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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특집/역전된 불온성을 투시하는 아이러니적 상상력/엄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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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엄경희
댓글 0건 조회 3,856회 작성일 03-03-20 19:56

본문

역전된 불온성을 투시하는 아이러니적 상상력
엄경희(문학평론가)



1. 불온성을 규정짓는 불온한 권력 구조
'불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김수영([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의 목소리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꿈과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며 희망이다. 그러나 기존의 틀을 유지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보면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반역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현존하는 구조를 바꾼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구조가 바뀌지 않을 때 불가능은 불가능으로 남는다. 모든 구조는 생성의 기반이면서 동시에 그 생성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를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족쇄 역할을 한다. 따라서 구조는 양가적 의미를 지닌다. 가장 이상적인 구조는 그것이 개개인 모두를 존중할 수 있는 기반으로 역할을 할 때일 것이다. 이때 문제는 구조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구조의 중심을 지배하는 것이 힘과 권력이라면 그 구조는 배제와 억압을 근본으로 하는 폭력이 된다.  
권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교활한 장치들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불온'을 규정짓는 것 또한 그러한 장치 가운데 하나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온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하는 저항적 힘을 권력은 '불온'으로 규정짓는다. 이러한 규정은 억압을 함의하며, 나아가서는 감금과 소외라는 처벌을 내포한다. 한편 권력은 '불온'을 규정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해줄 수 있는 기만적이고도 유혹적인 상징물들(이미지)을 유포한다. 그리고 상징물들 속에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흡수해버린다. 이 상징물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온함이다. 그러나 이는 권력에 의해 전도된 의미로 존립한다. 도시, 구체적으로 말해 자본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이라는 공간은 불온성으로 낙인 찍힌 공간과 권력의 상징물들이 공존하는 복합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사회적 코드에 의한 감금과 소외가,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의 상업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불온한 것과 권력에 의해 규정된 불온의 역전된 의미는 유혹과 각성이라는 아이러니의 진원지가 된다. 최승호는 "텅 빈 은막 위에 요동치는 것들이 / 幻인 줄 알면서 나는 幻에 취해 / 실감나게 펼쳐지는 幻을 끝까지 본다"([세속도시의 즐거움·1])고 세속도시의 위협적 환(幻)에 대해 말한다. 함성호는 "나는 서울은 오백 년 도읍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 (서·울·은·갈·보·예·요)"([서울, 서울, 서울 ― 건축사회학])라고 부패한 서울의 모습을 고발한다. 그리고 함민복은 인간의 정신을 말살하는 자본주의적 세상을 "순간적 인식과 찰나적 망각을 종용하는 / 슬픔과 아픔이 숙성될 수 없는 / 정서의 겉절이 시대"([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라고 말한다. 한국인의 삶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서울'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성은 우리가 믿고 있는 미래와 우리가 도취해 있는 환락이 기만과 허위에 의해 생산된 것임을 시사한다. 미와 추가 전도된 세계, 선과 악이 역전된 세계는 곧 진실이 은폐된 세계이며, 나아가서는 추와 악이 미와 선을 숙주로 번성하는 세계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러한 세계는 시적 공간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2. 달콤한 황금의 독(毒)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상품' 유통의 가장 큰 동력이다. 좋은 상품을 만드는 일보다 어떻게 하면 구매자의 욕망을 자극할 수 있는가가 자본을 거머쥐는 관건이다. 자극된 욕망은 상품의 소비를 위해서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욕망이 비대해질수록 더 많은 노동과 시간을 소비를 위해 투자해야만 한다. 욕망은 실현되는 순간 또 다른 욕망으로 증식하는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의 증식은 자본주의의 미덕이며, 반대로 절제는 악덕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밑거름으로 도시 공간을 시스템화한다. 그 시스템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공간의 시장화이다. 시장화된 시스템 속에서 생존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들은 시스템의 작동 원리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여진다. 자유 의지를 무력화하고 욕망의 노예로 훈육하는 것이 권력 자본의 최대 목표인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독을 은폐한 당의정으로 인간을 중독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불온한 것이다. 함성호는 이를 '63빌딩'과 '롯데 월드'를 통해 드러낸다.

나는 여의도에만 가면 항상 한강의 수위가 걱정되더라 63빌딩은 거대한 남근 숭배의 신앙이다 올림픽을 앞둔 1988년 이전의 한국인들은 어떤 종류의 번식을 바랐을까 소유의 확대를? 자본의 증식을? 섹스의 강화를, 繁雜을, 어차피 자본주의의 탄생 자체가 리비도적 충동의 산물이라면 저 황금빛의 연출은 충분히 암시적이다 그것은 그대로 피로한 짐진 자들의 아이 맥스 화면이고 여의도의 수위를 가시적으로 높여준 해발의, 금방, 쓰러지기 쉬운, 봉우리다
― [63빌딩 ― 건축사회학] 부분

당신의 휴식 공간 롯데는
우리를 모두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에 빠지게 한다
욕구의 끓는 기름과 조갈의 불화살을 쏴
끊임없이 당신을 상품화하고
끊임없이 당신을 당신이 소비하도록
구애한다
"여러분은 지금 롯데 월드로 가시는 전철을……"
/욕/망/을/드/립/니/다/
            /쾌/락/을/드/립/니/다/
"내리시면 바로 당신을 진열해드립니다"
― [잠실 롯데 월드 ― 건축사회학] 부분

63빌딩은 자본의 막강한 위력을 가시화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그것은 도시의 번영과 발전을 한눈에 확인시킨다. '피로하고 짐진 자들'은 이러한 63빌딩에 감탄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아이 맥스 화면'이라고 말한다. 일종의 허구적 이미지인 것이다. 황금색으로 치장한 이 허구적 이미지는 그 자체 건물의 물리적 기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기능이 아니라 효과이다. 이는 권력 자본의 교묘한 포장술이라 할 수 있다. 포장된 이미지는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이념을 세뇌하고 신격화함으로써 사람들을 신도로서 종속시킨다. 즉 '자본주의의 탄생 자체가 리비도적 충동의 산물'인 것처럼 자본주의적 이미지에 현혹된 '신도'들은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시인은 이와 같은 위악적 상징물을 위태로운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금방, 쓰러지기 쉬운, 봉우리'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63빌딩'의 상징성에 대해 함민복 또한 "복병처럼 물살에 납작 엎드린 63빌딩 그림자 / 자본의 거짓 빨래판 / 낙도 어린이가 서울 나들이 오면 꼭 보여주는 곳 / 바다와 벗하여 사는 어린이에게 수족관을 보여주는 발상"([한강유람선])이라고 비판한다.
권력 자본의 기만적 이미지에 사로잡힌 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시 [잠실 롯데 월드]에서 함성호는 이러한 의식의 상태를 '욕구의 끓는 기름과 조갈의 불화살'이라고 말한다. 주목할 것은 조갈에 시달리는 욕망은 '끊임없이 당신을 상품화하고 / 끊임없이 당신을 당신이 소비하도록'한다는 사실이다. 이 시 구절은 소비하기 위해서는 생산해야만 한다는 자본주의 근본 속성을 의미한다. 스스로 상품이 되지 않으면 소비권을 획득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생산 ― 소비 시스템은 결국 인간의 삶을 소모적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소비하는, 즉 스스로를 탕진케 하는 비인간적 작동원리라 할 수 있다. 마치 '짝사랑'에 빠진 자처럼 욕망과 쾌락으로 탈진케 하는 것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에서는 휴식의 공간 '롯데 월드'인 것이다.
함성호가 '63빌딩'과 '롯데 월드'를 건축사회학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다면, 유하는 '압구정'과 '경마장'을 권력 자본의 상징적 공간으로 비판한다. 그에게 압구정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2])이며, "황홀 찬란 온갖 색욕의 발전기가, 무단 횡단처럼 숨가삐 돌아"가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7]) 권력 자본의 발전소이다. 이러한 '압구정'은 그를 유혹과 각성이라는 상반된 정신의 상태로 몰고 갔던 부조리한 공간이다. '경마장' 또한 '압구정'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압구정'이 색(色)의 욕망과 관련된다면 '경마장'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한탕주의적 욕망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경마장'의 상징 공간을 통해서 '각성'의 의미를 보다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 또한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마사 박물관에 가면 당신은
한때 뚝섬을 주름잡았던 명마의 박제를 만날 수 있다
경주마 이름은 포경선
생전에 그에겐 많은 돈이 걸렸다
물론 사람들이 원하는 건 바람 같은 질주가 아니었다
그는 시간이라는 조롱 속에 갇혀
끝없이 황금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오직 죽음만이, 이 저주받은 이야기꾼의 운명을
정지시켜줄 수 있다는 것을,
죽음은 그의 바람대로
그를, 말의 육신을 멈추게 해주었다
이윽고 그의 몸은 방부제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하여 황금 고래에 관한 이야기는
영원히 썩지 않는 박제가 되었다
― [천일馬화 ― 명마 捕鯨船] 전문

박물관에 전시된 명마 '포경선(捕鯨船)'은 그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고래'를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한순간에 '황금'을 움켜쥐고자 하는 자들에게 이는 유혹이며 희망이다. 명마 '포경선'은 '황금 고래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증거해 왔던 자본주의의 전도사이다. 그는 이미 활동이 중지된 박제물에 불과하지만 그가 유포한 '황금 고래에 관한 이야기'는 결코 썩지 않는다. 시간의 오랜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명마 '포경선'을 통해서 권력 자본이 유포한 날조된 꿈과 욕망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천일馬화'인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경마장'이 함의하는 일확천금의 신화는 '천일야화'처럼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끊임없이 들어도 질리지 않는 허황한 이야기, 그것을 권력 자본의 상징인 '마사'는 기리 보존해야 할 역사적 유물로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와 같은 유혹의 부조리함을 다른 시편에서 "말과 이미지의 라스베가스"([천일馬화 ― 경마장의 함정]), "우리들의 국가는 늘상 마취제와 각성제를 교대로 투입해요"([천일馬화 ― 1800M 1군 핸디캡 연령 오픈 일반 경주 발주 10분 전 경마 예상가 金馬氏를 만나다])라는 말로 반복한다.
63빌딩과 롯데 월드, 경마장. 이 모두는 권력 자본이 만들어낸 환상의 공간이다. 꿈과 쾌락과 물질의 풍요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환상의 공간은 그러나 기실 욕망의 발전소이다. 끊임없이 욕망을 풀무질함으로써 기만적인 자본의 회로에서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소모적 공간인 것이다. 함성호와 유하의 시에 시적 상징으로 등장한 이들 공간은 폭력적인 자본주의의 위장술과 그것에 현혹된 우리의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화려함 안에 가려진 허위성, 달콤함 안에 숨겨진 毒을 끄집어냄으로써 시인들은 진정으로 불온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소외된 자들의 그늘진 천국
63빌딩과 롯데 월드와 경마장과 같은 화려한 권력 자본의 이미지를 벗겨내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을 유지하고 확장하려하는 부조리한 힘이 그 추악한 얼굴로 새로운 음모를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매일 또 다른 63빌딩과 또 다른 롯데 월드를 탄생시키며 그 속에 우리의 생활을 흡수해버리는 것이 권력 자본의 생명력이다. 오규원은 시[우리 시대의 순수시(純粹詩)]에서 "안녕과 안녕 사이로 흐르는 / 저것은 보수주의(保守主義)의 징그러운 미소"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권력 자본이 생산해내는 부조리한 욕망에 저항하는 자들은 어디에 자신들의 세계를 건설하는가? 달콤한 황금의 毒에 도취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고 도시적 욕망의 생산라인에 참여하고 그것을 소비하지 않는 자들은 이 도시의 법령을 위반한 불온한 세력이며, 이 세계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서 세상 밖으로 분리되어야 마땅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지하 갱도처럼 후미진 공간으로 밀려나 이 세계에 대한 부정의 정신을 만들어낸다. 김신용의 '공중 변소'와 배용제의 '삼류극장', 유하의 '세운상가'가 함축하고 있는 상징성이 그것이다.
지게꾼과 막노동꾼으로 살아온 김신용은 그의 첫 시집의 제목 {버려진 사람들}(고려원, 1988년)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줄곧 하층민으로 분리된 사람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폭로해 온 리얼리스트이다. 그의 시는 일용 잡부와 갈보와 소매치기와 철거민 등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대변하고 있다. 두 번째 시집 {개같은 날들의 기록}(세계사, 1990년)에 실려있는 [공중변소 속에서 ― 개같은 날의 연가] 또한 이러한 시적 맥락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사방 벽으로 차단된 변소 속,
이 잿빛 풍경이 내 고향
내 밀폐된 가슴 속에 그 눈발 흩날려와, 어지러워
그 흐느낌 찾아갔네.
그녀는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어도
새벽털이를 위해 숨어 있는 게 분명했어. 난 눈 부릅떴지.
그리고 등불을 켜듯, 그녀의 몸에
내 몸을 심었네. 사방 막힌 벽에 기대서서, 추위 때문일까
살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었지만
솜털 한오라기 철조망처럼 아팠지만
내 뻥 뚫린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 위
작은 창에는, 거미줄에 죽은 날벌레가 흔들리고 있었어. 그 밤.
내 몸에서 풍기던,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악취는
그 밀폐의 공간 속에 고인 악취는 얼마나 포근했던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네. 마약처럼
하얀 백색 가루로 녹아서 내 핏줄 속으로 사라져간
그녀,
독한 시멘트 바람에 중독된 그녀.

지금도 내 돌아가야 할 고향, 그 악취 꽃핀 곳
그녀의 품속밖에 없네.
              
이 시는 달콤하고도 낭만적인 사랑의 환상을 묵살하고 불결함과 상처와 악취로 얼룩진 색다른 사랑을 제시한다. 마약중독자가 된 그녀, 새벽털이를 위해 숨어있는 그녀, 심한 악취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그녀. 그런 그녀를 시인은 '내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고 말한다. 더럽고 비천한 것을 끌어안고 그로부터 위안과 안식을 느끼는 이러한 사랑의 형태야말로 사랑의 원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사방 벽으로 차단된 변소'이다. 벽으로 막힌 시적 공간은 세상과의 단절을 암시한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감추어진 이 어둠과 추위의 공간은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소외의 징표이다. 그곳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세상의 끝에 있는 자들이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막힘과 감금의 상태를 '차단'과 '밀폐'라는 시어가 나타내고 있다. 김신용에게 균처럼 불결한 삶은 곧 소외와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시인은 그 끝의 공간을 우리 앞에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의 안락한 토대를 부정한다. 특히 '독한 시멘트 바람'이라는 표현은 도시 생활의 가혹함과 비정함을 함축한다. 이와 같은 도시 속에서의 소외를 배용제는 '삼류극장'의 상징으로 드러낸다.

눈부신 세상, 그 지옥의 축제를 벗어나기 위해
몇 권의 일기장을 찢으며
이빨을 부러뜨린 뒤,
비로소 나는 완전한 사랑의 방식을 터득했다

이곳은 떠나온 자들의 천국이었고
에로 영화의 줄거리는 쉽게 이해되었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면 누구나 그러했기에
발가벗은 슬픔을 부비면서 은밀한 쾌감의 집을 지었다
눈물들도 벌겋게 달아올라 탄성을 질렀다
내내 저렇듯 찬란한 세상,

그러나 희망의 주소지를 말소시킨 내게
단 하나의 초대장도 발송되지 않았다
검은 유희의 문패를 달고 환멸의 애무에 몸을 맡겼다
오래도록 분노의 오르가슴을 온 핏줄에 가득 채웠다

어떤 불빛의 등대도 나를 발견할 수 없도록
세상 밖으로만 맴돌며
더 지독한 에로 영화를 찾아 헤매다녔다
― [삼류극장에서의 한때·2] 부분

배용제의 화자는 세상 안에 존재하지 않고 세상 밖에 거주한다. 그들을 시인은 '떠나온 자들', '희망의 주소지를 말소시킨 자'라고 말한다. 그의 다른 시에서 이는 "추방된 것들"([지하 생활자의 일기])로 표현되기도 한다. 반면 이러한 화자들이 떠나온 세상은 '눈부신 지옥의 축제'로 가득한 곳이며, "단단한 벽으로 밀봉된 바깥"([삼류극장에서의 한때 1])이다. 김신용의 [공중변소 속에서 - 개같은 날의 연가]와 마찬가지로 배용제의 '삼류극장' 또한 세상과 단절된 공간인 것이다.
'눈부신' 그러나 '지옥'인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 시의 화자는 '몇 권의 일기장을 찢으며 / 이빨을 부러뜨'리는 자기 부정의 혹독한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성찰과 맞닿아 있으며, 자기 성찰 후에 그가 도달한 것은 '완전한 사랑의 방식'이다. 가식과 허위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귀환한 화자의 '완전한 사랑의 방식'은 '벗기기'라는 행위로 드러난다. 즉 '슬픔을 발가벗기'는 사랑의 방식은 자기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성찰적 나르시시즘이다. 이러한 배용제의 '발가벗기기'에는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쾌감'과 '분노'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내장되어 있다. 이는 '일류'를 지향하는 세상에서가 아니라, 자기를 발가벗길 수 있는 '삼류'의 공간에서 생성된다. 따라서 그의 '삼류극장'은 퇴폐적인 것에 대한 탐닉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부정과 자기 회복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내포한 아이러니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배용제와 마찬가지로 유하 또한 금기에 대한 위반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부정의 정신을 표출한다.

나는 세운상가 키드, 종로3가와 청계천의
아황산 가스가 팔 할의 나를 키웠다
청계천 구루마의 거리, 마도의 향불 아래
마성기와 견질녀, 꿀단지, 여신봉, 면도사 미스 리
아메리칸 타부, 애니멀, 뱀장어쑈, 포주, 레지, 차력사……

고담市의 뒷골목에 뒹구는 쓰레기들의 환희, 유혹
나의 뇌수는 온통 세상이 버린 쓰레기의 즙,
몽상의 청계천으로 출렁대고
쓸모 없는 영혼이여, 썩은 저수지의 입술로
너에게 무지개의 사랑을 들려주리
난 구정물의 수력 발전소,
난지도를 몽땅 불사른 후의 에너지

세상이 나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에, 태양의 언어 밖에서
난 노래한다, 박쥐의 눈으로 어둠의 광휘를
난 무능력한 자이므로, 풍자한다
호화 양장본 세상의 기막힌 마분지성에 대하여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3] 부분

이 시에서 청계천에 즐비한 저급 문화는 '나'를 키운 자양이다. '나'는 '세상이 버린 쓰레기의 즙'으로 구성된 오물이며 '구정물의 수력 발전소'이다. 이러한 유하의 자기 비하는 '호화 양장본'으로 꾸며진 '마분지성'의 세상을 풍자하기 위한 무기이다. 호화스럽게 잘 닦여진 세상, 그러나 거짓으로 꾸며진 세상에 오물과 구정물을 퍼붓는 것처럼 통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이 날 원하지 않고 세상이 날 쓰레기라고 할 때 그 '썩은 저수지의 입술'로 세상에 대고 입을 맞추는 일이야말로 근엄한 세상에 대한 야유며 조롱인 것이다. 그것은 호화스러운 세상을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며,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유머와 사유의 탄력은 소외된 자가 행할 수 있는 저항의 한 방식이다. 시인은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에서 이를 "이 세계의 좁은 지하실 속에서 안간힘으로 죽음을 유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4. 역전된 세계 뒤집기
63빌딩, 롯데 월드, 경마장과 공중변소, 삼류극장, 청계천 사이에 놓여 있는 질적거리는 생존 방식의 차이를 말한다. 전자가 현란한 도시적 삶의 전면이라면 후자는 세련된 도시 문화가 은폐하고 있는 도시의 후면이다. 이 둘은 한 공간에 있지만 동등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다. 권력 자본에 의해 건설된 전자의 공간성은 자본 증식을 위한 거점이라는 점에서 시인들에게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소시민들의 의식을 그 현란함으로 현혹시키는 허위적이고 소모적인 공간으로 상징화된다. 반면 후자는 이러한 화려한 세계로부터 추방된 자들이 모여드는 소외의 공간으로 상징화된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거주하는 비천한 공간은 그러나 자신과 동류의 삶을 살아가는 자에 대한 사랑을, 자신에 대한 성찰을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부정의 정신을 터득해 가는 각성의 공간성을 지닌다.
여기에는 공간에 대한 전도된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우리가 번영과 발전, 쾌락과 황금의 징표로 믿고 있는 세계는 권력이 양산해낸 진정으로 불온한 세계이며, 우리가 되돌아보지 않는, 혹은 누구나 기피하는 소외의 공간은 권력이 금기와 불온으로 규정한 세계임을 시인들은 아이러니적 사유로 꿰뚫는다. 진정으로 불온한 것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오히려 진실을 불온으로 규정지을 때, 참다운 삶의 꿈과 지향이 밀실에 갇힐 때 그것이야말로 폭력과 비인간화가 자행되는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성호와, 유하, 김신용, 배용제 등의 시에서 보여지는 시적 공간들은 부조리한 현실 구조를 비판하는 전복적 의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부당한 힘들이 만들어낸 현란한 이미지를 투시함으로써 현실 구조의 허위성과 교활함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당하게 전도된 세계를 뒤집는 것, 그리고 자신의 존엄함을 되찾는 것이 곧 참다운 의미에서의 역능의지(力能意志)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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