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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신작시/계단 외 1편/강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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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애
계단
상가를 낀 건물은
내부에 뜨거운 욕망을 쌓아올리고
지상 28층 높이에서 슬며시
상승의 포부를 놓아버렸다
시선을 감추다 더욱 더 타인이 되는 엘리베이터를 피해
7층 일터까지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노래하네
_____매장도 전품목 바겐세일도 없는 여기, 다만
곰팡내 가득한 사무실로
자판의 ㅇ이나 ㄹ처럼 꽂히러 가네
퇴출당한 물고기를 신문지로 덮어주고
저녁 어스름 속으로 퉁겨져 나오면
진열장에 비친 오, 모니터와 뒤바뀐 내 얼굴
천식을 앓는 구름이
숨어 기침하기 위해서나 들르는
공명장치 잘 된 계단은 이를테면
원근법 비탈이 만든 노래방
나는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자
매일 영혼 한 귀퉁이를 가로지르네
희미한 보안등 아래
발자국 소리를 텅텅 울리며
암호를 잊어버렸다
내가 써놓은 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암호를 입력하시오’
텅 빈 케잌상자 같은 컴퓨터 화면은
같은 말만 반복한다
새가 뇌 속으로 빨려들어갔나!
날 받아주던 기호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랑도, 그대 내부 깊숙한 곳에서 새어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는 것
타인의 가슴에 쓰는 일기였다
그때, 그대의 닫힌 문을 열던 암호가 무엇이었는지
그대를 내게 집중시키던
상형문자가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다
고백할 가슴도
암호가 되어 날아가던 기쁨도 사라졌다
수백 개의 태양이 져버린 화면을 끝없이 바라본다
강신애
․1961년 경기 강화 출생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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