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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초점/거대한 중심에 갇혀버린 매너리즘/하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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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상일
댓글 0건 조회 3,792회 작성일 03-03-20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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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중심에 갇혀버린 매너리즘
― 신경숙, {바이올렛}을 통해 본 베스트셀러의 정치학 ―
하상일(문학평론가)


1. 베스트셀러의 정치학
오늘날 문학을 둘러싼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문화산업의 획기적인 발전과 이를 뒷받침하는 공적 제도의 영향으로 문학 환경은 90년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논리를 허겁지겁 따라가고 있다. 물론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의 발전 속도에 비추어볼 때 그 정도는 미약할지 모르지만, 예전의 수공업적인 출판환경이 이제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기업시스템으로 변화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러한 출판시스템의 기업화 과정에 있다. 즉 기업의 목표가 이윤 창출의 극대화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이는 문학의 세속화와 상업화를 부추김으로써 본격문학의 전반적인 퇴행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확고하게 지우려는, 그래서 문학의 대중화 현상을 무조건 폄하하려는 태도는 너무나 보수적이고 옹졸한 문학관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문학의 대중화에 대한 고민이 오늘날의 변화된 문학환경에 대처하는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문학 자체의 성숙과 발전의 결과가 아닌 소수 출판권력에 의해 분점되거나 독점되는 출판시스템의 결과이거나, 마치 대중연예인을 키우듯 인기 작가를 몰고 다니며 독자들을 회유하는 스타시스템의 방식이라면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스트셀러는 작가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출판사나 언론에 의해 조작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오늘날 문학계의 순수하지 못한 혐의를 더 이상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상업주의란 이윤 추구의 정신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 추구 자체를 금기시하거나 직접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온갖 전략에 의해 왜곡되거나 부풀려짐으로써 정당한 경쟁의 과정을 차단하거나, 상품 자체의 질적 향상보다는 그럴듯한 포장이나 광고에 의해 소비자를 현혹시키려는 유통 과정의 병폐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상업주의 역시 독자들이 책을 많이 읽고 또 많이 사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란 점에서 그 의도 자체를 전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전략이 작가의 최소한의 삶을 보장함으로써 문학적 역량을 더욱 성숙시키는 제도적 기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무조건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려는 출판사들의 상업적 성공의 도구로 변질된다면 아주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제는 '문학도 하나의 상품이다'라는 명제를 무조건 부정만 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비판적'이라는 단서는, '그렇다면 문학이 어떤 상품이 되어야만 하는가?'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1) 하지만 오늘날의 출판 환경은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순수하지는 못하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출판사는 점점 더 권력화되고 언론은 이러한 권력 위에 군림하며 선심성 기사를 쓰고, 결국 작가는 이들의 눈치만 보게 되는, 마치 권모술수와 야합, 그리고 권력을 향해 줄서기로 일그러진 오늘날 우리 정치판의 타락한 구도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이에 대해 필자는 그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려니 하고 아무리 넘어가려 해도, 그래도 가장 순수해야 할 문학 환경인데 하는 생각에 이르면 도저히 비판의 목소리를 억누를 수가 없다. 베스트셀러의 정치학,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불순함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글의 논의 대상은 신경숙의 소설 {바이올렛}(문학동네, 2001)이다. 이 작품은 그의 초기 작품집인 {풍금이 있던 자리}(문학과지성사, 1993)에 수록된 [배드민턴 치는 여자]를 장편으로 개작한 것이다. 그는 [작가 후기]에서 "오산이({바이올렛}의 주인공)는 내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의 분신이다. 이 여자를 바로 세상에 다시 내보내려 했는데 다른 작품에 밀려 이제야 이루었다. 빚어지지 못한 채로 내 마음속에서 십여 년을 함께 산 셈이다. 오해 많은 세상에 이 여자를 내보내려 하니 미안해 죽겠다. 제대로 맛있는 것도 먹이지 못했고, 좋은 옷도 입히지 못했으며, 종내는 꿈과 욕망조차 바스러지게 했으니 이 여자의 어미나 되는 듯 마음이 쓰리다. 이 여자를 통과해 가는 시선 속에서 이 여자가 새로 부활하기를 바랄 따름이다."고 말함으로써 약 10년의 간격을 두고 개작된 이번 작품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독자로서 이번 소설이 이전에 비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래서 얼마만큼의 깊이와 감동을 불러오는지 살펴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생각으로 두 작품을 꼼꼼히 읽었는데, 결과적으로 두 작품 사이의 차이를 크게 느낄 수가 없었다. 또한 {바이올렛}은 그 동안 신경숙의 소설 세계가 견지해온 심문(心紋), 즉 내면성의 세계와도 별 다를 바 없는 유사품이란 사실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그는 이제 지독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그 매너리즘의 배후에는 출판자본과 언론권력의 화려함에 익숙해져버린, 그래서 그 즐거움에 쉽게 도취되어버린 오늘날 인기 작가의 씁쓸한 뒷모습이 그대로 각인되어 나타난다. '거대한 중심에 갇혀버린 매너리즘'이 지금 우리 소설을 고여 썩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2. [배드민턴 치는 여자]와 {바이올렛}
지금 한국문학은 몇몇 소수의 출판자본과 인기 작가, 그리고 이들을 비호하는 언론권력에 의해 철저히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작가가 어떤 작품을 썼는가 하는 작품의 질적 차원은 나중 문제이고, 오히려 어느 출판사에서 작품집을 출간했는지, 광고는 얼마나 되었는지, 그리고 어느 평론가가 해설을 썼는지, 게다가 언론에서 얼마나 호의적으로 기사화해 주었는지 하는 문학 외적 사실이 더욱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 따라서 문학제도와 출판환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가운데 촌철살인의 자세로 우수한 작품 쓰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작가들은 이러한 문학판의 구도를 전혀 도외시할 수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작가는 문학성 이전에 상품성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고, 출판과 언론에 줄서기를 하는 비굴함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점은 현재 우리 문단 전체의 일반적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출판사 ― 언론 ― 비평가의 삼각 그물 속에 작가가 꼼짝 못하고 갇혀있는 형국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이 인기 작가의 경우라면 더더욱 심각하다. 인기 작가는 힘들게 올라온 중심의 자리에 대한 불안감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영향력 있는 비평가에게 주례사비평을 부탁할 수밖에 없게 되고, 신문사 기자들에게는 적극적인 홍보전사가 되어줄 것을 호소한다. 결국 이 과정에서 작가는 스스로의 정체성과 작가의식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냄으로써 보다 성숙된 작품을 창조해내기보다는 독자의 기호에 영합하는, 속된 말로 그 동안 짭짤한 수익을 올린 '그 나물에 그 밥' 식의 작품을 어물쩡 내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정말 지독한 악순환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경숙의 {바이올렛}은 필자에게 그의 초기소설, 아니 그의 소설 세계 전반을 답습하는 매너리즘의 결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배드민턴 치는 여자]에서 {바이올렛}에 이르는 실제적 과정은 약 1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무엇을, 어떻게 다시 말하기 위해 작가가 이 소설을 개작했는지 그 진의를 짐작하기가 좀처럼 어렵다. 필자의 우둔함 때문일까, 고작 인물의 형상을 좀 더 구체화하고 사건의 얼개를 복잡하게 하고 평소 말더듬의 문체를 더욱 지루하게 끌고 있을 뿐 이전의 단편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다. [배드민턴 치는 여자]의 주제 역시 '소통에의 욕망'이었고, 이 작품에 실린 내용 거의 대부분이 한 줄도 다르지 않게 그대로 {바이올렛}에 수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개작 과정이 "전혀 흠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가장 신경숙다운 방향에서 완성을 거둔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방민호의 지적([닭을 안은 소녀의 행로], ≪작가세계≫ 2001년 가을)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또한 "혼신의 문학만이 줄 수 있는 가슴 먹먹한 감동"이라는 출판사 광고 문구 역시 도저한 추상성을 감당하기 어렵다. 필자가 보기에 신경숙은 지금 너무도 거대한 중심에 갇혀버린 것 같다. 그래서 그 중심의 안온함에 쉽게 길들여져 더 이상 상상력의 확장을 이루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깊숙이 빠져버린 것이다. 소재의 고갈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내면성의 문체라는 그의 소설 꼬리표 역시 이제는 진부한 장식에 불과하다. "이제 한 5년간 어디로 사라졌다가 새로운 상상력이 넘치는 작품들을 들고 다시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어느 독자의 솔직한 충고에 그는 귀기울여야 한다. 이전 작품들로부터 창조적 배신을 하지 않는 한 그는 이러한 매너리즘의 늪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바이올렛}은 남성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정체성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주인공 오산을 통해 남성적 폭력의 일상성과 이로부터 상처받은 여성들의 말할 수 없는 욕망의 자리를 신경숙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형상화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과감하게 노출시키는 '배드민턴 치는 여자'와 달리 어느 누구에게도 소통의 대상이 되어보지 못한 주인공에게 사진기자는 강력한 소통의 욕망을 심어주지만, 그의 관심과 스킨쉽은 한낱 불순한 제스처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저놈 말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놈에겐 당신만큼이나 예쁜 애인이 자그마치 셋이나 있소. 저놈은 누구에게나 다 그래요. 여자 킬러라니까요."(p.157.)라고 말하는 동행의 충고는 불순한 욕망을 차단하기에 충분하지만, 주인공에게 있어서 한낱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주인공은 그 이후 더욱 사진기자의 환영 속에서 넋을 잃고 방황할 뿐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행위에 대해 오늘날 우리 여성들의 전형적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의 반발과 비난이 쏟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신경숙은 주인공 오산이를 통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소설을 계몽성의 틀에 가두어 읽는 것은 시대착오적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올바른 여성의 주체의식 형성과 정체성 찾기와 무관하게 흘러가버리는 것은 더더욱 문제가 아닐까?
신경숙의 소설 속 인물은 {외딴방}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너무도 비일상적인 흔적을 쫓아가고 있다. 물론 일상의 현실을 넘어선 허구적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이라는 점에서 신경숙 소설의 비일상성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소설원론적 접근이 '개연성'이라는 소설의 미학적 장치를 전혀 무시하는 극단적 비약으로 흘러버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신경숙의 소설은 대개 개연성을 바탕으로 구조화되기보다는 우연성과 신비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다. 흔히 그의 소설에 부여되는 '문체의 미학'은 바로 이러한 개연성의 결핍을 해소하는 가장 뚜렷한 장치가 되면서 신경숙 소설의 특장(特長)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대표적 여성 작가인 박완서는 신경숙의 소설에 대해 "짜임새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쓴 것 같은데 읽고 나면 바로 그 점이 이 작가만의 구성의 묘였구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박완서의 이러한 찬사가 오히려 신경숙 소설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현실적 구성이란 처음부터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전적 소설 {외딴방}에서 "구성을 다 짜놓고 쓰진 않는다. 메모하는 습관도 없다. (……) 내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으로 순간적으로 뛰어드는 것들이 문장을 만들어낼 때가 많다. 때로 그것들은 폭발적이어서 앞 문장을 따라가다가 슬몃 일어나버릴 때가 있다. 그래서 글을 마칠 때까지는 어떤 글이 될지 나도 모를 때조차 있다."(p.265)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소설가의 개인적 창작방법을 두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러한 창작 스타일에 대해, 구성의 결여에서 오는 산만함을 드러내고 있다거나 지나치게 사적인 목소리의 과잉을 드러내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마음의 심연을 헤아리는 문체, 독자를 사로잡는 신통력 따위의 과장된 수사만 남발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 번 인기 작가는 영원한 인기 작가인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검증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신경숙의 이름만 걸고 나오면 출판사·언론은 과대포장을 하고 있으니,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연예매니지먼트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신경숙의 소설은 이제 문학지망생으로서의 초발심(初發心)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의 소설 작품 목록에 [배드민턴 치는 여자] 하나면 충분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소재의 고갈에서 비롯된 기존 모티프의 부풀리기, 혹은 새 옷 입히기로 일관한다면, 그는 인기 작가들을 따라다니는 대중독자들은 여전히 붙들어둘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점점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오늘날 소설은 너무도 지나치게 미시적 세계에 골몰하고 있다. 정체된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인간의 길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거시적 사유는 너무도 부재한 게 사실이다. 정확히 말해 지금 문학판은 작가들에게 자유로운 상상력을 열어가도록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적자생존의 혹독한 현실이 무섭게 작가들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팔리느냐가 작가의 생명과 직결되는 한 작가들은 주체적 소설관을 견지하기 힘들다. 잠시 영화판을 둘러보면,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떠들어내는 오늘날 영화시장의 모습이 어떠한가? 조폭과 코메디 이야기에 국한된 소재적 빈곤 속에서 자화자찬을 남발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불균형이 한국 영화 산업의 기형적 양상을 초래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하면서도 여전히 돈이 되는 영화에 투자자가 몰리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 지형도는 소수들의 즐거운 축제에 다수가 들러리를 서고 있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는 중심의 타락에서 비롯된 양상이다. 중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배드민턴 치는 여자]를 {바이올렛}으로 바꿔놓은 신경숙의 작가적 양심을 묻고 싶다. 그는 진정으로 소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소설문단의 바람직한 지형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대단한 실력과 야심으로 소설세계를 구축하려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역시 이제 신인 소설가의 위치에서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중심의 타락을 경계하면서…….


3. 중심의 타락을 경계하며
문학권력논쟁이 문단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미 확보하고 있는 문학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수구세력의 불온성에 대항한 일련의 비평활동은 정체된 우리 비평계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비판적 비평활동에 대해, 권력을 비판함으로써 또 다른 권력을 지향하는 음모라고 반비판을 서슴지 않는 지식인 문인의 소아적 영웅주의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판의식의 실종은 결국 비평의 퇴행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비평은 주례사와 덕담 같은 근친적 해설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매체를 중심으로 권력화되어가고 있는 문단의 지형은 문인들을 암묵적으로 줄세우고 있고, 그 줄을 타지 못하는 문인은 전혀 주목을 받을 수가 없다. 입버릇처럼 젊은 문인들의 발굴과 육성을 외치지만, 정작 그들의 비평담론은 인기 작가나 원로작가에 치우치는 것이 보편적 상황이다. 20대 80의 사회적 불균형은 어느새 우리 문단의 고질적 분할 구도로 굳어져 가고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중심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이 중심의 타락을 경계하지 않는 한 우리 문학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중심에 의해서 인기 작가가 탄생하고, 중심에 의해서 베스트셀러가 만들어지고, 중심에 의해서 문단의 역학관계가 조성된다면 더 이상 문학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문학권력논쟁은 '중심의 타락과 균열의 징후'에 다름아니다. 이에 대해 구모룡은 "비평이든 학문이든 모든 조건이 중심주의에 결박되어 있는 현실이라면 이러한 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노력 없이 한국 사회에서 올바른 문화적 소통은 요원하다."2)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고 있다. 이는 우리 문학이 중심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폐쇄적 에콜의 권력 시스템에 길들여져 버리는 한 어떠한 갱신과 희망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신경숙은 이러한 말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신경숙은 "나는 한 번도 문학판의 눈치를 보거나 중심에 나를 가두려 한 적이 없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아직은 그의 소설적 자의식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무수히 쏟아졌던 신경숙 담론 ― '신경숙 신드롬'이란 말까지 있지 않았던가? ―에 적잖이 흥분했고 또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담론의 힘에 이끌려 글을 써왔던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 또한 중심의 타락과 맞물려 있다. 우선 매체권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자사 비평가들의 주례사비평으로 작품을 과대포장하고, 언론은 이들의 비평을 여과 없이 수용하여 기사화함으로써 독자들의 감식안을 미리 차단해버리고, 게다가 대대적인 광고3)를 통해 독자들의 의식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리는 치밀한 유통 전략을 통해 베스트셀러는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사라지고, 고도의 전략만이 덩그러니 남은 출판환경은 인기몰이, 즉 판매부수 늘리기에 여념이 없을 뿐이다. 최근 필자는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당선작인 박현욱의 {동정 없는 세상}을 읽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어쩌면 싱거울지도 모를 그 이야기를 인간 성장의 보다 넓은 맥락에서 다양하게 읽히게 만든다"4)는 심사평을 읽으면서 그 동안 ≪문학동네≫의 신인 선발 자체를 무화시켜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본심 심사과정에서 얼마나 좋은 작품들이 탈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문학동네≫의 프리즘을 통과하는 데 있어서, 김동식, 김영하, 백민석, 신수정 네 사람의 예심위원에 의해 선택된 작품의 면모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필자는 이 작품이 '정말 싱거운' 소설밖에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수상을 뒤로 한 채 또 한 해를 흘려버려야 하는, ≪문학동네≫ 심사위원들이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소설경향과 문체에 적합하지 않아 탈락된 우수한 예비소설가들이 이 수상작을 읽고 우리 문단의 폐쇄적 권력화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버리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이 앞선다. 이도 모자라 ≪문학동네≫는 성적 상상력을 부각시키는 직설적인 광고 언어를 동원해 판매를 부추기고 있어서 우리 문단의 영향력 있는 매체가 보여주는 지독한 상업성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예지의 상징권력과 출판자본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야기되는 비평의 파행성"5)은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더군다나 <조선일보>와의 문언유착 문제에까지 이르면 ≪문학동네≫는 독 안에 든 쥐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우리 비평의 모습은 잃어버린 건강성을 점점 회복해 가고 있다. 이러한 비평의 희망 앞에 잘못된 관행과 폐쇄적 에콜의 권력화는 결국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출판사, 언론, 그리고 비평가에 의해 베스트셀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작가의 혼신의 노력으로 베스트셀러가 탄생하길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 신경숙은 이제 자신의 문학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거대한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한다. 그 길은 아주 자유로운 길이어야 한다. 때로는 낯선 길이라도 과감히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의 문학이 중심으로 향하는 대로(大路)를 외면하고 오솔길에서 방황할 때 더욱 성숙된 결과를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방황의 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을 듯하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주>
1) 하상일, [세속과 탈속의 대중지향성], ≪오늘의 문예비평≫. 2000년 여름, p.214.
2) 구모룡, [비평적 글쓰기와 이타성의 지평], {제유의 시학}(좋은 날, 2000), p.343.
3) 신문광고의 서적 광고 중 문예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30∼40% 정도이다. 그리고 출판사의 광고비는 총매출액 대비 15∼25% 정도이다. 이는 광고의 비율이 가장 높다는 화장품(10%)과 제약(9%) 업종을 훨씬 상회한다. 이성욱, [베스트셀러는 무엇으로 사는가], {문화분석의 몇 가지 길들}(문화과학사, 1996), p.127.
4) 황종연, [심사평], 박현욱, {동정없는 세상}(문학동네, 2001), p.195.
5) 고명철, [한 문예지의 초고속 성장, 그 빛과 그림자], {'쓰다'의 정치학}(세움, 2001), p.75.



하상일
·편저 {고석규 문학의 재조명}
·부산대, 동의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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