아 들어가기도 한다. 시트콤<프렌즈>는 이런 고름들을 찬란하게 만든다. 더욱 빛나게 만들기도 하고 그래서 때때로 감동적일 때도 있다. 미국의 성인 시트콤인 <프렌즈>에서 다루어지는 사랑과 성에 관한 민감한 문제들, 특히 현대인들의 사랑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욕구에 대한 대리만족과 그와 관련된 문제들을 비틀어낸다. 시트콤에 뿌려지는 방청객의 웃음은 시청자들에게 어디에서 웃어야 하며 무엇을 희화화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지목하지만 본격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웃음을 통해 스스로를 조롱하거나 타자화시키는 웃음에 가깝다. 음습하게 내면화된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비릿함들을 까뒤집어놓고 한바탕 웃음으로써 스쳐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시트콤의 웃음은 부담이 없으며 시청자들을 시트콤의 주인공이자 관찰자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시트콤의 주인공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적당히 세속화되고 자기 중심적인 유치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런 캐릭터들은 대중들에게 전혀 부담 없이 다가가서 대중들을 무장해제시키고 만족감을 선사한다. 대중은 좀 모자라고 덜떨어져 보이는 이들 아이 같은 어른들에게서 동질감에 기반한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반영웅적 캐릭터들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것처럼 보이는 젊은 뉴요커들의 상실감을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그들의 그런 결점들은 어쩌면 그들 모두의 것이며 우리들의 것이기도 해서 우습지만 뼈있는 농담처럼 들리게 하는 것이다.

<프렌즈>의 이야기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프렌즈>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모두 6명이다. 어쩌면 많을 수도 있는 캐릭터들을 항상 2개 내지 3개의 에피소드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에피소드들간의 은유나 대조를 통해 웃음을 유발시킨다. 물론 그 캐릭터들은 모두 매우 특징적이며 성격은 어쩌면 평면적이다 싶으리만큼 명확하다. 공룡학자인 로스(데이빗 쉼머), 소심한 회사원 챈들러(매튜 페리), 먹보에 여자만 밝히는 3류 배우 조이(매트 르 블랑)와 사랑스럽지만 변덕이 심한 쇼핑광 레이첼(제니퍼 애니스톤), 지고는 못사는 완고한 성격의 요리사 모니카(커트니 콕스), 채식주의자에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마사지사 피비(리사 쿠드로)가 그들이다. 이들은 또 직간접적인 관계들로 서로 엮여져 있었는데 레이첼은 모니카와 친구 사이이고, 로스는 모니카의 친오빠이다. 그리고 챈들러는 로스와 대학동창이고 조이와 피비는 그들의 친구들이다. 그들은 모두 뉴욕의 보통 젊은이들로 설정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애초부터 <프렌즈>의 작가들은 그들이 노닥거렸던 커피전문점의 잡담과 수다들을 옮겨오고자 했다고 한다. 센트럴 퍼크(central perk)라는 단골 커피가게에 모여 앉아 노닥거리면서 친구들의 애정문제를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진지하게 고민하고 함께 해결하려고 하며 상담해주고 어떨 때는 자신을 희생해 친구의 기분을 배려해주기도 한다. 모니카는 요리로, 챈들러는 애교 넘치는 몸짓과 말로, 피비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가사를 읋조리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사실 로스와 레이첼은 친구들을 위로해 주기보다는 3번의 이혼 때문에, 그리고 번번히 복잡한 애정전선 때문에 괴로워하며 위로를 받는 쪽들이다. 아마 조이나 피비 같은 엉뚱한 캐릭터가 없었다면 <프렌즈>는 매우 진지한 드라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초기의 6명 외의 다른 이성친구들과의 문제들과 에피소드들을 진행시켜왔다면 시리즈 중간 부분, 그러니까 로스가 에밀리와 사귀면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다룬 시리즈 5에서부터는 <프렌즈> 내의 남녀간의 문제가 더 부각된다. 그 전에 있었던 시리즈들이 각자가 외부인들과 사귀면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그들끼리 서로의 비밀을 시시덕거리고 비판하거나 가슴 아파하는 과정이었다면 시리즈 6부터는 그들간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어쩌면 이건 그들이 점점 어른이 되어가고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순간적이고 즉흥적인 사랑보다는 그들이 진정으로 마음 두고 있는 대상에 대해 스스로 솔직해지는 순간들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특히 그래서 챈들러와 모니카와의 사랑이나 조이가 레이첼의 아기를 위해 레이첼에게 가지게 되었던 사랑의 감정이 매우 진지해 보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비밀은 없다. 시리즈 6 정도까지 그들은 항상 ‘센트럴 퍼크’에 모여서 커피나 시켜먹으면서 무수한 잡담과 수다로 서로간의 애정문제와 사소한 시비거리를 낱낱이 가리곤 했다. 물론 다시 사랑게임은 계속되고 실수도 이어진다.
우리 시대의 웃음은 TV에서 종합되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염시킨다. 시트콤이 다른 일일 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와 다른 점은 우선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이 매우 제한되어 있으며 캐릭터 구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이슈가 되는 사회적 문제를 사소하게(?) 건드리며 희화화시킨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러티브 전개방식의 전형성을 따르되 쉽사리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돌발적인 충격들을 쉴새 없이 쏟아내는 것이 <프렌즈>의 장점이다. 그래서 시트콤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으로 시청자들을 브라운관 앞에서 잡아둔다. <프렌즈>가 시청대상으로 삼는 타겟은 남녀의 애정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젊은이들이며, 그래서 이들의 사사로운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변치 않는 이성애주의자들의 애정전선의 일진일퇴를 코믹하게 그리는 데 집중한다.
현재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는 이런 시트콤의 특성을 정형화시킨 가장 위대한 시트콤일지도 모른다. 뉴욕의 독신 남녀 6명의 각자의 연예담과 그들 사이의 우정이 가장 미국적인 방식으로 보여지는 시트콤은 94년에 시작해서 벌써 8년째를 맞이하며 가장 인기 있는 시트콤의 전설을 써나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케이블 TV인 동아방송을 통해 방송되면서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중인데 벌써부터 이번 9번째 시리즈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10번째 시리즈가 만들어질 거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이렇게 시트콤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데는 시트콤 특유의 형식 즉 단막극 형식의, 주위에서 한번쯤 만나봤을 법한 일상적 캐릭터들이 사랑이라는 가장 민감하면서도 대중성 있는 주제들 즉 사랑이야기를 끝없이 변주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시트콤의 사회사
이러한 웃음이 담고 있는 의미들의 변화를 따라가 보는 것은 사회사적 변화와 어울려 더욱 흥미롭다. 한국사회가 언제나 미국문화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는 것은 언제나 영화와 TV를 통해서였다. 아메리칸 드림은 어떤 때는 미국을 가장 의롭고 자유가 넘치는 개방적인 천국으로 묘사되었다가 또 다른 측면에서는 가장 위험하고 혼란스런 나라로 묘사되기도 한다. 로맨틱 코미디나 시트콤은 전자의 환상을 강조하며 갱스터 범죄 느와르 영화는 후자의 위험성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측면은 동전의 양면처럼 미국이 가진 두 가지 다른 이미지일 것이다.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는 영상 이미지의 ‘환상적 현실성’을 강조하며 뉴욕이라는 세계최대 도시에 사는 젊은이들의 삶의 작은 고민들을 재치 있는 말투와 에피소드들을 통해 보여준다. 지금 제작되고 있는 시리즈 9는 회복된 인기와 더불어 6명의 주인공들 각각의 몸값을 100만불을 상회하도록 했으며 평균시청인구도 미국 내에서만 26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에서도 케이블 TV라는 매우 제한된 방송 접촉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매니아들이 미국의 문화와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리고 <프렌즈>는 한국적 상황에서 특별히 한번 더 문화적 번역을 거치면서 ‘낯선 친근감’을 주는 시트콤이 된다. 어쩌면 문화적 이질감이 느껴질 법한 문제들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이런 헐리우드의 문화제국주의적 영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화적 확산이 비단 케이블 TV라는 매우 제한된 접촉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문화적 이질감이 극복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문화환경이 미국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피자 헛과 스타벅스가 우리에게도 이미 친숙하기 때문이다.
시트콤의 가벼운 웃음들은 분명 모던의 분열양상과 포스트모던의 현기증나는 시대적 변화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90년대 들어 불기 시작한 ‘신세대론’은 이런 과거 이데올로기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문화적 담론의 형성기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 후반 들어 포스트모던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본격적으로 이데올로기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가벼운 웃음의 이데올로기가 넘실대기 시작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90년대 초반 SBS라는 상업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민영방송은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순풍산부인과’로 자리를 잡았고 그 후 타 방송사의 경쟁적인 시트콤 제작으로 시트콤이 저녁 시간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시트콤은 현실을 풍자하기보다는 희화화하는 가학적 웃음에 집단적 열광을 바치고 있다. 그래서 ‘현실을 제대로 모른다’는 시트콤의 비판은 시트콤이 ‘현실적인 인상’을 주기보다는 항상 환상을 증폭시켜 현실로 되돌아오는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로 돌아오는 접점들을 놓치게 한다. 예를 들어 웃음을 일으키는 대상을 정할 때 폭넓은 관계들의 세밀한 묘사와 감각적인 대사들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일부계층의 제한된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트콤이 캐릭터 묘사에 치중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가끔 소외받는 대상에 대해 가해지는 가학적 웃음은 흔히 시트콤의 폐해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래서 <프렌즈>는 뉴욕에 살지만 팍팍한 삶에 지친 그러나 사랑에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보통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주로 펼친다.

상호텍스트적 웃음의 이데올로기
시트콤이 대중적이면서도 사실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웃음을 자아내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주로 이런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박관념에도 하나의 이유가 걸쳐져 있는 것 같다.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은 다양해졌지만 이데올로기 외적 공간은 그리 넓게 펼쳐져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에서 주인공이 자주 내뱉는 말은 “도대체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너의 이데올로기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이었다. 이는 전형적으로 이데올로기가 개인적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는 미시권력적 차원에 대한 물음이었고 그런 물음은 집단적 차원에서 배제되는 다양한 성차와 문화적 다름의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의문들이었다. 시트콤은 바로 그런 다양한 개인적 이데올로기들을 형식화해서 드러내는 가장 적합한 장르일 것이다.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그렇다고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는 긴장관계들을 대화와 극적인 상황들을 중심으로 캐릭터를 배치함으로써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미장센은 매우 단순하며 마치 연극처럼 무대는 제4의 면을 향하여 열려있는 구조이며 시청자는 그 면을 통해서만 바라보고 함께 반응하며 그 주기적인 방영시간과 일주일이라는 시간적 흐름을 통해 캐릭터들의 삶의 구조와 시청자 자신의 삶의 주기를 일치시켜 나가는 것이다. 일상적 시간성의 반복적 구조와 주기성은 시트콤이 살아 움직이며 진화하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게 되는 이유이다.
<프렌즈>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94년 솜털이 보송보송한 젊은이들로 시작해서 사랑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듯 이성애를 갈구하며 때론 동성애에 당황하며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이제 시리즈 8에서 그들은 모두 서른 살의 생일을 맞이했고 이제 하나 둘 아이를 가지며 이제 더 이상 ‘키덜트(kidult)’가 아닌 성인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MBC의 시트콤 <연인들>도 마찬가지로 어쩌면 우연, 어쩌면 필연처럼 <프렌즈>가 걷던 방식을 그대로 밟아나가고 있다. 조이․챈들러․로스처럼 박상면․공형진․김국진이 남자 캐릭터들을 연기하고, 레이첼․모니카․피비처럼 김윤성․김혜영․진희경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간간이 등장하는 친구들이 하나의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것도 비슷하고 특히 피비의 남동생이 등장해서 임신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꾸미는 방식은 매우 비슷하다. 그렇다고 <연인들>이 <프렌즈>를 표절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시트콤은 제작방식 자체가 ‘심오하게도’ 끊임없이 상호텍스트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에피소드 각각이 에피소드 내외적으로 참조하는 여러 다른 문화적 텍스트들 예를 들면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영화이며 에피소드들 상호간의 참조와 변형 그리고 스타이미지를 이용한 새로운 이미지놀이 같은 형식이 시트콤의 주된 제작방식이기 때문이다. 기존 이미지와 겹쳐지면서도 뒤틀려 다가오는 이 애매모호함이 바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시트콤은 그런 가벼운 이미지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폐기시킬 수 있는 그런 상업적 실험의 공간이다.
<프렌즈>에 등장했던 스타들의 이름을 열거해보면 헬렌 헌트, 브래드 피트, 브루스 윌리스, 리즈 위더스푼, 브룩 쉴즈, 숀 펜, 위노나 라이더, 빌리 크리스털, 수잔 서랜든, 로빈 윌리암스, 장 클로드 반담, 이사벨라 롯셀리니, 랄프 로렌, 제이 리노, 사라 퍼거슨, 스팅의 아내 트루디 등 주로 일급스타들이 한번쯤은 모두 얼굴을 내밀었다. 이들은 주로 자신들이 이제까지 쌓아왔던 이미지와 반대되거나 그 이미지를 이용한 교묘한 농담 같은 캐릭터로 등장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브래드 피트로 그는 <프렌즈>의 헤로인인 레이첼(제니퍼 애니스톤)의 실제 남편이지만 극중에서는 레이첼에게 상처받은 못난이로 등장해 웃음을 유발시킨다. 브래드 피트는 학창시절 레이첼에게 받았던 상처를 레이첼에 대한 악성루머를 퍼뜨리는 모임까지 만들어 활동할 정도였는데 그 활동에 가담했던 이들 중에 로스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레이첼에게 충격적인 반전을 일으킨다. 브룩 쉴즈도 시리즈 2에서 잠시 등장했는데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는 망상증 환자로 등장해 라모레 박사로 연기했던 조이를 우쭐하게 만들기도 하고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숀 펜도 피비의 쌍둥이 언니 우슐라의 애인으로 등장해 피비의 상대역인 안 어울리게도 착한 남자역을 훌륭히 소화해내기도 했다. 이런 스타들의 이미지를 이용한 이야기는 주로 시리즈 2와 6에서 주로 선보였다. 그런데 이런 스타 이미지를 시청자들은 쉽게 싫증나 했고 정말 보고싶어하는 것은 6명의 친구들 사이의 에피소드라는 것이 증명되면서 다시 그들 사이의 애정문제들과 관계된 일들의 에피소드로 돌아섰다.
상호텍스트성은 단지 스타이미지들만을 이용한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상품들의 신화, 그리고 관습과 놀이들이 모두 상호텍스트의 공간이 된다. 인종적 편견이나 소수민족들의 편견에 대한 조롱도 빼놓을 수 없는 소재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상호텍스트성은 그 본래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내러티브를 주변화시키며 이야기를 풍부하게 지속시키는 효과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일화에 그런 기존의 통념과 가치관에 대한 인용과 비판 그리고 조롱이 담겨져 있는데 <프렌즈>는 그러나 통속적인 고정관념들을 한두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다. 자기 포용적이며 관용적이지만 <프렌즈>의 주인공들은 모두 백인들이며 그들의 일상은 백인 중심의 풍요로운 세상을 대변하는 신화이다. <프렌즈>는 그런 점에서는 매우 노골적인 미국중심의 신화를 유포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다. 그들의 신화에는 내포된 성적 개방과 콤플렉스는 그래서 가끔 징그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개방시키는 이중성이 있다.
<프렌즈>가 다루는 전형성과 상투성은 고정관념에 대한 폐기를 은밀하게 주장한다. 새로운 것, 현재의 가치관에 봉사하는 이런 이데올로기성은 한편으로는 저항적이지만 결국 전복적이지는 못하다. 왜냐하면 시트콤이 다루는 소재는 정치적이지만 시트콤은 정치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아 볼 사람들은 다 알아보고 더 크게 웃을 것이고 가려져 있는 문제들에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시시하다거나 저질스런 웃음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렇대도 그것이 대수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시트콤은 바로 그런 반응들 이전에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에게 이미 한가득 웃음을 안겨주고 난 다음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런 갈등하는 소시민적 정서가 오히려 솔직하게 다가오는 측면들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피비는 동물애호가이지만 모피를 쉽게 버리지 못하고 채식주의자이지만 동생을 위해 임신을 한 후에는 잠정적으로 육식을 즐기는 장면은 그래서 더 정겹기도 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

어쩌면 무거운, 어쩌면 가벼운
단막극 형식의 에피소드가 반복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여러 가지 문화적 상호영향의 장이 시트콤의 형식 속에 녹아 들어가 쉽게 질리지 않고, 연속적으로 집약된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있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런 내러티브 구조적 특성은 특히 시트콤이 취하고 있는 기본적 미장센 그러니까 인물들의 미세한 감정의 변화보다는 전체적인 동선과 상황을 강조하는 카메라 구도와 잘 맞아 들어간다. 그리고 야외촬영을 지양하고 세트와 정해진 상황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제한된 상황묘사만으로 어떻게 ‘현실감’을 전달할 수 있을까? 모든 시트콤이 현실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들이지만 접점마저 놓치게 되면 이야기는 황당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프렌즈>는 이런 긴장관계에 놓여진 사회적 의제들을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게 다루면서 그 균형을 잘 잡아간다. 이런 균형은 캐릭터가 가진 성격을 구축해 가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대표적으로 피비는 생태주의자이며 채식주의자인데 시리즈 3과 4에 걸쳐 자신의 동생을 위해 대리모가 되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직 대리모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 조차 없는 한국의 경우에 비해 파격적이기 이를 데 없는 에피소드이지만 그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시리즈 3에서 피비는 동생이 나이 든 여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자 아이를 대신 낳아주기로 결심하지만 주위에서는 대리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문제들을 조목조목 열거하며 반대한다. 특히 피비의 생모는 사랑하는 아이를 떼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강아지를 키워보면서 대신 느껴보게 하지만 피비는 오히려 강아지를 키워주는 것이 이렇게나 남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아이를 낳아주는 것은 얼마나 더 큰 기쁨을 주겠느냐며 탈속의 경지에 다다른 코믹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에피소드들은 매우 많다. <프렌즈>가 다루는 에피소드에는 유난히 동성애적 코드가 많은데 이것 또한 우리가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울 소재들을 재미있게 표현한다. 챈들러와 모니카가 결혼을 하기 위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장면에서 동성애적 코드는 이렇게 표현된다. 결혼을 결심한 두 사람이 챈들러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파티장을 찾았다. 그런데 챈들러의 아버지라고 나타난 사람은 게이가 아닌가? 사실 챈들러의 아버지는 게이 쇼를 하는 동성연애자이다. 일순간 시청자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이런 에피소드들은 그렇지만 게이임에도 자상하고 챈들러와 모니카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장면들에서 훈훈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 물론 이런 동성애적 코드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을 단순화시켜 시트콤의 웃음거리로 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트콤은 다큐멘터리나 르뽀가 줄 수 없는 웃음을 통한 문제제기의 기능이 있다. 시트콤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라면 <프렌즈>의 문제제기는 매우 교묘하면서 신중한 웃음을 그래서 말하고자 의도하는 것들을 좀더 생각해 본다면 더 크게 웃을 수 있는 웃음을 전달하고자 한다.

의도된 상황, 의도된 배신
시트콤의 생명은 얼마나 상황을 그럴듯하게 짜내는가이다. 그래서 내러티브는 갈등이 내포된 채로 주어지고 주어진 갈등은 내러티브를 역동적으로 변화하게 한다. 시트콤의 내러티브는 그런 의도된 상황들을 따라 흘러가지만 의도된 결말로 치달아가기만 한다면 아무런 웃음도 감동도 전할 수 없다. <프렌즈>는 그런 의도된 상황들을 배신하면서 치달아가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일례로 엘리트이면서 모범생 기질의 로스는 그래서 항상 그 모범생 기질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된다. 공룡에 대해서 한참 설명해주는 지루한 씬에서 <프렌즈>의 친구들은 모두 동상이몽에 빠지게 되거나 공룡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지만 결국 여자를 꼬셔서 잠자리를 같이하고자 하는 속된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시트콤은 직설적으로 풀어놓는다. 그래서 공룡 전시장 안에서 여자와 사랑을 하다가 공룡을 구경하러 온 아이들에게 그 장면을 들키기도 하고, 자신의 석사논문이 도서관의 구석에 쳐박혀 있어서 연인들의 은밀한 사랑의 장소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시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그 장소에서 자신의 논문을 찾는 여학생과 사랑을 나누다 도리어 경비에게 들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의도된 배신은 의도된 상황을 전면적으로 배신한다기보다는 의도된 기대를 배신할 뿐 전혀 다른 텍스트적 의미로 나아가진 않는다. 그래서 앞서 얘기된 상호텍스트적 혼합도 그저 페스티시일 뿐이다. 서로 뒤섞이는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에피소드들 내에서 묘한 변주와 은유적 관계로 배치되기도 한다. <프렌즈>의 친구들은 친구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모두 함께 겪기 때문에 병원에 하나만 입원해도 모두 함께 병원에서 죽치고 버티다 사고를 친다. 레이첼이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가거나 피비가 입원하면 모두가 병원에서 여자 뒤를 혹은 남자 뒤를 쫓는다. 어쩌면 솔직히 보이는 이런 무의식적 욕망들을 <프렌즈>의 친구들은 충실히 대변한다. 세상에는 분명 남자와 여자 두 가지 성이 존재하지만 세상사를 상대방 성을 시도 때도 없이 뒤쫓는 식으로는 아무도 살지 않지만 이 친구들은 모든 삶을 연애와 사랑으로 연결짓는다. 연애담, 사랑 이야기로 점철된 <프렌즈>의 친구들이 급기야 서로간의 족내혼(?)으로 발전되면서 마치 주변의 연인들의 일상사를 궁금해하듯 그들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관음적 시선이라기보다는 캐릭터에 고착된 애착을 애정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시청자들을 사랑 이야기로 매몰시키는 전략은 그래서 탁월하다. 로스는 벌써 세 번의 이혼을 경험했고, 그 수많은 연애에도 불구하고 레이첼은 미혼모가 될 처지에 놓였으며, 조이와 피비는 변변찮은 애인도 없이 남았으며, 단지 챈들러와 모니카만이 결혼을 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결혼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면 이들이 끊임없이 연애감정에 사로잡혀 행복과 좌절을 오간다고 해서 특별히 우리에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이건 단지 시트콤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시트콤의 한계라기보다는 상업적 방송 프로그램의 한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가며
시트콤의 웃음이 그 자체의 완결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경우보다 시트콤 외적 상황들의 맥락에 따라 웃음을 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웃음들은 상황들에 대한 웃음이며 문화적 트렌드에 대한 웃음을 통한 성찰일 것이다. 미장센은 단순하고 카메라는 롱 숏으로 흐르지만 그 상황을 바라보는 시청자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그리고 자신이 감정 이입하는 캐릭터를 따라 서로 다른 각도로 이야기를 쫓아간다. 시트콤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우리들처럼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사랑 문제로 고민하고 때론 유치하며 때론 사랑스럽기도 하고 친구를 위해 헌신하기도 한다. 이들은 드라마의 멋진 남자 주인공도 의도적으로 부풀려진 신화적 인물들도 아니다. 결점투성이며 지극히 현실적이며, 그래서 때로 공간적인 거리와 인종적 차이를 뛰어넘어 동질감을 느끼게도 한다. 한 주에 한 번씩 방송되는 미국인들의 방송시간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미디어에 노출되는 <프렌즈>의 친구들은 마치 우리들의 친구 같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그 달콤한 환상을 걷어내기엔 애착이 너무 깊은 것도 사실이다. 그들의 연애행각을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들은 그러나 어떤 때는 삶에 대한 짧은 빛나는 통찰력을 선보일 때도 있고, 때론 감동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도 한다. 미디어에 노출되면 될수록 그들이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트콤 밖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고 시트콤은 분명 그 세상의 일부이다. 물론 시트콤이 변화시키는 세상의 부분도 있을 것이다. <프렌즈>가 던지는 짧은 순간의 행복을 일부러 거절할 필요도 분해시켜 폐기할 필요도 없다. 한번쯤 <프렌즈>의 친구들이 자주 가는 ‘센트럴 퍼크’에서 커피를 마셔볼 기회가 있다면 굳이 거절하진 마시란 말씀이다. 만약에 실제 뉴욕에서도 그들을 만나볼 수 없다면 그건 그들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닌 애초에 환상이었다고 생각하고 웃으면서 고이 간직할 일이다.

박부식
․<프리미어> 1회 영화평론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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