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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신인상(시)/알레르기 외 4편/장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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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성혜
댓글 0건 조회 3,731회 작성일 03-03-2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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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알레르기 외 4편
장성혜


해마다 그 자리에
한 여자가 서 있네
햇살이 메마른 가지를 긁으니
벌겋게 보고싶다는 말이 흩어지네
바람이 수없이 회초리 되어 지나간
그늘이 부풀어오르네
꽃이 된 자리마다 병이 도져
봄이 오면 여기저기
미치도록 가렵다는 전화가 오네
불꽃 같은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었던 곳이
여기다 여기다 하면서
가시를 품은 향기가
눈물처럼 쏟아지는 골목
이제는 지나갔겠지 눈을 뜨면
징그러운 그리움 아직도 밟고 섰네
달려왔다 지워지는 물결이 보이네
몇 번을 더 앓아야 하는지
왜 이렇게 가려운지
허망함만 배가 불러
바다로 뛰어들 뿐
푸른 살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네





염색을 하면서


광산촌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강을 검은 색으로 칠한다고 했던 사람에게
광산촌 아이였던 나 한번도 강을 검은 색으로 칠한 적이 없어서 괜히 미안했었네
도화지위엔 언제나 파랗고 긴 강이 흐르고 있었어

황지중앙초등학교 동문체육대회 열린다고 영월 상동 지나 태백 가던 길
폐광이 된 함태광업소 앞 노란 꽃들이 피어 있었네
버려졌던 한 무더기 상처가 길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어

검은 강 검은 지붕 사라진 마을
삼십 년이 지난 줄도 모르고 저탄장 근처 어두웠던 집 잃어버린 길을 찾다가
여기가 어딘가 곱게 물들이지 못한 지난 날이 하얗게 지워지고
파랗고 긴 강이 진짜로 흐르고 있었어

어디로 숨었을까 오지 않은 아이들과
가슴 속 어둠 실어 나르던 수많은 갱도
공을 차다가 줄다리기 하다가 모여
입 다문 산을 배경으로 서둘러 사진을 찍었어

오늘 내게로 온 사진 속 낯선 풍경 들여다보며 염색을 했어
새치커버용 짙은 갈색으로
하얗게 솟아나는 흰머리 혼자 칠하며 괜히 부끄러웠네
늘 다른 색으로 숨겨야 했던 질기고 긴 절망이
이제는 검은 색으로 흐르고 있었어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지나가네
미친 바람과
지친 비와
한떼의 부질없음이
길이 없어
뛰어내려
아스팔트를 치고 사라지네
떠난 자리
물이 고이고
파문만 꽃처럼 피었다 지네

남겨지네
신문 한 장과
거부하는 현수막과
뛰어내리지 않으려는
나와
독이 잔뜩 오른 가로수
그 사이로
돌고 돌아가야 하는
빤히 보이는 길이
모두 젖어서
더욱 구질구질해지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어제 자전거를 타고 비디오 빌리러 갔었어요
여름 저녁이었어요
가로수 아래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어요
누군가 내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고 말해
어디서 보았을까 생각하다가 비틀거렸어요
가는 길에 신호등 하나가 더 생겼어요
사는 것이 점점 경사가 심해 오르기가 힘이 들어요
자전거에서 내려 지그재그로 걷다보니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나왔던 아이가
달려간 길이었어요
그 이란 감독 이름이 또 생각나지 않아요
오늘 비디오를 보다가 중간쯤에서 생각났어요





실내를 위하여


손때 묻은 세월을 뜯어보니
썩고 금이 간 시멘트 벽
쉽게 속이 드러나도
겉으로는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연한 살구빛 벽지의
잘려진 무늬를 맞춰
작은 방 네 벽을 다시 봉했다
숨길 수 없는 누수로 얼룩졌던 천장
슬쩍 높아지고
쓸데없이 못박았던 자리 지워졌다
뜯어보기만 할 뿐
어딘가 금간 마음의 벽 하나
봉하지 못하고
낮은 스탠드를 켰다
아늑한 실내
차 한잔 앞에 놓고
길게 몸을 파묻으니
유리병에 입이 터지도록 꽃이 피어나고
네 벽은 밤새도록 단단한 껍질이 되어주었다




신인상 수상소감|장성혜

어느 일요일 아침
무심코 창 밖을 보다가 가슴 뭉클한 적이 있었다
하늘에 희미해진 달이 아침햇살에 반사되어 잠시
태양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아득하게 사라진 줄 알았던 내 희미해진 꿈 하나
어느 날 그렇게 가슴 뭉클함으로 내게 다가왔다
빛나는 것들이 이제 내 것이 아니었을 때
사라지는 것들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자꾸만 눈에 띄였다. 무심한 일상에 경이로움으로
그 눈물겨운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가슴에 담기 위해 글을 쓰고 싶었다
늘 벌뿐이었던 내 옷 절망에서 일어나 새롭게 눈뜨고 싶었다
이 길에 큰 힘이 되어주신 리토피아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장성혜
·경북 봉화 출생
·197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침향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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