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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젊은시인조명/'볕 좋은 봄날에' 외 9편 /윤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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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젊은시인조명>/'볕 좋은 봄날에' 외 9편 /윤관영
볕 좋은 봄날에 외 9편
뭔 힘이 밀어 꽃잎은 나오느냐.
나오면서
나오면서
피어나느냐
뭔 힘이 밀어 그런 태깔 밀어내느냐.
볕 좋은 봄 한날
내 오줌 누는 모습, 정면으로 지켜보던 흰둥이랑
쪼그려앉아
흰 배꽃을, 분홍 복숭꽃을
한나절 보고 있었어라.
삼 년 전 저 꽃나무 심은 내가
새삼 갸륵해서
앞발 드는 흰둥이 목덜미를
자꾸 쓸어주는데,
내 몸에선 뭔 힘이 밀어
이리 눈물이 나는 것이냐
전기 살충기
따닥, 따닥
한여름 밤 고요를 깨는 것이 있다.
불 밝힌 것이 불 밝히는 것을 죽이는,
죽임의 축제가 있다.
죽임을 보고도 돌진하는 무리가 있다.
그 파장 안에 들기만 하면
양극이 쏘아대는, 쏘아 전신을 태우는,
태워 내장이 터지는 황홀한 죽음이 있다.
정면 충돌이 슬로우 모션으로 오듯
목이 부러져 죽기까지, 투신을 또 얼마나 길던가
그들의 추락은 더없이 길다. 추락이 쌓인다.
짜릿한 죽음
전신을 관통당한 흔들림,
죽음의 문턱엔 가보지도 못하고, 가벼이
뛰어넘는, 부패 없는 시신들
평상 위 나른한 맥주 한잔을 흔드는
따닥따닥따닥따다닥
치우는 일이 귀찮아서 설치하지 않는다는,
불 밝힌 유혹들 유혹이 기꺼운 무리가 있다.
돈나물
오월하고도 하순인
오늘,
돈나물에 꽃,
소보로빵처럼 피었네.
딱, 그만한 구멍
하늘에 뚫렸네.
자꾸 잠식당하는 하늘
돈, 돈, 돈, 돈…… 돈 나 물
(알겠네)
흐리고, 퍼붓고, 자주
개는 하늘.
소나기 한 차례
바람도 젖은 바람은
이리 시원타.
비에 자리를 내주고
몰리고 몰려서 원두막을 채운 밀도
날파리들이
비와 원두막의 추녀, 그 경계에서 분주하다.
빗방울 한 방이면 추락할 그것들이 용타.
호미를 곁에 놓고
무르팍 오그려, 잡히는 대로 눈길 두는
이 잠시잠깐,
그 동안, 참 가물었었다.
길 위에 길
머리 속에 뭘 넣어야한다고
대가리 처박고 신문이라도 보던 시절 지나니,
보인다. 노란 맹자(盲者)의 길
강박의 길 지나니,
오돌도돌한 직선과 직각의 길 보인다.
무료와 권태 속에 있지 않으려던
억지 집중을 지나니,
힐끔힐끔, 힐난의 눈길도 받는,
딴청이 날 보게 한다.
색으로 난 길과
몸무게를 다 짊어진 구두굽과
그 밑 두툼한 발바닥 ―
말초신경이란 말을 괜히 알 듯도 하여
헛웃음 참으며 또 힐끔거리며
발가락을 빨아도 아름다운 그대
뭐, 이런 속스런 생각에 기분이 동해
그런 애인이라면 뭐 하면서
이때는 전동차 창밖을 보게 된다.
자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앞자리 여인을 흘끔거리며.
겨울의 중심
눈 하도 탐스러이 내려
비디오로 찍고 싶다는 생각 들었네.
날 촌(村)스러운 데까지 데려가는 겨울, 함박눈
별수없었겠지.
맑은 하늘 지운 게 저였고
제 품에 놀던 새떼들을 쫓은 게 저였으니까
얼구고,
떨구고,
빈 가지마저 그냥 안 둔 저였으니까
광폭의 끝간데에서는
저도 별수없었겠지.
절 풀어내릴 수밖에 없었겠지.
너무 느려
차라리 수직인
함박눈 내리네 이 겨울의 중심에.
고로쇠물
태어나, 첨
먹어봤네. 고로쇠물
일 년에 단 삼 주만 쏟아내는 해거리 물
냉장고에 넣어도 열흘도 못 가 쉬는 물
고로
쇠물
피가 응고하듯 굳는 물
투명하면서 불투명한 물
잘린 원목처럼 누워
수혈받고 싶었네. 한 통
얻어다 놓고 빨리, 많이, 먹어치워야 했던
단내나는 물
그 미끌미끌하고도 꺼끌꺼끌한 물, 나무에도
샘이 있다는 거 알았네.
옛날, 일설(一說)에
경도를 치루는 무녀(巫女)는 신통력을 갖기 어려워, 그래 아기보살을 몸 어딘가에 지닌다는 설이 있는데, 초경이 한참 전인, 어리나 똑똑한 여아를 독 속에 집어넣는다는 설이 있는데, 그 속에 왕소금과 은방울을 넣는다는데, 이건 설이 아니라는데, 컴컴한 속에서 소리치다 배고프고 목말라 소금을 먹는다는데, 두려움 속에서 은방울을 가지고 놀다 기갈 속에서 운다는데, 울다 기진해 죽는다는데, 죽어 혼령이 은방울 속에 들어간다는데, 이건 순전히……, 영험……
태초(太初)에 설을 이룬 무녀가 있었고, 그런 그녀가 긴요(要緊)한 사람이 있(었)다는데……
벌마늘
벌어져서 벌마늘이라는 그놈은
볼썽사나웠어요. 접으로 엮여있어도
영 폼이 안 나더라고요. 엄만,
참 좋은 마늘이래요.
한 쪽이 한 통 되는 마늘 농사
별것이래야 농사짓는 것은 아니지만서두
가족끼리 둘러앉아 떼어내는데,
그놈 참 예뻐 보이데요.
거죽 하나를 사이로 내가 통통하면
다른 쪽이 찌그러드는 게 마늘인데,
놈들은 각기 벌어져서 동글동글해요.
흙을 몸 가운데 받아 마늘대를 밀어올렸다니,
흩어져 하나인 그놈들은, 떼어내는데
뿌리 쪽이 딱딱 부러지는 소리를 내는 거예요.
각자 벌어졌어도 거푸집 같은 외피는 또 여전하고
스스로 통풍(通風)해 썩지도 않고, 해서
대를 축으로 한, 벌사람이라는 게 있다면
거 괜찮겠다고―
나야, 내내
손톱 밑이 좀 아렸지요, 뭐.
대가리 처든 채
대가리를 처든 채
꼬리에 물살 하나 매달지 않고
물을 건너는 뱀을 본 적이 있다. 저
징그러움은, 부력은
지독한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관절이 없는
그는 수 없는 관절의 집합이다.
전후좌우로 꺾이는, 관절의 관절이
물 위를 파문 하나 없이 건넌다.
구분되지 않는 그의 몸은 영락없이 물을 닮았다.
물까지 쥐면서 밀어내는
고감도의 탄력이
그의 몸이다 무기다.
(언젠가 나는, 죽은 그놈의 아가리를 벌려본 적이 있다)
또아리가 풀리면서 막대기처럼 뜨는 그 순간
온몸이 하나의 관절이 되는 것을
보았다.
▮시작노트
(초식을 공개하는) 지금 나는 비장하다. 낭인무사, 자객, 살수―내겐 살수(殺手)가 더 와닿는다. (詩의 손 중의 하나도 殺手다) 살이 업이다. 살업(殺業). 살수에겐 이름이 없다. 피를 먹은 무기가 그를 말해줄 뿐. 권(拳)․도(刀)․검(劍)․창(槍)․독(毒) ― 구애받지 않는다. 맞는 게 있긴 하지만, 폼 나는 건 검(劍)이지만, 그건 상황과 청부 대상에 따라 고려될 뿐 철저히 살(殺)에 종속된다. 쾌(快)니, 변(變)이니, 초식이니 하는 것도 다 殺에 종속된다.
내 살을 내가 꿰맬 때의 쾌감, 느리게 한없이 느리게 내 몸을 지나가는 칼날을 느낄 때, 그 후에 분출하는 피처럼 솟는 삶의 생기(生氣). 상처가 날 살게 한다. 내 몸의 검흔(劍痕), 혹은 상흔(傷痕)이 殺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상처, 아니 패배, 아니 굴욕만한 힘이 어디 있으랴. 詩는 내게, 칼날처럼 느리나 예리하게 온다. 운전할 때, 그 움직임 속에서 정지한 고도의 집중 속에서, 그 집중을 뚫고, 그 집중의 중심으로 온다.
살수는 술을 마시면서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난 놓는다. 다만, 수평을 잡는 날의 바깥을 갈아먹지는 않는다. 지난하지만 안을 간다.
나의 꿈은 초비상(草上飛). 촉수를 세운 귀또리처럼 풀잎을 밟은 채 둥둥 떠있는 것이다. (물론 그게, 고도의, 튈 준비인 거지만)
윤관영
․1961년 충북 보은 출생
․1994년 <윤상원 문학상>으로 등단
․1996년 ≪문학과사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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