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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초점/포스트모더니즘 또는 사이버 문학 시대의 이야기 전략/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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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 호
댓글 0건 조회 4,861회 작성일 03-03-2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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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또는 사이버 문학 시대의 이야기 전략
이호(문학박사)




1. 글을 시작하며 : 이야기(하기)에 관한 소론
현대는 서사의 시대이다. 서사 즉 이야기(하기)는 비단 문학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구석구석까지 그 촉수를 드리우고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비평가 미셀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온갖 대중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우리의 꿈과 의식까지도 조작하는 시대가 곧 현대라고 진단한다. 그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세 가지 의미에서 '재인용된'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첫 번째는 우리 사회가 광고 매체나 정보 매체를 통해 대량생산하는 무수한 이야기들에 의해서, 두 번째는 그 이야기들의 인용에 의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야기들의 재인용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1)
이처럼 무수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생산·유통·소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범위를 좁혀서, 시나 소설, 극과 같은 '문학적' 이야기, 그 중에서 소설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이야기가 선사하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전에 미처 듣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새롭고 독창적이고 기발한 이야기라면 그 즐거움이야 더 말할 것이 없다. 소설에 해당하는 영어 novel의 어원에 '새로움'이나 '신기함'이란 의미가 내포된 것이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 만큼 대부분의 작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요구하는, 변덕스럽고 까탈스런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의 즐거움을 보장하는 것이 꼭 새로움과 독창성에만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읽고 보고 듣는 것에도 못지 않은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가. 이야기의 줄거리를 뻔히 알면서도 같은 소설 작품을 몇 번이고 다시 즐겨 읽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미 보았던 것과 이미 읽었던 것, 말하자면 기시감과 기독감이 이야기를 읽는 또다른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기존 작품들의 표절 내지 짜깁기라 하여 비난의 도마에 올랐던 페스티쉬 같은 포스트모던적인 창작 기법들이 나름의 근거와 타당성이 있음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진부하고 낯익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읽고 듣고 보는 중요한 하나의 이유로, 아마도 소설 작품 속의 허구 세계에 대한 몰입, 즉 동일시가 보다 손쉽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읽기에서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동일시란 허구 세계를 실재하는 현실 세계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허구 세계가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과 어떤 식으로든 닮아있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은 실제 현실의 모방이다'라는 오랜 테제는 바로 이것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모방'은 현실을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 찍어내고 복사한다는 의미에서의 모방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현실의 모방은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의 직접적인 모방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의 모방이다. 모방은 가능성과 개연성과 필연성, 즉 현실은 마땅히 그럴 수 있고, 그럴 듯 하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예술적이고 심미적인 제약 조건들에 의해 선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2) 예컨대, 우리 고전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로 거론되어온 '권선징악'에 대해 생각해보자. '선은 항상 악을 이긴다'라는 이 낯익고 진부한 주제적 관념이 실제 현실에서까지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물론 이런 믿음이 허황된 것이라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그것은 단지 예술 속에서만 유효한 '시적 정의poetic justice'일 뿐이다. 그것은 당대 사람들의 현실관 내지 세계관으로, 작품 속의 세계는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기대 지평이자 암묵적인 규범이며 이데올로기다. 이것들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그림', 즉 현실에 대한 이미지다.
사정이 이쯤 되면, 이야기 세계에로의 동일시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실과의 직접적인 유사성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기대치와 이미지라는 간접적 매개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이미지의 환기와 수용, 즉 동일시가 현실 그 자체인 것처럼 얼마나 자연스럽게 또한 성공적으로 이루지는가의 여부는 이야기가 당대 현실에 대한 대중의 합의된 관점에 얼만큼이나 일치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대중의 기대치를 여지없이 깨뜨리고 배반하는 이야기가 공감을 얻을 경우도 많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마도 기존에 확립된 현실관이 수정되거나 폐기될 위험에 처했다는 징후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자 거울일 수 있다면, 이야기(하기)가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방법이라는 데 일단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2. 숨김과 드러냄의 역학 ― 실존을 위한 속음 혹은 속이기
먼저 현실에 대한 이미지의 환기와 수용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구현되는, 말하자면 이야기 세계와의 동일시가 교묘하고도 '자연스럽게'(이것은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 저항과 거부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뜻임을 명심하자) 이루어지는, 오프라인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어디까지나 포스트모던 시대로 규정되는 우리 시대의 서사 내지 이야기(하기)의 본질과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서 논의될 작품은 우리 소설사에서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은,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이다.3) 이 작품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거의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작품이므로, 아마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고 있으리라는 전제에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날개]의 "박제된 천재를 아시오"라는 말로 시작하여 횡설수설하는 듯한 독백이 이어지는 저 유명한 프롤로그 부분은 다들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이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는 프롤로그가 [날개]의 악명과 신화화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겠지만, 이 글의 주제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고, 또 [날개]의 전반을 시시콜콜히 논의할 지면상의 여유도 없어 일단 제외하고 바로 본 이야기로 건너뛰겠다.
[날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앞서 이 작품이 '나'라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된다는 데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하면 얼핏 보아서는 '나'라는 주체를 한결같은 동일인으로 여기기 십상이지만, 엄밀히 말해 이 나는 동일 주체가 아니라, '이야기하는(서술하는) 나'와 '이야기되는(서술되는) 나'로 분열된 주체이다. 자서전의 서술 형식을 생각해보면 보다 쉽게 이해될 것이다. 자서전은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나이 먹고 인생을 제법 관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회상하는 서술 형식을 취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분명 동일인이되 서로 다른 존재다. 현재의 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것을 과오였느니 올바른 행동이었느니 하고 제법 거리를 두고 관조하고 판단할 수 있는 반면, 다른 한쪽의 자아 즉 '과거 그때 그곳의' 나는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이 과연 미래(이야기하는 나의 현재 시점인)에 어떤 영향을 미칠는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 속에서 이와 같은 자아의 구분을 명확하게 찾아낼 만한 증거가 있는가, 또한 그것을 애써 찾아낼 필요가 있는가라고 반문할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허구가 아닌 실제 생활에서조차 자신이나 타인을 대상으로 이야기할 때, 자신과 타인을 명확하게 이해하거나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때가 흔히 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종종 이야기하기 전에 분명히 실재했으리라 생각했던 대상의 형상이 오히려 이야기의 진행 과정에서 전혀 다른 형상으로 빚어지고, 그에 따라 오히려 이야기가 대상을 임의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곤 하는 것이다. 현실적 대상에 대한 이런 이해와 설명의 어려움 내지 불가능함에 대한 인식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거대 이론(진화론과 같은)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와 거부로 나타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이야기하기 행위 자체의 불확실성 내지 이야기하는 주체가 갖는 정체성의 견고함에 대한 부정과 의심이 동반됨은 물론이다. 그런 만큼 근래 사이버 문학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자아의 분열 내지 '주체의 분열'은 혁신적이고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 소설의 이야기하기가 갖는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강조하건대, [날개]에서 이야기하는 자, 즉 서술자 '나'는 이야기되는 자, 허구 세계 내에서 행동하고 경험하는 주인공 '나'와는 분명 다른 존재이다. 이런 자아의 분열이 왜 중요하며,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 해답을 구하려면 [날개]에서 내가 자주 던지는 의문들을 둘러싼 '앎'과 '모름'의 기묘한 역학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아내에게 직업이 있었던가? 나는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325)

나는 우선 내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기에 착수하였으나 좁은 시야와 부족한 지식으로는 이것을 알아내기가 힘이 든다. 나는 끝끝내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말려나보다.(326)
      
내가 [날개]에서 되풀이해서 던지는, 이 아내의 직업에 관한 질문은 부부 같지 않은 부부 생활을 '경험하였던' 주인공 나의 경우에, 아내의 직업을 정말 '모른다'고 하는 정보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대목들은 대체 무엇인가?

ⓐ 18가구에 각기 빌어 들은 송이송이 꽃들 가운데서도 내 아내가 특히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으로 이 함석 지붕 및 볕 안드는 지역에서 어디까지든 찬란하였다. 따라서 그런 한떨기 꽃을 지키고― 아니 그 꽃에 매어달려 사는 나라는 존재가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거북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321)
ⓑ 나는 내 좀 축축한 이불 속에서 참 여러가지 발명도 하였고 논문도 많이 썼다. 시도 많이 지었다.(323)
  
ⓒ 불장난도 못한다. 화장품 냄새도 못 맡는다. 그런 날은 나는 의식적으로 우울해 하였다. 그러면 아내는 나에게 돈을 준다. 오십전짜리 은화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에 써야 옳을지 몰라서 늘 머리맡에 던져 두고 한 것이 어느 결에 모여서 꽤 많아졌다.(325)
  
ⓓ 오래간만에 보는 거리는 거의 경이에 가까울 만치 내 신경을 흥분시키지 않고는 마지 않았다. 나는 금시에 피곤하여 버렸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그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까닭을 잊어버린 채 이 거리 저 거리로 지향없이 헤매였다. 돈은 물론 한푼도 쓰지 않았다. 돈을 쓸 아무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는 벌써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329)

위의 인용문들을 이 작품에서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주체의 분열과 관련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아내의 직업을 모른다/나는 아내의 직업을 안다
ⓑⓒ→나는 잠과 어린애 같은 놀이로 세상 물정 모르고 소일한다/나는 이불 속에서 시도 짓고 온갖 연구를 한다
ⓒⓓ→나는 돈을 쓸 줄 모른다/나는 돈을 쓸 줄 안다  

이같은 모름/앎으로 양분되는 자아 분열의 징후들은 서술 시점(時點), 즉 일인칭 서술에 특유한 서술 위치의 혼동에서 비롯된다. 모르는 쪽은 당연히 작품 세계 내에서 이야기되는 자아, 즉 '그때 그곳'에 자리한 나일 것이다. 반면에 아는 쪽은 이런 자신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회고하고(사실 이는 섣불리 단정하기 곤란한 말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회상한다는 증거는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나일 것이다. 이런 주체의 분열은 그저 일인칭 서술이 갖는 일반적 특성만으로 간단히 처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아내의 직업을 모른다고 하면서도 은연중에 그것을 알고 있다는, 이율배반적인 발언들을 작품 곳곳에서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의 읽기가 작품의 이해에 꼭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꼭 허구적인 문학 작품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타인에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를 되새겨보자. 그럴 때 어떤 의도나 이해관계 때문에 자신을 자신이 생각하는 '본 모습'과 다르게 표현하고 왜곡시킬 수밖에 없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물론 남이 나에 대해 이야기할 경우에도 그것이 정말 나에 대한 진실을 말한다고 보장할 방법이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야기하기의 본질은 결코 '솔직함'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함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우리는 오히려 이야기의 '진실함'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三十三번지라는 것이 구조가 흡사 유곽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 번지에 十八가구가 죽―어깨를 맞대고 늘어서서 창호가 똑같고 아궁지 모양이 똑같다. 게다가 각 가구에 사는 사람들이 송이송이 꽃과 같이 젊다. 해가 들지 않는다. 해가 드는 것을 그들이 모른 체 하는 까닭이다. 턱살 밑에다 철줄을 매고 얼룩진 이부자리를 널어 말린다는 핑계로 미닫이에 해가 드는 것을 막아버린다. 침침한 방 안에서 낮잠들을 잔다. 그들은 밤에는 잠을 자지 않나? 알 수 없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잠만 자느라고 그런 것은 알 길이 없다.(319-320)

'유곽'이라는 곳이 일제 강점기의 공창(公娼)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니, 위의 인용은 "三十三번지"에 거주하는 아내와 다른 여인네들의 직업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명확한 단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나는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주장하니, 터무니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런 나의 몰지각함(?)이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나의 생활에 비추어보면 아주 그럴 듯해 보인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나의 생활은 밤낮 잠만 자고, 아내가 갖다주는 맛없는 밥을 무슨 모이처럼 넙죽넙죽 받아먹고, 아내의 외출 동안에 몰래 아내의 방에서 돋보기로 불장난을 하거나 화장품 냄새를 맡는 등 거의 금치산자나 유아에 다름없는 퇴행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퇴행성이야말로 나의 무지를 그럴 듯하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이다.
주지하다시피, [날개]에서 모든 갈등의 근원은 부부 같지 않은 부부생활, 즉 '남편이 창부인 아내에 얹혀사는 생활'4)로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이 물론 정상적인 부부상(像)은 아닐 터인데, 한술 더 떠서 남편이 아내의 직업조차 모르고 생활한다는 것은 분명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그야말로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그럴 듯하게 만드는, 교묘한 소설적 장치가 있으니 그것이 '시점의 소원화'이다. 시점의 소원화란 "독자에게 낯익은 어떤 현실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함으로써 소원화를 얻는"5) 소설 기법이다. 그런데 날개의 상황 설정 자체가 이미 일상적인 것과 어긋한 낯선 현실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일종의 '역(逆)소원화'라 할 수 있다. 방금 지적했듯이, 아내의 직업도 모를 뿐만 아니라 거의 어린아이와 같은 내가 그런 도착적인 상황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럴 듯한 현실로 탈바꿈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독자는 이런 낯선 현실에 소원화와 이질감을 느끼다가도 이런 현실을 제시하는 나 역시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람임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작품 속의 현실에 동화되는 것이다. 그럴 듯하지 않은 상황을 그럴 듯하게 만드는, 이런 '나'의 교묘한 자기 위장과 연출을 포착하지 못한다면 이 소설의 굳게 닫힌 의미의 방을 열어줄 열쇠를 찾을 수 없다.
앞서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가'라는 나의 '해석학적 의문'6)이 실상은 해답이 이미 주어진 의문인 까닭에 작품의 의미를 찾기 위한 단서로서는 별다른 가치가 없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의문은 '왜 나는 아내의 직업을 모른다고 하는 것인가'라는 것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다면, 비로소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 의문을 해결할 단서는 의외로 간단히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가라는 가짜 의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내가 다시 제기하는 내객→아내, 아내→나 간에 오가는 '은화(돈) 주고받기'에 관한 또다른 의문이다. 먼저 내객이 아내에게 주는 돈이 곧 아내의 직업과 관련되어 무슨 의미를 갖는지는 다음의 진술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그들 내객은 왜 돈을 놓고 가나? 왜 내 아내는 그 돈을 받아야 되나? 하는 禮儀 관념이 내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저 예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혹 무슨 대가일까? 보수일까? 내 아내가 그들의 눈에는 동정을 받아야만 할 가엾은 인물로 보였던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으레히 내 머리는 혼란하여 버리고 버리고 하였다. 잠들기 전에 획득했다는 결론이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보거나 한 일이 참 한 번도 없다.(326-327)

앞서 인용한 도입부나 ⓐ, ⓓ, ⓔ에서 보았듯이, 내(이 '나'를 '서술하는 나'라고 딱히 단정하기는 곤란하다)가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또한 돈의 용도나 가치를 익히 알기 때문에, 내객이 아내에게 주는 돈이 단순히 "예의 관념"이 아닌 "무슨 대가"나 "보수"일지 모르고, 그 때문에 "오직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은화 주고받기'는 "매춘을 근거로 한 지불인(내객)―지불(돈)―수취인(아내)의 교환관계"인데, 문제는 이것이 다시 "증여자(아내)―놓고 감, 지불(돈)―수령자(나)의 관계구조로 이행"된다는 데 있다.7)

왜 아내의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나 하는 것이 풀 수 없는 의문인 것 같이 왜 아내는 나에게 돈을 놓고 가나 하는 것도 역시 나에게는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327-328)

따라서 은화 주고받기에 얽힌 이 두 번째의 의문이야말로 [날개]의 의미를 해명하는 결정적 단서이다. [날개]의 모든 갈등은 "창부에 기생해사는 남자"와 아내간의 전도된 생활, 즉 아내의 직업이 매춘부라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왜 아내는 매춘을 하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확인하다시피, 그것은 "무엇에 써야 옳을지" 모를, 나에게는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돈을 벌기 위해서다(앞의 인용문ⓒ를 보라). 따라서 갈등의 또 다른 한 축은 아내가 매춘부라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무직자 내지 생활 능력이 전혀 없는 무능력자, 금치산자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데도 있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져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321)
  
내가 제법 한 사람의 사회인의 자격으로 일을 해보는 것도 아내에게 사설 듣는 것도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도 싶었다. 나에는 인간 사회가 스스로왔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324)

나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한 번 켜보고 아내 베개를 내려 베이고 벌떡 자빠져서는 이렇게도 편안하고 즐거운 세월을 하느님께 흠씬 자랑하여 주고 싶었다.(339)

나는 "직업이 없"는 데다가 "사회인의 자격으로 일을 해보"겠다는 의지조차 전혀 없다. 더구나 "세상의 아무 것과도 교섭을" 하지 않고 방 안에서 뒹구는 생활을 "편안하고 즐거운" 세월이라고까지 여긴다. 이런 세월을 자족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아내의 직업을 모른 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앞서 제기한, '아내가 왜 나에게 은화를 주는가'라는 의문과 연관지으면 그 해답은 분명해진다. 아내가 매춘을 하는 이유는 바로 나에게 은화를 주기 위해서, 즉 나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이다. 아내의 매춘이, 아내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인지, 나의 강요나 방조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것이 무직자인 데다 사회 참여의 의지마저 없는 나에게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처럼 진실에 대한 은폐와 책임 회피가, 아내의 직업을 모른 체하고, 아내의 매춘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생활을 "편안하고 즐거운 세월"이라고까지 자위(自慰)하고 위장하는 행동으로 나타난 셈이다. 여기에 덧붙여 나의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행태 역시 진실에 대한 무지를 그럴 듯하게 만들려는 눈가림에 불과하다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현실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에서는 그와 관련된 단서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직업이 없는, 아니 직업을 갖지 않으려는 이유나 세상과 교섭을 하지 않으려는 것, 아내가 매춘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정황 제시가 없기 때문이다. 현실 자체에 대한 분석이나 비판이 회피된 채로 오직 현실에 대한 반응만이 극대화되어 나타날 때, 현실은 그저 이해나 설명이 필요없는 불가사의이며, 양립할 수 없는 적대자, 안타고니스트일 뿐이다.
이처럼 현실 내지 진실에 대한 모르기 또는 모른 체하기가 그것을 아는 것보다 별반 더 나을 것이 없는 역설적 상황, 나아가서 이 같은 자발적인 무지를 실존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필연화하는 상황 연출이야말로 이 작품의 묘미일 것이다. 이처럼 진실을 직시하려는 노력이 때로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이같은 역설적 상황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 이래로 문학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졌던 낯익은 주제이다. [날개]는 이를 살짝 비틀어서, 진실을 알면서도 속는, 아니 속는 체하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에서 일어날 법한 서글프면서도 엄연한 진실임을 어찌 보면 가증스럽고도 뻔뻔하기까지 한 태도로 증언한다. 세상 또는 타인을 속이려면 먼저 자신부터 완벽하게 속일 수 있어야 된다는 것, 이것이 이야기하기의 성패를 가늠하는 척도일지도 모른다.

3. 거울의 상상력 ― 허구 속에서 허구를 의심하기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전면화된 '소설에 대한 소설', 이른바 메타픽션metafiction의 특징은, 이야기하기의 자의식성을 보다 더 강조한다는 데 있다. 즉 서술자가 자신이 이야기하는 행위, 즉 허구를 꾸며내는 행위를 독자에게 강하게 환기시켜 허구 세계와의 동일시를 고의로 방해하고 차단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허구와 사실과의 관계는 대단히 문제적인 것이 되는데, 그것은 소설이 단지 허구일 뿐이라는 자명한 명제의 확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허구가 허구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 다시 말해 이야기하기를 통해 새로운 진실 가능성의 세계, 즉 일종의 '대안 세계'를 창조해낸다는 데 있다.
이 대안 세계의 창조 목적은 허구가 결코 세계를 모방하거나 재현할 수 없으며 항상 이 세계를 이야기하는 담론들만을 모방하거나 재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8) 그렇다고 창조된 세계가 물론 실재하는 세계와 완전히 절연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일상 생활의 맥락을 환기한다. 단지 일상의 생활을 고의로 파괴하고 왜곡하여 인공의 세계 즉 문자나 다른 매체의 작용에 의한 세계 창조의 가능성과 그 창조 과정을 강조할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계가 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우리가 그것을 이야기하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는, 전복적인 인식과 상상력을 읽어낼 수 있다.
여기서 살펴볼 작품은 사이버 시대의 문학적 글쓰기의 한 전범을 제시한 이영수의 것이다.9) 그 중에서 특히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현실과 인터넷의 도래로 구체화된 가상 현실과의 관계를 문제삼고 있는 [스핑크스 아래서]가 여기서 논의될 것이다.10) 이 작품은 진짜(진실)와 가짜(허구)의 혼돈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작품 역시 1인칭 회상형의 서술 형식을 취하는데, 이 작품의 서술자 '나'는 [날개]의 일인칭 서술자에 비하면 비교적 신뢰할 만하다. 그렇다고 해도 허구에서 '나'란 존재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를 하는 나의 정체성은 거꾸로 내가 말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존재하고 확인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거울에 비친 모습에서 정체성과 실존을 구하려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 작품의 중심 사건은 작품 제목과 동명의 영화 '스핑크스 아래서'의 위작 여부에 관한 것이다. 사건은 내가 일년 전 인터넷에 실재하는 영화 전문 사이트 IMDb(Internet Movie Database)에서 우연히 이 영화에 관한 자료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이 영화에 관해 올려진 자료들은 제작년도가 1946년이라는 것, 감독이 헨리 빈스고, 주연 배우가 해리엇 홀바인과 줄리 벤슨이라는 정도뿐이었다. 그런데 일년 뒤에 사이트를 방문하였을 때, 이 영화에 관한 자료들은 클로이 베리라는 여자가 작성한, 줄거리에 관한 간단한 시놉시스까지 실려 있을 정도로 상당히 늘어나게 된다. 나는 호기심에 클로이 베리에게 문의 편지를 띄우지만, 주소 잘못으로 반송되어 오고, 그 사이에 관련 자료는 점점 늘어만 간다. 영화에 관한 사진 자료까지 올라오자 나는 사진의 출처를 추적하여 올리비아 에번스라는 여자의 홈페이지를 찾아내고 거기서 사진 몇 점을 다운받는다. 그러던 중 나는 꿈속에서 그 영화가 위작일지 모른다는 심상치 않은 암시를 받게 되고 다운받았던 사진들이 위조된 것임을 알아낸다. 나는 그 사실을 올리비아 에번스에게 보내게 되고, 그녀는 답장을 통해 그 영화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은 자신의 위조이고, 클로이 베리도 자신의 가명임을 밝힌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스핑크스 아래서'가 실재한 영화라는 증거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기에 이른 것이다. 단순히 장난삼아 위조를 시작했던 올리비아는 처음 이 기막힌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 만한 사태에 황당해하고 분노하여 모든 것이 가짜임을 강력히 주장하지만, 결국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세상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초자연현상인지 나는 몰라요. 하지만 이 점만은 말할 수 있어요. <스핑크스 아래서>는 내가 만들었어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뭐라고 주장해도 이 점만은 바꿀 수 없어요." 당당하고 조금은 감동적이기까지 한 선언이었지만 끝에 쓴 자신 없는 추신이 분위기를 망쳐버렸다. '날 믿나요?' 나는 곧장 답변해주었다. "믿어요."(36)

영화가 실재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음에도, 나는 오히려 올리비아보다도 더 이 영화가 위작임을 확신한다. 우연치 않게도 나에게도 그녀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사망한 국문학자인 나의 큰아버지 최민승 교수는 말년에 [금오전(金烏傳)]이라는, 제목과 간단한 줄거리만 알려졌을 뿐, 지금은 유실된 소설 연구에 매달렸었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죽은 뒤에 책상 서랍에서 그 소설의 복사본이 발견되고, 두 달 뒤에는 원본이 발견되어 이 소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실재한 것임이 증명된다. 그런데 문제는 먼저 발견된 [금오전]의 복사본이 위조된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내가 갖고 있었다는 데 있다.

나는 큰아버지의 복사기로 사본을 만들고 원본을 회사에 부쳤다. 복사기를 다루는 게 서툴러 종이가 여러 차례 중간에 끼어서 제거해야 했는데, 그러는 동안 내 엄지손가락에 톤이 묻었고 그것들은 다시 유리 구석에 묻었다. 물론 그 지문은 내 사본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금오전> 복사본의 첫 두 장에도 그 지문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큰아버지가 쓰러진 건 내가 복사를 끝낸 지 겨우 3시간 뒤였다. 그 뒤에 큰아버지가 복사기를 만질 시간이 없었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 뒤에 <금오전>을 들고 와 복사해서 큰아버지의 집에 숨겨두었다는 말이 된다.(39)
            
위조되었음에 분명한 사본의 원본이 발견된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쯤 되면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해답은 명확하다. 세상과 올리비아, 세상과 나 가운데 어느 한쪽은 분명 거짓말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예술 작품을 조작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일까? 우연히 나는 어떤 종교 관련 뉴스 그룹에서 이상한 글을 읽었는데, 그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나 당신 친구라고 믿을 만한 몇몇 근거가 있다. 하여간 그 글에 따르면 인간 역사에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구식 역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적인 무정부사회에 도달하는 과정 따위가 아니다. 역사는 각 시간 단위마다 무언가를 생산해 내야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에 한 특정시기가 그 시기의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았다면 그 시기는 실패한 셈이 된다. 그리고 만약 한 단계가 충분히 성공적이지 않다면 나중에라도 그것을 보충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멋대로 예를 들어, 만약 1940년대 필름 느와르가 게이 여성의 존재를 이용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나중에라도 보충해주는 것이 우리의, 아니 당신들의 의무라는 말이다.(41)
역사라는 것이 어차피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역사의 성공을 위해서 증거를 조작하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역사의 목적이며 임무이다. 세상의 역사가 이런 식으로 조작되었다면,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사 조작의 합목적성이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밝히기 위한 노력의 무익함을 정당화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나는 필사적으로 강변한다.
  
당신의 주장을 요약해 볼까? 우선 당신은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당신의 답변은 '역사란 종이 위에 적힌 글씨들과 깨진 도자기 조각에 불과하다'였다. 역사는 기록을 통해서만 영향력을 행사한다. 만약 사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역사책은 전세계적인 음모집단이 조작한 것이라고 우겨보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는 바탕 위에 존재한다. 기록이,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적 기억이 단단하게 뒤를 받치는 한 프랑스 혁명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어도 유효하다.(40)
  
어떤 역사적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사건에 대한 기록만이, 실재한 기록을 바탕으로 다수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용인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사건 그 자체 즉 원본의 존재보다는 사건에 '대한' 기록, 즉 사본이 사건의 역사적 실재성을 증명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현대 사회의 근원적 문제가 겹쳐지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인터넷 온라인이라는 가상 현실 속의 의사소통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진실의 실재성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나는 좀더 알고 싶어서 그 클로이 베리라는 여자의 이름을 눌러 줄거리를 좀더 자세히 적어주겠냐고 문의 편지를 보냈다. 잠시 후, 그 편지는 주소가 잘못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반송되어 왔다. 이 역시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서비스와 ID를 바꾸기 마련이니까.(23-24)

온라인 자료를 믿지 못하겠다면 브라이언 스티븐즈의 <잊혀진 벽돌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모뉴멘탈 픽쳐즈의 잊혀진 수많은 영화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30)
나는 한 번 만난 사람의 e-mail 주소 따위는 보관해 두지도 기억해 두지도 않지만 당신의 경우는 예외이다. 당신이 온라인에서 지껄인 황당한 연설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까지 당신의 연설을 <스핑크스 아래서>와 직접 연결시키지 않았을 뿐이다.(40)

동일인이 여러 개의 ID나 이메일 주소로 얼마든지 증식되고 복수화될 수 있다면 그/그녀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따라서 그가 전하는 정보가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 불가능하다는 것이 온라인상의 의사소통이 갖는 전형적 특징일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역으로 책이라는 오프라인상의 매체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현대의 일반화된 의사소통이 사람 대 사람의 대면과 교류, 사실의 직접 목격이나 확인이 아닌, 문자나 영상 매체에 의해 연출된 간접 기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그런 기록들의 유통과 전파는 결국 끊임없는 인용과 매개의 사슬(관련 링크들)에 의해 첨삭되고 왜곡되기 마련이다. 나와 올리비아, 나와 '당신' 및 그밖의 모든 이들 간에 오가는 모든 정보가 이처럼 진실에 대한 모방, 즉 '사본'에 불과하다면 진실/거짓의 가름은 애초부터 불가능할뿐더러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대상 자체가 아닌 대상에 대한 모방이 압도하는 이런 식의 의사소통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는 길은, 권위나 다수의 인정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일단의 사회적 합의가 진실로 굳어지고 용인되는 신화화, 곧 이데올로기적 매커니즘이 첨단 의사소통 매체의 발달로 인해 더욱 가속되고 전면화된 형태일 것이다.
현실 자체보다는 현실에 대한 정보의 복사와 인용, 이른바 메타리얼리티가 리얼리티를 압도하는 상황을 현대 사회의 자명한 공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소설이라는 허구 속에서 가상 현실이라는 또다른 허구를 이야기하는 이 소설의 이야기 상황 자체가 이미 허구의 허구, 즉 메타허구의 상황을 애초부터 상정하고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스핑크스 아래서'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영화라는 확실한 증거가 불어날수록 나는 그것의 실재 여부를 더욱더 의심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반박을 했고, 사실 지금도 당신을 반박하고 싶지만 그때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으며 내 미약한 반박으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별 죄의식 없이 과거를 건드릴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41)

사실 나는 당신들 때문에 지금 매우 불안하다. 당신이 뻔뻔스럽게 외디푸스나 호루스라는 대화명을 사용하며 당신들의 주장을 나에게 들이밀고, 분명히 올리비아가 어떻게 나올지 알면서도 태연스럽게 그녀의 창작품을 사용하는 데에는 뭔가 더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제, 나는 해리 빈스의 유품 속에서 <스핑크스 아래서>의 나머지 부분이 발견되었고 그 영화의 '감독판'이 곧 복원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이제 나는 빈스와 홀바인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자기가 벤슨이라고 주장하는 할머니의 신원도 미심쩍기 짝이 없지만 그 뉴스를 듣고 잠시 흥분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당신들이 올리비아 에반스한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물어봐도 될까? 왜 최근에 나온 해리엇 홀바인 전기의 공저자 중 한 명이 클로이 베리인지?(42)

나의 반박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서술자인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확인할 도리가 없다. 또한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들이 과거의 예술 작품을 조작해서 얻는 이유나 이익이 무엇인지도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단지 분명한 것은, 올리비아의 최근 동향에 관한 정보일 뿐이다.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영화를 허구화한 최초의 창조자 올리비아가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작업에 예의 가명으로 참여하게 되는 아이러니는, 허구가 진실로 공고화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허구의 힘이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실례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실재했던 것보다는 있을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허구의 진정한 본질이라면, 이처럼 허구 속에서 실재한 역사의 허구성을 다시금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일찍이 이상이 거울 속의 자신에게서 실존의 근거를 찾으려 했던 것처럼, 허구를 통한 진실의 모색 가능성을 여전히 우리에게 열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 것이다.

4. 글을 마무리하며
일찍이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세상의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도 결국 문장 구성에 작용하는 문법 규칙들처럼 몇 가지 심층적 규칙들에 의해 생산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야기의 연구는 바로 그런 규칙들을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프롭이 러시아 민담에서 행위의 기본 단위들, 즉 '행위기능actant'을 31개로 정리하고, 거의 모든 민담이 예외 없이 이 행위기능의 일정한 결합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점에서 구조주의 연구의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처럼 수많은 이야기들이 한정된 몇 개의 기능 단위로 환원될 수 있다면 결국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단순히 기능 단위들의 조합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당연한 것이다. 이에 착안한 일부 전위적인 서사 이론가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2진법 연산 조합의 원리처럼 기본적인 이야기 구성 단위, 즉 주제 단위들을 조합함으로써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원리들을 찾기 위한 실험을 시도하기도 한다.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와 마찬가지로, 이해와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게 뒤얽힌 현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원리와 법칙을 알아내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인식 구조에서 결과된 것이다.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정의하고 단정짓는 것, 말하자면 현실의 확정성에 대한 굳은 믿음과 추구가 오랜 세월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은, 리얼리즘의 창작 원리의 근본 토대였다는 것은 이 점을 뒷받침한다. 물론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와서 그런 확신과 믿음은 근거 없다는 것이 널리 주장되고 용인되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부정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현실의 기반이 없다면 역으로 현실의 정체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담론으로서 허구를 주장할 근거 역시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상호배제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현실이 어떤 방식으로 존립하고, 그것을 어떻게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라는 데에는 수많은 이견들이 있을 수 있고, 그것들은 우리 주위에서 무수한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하고 소통된다. 이야기는 사건의 우연하고 무작위한 묶음이 아니라, 사건들을 있을 수 있고 있어야 보이도록 의미있고 심미적으로 배열한 조직체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혼란스러운 현상들을 이해와 설명이 가능하도록 질서화하고 조직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를 통한 이런 질문/답변의 주고받기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삶을 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기보다는 삶이 무엇인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삶의 이유와 존재의 필연성을 구하려는 우리네 세상살이의 태도와 신념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현실의 진실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쉼없이 묻고 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
1) 제레미 탬블링, {서사학과 이데올로기}(이호 옮김, 예림기획, 2000), 16-17쪽에서 재인용.
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김재홍 옮김,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0), 72-74쪽 참조.
3) 이 글에서 인용되는 이상의 [날개]에 관한 것들은 {이상문학전집2}(김윤식 엮음, 문학사상사, 1994)에서 나온 것이다. 면수 표시도 모두 여기에 의거한 것이다.
4) 최혜실, {한국모더니즘 연구}(민지사, 1992). 154-156쪽 참조.
5) F. K. 슈탄첼, {소설의 이론}(김정신 옮김, 문학과비평사, 1988), 28-29쪽 참조.
6) 이는 프랑스의 저명한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해석학적 약호hermeneutic code'라는 개념에 해당한다. 그에 의하면 이야기 읽기에 작용하는 약호들이 다섯 가지 있는데, 이중에서 해석학적 약호는 이야기를 추동하는 기본 의문, 즉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왜 그런가'라는 의문을 촉발함으로써 독자의 흥미와 기대치를 이끌어낸다고 한다. 스티븐 코핸·린다 M. 샤이어스, {이야기하기의 이론}(임병권·이호 옮김, 한나래, 1988), 174쪽 참조.
7) 이재선, [현대소설의 권태의 시학](≪현대문학≫, 1997, 5월호, (주)현대문학), 400쪽.
8) 퍼트리샤 워, {메타픽션}(김상구 역, 열음사, 1989), 134-135쪽 참조.
9) 이영수는 1994년부터 온라인에서 글쓰기를 시작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용욱에 따르면, 이영수는 '듀나DJUNA'라는 ID 외에는 성별이나 나이, 경력 어느 것도 알려져 있지 않은 익명의 작가이다. 단지 긴밀한 관계에 있는 둘 이상의 사람이 이영수라는 이름으로 공동 창작을 하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알려진 정보이다.  이용욱, [사이버리즘의 문학적 구현 양상-이영수의 {면세구역}을 중심으로-], 2-3쪽.
10) 여기서 인용되는 것들은 모두 이영수의 두 번째 작품집 {면세구역}(국민서관, 2000)에서 나온 것이다. 면수 표시는 이 작품집에 근거한다.


이호
·서강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 문학박사
·저서 {현대 심리소설의 서술 전략과 이데올로기}
·연구 논문 [<날개>의 플롯과 해석]등
·번역서 {이야기하기의 이론} 등
·현재 선문대, 한라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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