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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초점/왜 문학권력 비판인가?/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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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문학권력 비판인가?*
고명철(문학평론가)
1. 문학권력, 문학사회학의 새로운 탐구 과제
몇 년 전부터 문학 안팎을 달구었던 것은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권력'이란 단어는 으레 여당과 야당 간의 정쟁(政爭)을 떠올리게 하는 것, 즉 대권장악, 당권장악 등 정치권력을 상기시킴으로써 문학과는 어울리기 힘든 오염된 언어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권력이란 단어는 정치권력에게만 한정된 게 아니라 가히 모든 분야를 망라해서 적용되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90년대 이후 정치·경제보다 상대적으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다보니 문화산업이 각광을 받게 되고, 그러는 가운데 여러 현상을 분석하는 방법 중 '문화권력'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문학권력은 바로 문화권력의 부분을 이룬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1)
그런데 문학을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이 문학권력이란 말이 생소하거나 그리 달갑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여기에는 문학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이 견고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데요. 문학하면, 어딘지 모르게 지고지순하면서 신성한 어떤 그 무엇으로 인식하고 있으니까요. 말하자면, 문학은 인간의 정신적 영역을 중심으로 삼다보니, 우리 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불신감을 조장시키는 '권력'이라는 말과 결부시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생득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고 할까요. 하지만 이제 우리는 현실을 냉철히 직시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학은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문학도 하나의 '사회적 제도'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를 이루는 여러 제도들처럼 문학 역시 나름대로의 특수한 자기 역할을 하면서도 다른 사회적 제도들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때, 90년대 이후 문학의 위기라는 진단 속에서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문학권력 논쟁은 가볍게 넘겨볼 수 없는 중요한 문학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문학계의 논쟁은 문학만의 영역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회 전 부문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만,2) 90년대 이후 문학계의 논쟁은 문학만의 영역에 제한되어 있어 그밖의 영역의 관심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게 현실입니다. 게다가 영상문화의 급부상이 날이 갈수록 문학이 설 자리를 위태롭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문학계의 논쟁이 일반인들의 관심을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문학논쟁의 현실 속에서 문학권력 논쟁은 문학만의 영역에서 자족성을 띠는 게 아니라 문학과 관련된 사회의 제반 문제점들과 연동되는 가운데 문학사회학의 새로운 탐구 과제로 하나의 사회적 아젠다로서 그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2. 문학권력 논쟁의 긍정적 성과
그동안 진행되었던 문학권력 논쟁의 성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김정란, 남진우, 권오룡, 권성우, 신철하, 윤지관 그리고 이들과 한두 세대 뒤인 ≪비평과전망≫ 동인들이 힘차게 주고받은 '문학권력 논쟁'의 결과는, 그 한계점 못지 않게 중요한 비평사적 의의를 띤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보수적으로 고수해온 텍스트주의를 과감하게 벗어나 문학을 살아있는 사회적 역학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평가하는 관점을 제공하였고, 이념의 동질성보다는 전근대적인 학연에 의해 권력이 분점되는 행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부여하였고, 나아가 비평의 외연을 문인들의 실천방식에까지 넓힌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논쟁이 앞으로 심화될 경우, 최근 우리가 겪고 있는 '문학의 위기'가 외적인 요인들 때문이 아니라, 문학인들 스스로 재촉한 측면이 강하다는 내인(內因)성 성찰을 동반해야 할 것이다.3)
(이하 밑줄-인용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권력 논쟁은 그 동안 수면 밑에 고여 있던 문제들을 물위로 끌어 올려 논의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논쟁이 문단권력이나 특정 집단의 중심화에 대한 찬반 논의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문학의 본질 자체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학권력 논쟁은 결국 '문학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과 그것에 대한 답을 생각하도록 해주었다는 것이다.4)
유성호와 김성곤은 문학권력 논쟁에 열정적으로 가담한 논자들이 아니지만, 그동안 문학 안팎에서 진행되어온 문학권력 논쟁이 갖는 긍정적 요인에 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문학권력 논쟁에 대해 냉소와 침묵으로 일관하던 비평의 에콜(대표적으로 ≪문학과사회≫와 ≪문학동네≫)과 달리5) 문학권력 논쟁이 갖는 생산적 면에 주목함으로써 문학권력 비판이란 담론이 소모적 논쟁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성곤의 묘파한 바, 문학권력 논쟁을 통해 '문학의 본질 자체에 대한 성찰'의 길이 새롭게 모색되고 있다는 점을 가볍게 지나쳐서 안될 것입니다. 이 문제와 결부지어 문학권력 비판담론은 유성호도 언급했듯이 그동안 묵과되었던 문인들의 행태문제와 관련된 '문인들의 실천방식'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별 문인의 특정 행태를 문제삼은 게 아니라 '문학장'을 구성하는 문학제도적 맥락에서 문인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암묵적으로 승인되거나 묵인되어온 문학제도의 파행적 면을 응시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문학제도의 문제점을 성찰하고, 그 과정에서 훼손되어온 한국문학의 존재 의의와 자존을 지켜나가는 데 궁극적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6)
이제 이러한 문학권력 논쟁은 사회학자 강준만이 {한국문학의 위선과 기만}(개마고원, 2001) 및 {문학권력}(개마고원, 2001)이란 저서를 연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한 국면을 맞이한 것 같습니다. 강준만에게 문학권력의 문제는 문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학의 탐구 대상으로까지 확장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전개된 문학권력 논쟁의 주요한 쟁점을 몇 가지로 간추려볼까요.
3. 문학권력 논쟁의 문학적 실천
우선, 문학상과 관련된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문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상이라는 게 상을 주는 자와 상을 받는 자의 관계가 무엇보다 투명할 때, 그 상에 권위가 주어지며,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 떳떳할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상의 수상을 계기로 그 분야의 더 나은 발전을 도모할 수 있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게 또한 문학권력 논쟁이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새천년 벽두부터 이인화가 수상한 '이상문학상'과 관련한 문학상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다시 한번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7) 단순히 특정한 문학상의 시시비비에 국한되지 않고, 그동안 이 땅에서 관행화되어온 각종 문학상 제도로부터 누적되어온 문제점을 다각도로 검토해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던져줌으로써 문학권력 비판에 대한 또하나의 타산지석으로 삼게되었다고 할까요. 문제는 여기에 문학권력의 복잡한 양상이 매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시된 이인화의 '이상문학상' 수상의 경우 수상적 선정 기준의 엄정성과 객관성이 문학 안팎에서 문제시되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출판사의 문학상업주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격 문학의 대중성과 상업성을 확보한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경우 여타의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판매부수를 보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떠한 문학 상품을 내다팔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왕 '이상문학상'이란 문학적 전통을 축적시킨 문학상이라면, 그에 값하는 작품을 공정하게 선정함으로써 그 상을 주관하는 출판사는 물론, 그 상을 수상한 작가는 한국문학의 발전에 자그마한 공헌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상문학상'과 관련된 이러한 문제가 다각도로 집요하게 검토해보았다면,8) '동인문학상'이나 '미당문학상'과 관련된 문제점이 반복적으로, 그것도 아무렇지나 않은 듯이 불거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동인문학상'에서 불거진 문제와 '이상문학상', '미당문학상'의 그것이 같은 차원에 놓여있지는 않습니다. '동인문학상'(<조선일보> 주관)과 '미당문학상'(<중앙일보> 주관)의 경우 특정한 언론의 문화권력에 의해 주관되는 가운데 파생된 문제라는 점이 '이상문학상'과는 다른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언론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요구된 것입니다.
'동인문학상'과 '미당문학상' 모두 지금, 이곳에서 막강한 문화권력의 물적 토대에 기반한 언론사에서 주관한 문학상인 만큼 이들 문학상에 대한 엄정한 객관적 평가가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동인문학상'의 문제는,<조선일보>라는 특정한 거대 언론권력이 문학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비추어진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문학권력이라는 문제가 언론권력과 밀월관계를 맺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미당문학상'의 경우 얼마 전 친일파 708명의 명단이 공개 발표되면서 미당이 친일문인이라는 역사적 멍에를 짊어졌음을 상기해볼 때, 과연 어떠한 문학상 제정이 역사와 문학 앞에서 떳떳한가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9)
정치와 경제의 유착, 즉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진 바 있듯이, 이제 문학과 언론의 유착을 가리키는 '문언유착(文言癒着)'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문학과 언론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특정한 출판사, 특정한 문예매체, 특정한 작가, 특정한 비평가 등이 특정한 언론과 긴밀한 공생관계 속에서 문학권력을 지니게 됨을 뜻하는 말입니다. 최근 혹자는 문인을 후원하는 전통적 패트론이 매스미디어로 바뀐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 바 있듯이, 이제 문학과 언론의 관계는 그냥 소박하게만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특정한 매체에 특정한 작가가 자주 소개되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작가가 문학적 역량이 탁월한 작가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으나, 문언유착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이 문제 역시 좀더 세밀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어떤 매체가 그 작가를 조명하는 관점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근래 쟁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만, 이른바 '이문열돕기운동본부'에 의해 치러진 이문열의 소설에 대한 모의 장례식에서 우리가 정작 성찰해야 할 것은 이문열 개인을 향한 증오의 감정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왜 이문열의 문학에 그러한 의식을 치르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세한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다만, 이 의식은 언론개혁에 대한 시민운동을 홍위병의 행위로 몰아세우면서 이 땅의 수구세력의 정치적 입장과 밀월관계를 맺고 있는 작가의 문학과 그러한 문학을 후원해주는 언론을 향한 양심적 시민의 정치적 의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대 언론들은 그 모의 장례식을 문학의 문외한이 저지른 반문학적 행위라고 보도하는가 하면, 작가 박완서는 ≪문예중앙≫(2001년 여름호)과의 인터뷰에서 문학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과연 무엇이 반문학적 행위이며 문학모독인지, 우리는 겸허히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비평의 정론성 상실, 문학권력의 파행
그런데 지금까지 얘기한 문학권력의 문제는 사실상 문학 비평의 문제와 동전의 앞뒷면을 이룬다고 할까요. 이것은 비평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됩니다. 90년대 이후 비평이 출판사 혹은 문예지의 상업주의에 노출된 상태에서, 비판적 지성이 쇠퇴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자신들 출판사 혹은 문예지가 정략적으로 밀고 있는 작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해당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안목을 방해하고, 더욱이 그러한 비평이 우리의 문학을 살찌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해설 위주의 비평만이 넘쳐나고 있을 뿐, 비평의 생명이랄 수 있는 평가와 비판적 성찰이 동반되는 비평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할까요. 이것은 비평이 지니고 있는 권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평이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문예 매체의 편집위원의 대부분이 비평가이며, 비평가의 선택과 배제의 원리에 의해 특정 문예 매체의 성격이 결정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비평이 지닌 이러한 권력을 어떻게 하면 생산적으로 창조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문학권력 논쟁에서 문학권력 비판론자와 그 반대론자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기존의 메이저급 문예 매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평가나 비평의 에콜인 경우 문학권력 논쟁에서 보인 바처럼 자신들이 소유한 비평의 권력을 특권화시킬 뿐만 아니라 논쟁의 상대방을 향한 냉소와 무관심의 태도를 통해 오히려 자신들의 문학권력을 더욱 견고히 지키고자 하는 노회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대화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문학권력 논쟁을 '가짜' 논쟁으로 치부하며, 이 논쟁을 통해 문단의 중심부를 차지하려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갖고 있습니다.10)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은 각자의 비평적 입장에 따라 90년대 이후의 현실에서 형성되는 파행적 문학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학권력을 해체함으로써 생산적인 문학권력의 생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지, 문단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은 80년대와 현저히 다른 90년대 이후의 문학 현실 속에서 나름대로 문학의 진보 혹은 진보의 문학을 위해 치열한 고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파행적으로 형성되는 문학장에 대한 부정과 갱신의 움직임을 향한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의 비평은 진보주의적 문학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이때의 진보주의적 문학은 윤지관이 맹신하고 있는 80년대식 진보주의적 문학과는 다른 심급을 지닌다.11)
가령,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은 그 이념의 형식적인 진보성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역설적으로 보수화된 집단주의의 구현체로 전락하게 되는가에 대한 비판까지를 담보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은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이념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타자의 담론을 억압하고 압살하는 독백적 담론으로 전락하는가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담보하고 있다.12)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은 기존의 진보주의적 문학과 자유주의적 문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적시하고 비판함으로써 이 땅의 문학 토양을 객토하고자 하는, 새로운 진보주의적 문학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문학권력 비판이 추구하는 진보주의적 문학은 80년대식 진보주의 문학 ― 정치경제학적 문제틀에 의해 조명되는 것으로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문학제도(특정한 비평의 에콜과 문예 매체의 관계 속에서 노정된 문제, 문학상과 관련되어 잠복된 문제, 문언유착이 제기되면서 언론개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제반 문제, 문학상업주의의 고질적 병폐를 낳는 문제, 더 나아가 이 땅의 성숙한 논쟁 문화의 토양이 척박함이 불러일으키는 배제와 침묵의 카르텔 등) 깊숙이 스며있는 반문학적 요소를 거둬내는 문학적 실천의 과정을 포괄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5. 문학권력 논쟁의 새로운 국면 모색을 위해
그렇다고 문학권력 논쟁이 긍정적 측면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한 비평전문지와의 좌담에서 다음과 같이 문학권력 논쟁이 지닌 한계를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문학권력 논쟁과 결부지을 때면, 이런 반성을 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문학권력 논쟁이 창작과 긴장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자칫하면 비평가들만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문학권력 논쟁의 과정 속에는 창작의 토양을 객토하고자 하는 논의가 없던 바는 아니지만,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될수록 창작과 거리를 둔 비평만의 영역으로 협소해진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제 개인적으로 문학권력 논쟁을 거치는 가운데 얻은 비평의 소중한 자기성찰이었다고 할까요. 비평의 논쟁이 비평을 살찌울 뿐만 아니라 창작마저 동시에 풍요롭게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저의 소박한 생각으로는 그동안의 문학권력 논쟁의 맥락에서 비평의 존재론은 비평의 경계를 넘어 창작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가질 때 좀더 생산적 성과를 축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13
요컨대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겼던 비평과 창작의 관계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창작이 뒷받침되지 않은 비평의 논쟁은 결국 탁상공론에 불과하거든요. 사실 문학권력 논쟁이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이기에 지금까지 전개되었던 논쟁의 과정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한 단계 진전된 논쟁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문학권력 논쟁의 쟁점을 되돌아보니, 문학을 둘러싼 여러 제도적 측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할까요. 문학상, 언론, 문예매체, 비평가 등에 대한 다각도의 이해가 뒤따라야 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문학은 창작자와 독자만의 단순한 관계로 파악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욱이 문학권력 논쟁은 문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직간접 연관된 하나의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란 점에서 우리 모두 관심을 기울여할 토론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주>
* 이 글은 2002년 4월 20일에 치른 <현대시학회> '제 24회 봄시제'의 문학토론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그동안 전개된 문학권력 논쟁의 주요 쟁점들을 다시 한번 포괄적으로 되돌아보면서, 문학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통합적 안목이 절실히 필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문학권력 논쟁의 과정에서 자칫 흩어진 문제의식을 추스리고, 냉철한 자기점검을 통해 보다 생산적인 문학 토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그날 이 글에 대해 생산적인 토론을 해주신 두 분 토론자(박현수, 강경희)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시종일관 저의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경청해주신, 봄시제에 참석하신 여러 문인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 "결국 문학권력은 출판사, 에콜, 언론의 상호 유착 간계가 만들어내는 일종의 '문화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권경우, [권력을 위한 문학, 문학을 위한 권력], ≪문화과학≫ 2001년 봄호, 124면.
2) 저는 비평사의 논쟁, 특히 한국전쟁 이후의 비평적 논쟁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몇 가지 주요한 논쟁을 살펴보면, 1960년대 내내 문단의 맘모스 논쟁이었던 순수참여 문학 논쟁만 하더라도 문단 내에서만 관심을 일으킨 논쟁이기보다 4..19와 5.16을 거치면서 지식인의 사회 현실 참여 여부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된 문제의식을 보인 논쟁이었으며, 이후 1970·80년대의 민족문학 진영에서 일었던 일련의 리얼리즘 논쟁과 민족문학주체 논쟁 등은 문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에까지 그 논쟁의 파급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비록 개별 논쟁이 생산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채 논자들의 인신공격 내지 현실의 구체성을 담지하지 못하는 담론의 추상성으로 인해 논쟁의 소모전 양상을 띠기도 하였습니다만, 문학논쟁이 문학의 영역으로 협소하게 국한되지 않은 채 당대 지식사회의 담론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문학사회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3) 유성호,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과 관련하여], ≪민족예술≫ 2001년 12월호, 59면.
4) 김성곤, ['메두사'적 현실과 미로 속의 언어], ≪21세기 문학≫ 2001년 겨울호, 55-56면.
5) 최근 ≪문학동네≫가 문학권력 논쟁에 가담함으로써 겉으로 볼 때는 문학권력 논쟁에 대한 냉소와 침묵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문학동네≫의 입장을 살펴보면, 문학권력 비판자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한 문학권력 비판과 관련된 여러 성찰적 문제들을 매우 선정적으로 단순화시켜 파악하고 있는데('가짜논쟁'이라는 입장), 이것은 사실상 논쟁적 대화라기보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 타자의 견해를 일방적으로 규정내리고 그 어떠한 비판적 대화에도 나서지 않겠다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독백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6) 이 문제와 결부지어 류보선은 ['비판적 글쓰기' 혹은 대중기만으로서의 비판](≪문학동네≫ 2001년 겨울호)에서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이 비평가의 행태비판에 치중한 것을 문제삼고 있는데, 그의 논의는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이 무엇 때문에 비평가의 행태를 문제삼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비평가의 행태비판을 일종의 '인물비평'의 차원으로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의 논의를 꼼꼼히 이해하지 못한 류보선의 자의적 해석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는 류보선의 이 같은 비판의 오류와 일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 문학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그 원인 중 하나인 '출판자본가-문학비평가-작가'의 관계에서 비평가의 행태를 집요하게 파헤침으로써 비평의 자기성찰의 치열성을 다져보자는 생산적 계기에 귀기울일 필요는 없을까. (중략)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그의 문제의식이다. 비평가의 행태비판을 문학제도 비판의 맥락과 절연시킨 채 인식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기존의 관행화된 문학제도의 누적된 문제점에 천착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문제점에 대한 불감증을 낳고 있기까지 하다." 졸고, ['문학권력 비판'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곡해들], ≪다층≫ 2002년 봄호, 85-86면.
7) '이상문학상'과 관련한 문제점에 대한 상세한 비판은 이명원의 [<이상문학상>, 우상화한 권위에 정을 박아라], {해독}, 새움, 2001 참조.
8)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펴낸 2001년 {문예연감}에 따르면 국내에 약 300여 개의 문학상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문학상이 많은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크고 작은 문학상의 수상이 난립하는 가운데 문학상을 수상하는 문학단체의 문학이념이라든가, 문학적 성향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문학상 제정과 그 수상의 관행은 문학인 스스로 문학적 권위를 실추케 함과 동시에 문학상 수상과 관련된 문학제도의 문제점을 낳게 하며, 바로 여기에 문학권력의 비합리성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학연과 지연, 특정의 에콜 등이 개입할 소지가 많으며, 따라서 문학상은 일종의 나눠먹기 식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문제점을 낳는 것입니다.
9) 지난 해 일본의 교과서에서 우리 역사가 왜곡당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한 목소리를 내던 언론이, 정작 우리의 뼈아픈 식민지 역사의 치부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응시하지 않으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타자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뒤틀린 역사의 파행성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를 다지는 것도 또한 중요한 역사적 과제가 아닐까요. 그러한 차원에서 '미당문학상'을 비롯한 이미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는 친일파 문인의 문학상(가령, 팔봉비평상)에 대해 발본적인 문제제기가 시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되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젊은작가포럼'의 ['친일파 문인' 이렇게 생각한다](≪한겨레≫ 2002. 3. 25.)는 우리의 선배 문인들이 지난 날 역사의 과오를 정당하게 응시하고, 그리하여 양심적 문인으로서 나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성찰할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였다고 생각됩니다.
10) 그 대표적인 논자로서 문학비평가 하응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의 다음가 같은 발언은 이를 여실히 입증해줍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 어느 분야나 마찬가일 것입니다. 한 분야의 권위자나 실력자가, 또는 권력이 있다 말한다 하더라도,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마 수십 년 동안 그 분야에서 봉사하고, 노력하고, 공부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그런 공을 들이지 않고 권력을 쟁취하고 싶어하는 자들, 그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그 사람이 누리는 것은 가지고 싶은데, 그만큼 노력하기는 싫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히려 권력 논쟁을 부추겨서 앞사람을 쓰러뜨리고 싶은 그런 욕구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웹진 ≪인스워즈≫(2001년 8월호) http: //www.inswords.com
11) 졸고, [언론개혁, 문학권력, 문인-지식인], {'쓰다'의 정치학}, 새움, 2001, 27면.
12) 이명원, [푸코를 넘어서는 사람들], ≪비평과전망≫ 4호, 155면.
13) [특집좌담: 비판과 관용의 네트워크], ≪오늘의 문예비평≫ 2001년 여름호, 50면.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및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저서 평론집 {'쓰다'의 정치학} 등
·광운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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