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8호/젊은시인조명 해설/윤관영 시 해설/백인덕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495회 작성일 04-01-04 12:27

본문

서정(抒情)의 ‘피’를 노리는 살수(殺手)의 꿈
 백인덕(시인)


1.
쉴새 없이 쏟아지는 수많은 각종 문예지에서 곤혹스럽게 확인하게 되는 사실 하나는, 아직도 우리 현대시의 주류가 서정시라는 점이다. 시가 결국은 서정적 장르라는 점에서 무슨 문제가 되랴 하고 안도해 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서정’이란 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알맞은 감수성의 모습으로 질적 변화를 성취하면서 변모해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물론 오늘의 모든 서정시가 강호가도나 전원 서정시라는 단언은 아니다. 다만, 서정의 개념이 너무 완고하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좁게 정의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한 편의 시를 쓰면서 어떤 ‘절실함과 간절함’, 다시 말해 내적 필연성이 작동하지 않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따가운 질타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날 문예지와 시집마다 넘쳐나는 서정시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읽어낼 수 없다. 첨단 정보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수많은 사람의 눈이 동영상을 향해 있는데 우리 서정시들의 시어를 보라. 여전히 꽃이며 바람이며 새며 숲이지 않은가. 여전히 사랑이며 그리움이며 설움이며 울음이지 않은가.”( 이승하, 「90년대 우리 시의 과오는 무엇인가」, ≪한국문학평론≫, 1999 겨울호)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적은 아직도 타당하다고 본다. 내친김에 하나만 더 인용하자. “지난 시절 시인들에게는 미학을 찾지 않아도 미학이 먼저 와 있었다. 식민지 시절에는 독립만으로도 미학이었고, 독재 시절에는 민주만으로도 미학이었다. 절대 곤궁이 휩쓰는 세상에서 시인은 가난을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미학을 구현했다. 그것이 오늘날 시인들이 지난날 시인들을 행복하고 부러운 존재로 보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궁핍은 시대와 사회가 주는 타율적 궁핍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갈구하는 자율적 궁핍이어야 한다.”( 고운기, 「시인인가 죄인인가」, ≪작가≫, 1999 여름호.)
개략적 인용으로 인해 오해의 소지가 없지는 않지만 두 시인이 지적한 바를 요약하면, 하나는 오늘날 서정시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의 시인들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자율적 미학’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정’에 의지해서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가 그만큼 힘들어졌음을 일깨워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절실함과 간절함’이라는 내적 필연성을 억누르지 않으면서 동시에 시대적 감수성에 걸 맞는 ‘서정’을 통해 자신만의 ‘미학’을 성취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번 호의 젊은 시인인 윤관영의 시는 바로 이러한 의문과 방법론적 탐색에서 출발하고 있다.

2.
윤관영은 짧은 시작메모에서 ‘비장하’게 자신의 ‘초식’을 공개한다. 문단의 수많은 사나운 눈과 험한 입을 향해 ‘초식’을 밝히는 두려움과 떨림은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런 경우에 아포리아나 에스프리 같은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한 형식을 취한다. 이 포즈가 두려움을 조금은 감소시켜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나 윤관영은 우회하는 길을 포기하고 대담하게 직선으로 걸어나온다. ‘詩는 내게, 칼날처럼 느리나 예리하게 온다. 운전할 때, 그 움직임 속에서 정지한 고도의 집중 속에서, 그 집중을 뚫고, 그 집중의 중심으로 온다.’고 밝히고 있다. 좀 거창하게 비교해서 파블루 네루다의 시작의 순간에 대한 시인 「시」 전반부를 떠오르게 하는 이러한 토로는 그가 이번의 신작시들을 통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시, 또는 시인의 길을 밝히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시작(詩作)을 점검하게 되는 동기는 자신이 취한 시적 태도가 이른바 시적 현실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세계와 자아와의 괴리나 불화가 외적 현실에서 비롯하기보다는 시인 자신의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졌을 때 이루어진다. 윤관영의 경우에 있어서는 다음의 작품에서 이러한 사정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머리 속에 뭘 넣어야한다고
대가리 처박고 신문이라도 보던 시절 지나니,
보인다. 노란 맹자(盲者)의 길
강박의 길 지나니,
오돌도돌한 직선과 직각의 길 보인다.
무료와 권태 속에 있지 않으려던
억지 집중을 지나니,
힐끔힐끔, 힐난의 눈길도 받는,
딴청이 날 보게 한다.
색으로 난 길과
몸무게를 다 짊어진 구두굽과
그 밑 두툼한 발바닥 ―
말초신경이란 말을 괜히 알 듯도 하여
헛웃음 참으며 또 힐끔거리며
발가락을 빨아도 아름다운 그대
뭐, 이런 속스런 생각에 기분이 동해
그런 애인이라면 뭐 하면서
이때는 전동차 창밖을 보게 된다.
자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앞자리 여인을 흘끔거리며.
―「길 위에 길」 전문

이 시에는 그 표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두 개의 길, 또는 길에 대한 태도가 보인다. 시를 표면적으로 따라가 보면, 하나는 ‘노란 맹자(盲者)의 길/강박의 길’인데 그것은 ‘머리 속에 뭘 넣어야 한다’는 ‘강박’, 다시 말해 지적 포즈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던 시절의 길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길을 지나니 ‘직선과 직각의 길’이 보인다고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무료와 권태’ 속에 있지 않으려는 ‘억지 집중’을 지나니 ‘딴청’이 날 보게 하는 경지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층위는 순차적으로도 이해될 수 있고, 중층적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盲者와 강박의 길’을 극복한 ‘직선과 직각의 길’에서 ‘억지 집중’의 태도를 버리니 ‘딴청’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이해한다면 순차적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직선과 직각의 길’마저도 종국에는 ‘무료와 권태’만을 지속시켰기에 ‘딴청’의 경지가 필요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후자의 이해를 따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보인다’라는 시인의 주체 중심적 태도가 ‘보게 한다’라는 객체 우선의 태도로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시인이라는 주재자가 언어의 조작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시인이라는 매개를 통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라는 시관(詩觀)은 낭만적이라는 오해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자율성을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보다 현대적이고 깊이 있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관영이 ‘딴청’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걸어왔던 시의 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 ‘예언자’나 ‘선구자’의 모습으로 시인을 정위(定位)했던 것은 아닐까? 세계의 구원으로서 시를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경도를 치루는 무녀(巫女)는 신통력을 갖기 어려워, 그래 아기보살을 몸 어딘가에 지닌다는 설이 있는데, 초경이 한참 전인, 어리나 똑똑한 여아를 독 속에 집어넣는다는 설이 있는데, 그 속에 왕소금과 은방울을 넣는다는데, 이건 설이 아니라는데, 컴컴한 속에서 소리치다 배고프고 목말라 소금을 먹는다는데, 두려움 속에서 은방울을 가지고 놀다 기갈 속에서 운다는데, 울다 기진해 죽는다는데, 죽어 혼령이 은방울 속에 들어간다는데, 이건 순전히……, 영험……

태초(太初)에 설을 이룬 무녀가 있었고, 그런 그녀가 긴요(要緊)한 사람이 있(었)다는데……
―「옛날, 일설(一說)에」 전문

이 시에는 비록 ‘옛날’, ‘일설(一說)에’와 같은 장치를 통해서 시에서 드러나는 태도가 현대적이지 못하다는 암시를 하는 위악적(僞惡的) 태도를 취하고는 있지만, ‘신통력’ 또는 ‘염험’을 얻기 위한 인간적 갈망과 비인간적 과정이 잘 그려지고 있다. ‘보여주기’와 ‘의심하기’라는 방법적 우회를 통해서 윤관영은 ‘영아(嬰兒)’를 제물로 획득하게 되는 ‘신통력’과 ‘영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는 있지만, 이 ‘무녀’들이 ‘긴요(要緊)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말을 흐림으로 인해서 그 필요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시작 메모의 한 구절, “상처, 아니 패배, 아니 굴욕만한 힘이 어디 있으랴”라는 구절과 그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예일비평의 거두인 해롤드 블룸이 정리한 ꡔ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ꡕ에 따르면, 후배시인이 강력한 선배시인의 영향력을 극복하고 자신의 시 세계를 정립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극단적인 자기비하나 비극적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불안’에 하나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상처, 패배, 굴욕’ 등을 통하여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경로라는 것이다.

뭔 힘이 밀어 꽃잎은 나오느냐.
나오면서
나오면서
피어나느냐

(……)

내 몸에선 뭔 힘이 밀어
이리 눈물이 나는 것이냐
―「볕 좋은 봄날에」 부분
이 시는 윤관영 시의 출발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봄날에 ‘꽃잎’이 ‘나오면서 피어나’는 것과 ‘내 몸’에서 ‘이리 눈물’나는 상황, 그 상황을 빚어내는 ‘뭔 힘’, 즉 ‘힘’의 정체에 대한 탐색이 그를 시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봄날에 ‘꽃잎’을 밀어 올리는 힘은 필경 생명의 ‘힘’이지만 그것은 땅 속에 웅크려 있을 때는 죽음의 ‘힘’, 아니 거의 죽음에 가깝게 놓여있던 ‘힘’이라는 것이다. 이 힘이 시인에게는 ‘상처, 패배, 굴욕’이라는 이름으로 잠복해 있다가 새로운 생명에 대한 염원으로 ‘눈물’을 밀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도식적으로 대비시켜 놓으면 일견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 윤관영의 시는 이러한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길 위에 길」에 의하면, 시인은 우선 ‘강박의 길’을 따라간다.

따닥, 따닥
한여름 밤 고요를 깨는 것이 있다.
불 밝힌 것이 불 밝히는 것을 죽이는,
죽임의 축제가 있다.
―「전기 살충기」 부분

너무 느려
차라리 수직인
함박눈 내리네 이 겨울의 중심에.
         ―「겨울의 중심」 부분

위의 두 인용시, 그러니까 ‘盲者의 길’을 따라갔을 때, 시인이 목격하게 되는 것은 ‘불 밝힌 것이 불 밝히는 것을 죽이는’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의 모습이다. 비록 “짜릿한 죽음/전신을 관통당한 흔들림”(「전기 살충기」)처럼 ‘유혹’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죽음의 ‘유혹’이 있고, 유혹이 ‘기꺼운 무리’가 있는 세계는 부조리하다. 이것은 또한 “별수없었겠지/맑은 하늘 지운 게 저였고/제 품에 놀던 새떼들 쫓은 게 저였으니까”(「겨울의 중심」)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인식과 같다. ‘겨울의 중심’에 고즈넉이 쏟아지는 ‘함박눈’은 어떤 평화의 상징이기보다는 제가 품어야 할 것들을 모두 털어내고 그 빈자리에 채우는 별수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盲者와 강박’의 길에서 윤관영이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세계의 모순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은 시인 자신의 모순을 요구한다. 강박이라 함은 어쩔 수 없이 따라가게 되는 상황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적 포즈로 세계를 파악한다는 것은 ‘강박적’ 상황에서는 요원한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길’을 찾게 되는데, 시인은 이 ‘길’을 ‘딴청’이라는 절묘한 이름으로 부른다.

벌어져서 벌마늘이라는 그놈은
볼썽사나웠어요. 접으로 엮여있어도
영 폼이 안 나더라고요. 엄만,
참 좋은 마늘이래요.
한 쪽이 한 통 되는 마늘 농사
별것이래야 농사짓는 것은 아니지만서두
가족끼리 둘러앉아 떼어내는데,
그놈 참 예뻐 보이데요.
거죽 하나를 사이로 내가 통통하면
다른 쪽이 찌그러드는 게 마늘인데,
놈들은 각기 벌어져서 동글동글해요.
흙을 몸 가운데 받아 마늘대를 밀어올렸다니,
흩어져 하나인 그놈들은, 떼어내는데
뿌리 쪽이 딱딱 부러지는 소리를 내는 거예요.
각자 벌어졌어도 거푸집 같은 외피는 또 여전하고
스스로 통풍(通風)해 썩지도 않고, 해서
대를 축으로 한, 벌사람이라는 게 있다면
거 괜찮겠다고―
나야, 내내
손톱 밑이 좀 아렸지요, 뭐.
―「벌마늘」 전문

이 시는 ‘딴청’이라 명명한 윤관영의 시적 인식이 어느 경지에 도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벌어져서 벌마늘 이라는 그놈은/ 볼썽사나웠어요”라고 외견상의 인상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곧 ‘그 놈 참 예뻐보이데요’라고 외견상의 인식을 수정하게 된다. 그 이유는 벌마늘의 진가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인데, 벌마늘의 진가는 곧 “거죽 하나를 사이로 내가 통통하면/다른 쪽이 찌그러드는 게 마늘인데,/놈들은 각기 벌어져서 동글동글해요”라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하나가 크고 강하면, 다른 하나는 찌그러지고 약하기 마련인 것이 세상의 이법(理法)이라는 인간적 사유로는 이 ‘벌마늘’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공존의 인식은 “그 미끌미끌하고도 꺼끌꺼끌한 물, 나무에도/샘이 있다는 거 알았네”(「고로쇠물」)라는 어떤 깨달음, 혹은 세계인식의 변화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나아가 ‘벌사람’이라는 게 있다면 ‘거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결국 윤관영이 획득하게 된 ‘딴청’의 태도는 ‘방관’이나 ‘주변인’의 그것이 아니라 ‘공존과 공생’의 필요성을 절감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사족이지만 시의 끝머리에 ‘나야, 내내/손톱 밑이 좀 아렸지요, 뭐.’ 하고 ‘딴청’을 부리는 것이야말로 윤관영다운 시적 태도의 한 단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3.
윤관영의 그의 시작 메모에서 자신을 ‘살수(殺手)’라 자칭하고 있다. 또한 그는 “징그러움은, 부력은/지독한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관절이 없는/그는 수 없는 관절의 집합이”(「대가리 쳐든 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남는 문제는 그 칼날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 하는 점인데, 너무 자신만을 향한다면, 자기 몸의 상처만을 향한다면 그것은 나르시즘으로 떨어질 것이요, 세상만을 향한다면 종국에는 아무것도 벨 수 없을 것이다. 식상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용형호제」라는 영화의 한 시퀸스처럼, ‘지독한 부드러움’이 진정한 날카로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와 세계가 따로가 아닌, 주체와 객체가 다르면서 하나인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말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두 시인의 따가운 질타를 인용했다. ‘서정시의 전망 부재’와 ‘젊은 시인들의 자율적 미학’에 대한 관심 부족이 그것이었다. 나는 이 두 문제가 별개로 드러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이 황폐화되고 기계에 대한 의존도가 점증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시의 ‘정서적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몸은 아직도 유기체고 아날로그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에 대한 척도, 기준이 불분명한 지금이야말로 젊은 시인들이 자신의 미학적 관점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윤관영 시인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난한 길인 줄 알면서 스스로 그 운명을 걸머진 자들은 그 책임을 최선을 다해, 전력을 다해 감내해 가야할 것이다.
윤관영 시인께 ‘하선암’의 물 맑고 풍광 수려한 은거지에서 도심의 이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을 잊지 말아주길 당부하며 이 글을 맺는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밤의 못질'
․현재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추천1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