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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신작시/나는 날마다 죽음에 검문당한다 외 1편/서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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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2,881회 작성일 04-01-04 12:39

본문

서안나
나는 날마다 죽음에 검문당한다


밤이면 나는 컴퓨터 속으로
슬며시 잠입한다.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쓰고
바짓단을 졸라매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조회받으며
칼 냄새 자욱한 무림의 땅으로 들어선다.

적도 동지도 없는 쓸쓸한 눈 덮인 벌판으로
발을 내딛으면 어둠 속에서 소리없이 열리는 길
등뒤에서 나를 노리는 자들의 발 소리
바람 속에 섞여있는 살의를 경계해야 한다
한 번 실패는 죽음이다

인디언처럼 적의 머리가죽을 벗기고
불쑥 튀어오르는 적의 가슴을 베려
내공을 키우는 밤
죽음은 어디서나 한 방울의 피처럼 가볍다

무림의 땅에서는 위장할 수 있는 검객의 이름들이 필요하다
잿빛 쟈칼, 붉은 여우, 칼빛 사랑, 바람의 신화
컴퓨터 화면마다 튀어오르는 핏자국들
숨을 멈추고 손끝에 기를 모아 단칼에 내리쳐야 한다
머리뼈를 가르는 묵직한 장검(長劍)의 소리
죽음이 죽음을 부르는 소리
피 냄새를 맡으면 퍼들거리며 날개가 돋아나는 칼날
목숨들이 한줄기 칼빛으로 사라진다

나는 밤이면 검은 두건을 쓰고 칼을 차고
금기의 땅으로 들어선다
누구도 이 무림의 땅에서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장검을 차고 피의 온기로 달빛이 맑게 뜨는 밤
달빛 위를 걸어가는 밤
길 위에서 나는 수시로 죽음에게 검문당한다





전생(前生)을 생각하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보면 책상의 前生이 보인다.
책상 표면에 매끄럽게 그려진 결마다
뿌리와 가지의 힘이 모여있다

나이테로 몰려든 경계와 경계를 넘나들던 힘들이
물을 빨아올리던 뿌리의 힘들이
나무의 옹이를 향해 제 몸을 둥글게 구부려가며
단단한 우주를 만들고 있다
중력을 떨치며 태양을 향해 방사선으로 피어나던 잎들이
숲을 지탱하던 나무들이 결국은 책상을 일으켜세우고
있다

밤마다 책상에서 뿌리들이 뻗어나와
오래된 기억들을 점자책처럼 더듬어 읽어간다
책상모서리마다 나사못들이 단단하게 조여져 있다
맞닿은 곳마다 숲의 온기가 생생하다

내 방엔 결가부좌한 책상의 前生이
서로의 몸을 껴안으며 살고 있다.
밤새 먼지 내려앉은 책상을 손으로 쓸어보면
단단하게 조립된 생나무들의 숨결이

별에 닿고 싶었던 나무의 의지가
내 손가락에 묻어난다
내 손가락들을 들여다본다
나이테가 감겨있다
책상에 앉아 서랍을 닫으며
혹시 내가 나무가 아니었을까

나의 前生을 생각해본다.


서안나
․1990년 ≪문학과 비평≫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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