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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초점/전복의 상상력과 위반의 언어/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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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경희
댓글 0건 조회 4,013회 작성일 03-03-20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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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의 상상력과 위반의 언어
강경희(문학평론가)




1. 일그러진 현실을 일그러뜨리기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어를 통해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의식 구조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유행어를 꼽으라면 단연 '엽기'라는 용어일 것이다. '엽기'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초가 되는 보편적 관념 체계를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파괴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진지한 것을 하찮은 것으로, 신성한 것을 타락한 것으로, 비극적 상황을 희극적 상황으로 뒤바꿔 놓음으로써 일반적 삶의 질서에 흠집과 균열을 내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9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급속하게 변모된 사회·문화적 맥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90년대 이후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다양한 방식의 하위 문화가 대중 문화 전반에 자리 잡게 되면서 엽기는 새로운 문화적 코드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저급하고 외설스럽고, 또는 섬뜩한 공포를 유발하는 엽기 문화의 이면에는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문화의 독점화 현상을 지적하고 공격하려는 비판정신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엽기'란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 속에는 상당부분 '그로테스크(grotesque)'가 포괄하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 매우 기괴하고 이상한 세계의 혼합, 불가능한 것들이 봉합되는 현상을 총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로테스크의 방식은 예술이 인간의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정신이 구현된 산물이라는 사실을 과감하게 해체해 버렸다. 따라서 일상적 질서를 전복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일군의 시는 거짓과 위선이 팽배한 일그러진 사회를 다시금 일그러뜨림으로써 세계의 허상을 공격하고자 하는 역설의 시학인 것이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부자연적이며 기괴하고 돌연한 시적 상상력이 자주 발견되는 것은 타락한 현실의 모순과 질곡을 새로운 실험정신을 통해 헤쳐 나가려는 시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함성호, 이수명, 함기석 등과 같은 젊은 시인들에게 있어 이러한 시작 방식은 꾸준히 모색되어 오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광기와 집착이 만들어낸 변형된 인간, 단순하고 명료한 진술보다는 심하게 뒤틀려 있는 비정상적 발화법, 환상과 실재를 뒤섞어 놓는 시적 기법 등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된 삶의 허위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군의 시작 방법은 지난 계절 발표된 시인들의 시에서도 여전히 확인된다. 특히 김행숙의 [新桃林](≪문학과 사회≫ 2002 여름호), 함기석의 [SOS](≪현대시학≫ 2002. 5), 김민정의 [깊은 밤 부엌에서](≪리토피아≫ 2002 여름호) 과 같은 시에 나타난 독특한 시적 상상력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의 시는 모두 독특한 시적 이미지를 통해 욕망의 배설구인 도시적 삶의 허구성을 지적하거나 물질화, 화석화되어가는 비극적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김민정의 경우 그로테스크 한 방식보다는 환상적 문맥에 기대어 있다는 점에 있어서 다소 차별성이 존재하지만, 사물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전복하려는 특이한 시적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함께 논의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2. 오염된 세계의 그늘
도시의 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그 곳엔 첨단의 문명뿐 아니라 낡고 허물어져가는 과거의 흔적 또한 함께 공존한다. 즉 도시의 전면은 언제나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지만, 도시의 뒷골목은 여전히 구멍 뚫린 남루한 삶의 풍경이 숨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야말로 가장 극단적이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불협화음의 공간인 것이다. 도시가 구축한 삶의 양상은 전통적 농경사회의 모습과는 대조적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즉 전통적인 농경사회는 혈연과 지연으로 묶여있는 좁은 지역적 특수성과 유사한 직업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태도와 방향성 또한 일치하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들의 삶은 언제나 강한 인간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형성된 집단 공동체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것은 곧 이념적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도시는 산업화된 삶의 방식이 정착되면서 인위적이며 의도적으로 계획된 특수화된 영역이다. 이는 각기 다른 삶의 터전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장소라는 점에서 그들에겐 새로운 삶의 방식과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적 삶은 이전에 자연인으로 누려왔던 풍부한 본성과 감성, 자연적 질서와 조화에 길들여진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도시적 삶은 대지와 호흡하던 순수한 자연인으로서의 본성이 상실된 치열한 생존과 경쟁의 장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김행숙의 [新桃林]은 이러한 도시적 공간 속에 놓여진 사람들의 살풍경한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그늘지고 소외된 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실감 있게 그려내는 시편이다.

늙은 사내 머리를 흔들며 존다. 늙은이의 머리가 가볍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낮술 먹은 청년이 상대 없이 삿대질을 한다. 분을 푸는 청년과 묵묵부답 耳順의 귀.
오류·개봉·구로·신도림…… 문은 개폐를 반복했지만 문의 개폐는 역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신도림역 혹은.

재수생 시절 서소문 공원에서 삼립식빵을 뜯다가 뺨을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벤치에 길게 누워 자던 남자는 홀린 듯이 일어나서 나를 때렸다. 더러운 사내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유감없이 구겨진 신문을 적선하고 사라졌다. 이유 모르게 나는 자꾸 불량스러워지고 싶었다.
카세트를 어깨에 맨 맹인이 천천히 지나간다.  오류·개봉…… 점입가경.

검은뻐꾸기 운다. 신라음반 자연의 소리는 사계의 경계가 없다. 괭이갈매기와 휘파람새 나란히 날아간다. 동전을 몇 닢 그의 모자에 떨어뜨린 임신부는 가볍게 웃으며 슬며시 배를 쓸어본다. 툭툭 발로 찬다고?
맹인의 지팡이가 발등을 때렸다. 나는 그에게 들킨 기분이었지만 여운 없이 날아간 검은 뻐꾸기. 오류·개봉·구로·신도림……
― [新桃林] 전문

'新桃林'이라는 지하철 역명을 굳이 한자로 쓴 까닭은 아마도 그 이름이 환기하는 의미가 사뭇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복숭아 숲'라는 언어의 일차적 기의와는 달리 실상 신도림 역은 가장 번잡하고 더러운 또한 가난한 삶에 쫓기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출입구를 대표한다. 그럼으로 이 시의 제목은 시인의 시적 의도를 가장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시어라 할 수 있다.
우선 이 시는 크게 세 가지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장면은 젊은 취객과 노인이 앉아 있는 전철 안의 모습이다. 노인은 졸고 있으며 술 취한 젊은이는 아무런 이유 없이 혼자서 삿대질을 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전철 안을 어지럽히는 청년의 난동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그저 묵묵부답의 항변만으로 일관할 뿐이다. 그리고 젊은이가 행사하는 폭력적 행위는 대상이 없다는 점에서 처연한 모습으로까지 비친다. 두 번째 장면은 화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인상적 사건이다. 그것은 우연히 공원에서 빵을 먹던 어린 화자가 걸인에게 걸려 호되게 뺨을 맞게 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제시된 장면은 검은 인공의 뻐꾸기만이 울고 있는 지하철 안에서 맹인의 지팡이가 화자의 발등을 찍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세 장의 풍경은 서로 다른 상황을 통해 발생한 것이지만 실상 하나의 공통된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들의 모습이 모두 지하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하철은 지치고 힘든 일상에 얽매인 다양한 서민들의 모습이 배어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은 특히 각 연의 마지막 구절에 반복되는 '오류·개봉·구로·신도림……'이라는 시어를 통해 더욱 구체적인 연대감을 갖게 한다. 즉 시인이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지역 명칭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화려한 도시의 불빛이 아니라 노동에 지친 고단한 삶의 환기시킨다.  
한편 이 시는 아무런 개연성과 필연적 이유 없이도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 얼마나 쉽게 노출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이기도 하다. 즉 시 속에 나오는 '술 취한 젊은이'와 '걸인'에게 있어 폭력적 행위는 대상에 대한 적대적 공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이 폭발하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억눌린 감정은 실상 그들의 삶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인위적이며 인공적인 도시 생활은 무엇보다 감각에만 의존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감각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육체를 통해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육체와 관련을 맺지 않은 오염은 거의 없으며 육체의 경계는 위험하거나 불안정한 모든 경계를 상징하는 것이다"라는 메리 더글라스에 말처럼 오염된 육체는 폭력적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삶을 대변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김행숙의 [신도림]은 오염된 인간의 육체, 그에 따라 정신마저 병들게 된 우리 시대의 소외된 자들의 삐뚤어진 삶의 이면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상처받은 존재로 살 수밖에 없는 도시인의 비극은 그의 또 다른 시 [사소한 기록], [三日間](≪문학과 사회≫ 2002 여름호)을 통해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타인과의 어떠한 소통도 거부한 채 자신에게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는 의심만은 존재로 길들여진 인간', '심장 없이 삼일을 누워 여자만을 생각한다는' 가학적 인간의 모습은 모두 불구화된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어두운 내면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행숙의 시가 타인과 소통이 거부된 도시적 삶의 병폐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함기석의 [SOS]는 인간의 생명이 어떻게 유린되고 폐기되는지를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 시라 할 수 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캄캄한 포도밭에서 비상벨이 울린다
자정이다
달의 실핏줄들이 빠르게 빠르게 터져나가고
하늘에서 검은 쇠갈고리들이 내려와
잠든 아기의 턱을 낚아채 공중으로 사라진다

한 아기가 사라진다
두 아기가 사라진다
세 아기가 사라진다
자정이다
포도밭 뒤 13월의 바다는
붉은 촛농을 흘리며 고요히 타들어간다

자정이다
포도밭은 수술대 위에 가랑일 벌리고 누워 있고
갈가리 찢긴 아기의 심장이 또 하나
유령접시처럼 밤하늘로 사라진다
― [SOS] 전문
  
이 시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시적 전언은 매우 분명한 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고귀한 생명이 지워지고 버려지고 있는 위악적인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또한 이는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다시금 촉구하는 경고의 메시지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함기석 시가 매우 난해한 의미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해 볼 때 [SOS]는 그의 다른 시와는 대조적인 시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시의 형식 속에는 그로테스크한 시적 묘사가 두드러져 나타난다. 특히 타자에 의해 강제로 생명을 유린당하는 아이의 모습을 매우 이질적이 두 공간으로 병치시키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즉 이 시는 매우 친근한 정서를 유발하는 '포도밭', '달', '바다' 와 같은 이미지와 '비상벨', '쇠갈고리', '수술대'와 같은 금속성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결합시킴으로써 매우 낯설고 충격적인 영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대조적 사물들간의 충돌은 생명성이 거세당한 황폐한 현실을 보다 분명하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이 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다름아닌 '13월의 바다'가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마치 물처럼 흐르는 것이 자연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함기석은 우리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시간대를 시 속에 상정시킨다. 이는 곧 현실의 시간을 넘어선 죽음의 시간일 수도 있으며, 또는 13이라는 숫자가 환기하는 공포와 저주의 시간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함기석의 [SOS]는 폭력적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희생되는 인간의 생명 경시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함기석의 시가 잉태된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는 인간의 병든 의식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면 김민정의 [깊은 밤 부엌에서]는 파괴된 육체로 대변되는 분열된 삶의 방식 속에 갇혀 허덕이는 인간 존재의 초라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뚱보가 뚱보의 작은 집 안에서 뚱보를 찾는다
날 때부터 작은 집 안에서 낮잠 중인 뚱보는 일 초에
일 킬로미터씩 우주를 향해 뱃살을 날리고 뚱보의
작은 집은 일 초에 일 평방킬로미터씩 평수를 좁혀온다
……뚱보 게 없냐?
뚱보가 뚱보의 작은 집 창살에 코알라처럼 매달린
뚱보를 다시, 찾는다 뚱보가 뚱보를 부르면 뚱보의
작은 집 창살은 빽빽한 빙산을 병풍을 둘러치고
뚱보가 눈을 감으면 뚱보의 작은 집 창살은
뚱보의 이빨에 넝쿨 뻗은 은빛 교정기로 빛난다
……뚱보 게 있냐니까?

잠든 뚱보의 몸 속에 동맥다발처럼 뻗쳐 있는 자크가
일제히 벌어져 내린다 목뼈를 타고 척추를 따라
대퇴부를 거쳐 새끼발가락뼈까지 촘촘히 깔린 레일이
치골처럼 툭 터진 채 갈라져 내린다 절벽 아래선 넘실
넘실거리는 검은 쓰레기봉투의 튼 살결 속으로 헤엄치는
틀니들, 틀니만을 골라 틀니를 물어뜯고 물어뜯긴 틀리는
물어뜯긴 틀니만 골라 거푸거푸 새 틀니의 형을 떠낸다
― [깊은 밤 부엌에서] 부분

김민정의 시 [깊은 밤 부엌에서]에서는 난해한 이미지들을 서로 중첩시키고 교란시키는 언어 유희가 돋보이는 시이다. 그의 시 속에는 지극히 일상적이며 평범한 삶의 모습은 흔적은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여러 번의 겹쳐 읽기가 요구된다. 특히 김민정이 즐겨 사용하는 반복의 기법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주요한 인자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시어의 반복은 의미의 강조와 시적 리듬감을 살리기 위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내용상 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반복 형식은 전체 시의 내용을 유기적 결합할 때 그 효과가 확대될 수 있다. 하지만 시의 의미보다는 리듬이 집중되는 시의 경우 그것은 매우 일정한 호흡으로 읽힐 수 있는 휴지가 더 강조된다. 김민정이 취하고 있는 중복의 시어는 '뚱보'와 '뚱보'를 둘러싼 다양한 행위, 그리고 '뚱보'라는 존재가 갖는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 집요하게 찾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수없이 반복하면서 등장하는 뚱보에게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을 끊임없이 찾아다닌다는 사실이다. 실종된 자신을 찾기 위한 뚱보는 빙산으로 병풍을 치고, 전복된 쓰레기열차 안에 있기도 한다. 그러나 종국에 가면 이러한 뚱보 자신의 행위는 어떠한 의미로도 귀결되지 않는다. 즉  '접시'가 되어 버린 '뚱보'란 결국 황당하고 비논리적이며 부조리한 세계 속에 놓여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란 실상 폭력적이며 위선적인 세계이기에 어느 누구도 참다운 주체가 될 수 없는 이율배반적 삶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한편 김민정의 시에 있어 나타나는 시적 특이성 중의 또 다른 하나는 매우 구체적인 신체 이미지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는 '동맥다발', '목뼈', '척추', '대퇴부', '새끼발가락', '치골'뿐 아니라 신체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틀니'에 이르기까지 조각나고 분해된 신체성이 등장한다. 이것은 화자가 처한 시적 세계가 이미 정상적인 곳이 아닌 변형되고 왜곡된 상태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끝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비합리적 현실이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암시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3. 전위적 실험 정신을 위하여
미하일 바흐친은 그로테스크의 방식을 고상한 것, 정신적인 것, 이상적인 것의 하락이라 했으며 이는 모든 것이 물질적인 차원으로 전락하고만 현대사회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문학적 장치라 했다. 따라서 전위적이며 실험성이 가득한 예술 양식은 도덕적 이성에 기초한 보편적 이상과 합리적 세계에 대한 믿음이 불가능해진 오늘의 혼란스런 현실을 풍자하려는 시대 정신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번 계절 발표된 김행숙의 [신도림], 함기석의 [SOS], 김민정의 [깊은 밤 부엌에서]는 모두 조화와 균형에 대한 일탈, 상식과 질서에 대한 반동, 순응과 길들여짐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다양한 방식의 실험정신은 현대인의 허위적 삶을 폭로하고 또한 그러한 삶으로부터 우리가 다시금 추구해야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되묻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모든 전위적이며 도전적인 실험시는 보다 독자적이며 새로운 정신의 모험을 통해 새로운 시세계의 영역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방법론적 모색이 자칫 포즈화되고 형식화된다면 진정한 시적 울림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시는 늘 앞서가는 듯 보이지만 그것이 화려한 수사나 난해한 기교적 차원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겉모습만 있고 내용 없는 수상한 시가 되고 말 것이다.


강경희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숭실대 석사 및 동대학원 박사 수료
·현재 숭실대, 안양 과학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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