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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문화산책/박봉구 이야기 --<이발사 박봉구>를 보고/이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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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희
댓글 0건 조회 4,385회 작성일 03-03-2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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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구 이야기
― [이발사 박봉구]를 보고
이승희




봉 구 : 나는 우주에서 왔제. 그렁게 이 지구에 적응허기가 힘들제. 이노무 엿같은 시상은 십년에 한 번썩 강산이 안 변하믄 난리가 나불제. 오늘은 내일허고 다르고 내일은 모레하고 다르고 어제 진 집은 내일 뽀개고 어제 뎃고 잔 년은 오늘 밥맛이고 그러고 사니께 나는 이놈의 지구에 적응을 헐 수가 없제. 깜방은 우주여. 내는 우주를 떠도는 외계인이여. 우주를 떠돌다가 지구에 도착허니께 적응허기 힘들제. 그것도 제정신이 아닌께 더 힘들제. 할라다 할라다 안되믄 지구를 떠나야제. 우주로 도로 가야제. 우주로 가. 이 지구를 떠야제.

1.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직업은 이발사. 4대째 가업으로 내려온 이 일을 그는 '하늘이 내려준 천재'라고 부르며, 그의 부친이 늘 하던 말은 이제 그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 "신체에서 난 것 중에 젤로 중한 것이 대긋박인디 그것을 보허고 있는 것이 머리터럭이다. 혀서 옛날에 단발허라고 혔을 때 우리 조상덜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내 대긋박은 짤라도 머리터럭은 손 못된다.'라고 데모도 허고 글도 쓰고 혔다. 그려서 이발을 허는 일은 중하고 소중허다. 그것이 용자를 다듬는 일이고 이것은 소홀히 헐 것이 아니다. 그렁게 머리를 손질허는 일은 돈을 벌으야겄다는 것뿐만 아니고 사람덜이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을 선비정신을 갖고 깨우치는 일이다." 그러나 어디, 세상은 그런가. 남자들은 용자를 다듬기 위해 더 이상 이발소를 찾지 않으며, 그들이 그곳을 찾을 때는 여자의 "안마나 마싸아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부수적인 그 어떤 행위들"이 필요할 때뿐인 것이다. 여기서 갈등이 일어난다. 세상은 그의 '선비정신'을 농담이나 비웃음거리로 받아들이면서 이 '천재'를 하질(下質)로 간주하는 반면, 그는 이러한 변화와 가치의 서열화에 결코 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좁힐 수 없는 이 간극은 점점 증폭되어가고 상황은 점점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그는 가위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는 이발사 아닌 이발사로 전락하며,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끝내 살인을 저지르고는 '동면'에 들어간다.
고선웅 작, 최우진 연출로 올려진 [이발사 박봉구](2002.5.3∼6.2. 동숭아트센터 소극장)는 바로 이처럼 세상의 현실논리와 속도에 적응할 수 없는 한 '외계인'이 입은 상처와 파멸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직하며 순수한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세상의 속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연극이다. 이 연극을 주목하게 된 것은, 새로운 가치의 진입으로 뒷방 신세를 면치 못하거나 심지어 사라져야 했던 것들에 대한 쓸쓸한 시선을 담기 마련인 이 연극이 올해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힐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데 있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으면서도 우울하기까지 한 이 연극이 주관객층인 20대 관객뿐만 아니라 3, 40대 관객들로부터도 후한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먼저 그 비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발사'와 '박봉구'라는 두 어휘가 만들어낸 제목부터가 묘한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시대착오적인 인상을 던져주기도 하지만, 주제의 성격 또한 30대 혹은 40대 관객에게 좀더 호소력이 있을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가능성과 불가능성, 유동성과 고정성, 도전과 안주, 희망과 체념, 미래와 과거 사이에 놓인 사회적인 나이가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버거운 무게와 빠른 속도에 짓눌리는 자신에 대한 알리바이를 찾고 싶어할 때, '순수'를 향한 동경과 향수는 매우 매력적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순수의 시대가 끝나버린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일어나는 때도 아마 그때 즈음이리라. 그러면서도 작가 고선웅 씨의 현란한 입담으로 이루어진 재치 있는 대사와 배우들의 의뭉스러운 연기의 앙상블은 흡사 '조폭 코미디' 영화를 방불케 하는 탄력성으로 젊은 관객들의 마음까지를 사로잡은 듯했다. 실제로 조폭들이 등장하기도 하려니와 조폭을 압도하는 박봉구의 '지사적'인 뚝심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웃음은 관객들의 눈과 귀를 매우 즐겁게 하였다.
또한 그 전달 방식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는 것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피로 얼룩진 박봉구가 독백을 하면서 동면에 드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연극은, 이 인물이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는 역전적 구성을 취하며, 이 과정은 사실주의적인 재현 방식 테두리 내에서 묘사되었다. 원작 말미에서 작가는 환타지를 끌어들이면서 동면에 든 박봉구가 돌연 사라지는 것으로 처리했지만, 연출가는 이를 시종 견지해오던 사실주의적인 재현의 연장선에서 마무리하였다. 관객이 이 연극을 보면서 난해함을 느낄 만한 대목은 그리 없었다.
이런 요인들은 분명 이 연극이 관객동원에 대성공을 거둔 데에 얼마만큼 그 공로가 있을 것이다. 연극이 무대와 관객의 소통이 무엇보다 긴요한 장르임을 감안할 때, 관객 층위가 그리 두텁지 않은 한국연극계 현실에서 내용과 형식면에서 보여주는 친숙함은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달리 생각해보면 이 연극의 성공은, 새로운 시대정신과 새로운 연극이 요청되지만, 아직은 이전의 정신과 방식의 구태를 조금씩 벗겨내는 데 만족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는 불투명한 시대의 탓으로도 돌릴 수 있겠지만 이 현실을 연극화하려는 연극인들의 고투도 그리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데에는 오락성이 강한 공연에 대한 관객의 기대심리와 이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연극 생산구조에 즉각 부딪칠 수밖에 없는 만만치 않은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경제논리가 모든 것의 우위를 점하는 이 시대에 연극 역시 이런 함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쩔 수 없다'라고 하든가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초극의지를 내세우면서 종교적 염세주의에 자신을 허용하는 것도 그리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발사 박봉구]의 미덕이란 바로 이러한 곤경에 처한 한국연극의 현실에서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그리고 관객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만한 어떤 특별함으로 무대화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 연극은 주목할 가치가 있으며, 이로부터 무언가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최근 연극들에서 간혹 만나곤 하는 불쾌한 경험은 극의 흐름과의 긴밀성이 떨어지는 웃음을 강요받는 경우이다. 관객들이 주제의 무거움을 참을 수 없어 하리라는 판단 속에서 일종의 서비스 차원에서 삽입되었을 웃음의 요소들이, 한편으로는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초라한 자의식에 화가 날 때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 대부분 애초에 설정되었을 법한 주제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삼류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물과 기름이 겉돌듯이 적당하게 진지하고 적당하게 웃기는 연극, 이런 연극을 보고 나면 사실 아무런 것도 마음에 남지 않기 마련이다. 심지어 순간 웃음을 터뜨렸던 사실을 떠올리며 기만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관객의 눈치를 본 연극은 관객으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올해 상반기에 공연된 바 있는 장 쥬네 작, 박정희 각색·연출로 올려진 [하녀들]은 인상적이었다. 비록 반세기가 지난 외국작품이었지만, 이 연극은 시종 팽팽한 긴장감으로 배우와 관객을 꽁꽁 묶어내고 주제를 좀더 선명하게 제시하는 과감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원작의 복잡성을 희생한 대가이기는 하지만 초긴장 상태를 우직하게 끝까지 밀고 나간 연출이 반가웠던 것은 좀처럼 이런 연극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부담스러운 연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관객들은 솔직하지 못한 연극들에서보다 좀더 많은 것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다소 장황하게 하는 것은 그 점에 관한 한 [이발사 박봉구]가 특별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간헐적으로 터지는 폭소로부터 가벼운 미소에 이르기까지 이 연극에서의 웃음은, 여느 연극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으로부터 비껴나 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 비극적인 어조를 띤 이 연극에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다소 칙칙하고 우울하며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이 연극에서 웃음을 만난다는 것은 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 중심에는 박봉구(정은표 분)의 우직하면서도 결코 나약하지 않은 순수함의 파워가 있다. 시대착오적인 '외계인' 박봉구의 자의식이 다른 인물들과 거리를 빚어낼 때 관객은 박봉구의 어리석음에 웃어대지만,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내는 당당함과 매서운 눈빛이 마치 조폭처럼 탄력을 받을 때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감옥에서 막 나와 새 출발을 하려고 찾아온 미희이용원에서 벌어진 한판의 액션―조폭들의 위협에도 전혀 꿀리지 않는 박봉구의 대처 능력과 완력은 그의 성격이 심상치 않음을 극 초반부터 확실히 보여준다. 더욱이 그의 입에서 리듬을 타면서 흘러나오는 전라남도 사투리의 정겨움과 강렬함은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한다. 관객들은 매우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박봉구를 바라본다. '외계인'처럼 세상과 섞이지 못하면서도 독립투사처럼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촌사람, 이처럼 그에게는 어쩐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러 성격들이 겹쳐져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에너지가 결국은 두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를 봉인하고야 마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순간, 관객들은 호흡을 멈춘다. 박봉구의 성격으로부터 솟아나는 웃음이 결국 파국으로 이어지는 성격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연극을 빛나게 한다.
이런 성격 묘사의 탁월함은 비중이 비교적 낮은 인물들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백수(白手)이다. 이 역을 맡은 배우 오용 씨는 정은표 씨와 맘먹을 정도로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많이 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배우는 관객들로 하여금 웃음을 많이 자아내게 하였고 관객들은 그를 보는 것이 매우 즐거웠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인물이 극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유발되는 웃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연극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역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이 인물이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살짝 벗어날 수 있던 것은, 이 인물이 극의 중심축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그에 인접하여 중심을 환기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박봉구가 술집에 갈 때마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살인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백수는 박봉구와 환유관계에 있다. 혀가 꼬이고 몸이 흐느적거리는 이 알콜 중독자의 언행이 관객들로부터 웃음을 이끌어내지만, 무심코 그가 내뱉은 엉뚱한 말들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던져 준다. "정말이지 상실의 시대야. 우리는 소통하지 않아" 하며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하는 백수의 주정은 딱히 박봉구의 내면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실감을 꼭지점으로 하여 모종의 의미 연관을 만들어낸다. 또한 이 인물에게 술을 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또 다른 박봉구이지 않을까, 박봉구가 살인과 동면으로써 세상과 절연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아니면 술에 취해 뒤죽박죽 혼란스럽게 분열된 주체, 그리고 역시 그렇게 보이는 세상, 이것이 [이발사 박봉구]가 묘사하고자 하는 현실일 수도 있음을 환기한다.
단언컨대 [이발사 박봉구]의 흡인력은 이처럼 극의 중심에서뿐만 아니라 외곽에서도 관객들을 웃음으로 이완시키되 다시 극의 핵심이나 그 언저리로 데려다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데 있다. 웃기는 웃지만 그냥 웃는 것은 아닐 것 같은 착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 착각이라 한 것은 이 연극이 필연적인 의미 연관을 의도적으로 피한 채 우연적으로 병치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어떤 필연성이 있을 것 같은 암시를 줄곧 흘리고 있기 때문이며, 적어도 극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수위는 착각의 수준을 넘어서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인과성에 묶여 있는 관객들의 기대감을 배반하면서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힘, 이것이 이 연극의 정서이다.
인물들간에 주고받는 동음이의어―'메기' '배' 등―를 통한 언어 유희 역시 그러하다. 이 언어들은 동음(同音)이라는 공통항으로 연상되는 것일 뿐 어떤 유사성도 없으나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모종의 효과를 자아낸다. 향수 어린 [메기의 추억]은 일순간 민물고기 '메기'와 병치되어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내지만 [메기의 추억]에 서린 죽음의 냄새는 민물고기 '메기'와 자신을 동일시한 끝에 살인을 저지르는 박봉구의 극 행동에서 완성된다. 한편 미희이용원 얼굴마담인 은영(이승비 분)이 박봉구의 고향이 나주라는 말을 듣고 "나주? 배 많이 나는데? 배 타고 싶다."라고 말하자 박봉구는 "오입질이 그러고 좋나?" 하고 응수하는 대목이 있다. 이 역시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내지만 이 유희의 심층에는 은영의 현실과 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그녀의 소망이 응축되어 있으며, 술에 잔뜩 취한 채 전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그녀가 배를 타는 환상 속에서 박봉구에게 살해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이 유희는 그 본의를 드러낸다. [메기의 추억]이 박봉구의 노래라면 [순이의 앵두]는 은영의 노래라 할 수 있는데 그녀가 즐겨 부르던 이 노래가 암시했던 것도 바로 죽음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어떻게 보면 극작술의 혼란처럼 보이는 이러한 전략은 매우 독특하다. 관객들이 이 연극의 심연으로 다가가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기능적인 평가를 떠나서, 우연적으로 병치된 것들이 궁극적으로 어떤 질서를 획득하고 있다는 인상을 던져주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이발사 박봉구]에서 또 다르게 시선을 끌었던 것은 세상의 현실논리와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쓸쓸함과 분노를 말하기 위해 굳이 과잉이라는 극적 전략을 택하였다는 데 있다. 이 연극이 전체적으로 사실주의적인 재현을 주된 묘사방식으로 선택하였음에도 박봉구라는 인물, 그의 행동은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평균치를 훨씬 뛰어넘는다. 박봉구의 세 번의 살인,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양연(박원상 분)이 말했던 것처럼 "사소한 일에 액션 들어" 가는 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 자신을 묘사하였듯이 외계인일 도리밖에 없는 과잉된 자의식의 소유자 박봉구.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어느 누구나 가질 수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박봉구의 편집증적인 직업의식이 세상과 충돌한 첫 사건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미 그는 고교 시절 자신의 포부를 모욕당했다는 데 분노하여 수학선생을 죽인 바 있다. 손을 쓰는 수재는 머리를 쓰는 천재의 수발이나 하면서 살게 되니 자고로 천재가 되어야 한다는 수학선생의 말에 발끈하여 일어난 사고이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소년원과 감옥에서 11년을 보내야 했다.
연극은 그 대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함없는' 박봉구가 이발계의 신화적인 인물이 되리라는 가슴 벅찬 포부를 간직한 채 출소하여 새 일자리에 찾아오는 시점부터 시작하지만, 불행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박봉구는 변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발소의 한쪽 벽에 걸려있는 초침만 있는 세계는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시침과 분침은 없이 초침만 있는 커다란 시계는 시간은 빠르게 흐르나 그 구체성과 역사성을 감지할 수 없음을, 즉 세상의 시간은 급변하고 있으나 박봉구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박봉구는 그가 용자를 다듬는 '이용사'가 되기로 마음 먹은 어느 날부터인가 고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직업의 가치를 서열화하고 좀더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 점점 속물화되는 현실의 논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의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던 것이다. 박봉구의 비타협적인 성격은 미희이용원 주인 고양연으로부터 가게를 양도받아 잠시 희망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천재이발소로 간판을 바꾸니 손님은 들지 않고 결국 은영의 권유로 다시 예전처럼 퇴폐영업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은영의 '빵꾸 난 스타킹. 삐져 나온 허벅지 뒷살'을 보고 4년 만에 발기한 어느 대기업 회장의 '주치이용사'에 희망을 걸어보지만 '신개념의 스타일리스트'에 밀려 이 역시 좌절된다. 바로 그날, 드디어 박봉구의 내면은 폭발한다. 매운탕거리로도 팔리지 못하는 아무 쓸모없는 관상용 메기를 이발사 아닌 이발사로 전락한 자신과 동일시해온 박봉구는, 메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술집 여주인을 면도칼로 여러 번 그어 죽이고, 술에 취한 은영을 일으켜 세워 그녀가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처럼 행복감을 느끼고 있을 때 그녀의 목을 면도칼로 그어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박봉구가 세 번의 살인을 한 데에는 어느 특정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실 논리에 대한 강한 저항감이 있겠지만, 연극이 묘사하는 국면은 다분히 우발적이며 충동적으로 비추어진다. 세상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수학선생, 경제적 유용성을 상실한 메기에게 밥을 주지 않은 술집 주인, 여전히 몸을 팔아 삶을 견디어야 하는 은영―사실, 그들을 죽여야 할 권리가 박봉구에게는 없다. 연극에서는 박봉구의 살인 행위가 도덕적 비난보다는 연민의 대상으로 묘사되지만 현실에서는 박봉구의 살인 행위는 단지 범죄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 박봉구도 이를 알았던 것일까. 야릇한 미소를 띄우고 푸른 빛을 받고 있는 박봉구 얼굴 위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디 난중에 조서 쓸 적에 박봉구가 어째 술집주인을 죽였는가를 쓸 디는 술값이 없어서 그렸다고 써주믄 좋겄네야. 안 그러고 메기 땜새 홧김에 그랬다믄 사람들이 믿겄는가?" 자신의 행위를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줄 아는 박봉구의 이러한 포즈는 마치 어떤 깨달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이 그 이전에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어둠이었습니다](이만희 작)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어떤 사람은 죄 한 번 짓지 않고서도 법을 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살인을 하고서도 깨우치는 사람이 있다……." 박봉구는 살인을 하고 나서야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을 경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억측을 눌러야만 할 것 같다. 자살을 선택하는 대신 "졸음이 계속적으로다 와불어야요. 눈까플이 무구와……." 하면서 잠든 박봉구, 형사들의 표현에 의하자면 '동면'에 든 박봉구가 완전한 죽음을 유예하고 언젠가 다시 깨어날 때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가 자신의 고착 지점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마지막 장면은 박봉구의 깨달음이라기보다 사소한 일에 액션 들어가는 이 외계인을 무대로 불러내어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싶었던 작가의 에필로그이다. 박봉구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이처럼 [이발사 박봉구]는 과잉된 자의식을 소유한 한 인물이 극단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면서 그의 폭력이 실상은 박봉구의 외부에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어한 연극이다. 다분히 병리적인 박봉구의 폭력은 곧 세상의 폭력성에 대한 출구 없는 항의인 것이다. 따라서 박봉구의 살인행위에 극적 설득력 혹은 도덕성 문제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그 행위는 그것들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표정을 보아서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 점에 대해서는 딴지를 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마 입소문에 극장에 찾아들었을 관객들이 비록 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과잉되어 있는 그의 몸부림 밑바닥에서 그처럼 소리치고 싶어하는 자신의 충동을 감지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작가도 말했듯이 박봉구는 이 세상에 많이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그런 인물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발사 박봉구]는 흔히 시쳇말로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흔치 않은 연극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웃음과 과잉의 절묘한 배합으로 이 연극이 의도했을 고지에 관객들이 오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박봉구처럼 뚜렷이 기억될 만한 캐릭터를 만난 것은 분명 값진 성과이다. 더욱이 친숙한 무대 관습을 주축으로 하면서도 은유와 환유를 넘나드는 극적 전략도 인상적이었다. 연극이 끝난 후에도 귓가에서 맴도는 [메기의 추억]과 [순이의 노래]는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들어 있는 향수로 관객의 가슴에 여진을 남기기도 하였다.

3.
그러나 [이발사 박봉구]가 남긴 것은 비단 이런 성과만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재미와 감동을 한꺼번에 거머쥐는 동안 우리의 퇴행적인 심사를 활성화하는 그 무엇, 나르시시즘의 변형으로 읽히는 그 무엇이 찌꺼기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느낌은 마치 영화 [박하사탕]을 보았을 때와 비슷하다. 군데군데에서 눈물을 참지 못하고 영호라는 인물에 깊은 호감을 느끼면서도 결코 그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로 기록할 수 없는 저항감이 들었던 영화가 바로 [박하사탕]이었다. 영호라는 인물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직선적으로 후진하면서 관객에게 시선을 강요한 영화의 전략이 한편으로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공감은 그 한줌의 진실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퇴행적인 자기연민과 자위행위의 또 다른 이름이자 감정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최근 '조폭영화' 신드롬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조폭이든 갱스터이든 그들은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양가적인 존재이다.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선망의 대상으로써, 관객에게 내재되어 있는 윤리와 전(前) 윤리로써의 폭력에의 충동이 투사되어 있는 존재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범죄자일 뿐인 그들이 스크린에서는 의리라는 덕목을 지닌 갱스터로 묘사되는 것은 선망의 표지이며, 그들에게 영원한 화려함에 제동을 거는 것은 도덕이라는 태클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신드롬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친구]의 폭발적인 성공이다. 영화의 중요한 정서로 들여온 1980년대 초반의 문화적 분위기는 이른바 386세대에게는 향수로, 그보다 젊은 세대에게는 일종의 엑조티즘으로 작용하면서, 친구간의 우정 혹은 의리의 문제는 영화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오락영화로서의 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은 조폭영화의 경제적 유용성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였고, 이에 따라 코믹 버전으로 탈바꿈한 조폭영화가 재생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재탕일 뿐이라는 비난의 위험을 피하면서도 관객의 기대심리를 충족시키고 도덕에 대한 강박증을 이완시킬 만한 장치가 바로 코믹 버전이다.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두사부일체] 등은 모두 통념적인 관계의 전도로부터 희극적 효과를 거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두사부일체]는 조폭보다 더 나쁜 현실을 뒤집어보이는 데까지 나아갔다. [공공의 적] 역시 같은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질이 나쁜 형사보다 더 나쁜 '공공의 적'의 발견과 섬멸!
[이발사 박봉구]의 성공을 문화적 코드로 읽었을 때, 그것은 [박하사탕]과 조폭영화 신드롬 그 언저리에 있거나 그 교집합일 것이다. 지나가버린 순수의 시대에 대한 향수와 '놋쇠 하늘'로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염오를 웃음과 폭력에의 충동으로 버무린 연극, 그것이 [이발사 박봉구]가 아닐까.
그러나 과연 우리에게 순수의 시대란 있었기나 했던 것일까. 오히려 그것은 현재의 불만족스러움과 존재의 위기감을 보상받고 싶어서 알리바이로 동원된 하나의 기호에 가깝다. 박봉구의 정지되어버린 순수, 영호의 훼손된 순수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는 부재 속에서만이 존재하는 향수이다. 그래서 그 순수는 하나의 허상일 뿐이며 미래와 절연된 과거일 뿐이다. '놋쇠 하늘' 아래 사는 우리네의 삶의 방식을 순수와 타협이라는 양자택일로 환원시켜서는 어떠한 희망도 품을 수 없으며, 단지 퇴행적인 감상에 잠시 젖어들었다가 다시금 타협의 세계에 몸을 내어맡기는 도리밖에 없다. 만약 순수라는 관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면, 순수는 미래를 쓰는 현재와 결합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때의 순수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견지해야 할 건강한 양심이자 원칙이며 속악하고 물화된 세계를 넘어서기 위한 지혜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 박봉구, 그의 실체가 좀더 투명하게 보인다. 아주 사소한 듯이 보일 수 있지만, 박봉구가 자신을 메기와 동일시하면서도 메기의 죽음에 방조하였음을 ― 메기가 굶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 떠올려보자. 박봉구는 속물화하는 세상에 항변을 하면서도 철저히 '박봉구'라는 성(城) 안에 갇혀 있을 뿐, 성 외부와의 소통은 물론 어떠한 실천도 하지 않는다. 이 연극이 박봉구의 독백처럼 여겨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모든 것은 박봉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그가 세상을 향해 쏜 화살은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와 박봉구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박봉구의 '순수한' 자폐성은 동시에 타인에 대한 억압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영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 맘에 걸리기는 하지만 대기업 회장의 전용 이발사를 꿈꾸며 들떠 있던 박봉구 그리고 그를 바라보던 은영의 서글픔에서, 이 연극이 박봉구의 전횡적인 폭력에 잠시 제동을 걸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지만 단지 그 뿐이다. 오히려 그 대목에서 박봉구의 편집증적인 자의식이, 세상의 비속성의 가속화와 가치의 서열화에 대한 비판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한편으로 이발계의 신화적인 인물로 남고 싶어하는 한 마초적인 남성의 욕망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만약 그가 은영을 발판으로 대기업 회장의 전용 이발사로 발탁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성공은 어디까지나 은영을 희생한 대가라는 낙인을 지울 수는 없다. 연극은 박봉구의 이러한 부도덕한 욕망을 의식했는지 성취 불가능한 그의 소망을 '신개념의 스타일리스트'로 단숨에 꺾어버리지만, 그의 자기중심적 욕망의 잔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은영의 죽음은 그 결과이다. 그렇기에 박봉구는 가학적 나르시시스트이다!
역사는 진보하는가,라는 물음을 누가 내게 던진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보편사는 야만으로부터 휴머니티로가 아니라 투석기로부터 핵폭탄으로의 전개 과정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의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그래서 순수의 시대란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박봉구의 절규는 단지 현실의 부정태를 환기하는 것으로서만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곧 역사에 대한 고고한 뒷짐지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 세상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미래는 존재하며 그것은 현재 속에 거한다.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을 고수하려는 힘을 경계하고 이를 바꾸고자 하는 현재는 곧 미래를 향해 있다. 그것이 곧 역사의 진보로 이어질지는 회의적이지만 이를 견지하는 모랄은 여전히 유효하다. [안개 속의 풍경](테오 앙겔로풀러스 감독)의 어린 두 남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아 떠났다. 그들이 아버지 혹은 안개 너머에 있는 나무를 찾을 수 있을지 못할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찾아 떠나는 여정 자체가 그들의 나무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 한 편의 연극이 흥미로운 다른 한편으로 음울했던 것은 이 연극과 이 연극을 둘러싼 공감대라는 자장의 기운이 과거에 속한 퇴행적인 현재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글 초두에도 말했지만 이 연극은 작가 혹은 연출가의 세계로 환원될 수 없는 한국연극계 전반의 곤경, 더 나아가서는 2002년 한국사회라는 구체적인 현실과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여기까지가 우리의 현실이라는 점을 냉정하게 인정해야 함을 다시금 확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뛰어넘을 만한 연극적 상상력에 대한 기대 또한 품어 보는 것이다. 어쩌면 그러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연극 현장에서 비켜나 있는 입장으로서는 당분간 이를 지켜볼 도리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보며 박봉구 이야기를 마친다.



이승희
·성균관대, 광운대, 성공회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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