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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문화산책/이상(李箱) 시와 미스테리 영화/임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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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준서
댓글 0건 조회 4,800회 작성일 03-03-2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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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 시와 미스테리 영화
임준서



오디세우스가…… 사랑을 발견하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것은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 자크 아탈리1)

1. 입구에서
문학 텍스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미로(迷路, labyrinth)이다. 작가는 언어의 일상적 규약을 구부리고 비틀어 의미의 미로를 건축하며, 독자는 그 언어의 회랑(回廊)을 따라 진정한 의미에 이르는 길을 탐색한다. 따라서 모든 문학 텍스트는 크건 작건 미로의 구조를 내장하고 있으며, 이 미로의 구조적 법칙성을 발견하는 것이 곧 독서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문학에 있어 창작행위와 독서행위는 일종의 미로 게임이자 수수께끼놀이에 다름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이상(李箱)은 특별히 주목을 요한다. 그는 우리 시문학사상 최고의 미로 설계사였다. 그의 시는 무수한 연구자들을 함정에 빠뜨렸으며, 길을 잃고 제자리를 맴돌게 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시공을 초월해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자들을 불러들인다. 이러한 사실은 곧 그의 시가 얼마나 완벽한 미로의 구조를 갖고 있는지를 반증해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상의 시세계를 특징짓는 원리를 '미로 구조'로 보고, 그 구조적 법칙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러한 이상 시의 미로 구조가 영화 텍스트에 어떻게 창조적으로 변용되고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영화 텍스트와의 비교를 통한 논의는 영화를 '문학 텍스트의 확장'2)으로 보는 시각에 근거한다. 이상의 시는 특유의 미로 구조로 인해 수수께끼, 즉 '미스터리'의 특성을 갖는데, 이는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영화 장르와의 결합 가능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영화 텍스트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우리는 장르의 한계를 돌파하는 이상 시의 원심력(遠心力)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원심력은 곧 폐쇄된 장르의 경계 안에 머물지 않고 외부로 무한히 확산되는 문학 텍스트의 창조적 힘에 다름아니다.
이 같은 조망 아래 이 글에서는 이상의 시 중 [이상한 可逆反應], [三次角設計圖], [建築無限六面角體]3) 등의 초기작과,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4)을 대상으로 삼아 텍스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5) 우선 형식과 내용 면에서 이상의 시가 어떠한 원리에 의해 미로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지 검토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이상 시의 미로 구조가 미스터리 영화에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2. 미로의 공법 ― 대칭, 반복, 전도
미로는 무엇보다 하나의 '건축물'로서 존재한다. 그것의 사전적인 정의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하나의 입구와 출구를 갖추었지만, 출구를 가리키는 어떠한 표지판도 없는 복잡한 길'6)이다. 따라서 이 복잡한 길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건축술이 요구된다. 이상의 시가 내포한 미로 구조 역시 건축술에 기반하고 있다. 즉 기하학적 건축미학을 시의 영역에 적용한 것이 이상의 시세계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상 문학의 독창성은 건축미학이 문학과 만날 때 빚어지는 불협화음에서 생긴 것'이라는 최혜실의 지적은 온당하다.7)
사실 이상은 시인이기에 앞서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공학도였으며, 1929년에서 1933년까지 조선총독부의 건축 기사로 일한 바 있다.8) 이러한 그의 이력은 곧 건축학적 시쓰기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즉 그는 건축 설계도면을 작성하듯 시를 쓴 것이다. 따라서 설계도로서의 그의 시는 문자언어가 아니라 수리(數理)언어로 이루어진다. 수리언어는 그 자체의 특수한 방정식에 의해 값을 얻는다는 점에서 '일상언어'가 아니라 '특수언어'이다. 이러한 수리언어의 특수성으로 인해 그의 시는 의미의 미로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상 시의 미로 구조를 떠받치는 건축학적 기둥은 어떤 것일까. 그 구조적 원리는 무엇인가.
이상 시의 미로 구조를 이루는 법칙으로 우선 '대칭'의 원리를 들 수 있다. 형태적, 의미론적 측면에서 이상의 초기작은 천칭(天秤)과도 같은 구도를 취한다.

(가) [線에 관한 覺書·1] 일부    (나) [線에 관한 覺書·2]
  1 2 3 4 5 6 7 8 9 0                  1+3              
1 ································                    3+1
2 ································                 3+1     1+3
3 ·······························                    1+3     3+1
4 ································                    1+3     1+3
5 ································                    3+1     3+1
6 ································                    3+1
7 ································                    1+3
8 ································        
9 ································        
0 ································  
              
위의 시들은 모두 숫자를 이용한 대칭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의 경우, 숫자들에 의해 가로 세로의 대칭축이 형성되고 이를 좌표축으로 삼아 점들이 일대일로 대응하면서 균일한 좌표를 이룬다. (나)의 경우 또한 각 행들은 다음에 오는 행과 형태적으로 대칭을 이루며, 나아가 시 전체 또한 가운데를 경계로 접었을 때 정확히 포개어진다.    
이와 같이 이상의 초기 시는 '수(數)의 대칭적 배열'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 이는 곧 수의 원리를 통해 우주의 운행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피타고라스적 세계관의 표현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수학적 세계관은 근대 자연과학적 인식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근대 건축공학 역시 이러한 수학의 원리에 기초해 있었다. 따라서 건축기사였던 이상은 이러한 수학적 세계관을 시 속에 투영해 세계 인식의 지형도를 그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가)의 예는 수의 원리가 만물을 구성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1에서 0까지의 아라비아 숫자는 시간과 공간을 계산 가능한 양적 단위로 미분(微分)하는 척도이다. 따라서 가로, 세로 축을 각각 시간, 공간으로 상정할 때 그 시공이 교차하는 좌표선상에 3차원의 존재가 성립된다. 그리고 이러한 3차원의 존재는 점과도 같은 미립자로, 이러한 미립자들의 무수한 배열이 곧 세계요, 우주라는 말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가)의 시는 이상이 설계한 '우주의 축도(縮圖)'로 볼 수 있다. 이 수리언어로 형성된 우주의 축도는 그 언어적 특수성으로 인해 의미 해독을 어렵게 함으로써 미로의 체계를 형성한다.
한편 (나)의 경우는 (가)의 시가 표현한 수학적 세계관을 전제로 4차원적 세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것은 3+1이라는 수의 결합과 그 다양한 변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에서 숫자 3과 1은 서로 자리를 바꿔 대칭적으로 결합되고 반복됨으로써 3차원의 질서에 균열을 야기한다. 이러한 수의 대칭적 결합은 곧 기존의 유클리드 기하학을 넘어서는 비(非)유클리드적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대변되는 20세기 초의 과학혁명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이 전제로 하는 3차원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부정한다. 시간과 공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결합을 통해 운동의 특성을 가지며, 이러한 운동성으로 인해 상대성을 갖는다는 것이다.9) 이러한 그의 태도는 (나)의 시 말미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확인된다.

幾何學은볼록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死亡해버린오늘유우크리트의焦點은到處에있어서人文의腦髓를마른풀과같이燒却하는收斂作用을나열하는것에의하여最大의收斂作用을재촉하는危險을재촉한다, 사람은絶望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絶望하라
            
즉 화자는 볼록렌즈와도 같이 모든 인문지식을 수렴하여 균등한 수열로 환원하는 유클리드적 정신의 '위험'을 지적하고 이 위험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그 탈출은 곧 '수(數)의 절망에 의한 탄생'으로 요약될 수 있다. 문흥술의 지적과 같이, 그는 '뉴튼 물리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에 기반한 근대 과학적 지식을 비판'10)하면서 그 해체를 '수의 대칭적 건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의 대칭적 결합은 절대시공간의 개념을 부정하는 비유클리드적 태도로 인해 개방된 의미망을 형성한다. 따라서 비유클리드적 수리 결합으로 형성된 그의 시는 무한한 입구와 무한한 출구를 갖는 미로의 특성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다음으로, 이상의 시는 '반복'의 원리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 이러한 반복의 사슬에 의해 그의 시는 연쇄적 흐름의 형태를 취하며 언어의 의미를 끝없이 유예시킨다.

(다) [AU MAGASIN DE NOUVEAUTES] 중 일부
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
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
…(중략)…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라) [運動] 중 일부
一層우에있는二層우에있는三層우에있는屋上庭園에올라서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屋上庭園밑에있는三層밑에있는二層밑에있는一層으로내려간즉東쪽에서솟아오른太陽이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하늘복판에와있기때문에……

위의 시들은 앞서의 예와는 달리 수리언어가 아닌 문자언어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상의 시가 수(數)의 주술 세계로부터 벗어나 언어예술의 영역으로 한 걸음 다가서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위의 경우 역시 그 주요 이미지는 사각형, 원 등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동서남북의 방위각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이 도형들의 등질적인 '반복'에 의해 시상이 전개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여전히 수리적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
위의 시들에 있어 미로의 효과는 도형의 반복적인 움직임에 의해 유발된다. (다)의 경우 1행에서는 '사각형'과 '내부'라는 어휘가, 2행에서는 '사각'과 '원'이라는 어휘가 반복되면서 시를 이끌어간다. 이러한 어휘의 반복은 띄어쓰기를 무시한 수법과 결합해 읽는 이에게 현기증과 착시현상을 유발한다. 사각형의 내부에 사각형을 반복하여 그려넣게 되면   모양11)이 된다. 이 사각형은 소용돌이치듯 내부로 소급되면서 그 크기가 점점 작아져 마침내 소실점과도 같은 형태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사각형은 본래의 형태를 상실하고 무정형(無定型)의 점의 상태로 환원된다. 그리하여 2행과 같이 '사각이면서 원이기도 한' 미스터리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각형의 기하학적 운동은 이 시의 제목이 '백화점에서'라는 점을 고려할 때 백화점 내부의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즉 가운데가 뚫린 백화점의 꼭대기층에서 아래를 부감할 때 백화점의 내부는 위의 도형과 같이 사각형이 포개어진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아울러 백화점의 내부를 이렇게 사각형이 중첩된 평면 상태로 환원시킬 경우, 백화점의 각 층은 그 원근법적 깊이를 상실하고 동일한 위상에 놓이게 된다. 마치 입체화 회화에서 눈, 코, 입이 동일한 위상에 놓인 것으로 묘사되듯이. 따라서 백화점의 각 층이 동일 좌표상에 놓일 때, 이 시의 17행에서 보듯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간 사람'은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하고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사람'과 동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운동상태를 기하학적 평면상태로 환원시키려는 이상의 시작 태도는 (라)의 경우처럼 '인식의 진공상태'를 유발하는 데까지 이른다. (라)의 시는 1, 2, 3층이라는 수직적 위상과 동, 서, 남, 북이라는 수평적 방위의 반복과 대칭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 1, 2, 3층으로의 상승과 하강, 그리고 동서남북으로의 시각 이동에 의해 이 시는 운동감을 표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수직, 수평 운동은 언어의 기계적 반복으로 인해 관습화되고 화석화된다.
따라서 이 시의 공간은 (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원근법적 깊이를 상실하고 평면상태로 환원된다. 동시에 시간 또한 기계적 속성을 띰으로써 운동성을 잃고 정지된다. 그 결과 위아래, 전후좌우를 살펴봐도 화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공간은 텅 비어 있으며 시간은 진공 상태에 놓인다. 이는 곧 인식의 영도(零度) 상태에 다름아니다. 즉 이상은 3차원 세계의 질서를 부정하기 위해 그 물리적 속성을 극단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운동상태 → 정지상태라는 역설적인 결과에 이른 것이다.
요컨대 이상의 시에서 '반복'의 원리는 사물을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환원시키고 그 움직임을 기계화시킨다. 이러한 기계적인 반복은 사물과 현상의 본래 의미를 휘발시킴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인식론적인 착시현상을 유발하게 된다. 즉 의미를 유실한 사물들은 차가운 도형으로 환원되어 미로의 구조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상 시는 '전도(顚倒)'의 원리에 의해 미로화되어 있다. 이러한 원리는 숫자나 도형의 상징을 통해 시공간의 '가역성'을 유발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마) [線에 관한 覺書·6] 일부






etc

사람은靜力學의現象하지아니하는것과同一하는것의永遠한假說이다, 사람은사람의客觀을버리라.
主觀의體系의收斂과收斂에依한오목렌즈.

(바) [異常한 可逆反應] 일부
異常한 可逆反應
任意의半徑의圓(過去分詞의時勢)
圓內의一點과圓外의一點을結付한直線
二種類의存在의時間的影響性
(우리들은이것에관하여무관심하다)
直線은圓을殺害하였는가
顯微鏡
그밑에있어서는人工도自然과다름없이現象되었다.

대칭과 반복에 의해 현기증을 유발한 이상의 시는 다시 '전도'를 통해 공간과 시간의 가역성을 획득함으로써 미로의 구조를 완성한다. (마)의 시는 4라는 숫자의 결합과 배열을 통해 시상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 4라는 숫자는 전후좌우로 뒤집힌 꼴을 하고 있다. 좌우로 누워 있거나 물구나무선 형태는 수에 부여된 고유의 산술가치를 파기하고 일종의 상형문자로서 기능한다.12) 그것은 이 시의 19행 '數字의一切의性態數字의一切의性質 이런것들에依한數字의語尾의活用에依한數字의消滅'이란 진술을 통해 확인된다. 즉 수의 고유한 기능과 성질을 파기함으로써 숫자를 순수한 그림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4라는 숫자는 앞서 (나)의 예에서 보듯 3차원의 세계를 넘어서는 4차원의 동적 형태를 표상하는 기호가 된다. 그 아래 행에 진술된 '정역학'이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기초로 한 3차원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볼 때, 화자는 그 반대편, 즉 '동역학'의 4차원 세계 속에서만 인간이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3차원의 정역학이 '객관의 볼록렌즈'와도 같다면, 이 4차원의 동역학은 '주관의 오목렌즈'와도 같다. 절대 공간의 개념이 무너진 이 동역학의 세계에서 숫자, 혹은 언어는 전후좌우 어느 쪽으로 뒤집혀도 등가가 되는 상대적인 가치, 가역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전도의 원리는 (바)에 이르러 시간의 가역성을 획득하는 데까지 이른다. (바)의 예에서 시인은 근대의 유클리드적 세계관이 유발한 시간의 분열에 주목한다. 이 시는 '원'과 '직선'의 대칭적 위상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데, 이는 곧 시간의식의 대립을 의미한다. 원이 과거분사의 시세라면, 그 원의 밖에 위치한 공간은 현재형의 시세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원과 직선은 곧 '전근대적 시간'과 '근대적 시간'의 속성을 상징하는 기호이다. 전근대적 시간은 계절주기에 따른 순환적 질서가 지배하는 '자연'의 시간이다. 이 순환적 시간의식은 계절적 의례(儀禮)에 의해 주기적으로 모태회귀를 허용함으로써 가역성을 갖는다.
반면 근대는 직선적 시간에 의해 전근대의 순환적 시간을 파괴함으로서 성립된다. 즉 '직선'의 시간이 '원'의 시간을 살해한 것이다. 직선적 시간은 미적분(微積分)의 반복을 통해 탄생한 양적인 시간이다. 이 '인공'의 시간은 누계적(累計的)으로 진행되는 까닭에 불가역의 특성을 가진다.13) 그런데 화자는 현미경을 통해 관찰할 때 이 불가역적인 인공의 시간이 자연의 순환적 시간과도 같이 가역성을 갖는다고 진술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이에 대해서는 '圓內의一點과圓外의一點을結付한直線'이라는 대목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직선적 시간은 축차적으로 진행되는 까닭에 미래지향성을 갖는다. 그런데 미래를 향해 진행되어야 할 시간이 거꾸로 '원'의 시제, 즉 과거를 향해 진행됨으로써 가역성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이상한 가역반응'은 3차원의 절대 시공간 속에서는 기대될 수 없다. 이상은 (마)의 예와 같은 4차원의 상대적 시간 관념을 전제로 근대적 시간의 화살표를 임의로 돌려놓음으로써 시간의 가역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전도의 원리를 통해 이상의 시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직선적 세계를 이탈해 시간과 공간의 가역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역성에 의해 상하좌우의 방위와,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동일 좌표상에 공존하게 됨으로써 이상의 시는 시공간의 양 측면에서 미로 구조를 완성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이상의 초기시가 '대칭', '반복', '전도'의 원리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리들은 그의 시에 있어 미로의 건축학적 특성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에 다름아니다. 이 요소들은 그의 시에 작용해 수나 도형의 형태적인 대칭, 반복, 전도의 연쇄적 흐름을 야기한다. 이러한 연쇄적 흐름은 다시 일상적인 시공간 감각을 교란시키며 의미의 소용돌이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의미의 소용돌이는 나선형의 흐름을 타고 끝없이 회전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현기증을 야기한다. 이로 인해 시 전체는 입구와 출구의 구분이 사라진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형태가 된다. 결국 독자는 미로에 갇힌 꼴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미로 구조를 통해 이상은 근대의식을 형성한 세계의 구조를 탐색하면서 동시에 이의 와해를 시도한다. 독자를 미로 속에 가두어놓음으로써 일상적 삶을 낯설게 보게 하고, 이를 통해 다시 삶의 새로운 논리를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 새로운 논리를 시인은 비유클리드적 세계상의 제시를 통해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상 시의 미로 구조와 메시지는 영화라는 대중매체와 만날 때 어떻게 변용될 수 있는가. 그것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이상이 설계한 미로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3. 미로 구조와 미스터리 구조의 만남
문학 텍스트가 미로 구조를 통해 수수께끼 풀기의 지적 유희로 존재한다면, 이러한 개념에 가장 충실한 장르는 추리서사일 것이다. 추리서사는 미궁에 빠진 범죄사건을 해결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탐정은 사건 해결을 위해 미로의 구석구석을 탐색한다. 따라서 미로 구조는 곧 미스터리 장르의 구조와 친족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이상 시의 미로 구조는 미스터리 영화의 서사구조로 변용될 가능성을 얻는다. 그리고 이렇게 변용된 미로 구조는 동일한 원리에 의해 미스터리 영화를 구조화한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은 건축가로서의 이상의 삶과 그의 시에 얽힌 비밀을 다룬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기적 사료의 도움을 빌어 이상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자유분방한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이상의 시작(詩作)에 얽힌 비밀을 조선을 영구 지배하려는 일본의 '음모'와 연결시키고 있다. 스토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사건은 'MAD 이상 동호회'라는 PC통신의 모임에서부터 비롯된다. 이 모임의 회장인 덕희를 중심으로 5명의 회원들은 1929-1931년 간의 시기에 이상의 종적이 묘연하다는 데 착안하여 그 빈 공백을 상상력을 동원해 메워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 2년 간 이상이 일본군에 징집되어 금궤공장을 설계하는 데 동원되었다는 내용으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란 제목의 소설을 PC통신에 연재한다. 소설은 연재되자마자 네티즌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그 직후부터다. 연재 도중 회원들은 하나둘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급기야 동호회 회장인 덕희마저 실종되기에 이른다. 남은 두 명의 회원, 즉 이상의 시를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이던 용민과 신참 신문기자 태경은 이상의 시를 단서로 삼아 실종된 덕희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이상은 소설의 내용대로 금궤공장의 설계자였으며, 그 이송부대의 대장인 하야시 나츠오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단 'Z백호'의 일원이었음이 밝혀진다.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상은 이 비밀을 암호화하여 시 속에 은닉한 것이다. 이후 박정희에 의해 제2의 'Z백호'팀이 구성되지만 암살은 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나츠오는 유일한 생존자 김성범의 몸을 빌어 불멸을 꾀한다. 추적 끝에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용민과 태경은 경복궁의 지하 공사장에서 덕희가 갇힌 문제의 공장을 발견하고, 나츠오가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에서 세운 거대한 철심을 파괴한다. 나츠오의 다음 숙주로 선택된 덕희가 김성범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사건은 종지부를 찍는다.

미스터리 스릴러14)의 장르를 취하고 있는 이 영화는 이상의 시와 같이 세 가지 원리에 의해 미로 구조를 형성한다. 우선 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적 원리는 '대칭'이다.
토도로프에 의하면, 추리서사는 이중의 스토리를 포함하는데, 그것은 '범죄의 스토리'와 '조사의 스토리'이다. 범죄의 스토리는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조사의 스토리는 '어떻게 독자(혹은 화자)가 그것에 대하여 알게 되는가'를 설명한다.15) 즉 사건의 결과를 먼저 제시하고 그 결과의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것이 추리서사의 전형적 구조이다. 이 영화 역시 전반부에 회원들의 의문사와 덕희의 실종사건을 미리 제시하고, 그 원인을 추적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영화의 전체 구조는 '범죄'와 '조사', '결과'와 '원인'이라는 이중의 체계로 형성되며, 이 양자는 상호 연결고리가 끊어진 채 대칭된다. 결과와 원인 사이의 논리적 접점이 은닉된 이러한 구도는 그대로 영화 전체를 미로의 체계로 만든다.
아울러 이 영화는 '범죄의 스토리' 안에서 다시 두 가지의 미스터리를 포함하고 있다. (1) 이상의 2년 간의 행적을 둘러싼 미스터리, (2) 회원들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가 그것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2)의 미스터리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1)의 미스터리와 만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두 가지의 미스터리 또한 양자 사이의 논리적 상관관계가 베일에 가려진 채 대칭됨으로써 영화를 미로의 구조로 만든다. 이처럼 이 영화는 범죄와 조사의 스토리, 그리고 표층과 심층의 미스터리가 서로 대칭됨으로써 구조화되어 있다. 이 대칭점 사이의 논리적 연결상태를 성공적으로 복원할 때 추리서사는 종결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인물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대칭관계를 이룬다. 추리서사에는 범인, 희생자, 탐정의 세 인물 유형이 반드시 존재한다.16) 이 영화에서는 동호회 회원인 캔버스, 카피캣, 덕희가 희생자 역할을 맡고 있고, 용민이 탐정을 역할을 수행하며, 범인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추리서사의 중심 스토리는 '조사의 스토리'로, 이 안에서 탐정과 범인은 대칭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용민은 의문부호와도 같은 존재인 범인과 대치하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다. 추리서사의 긴장과 공포는 이 범인과 탐정 양자간의 갈등관계, 즉 힘의 대치상태에서 야기되는 것으로, 이 대치상태가 와해되어 탐정이 승리함으로써 서사는 종결된다. 이와 같이 이 영화는 전체 서사구조, 사건 구조, 인물 구조에 있어 '대칭'의 법칙성을 드러내며, 이로써 영화는 미로의 성격을 획득한다.
한편 이 영화는 '반복'의 원리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 추리서사는 주인공인 탐정이 사건의 단서를 통해 수수께끼를 푸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하지만 범인은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를 배경 속에 은닉하거나 무의미한 여러 단서들 속에 섞어놓아 탐정을 교란시킨다. 따라서 사건의 진상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 탐정은 반복해서 원점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미로를 한 번에 통과하는 법은 없다. 이 영화에서도 용민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최초의 시점으로 반복해서 되돌아온다. 그리고 최초의 시점으로부터 다시 단서를 찾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그 최초의 단서는 바로 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반복의 원리는 사건의 연쇄적 발생과 범인의 반복적인 등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에서 미스터리는 '카피캣과 캔버스의 잇따른 죽음'과 '덕희의 실종'이라는 반복적이고 연속적인 장면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의문의 살인장면을 반복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이 영화는 관객에게 스릴과 서스펜스의 감정을 야기한다. 이러한 스릴과 서스펜스는 근본적으로 관객을 심리적인 '미아(迷兒)' 상태에 빠뜨림으로써 일어난다는 점에서 미스터리 구조의 주요한 효과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특기할 만한 점은 이 연쇄살인 장면에서 중절모를 쓴 범인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추리서사의 관습에서 범인은 사건이 해결될 시점까지 공개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관습을 깨고 범인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영화는 관객의 의혹과 공포감을 배가시킨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반복'의 원리는 사건의 발생과정과 해결의 수사과정 양 측면에서 동시에 작용함으로써 관객에게 극적 긴장을 유발하는 촉매제가 된다.
한편 이 영화의 구조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우리는 '전도'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우선 작품의 플롯상 '반전'의 기법으로 구체화된다. 영화에서 용민은 비밀공장의 소재를 캐기 위해 Z백호팀의 최후 생존자인 장형준을 찾아가지만 그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이후 용민은 경복궁 지하공사장에서 문제의 공장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살인범과 대면하게 되는데, 그 살인범은 다름아닌 장형준이었다. 그 장형준은 실은 김성범으로, 그는 장형준을 죽인 후 그의 이름으로 가장해 범행을 저질러온 것으로 밝혀진다. 또한 그 김성범은 다시 하야시 나츠오의 혼이 깃들인 숙주로 밝혀진다. 이러한 일련의 반전은 이 영화의 미스터리를 푸는 결정적인 전기(轉機)로 작용한다.
나아가 우리는 이 영화의 시간적 흐름이 전도의 원리에 의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이 영화에서 미스터리는 두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연쇄살인'이라는 표층의 미스터리와 '이상의 사라진 2년'이라는 심층의 미스터리가 그것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표층의 미스터리가 아니라 심층의 미스터리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표층의 미스터리가 사건의 결과라면, 심층의 미스터리는 그 원인, 혹은 역사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표층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단서를 찾아나설 때 탐정은 필연적으로 심층의 미스터리 속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 심층 미스터리 속으로의 이행은 곧 한국 현대사를 되짚어 올라가는 시간적 전도의 형국을 취하게 된다. 이는 이상의 초기 시가 보여준 '시간의 가역반응'을 서사적으로 변용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표층의 미스터리보다는 심층의 미스터리, 즉 미스터리의 성립과정과 역사적 배경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탐색은 현재에서 과거의 시점으로 이행하며, 이러한 시간적 전도에 의해 이 영화는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요컨대 이 영화는 '반전'과 '시간의 역류'라는 기법을 통해 미스터리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는 바로 '전도'의 기하학적 원리에 다름아니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은 대칭, 반복, 전도의 원리에 의해 미스터리의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구조는 이상의 초기시가 내포한 미로구조와 상동성을 갖는다. 이제 이러한 구조적 상동성에 입각하여 이상의 시가 이 영화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상의 시는 이 영화에 직접 인용되면서 사건 발생의 주요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이상의 시는 이 영화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가.
그의 시는 영화에서 미스터리의 해결을 위한 단서의 역할을 한다. 즉 그의 시는 수수께끼이자 동시에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내장하고 있다. 시의 표층적 의미망이 수수께끼의 형태를 취한다면, 시의 심층적 의미는 그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지시한다. 따라서 탐정인 용민은 이상의 시를 일종의 암호문으로 삼아 그 이면에 숨겨진 심층의미를 해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상의 시는 영화 속에서 어떠한 의미로 번역되고 있는가. 이 영화에서 인용되고 있는 시는 [건축무한육면각체] 연작 중 [AU MAGASIN DE NOUVEAUTES]이다. 탐정 역을 수행하는 용민의 독법을 따라감으로써 우리는 이상의 시를 변용하는 이 영화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1행) 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
(2행) 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
(9행) 마르세이유의봄을解纜한코티의香水의마지한東洋의가을
(10행) 快晴의空中에鵬遊하는Z伯號.
(12행) 彎曲된直線을直線으로疾走하는落體公式
(13행) 時計文字盤에?에내리워진一個의浸水된黃昏.
(20행) 四角이난케-스가걷기始作이다(소름끼치는 일이다)
먼저 (10행)은 영화에서 사건 발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캔버스가 살해된 현장에서 용민은 '박정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걸이를 발견하고, 이를 단서로 삼아 박정희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 Z백호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곧 하야시 나츠오의 지하공장을 찾아내기 위한 비밀조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상 역시 이 비밀조직의 1세대 공작원이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원래 이 시행은 백화점 상공에 떠 있는 애드벌룬을 묘사한 대목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Z백호'는 스릴러물의 관습을 빌어 비밀공작조의 암호명으로 둔갑한다.
(1행)과 (2행)은 영화에서 하야시 나츠오의 공장 위치를 찾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용민은 공장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지도 위에 삼각산 ― 인왕산 ― 남산 ― 북악산을 잇는 4각형을 그린다. 그리고 그 내부에 다시 사각형을 반복하여 그려넣은 결과 경복궁과 광화문으로 공장의 위치를 좁힐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하여 용민은 경복궁과 광화문을 잇는 선이 한자의 '일(日)'자 모양에 해당하며, 북한산이 상징하는 '대(大)'자와 시청의 '본(本)'자와 함께 '대일본(大日本)'이라는 글자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나츠오의 공장이 소재한 위치는 경복궁과 광화문의 중심, 즉 중앙박물관 지하라는 결론에 이른다. 원래 백화점의 내부 풍경을 기하학적으로 묘사한 시행이 영화에서는 비밀 아지트의 위치를 계측하는 물표(物標)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9행), (12행), (13행), (20행)은 비밀공장으로 통하는 지하미로 장면에서 표지판의 기능을 제공한다. (12행)은 용민 일행이 지하통로에서 갈림길을 만났을 때 방향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며, (13행)은 비밀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또한 (20행)의 '사각의 케이스'는 영화에서 석탄운반차로 돌변해 용민 일행을 위협하는 장애물이 된다. (9행)의 '코티의 향수'는 꽃문양의 버튼을 가리키는 기호로, 용민이 이 버튼을 누름으로써 비밀공간에 서 있던 거대한 철심은 폭파된다.  
이처럼 이 영화에 인용된 이상의 시는 모두 사건의 해결을 위한 단서로 기능한다. 퍼즐을 맞추듯 그 시행의 심층의미를 극적 상황에 맞춰 해석함으로써 탐정 용민은 사건의 미스터리를 벗기고 역사적 음모의 실체와 대면하게 된다. 그 음모는 '한반도를 영구 지배하려는 일제의 망령'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허구적 음모의 설정은 이상의 삶과 그의 시를 역사적인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려는 작가의 의도에 기초하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는 이상 시의 미로 구조가 영화 장르 안에서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종합하면,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은 이상 시가 내포한 미로 구조를 추리서사의 장르적 관습에 따라 미스터리 구조로 변용하고 있다. 미로 구조의 대칭, 반복, 전도라는 기하학적 요소는 미스터리 구조 안에 편입되어 플롯, 사건, 인물의 관계를 직조하는 서사원리가 된다. 또한 이러한 구조적 변용을 토대로 이상의 시는 영화 안에서 사건의 수수께끼를 푸는 결정적인 단서로 기능한다. 즉 이상의 시는 수수께끼의 질문과 답을 동시에 내포함으로써 추리서사를 끌어가는 동인(動因)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적 매듭의 엉킴과 풀림 작용을 통해 영화는 관객들에게 지적인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한편 이 같은 의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의 대중적 속성으로 인해 일정한 한계를 노출한다. 우선 이 영화는 이상 시가 내포한 인식론적 메시지를 속류 SF적 상상력으로 대체함으로써 그 진지한 의미를 사상시키고 있다. 이상의 초기 시는 미로 구조를 통해 근대적 시공의식에 대한 회의와 그 극복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탈근대의식이 이 영화에서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당의 초능력17)을 합리화시켜 주는 전제로 이용되고 있다. 혹은 '건축무한육면각체'를 철심이 박힌 중앙박물관 건물로 풀이하거나 박정희와 이상을 연관짓는 등, 이상 시의 메타포를 역사적인 맥락으로 환원시켜 그 의미를 단순화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상의 시를 지나치게 놀이화한 점 또한 이 영화의 결함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상의 시가 작품의 주제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길찾기의 표지판 기능을 수행하는 데 그침으로써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까지 반감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상의 시에 대한 풀이 역시 사건의 인과관계에 대한 정교한 논리적 추론에 의거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순간순간의 위기를 넘기기 위한 편의적 해석에 머물고 있다. 추리서사의 특장점은 치밀한 논리 전개를 통한 지적 유희에 있는 만큼 이러한 논리적 짜임새의 미숙은 지적되어 마땅하다.

4. 출구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이상이 설계한 언어의 미로를 탐사하였다. 그리고 그 미로의 구조가 미스터리 영화의 내부에서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초기 시는 '대칭', '반복', '전도'의 원리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원리들은 그의 시에 작용해 수나 도형의 형태적인 대칭, 반복, 전도의 연쇄적 흐름을 야기한다. 이러한 연쇄적 흐름은 나선형의 소용돌이를 형성하며 시의 의미를 끝없이 유예시킴으로써 미로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미로 구조를 통해 이상은 만물을 수학적으로 환원하여 균질화하는 근대 자연과학적 세계상을 아이러니컬하게 묘사하면서 그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한편 이상 시가 내포한 미로 구조는 이상을 소재로 한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에서 미스터리 구조로 변용된다. 대칭, 반복, 전도라는 이상 시의 기하학적 요소는 미스터리 구조 안으로 등기이전되면서 플롯, 사건, 인물의 관계를 관장하는 서사원리로 작용한다. 또한 미로 구조가 야기하는 현기증은 미스터리 구조 안에서 극적 긴장과 서스펜스라는 심리적 효과로 치환된다. 이러한 구조적 변용을 토대로 영화는 이상의 시 이면에 은닉된 역사적 배경에 주목하여 이를 허구적으로 재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상 시의 구조적 원리가 미스터리물의 서사 원리와 호환성을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미로 구조의 특성이야말로 이상의 시세계가 갖는 득의(得意)의 부분으로, 타 장르로의 무한한 변용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에서 다룬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은 그 매체적 속성으로 인해 여러 한계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이상 시문학의 정수를 간파하고 이를 영상언어로 번역하였다는 점에서 '문학 텍스트의 확장'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상이 설계한 언어의 미로를 빠져나오면서 우리는 미로가 갖는 의미에 대해 새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자크 아탈리에 의하면, 미로는 인간 운명에 관한 의미, 즉 세상의 질서를 추상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미로를 탐사한다는 것은 인생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설계자는 미로 속에 삶의 법칙성과 그 불가사의함을 동시에 투영한다. 따라서 그것은 탐험가에게 현기증과 환상과 공포를 유발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을 이겨내면, 환상은 가르침을 주고 두려움은 인격을 단련시키고 실수는 성장을 유도하고 현기증은 사람을 바꾸어놓는다. 미로를 깨우친 사람은 그리하여 지혜를 얻은 자, 곧 현자(賢者)가 되며, 다른 이들에게 미로를 통과하는 법을 가르치는 스승이 된다.18)
또한 미로는 직선의 투명함에서 벗어나 곡선의 신비를 회복하고자 하는 꿈의 산물이다. 산업혁명 이래 근대적 이성주의가 자리잡으면서 미로는 추방당해 있었다. 이상의 말대로 직선은 원을 살해했다. 하지만 새로운 세기가 열리면서 미로는 부활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컴퓨터는 예, 아니오의 지시어를 따라 한없이 스무고개를 넘어야 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아울러 인터넷은 직선의 도로가 아니라 무한히 분기(分岐)하는 사잇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처에 매복한 함정들로 인해 탐사자를 번번이 미아(迷兒)로 만든다. 이처럼 세계는 장차 하나의 거대한 미로로 재편되어 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이상은 인터넷의 시대, 미로의 시대를 예언한 선지자이자, 우리에게 삶의 미로를 가르치는 영원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주>
1) 자크 아탈리, {미로-지혜에 이르는 길}, 이인철 옮김, 영림카디널, 1997, 168쪽.
2) 김성곤, {문학과 영화}, 민음사, 1997. 24쪽 참조.
3) 이후 인용될 이상의 작품은 김승희 편, {이상}(문학세계사, 1993)에 의거한다.
4) 장용민 각본, 유상욱 연출, 1999년 5월 개봉.
5) 이 외에도 우리는 이상의 삶을 소재로 한 연극과 영화를 여러 편 발견할 수 있다. 연극의 경우 [아, 이상!](조광화 작, 박계배 연출, 1994), 영화의 경우 [이상의 날개](최인현 연출, 1968), [금홍아 금홍아](유지형 작, 김유진 연출, 1995)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들은 주로 전기적 사실에 의존해 시인의 기형적 삶이나 시대고(時代苦), 성적 편력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할 뿐, 이상의 시세계가 갖는 특유의 문학적 개성을 재현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이처럼 문학 내적 시야를 적절히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은 '문학 텍스트의 확장'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6) 자크 아탈리, 앞의 책, 31쪽 참조.
7) 최혜실, {한국모더니즘소설 연구}, 민지사, 1992, 77쪽 참조.
8) 김승희 편, [李箱年譜], {이상}, 문학세계사, 1993, 300쪽 참조.
9) 최혜실, 앞의 책, 108-109쪽 참조.
10) 문흥술, [이상문학에 나타난 주체분열과 반담론에 관한 연구], 서울대 대학원(석사), 1991, 1쪽.
11) 이 같은 도형의 모양은 이어령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된 바 있다. 이어령, [속·나르시스의 학살], {자유문학}, 1957년 7월호, 131쪽 참조.
12)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램(calligrammes)은 숫자의 시각적 구성을 통해 언어적 효과를 꾀한 대표적 사례이다.
13)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95쪽 참조.
14)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사건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에 기반한 영화 장르. 흔히 범죄나 범죄의 혐의를 해결하려는 주인공의 노력을 둘러싸고 진행된다.(프랭크 E. 비버, {영화미학용어사전}, 김혜리 역, 영화언어, 1995, 98쪽 참조.)
15) T. 토도로프, [탐정소설의 유형], {산문의 시학}, 신동욱 역, 문예출판사, 1992, 50쪽.
16) 송덕호, [추리소설의 유형], 대중문학연구회 편, {추리소설이란 무엇인가?}, 국학자료원, 1997, 34쪽.
17) 예컨대 하야시 나츠오가 사람의 피를 빨아먹거나 사람의 몸을 숙주로 삼아 불멸을 꾀한다는 식의 설정.
18) 자크 아탈리, 앞의 책, 54쪽.



임준서
·1969년 출생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재학, 공연과 미디어 연구소 간사

추천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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